추석 명절에 대한 신학적 이해

추석 명절을 추수감사절로 받아들이자 /김영한 

 

▲ 김영한 박사 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대표 숭실대기독교학대학원설립원장

-목차-

머리말

I. 추석/ 한가위의 의미

1) 한민족 최대의 명절, 한가위 축제 2) 뿌리로서의 고향에 대한 향수 3) 성경적 유비: 뿌리에 대한 귀속 사상

II. 공동체 축제로서의 한가위

1) 차고 기움이라는 삶의 축제 2) 고향으로 민족의 이동 3) 동아시아 민족의 관습, 중추절 지킴 4) ‘알지못하는 신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III. 추석의 기독교신앙적 의미

1) 보편적 가치로서의 명절 2)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감사 3) 조상에 대한 효는 미신적 제사 아닌 기독교적 추도식으로 4) 공동체 축제 5) 나누고 돌보는 실천계기 6) 영원한 고향 암시 7) 고향교회로의 관심 환기 8) 추석 추수감사절 운동

IV. 복음의 상황화로서 한국인의 추수감사절

1) 추석과 추수감사절의 공통점 2) 추석과 추수감사절의 차이점 3) 한국교회 추수감사절의 원형 회복’ 시급 4) 복음의 상황화라는 과제로서의 추석 명절 5) 민속의 감사절 한가위를 기독교의 추수감사절로 탈바꿈

맺음말

 

머리말

201498일은 민족 최고의 명절이라고 불리는 추석이다. 그 어느 해보다 일찍 찾아 온 2014년 추석을 맞이하여, 많은 내적인 갈등과 외적인 도전을 맞이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 새로운 나눔과 결실의 기쁨이 회복되기를 바라며 이 명절을 맞이하는 바른 자세와 기대가 요청된다. 추석으로 불리우는 한가위는 설날과 함께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이라 할 수 있다.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선물보따리를 싸들고 일제히 고향으로 향하는 날이기도 하며, 그만큼 가족들과 친지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이는 날이기도 하다. 우리의 추석은 가을의 중간에 있다고 하여 중추절이라고도 불리우며 음력 815일이다. 이 날은 가족들끼리 모여 덕담을 주고받으며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가족의 화목과 풍요로움을 기원하는 풍습이 있다.

이제 기독교가 우리 사회의 제도종교의 하나가 된 이상 우리 사회의 문화를 주도하기 위해서는 민속의 명절인 추석을 기독교의 추수감사절로 받아들이는 것이 요청된다. 추석과 기독교의 추수감사절이 역사는 다르지만 인간 삶에 결실과 수확을 주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아직도 믿지 않는 가족과 이웃과 사회에 알리는 운동이 필요하다. 추석을 우리 민족의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운동을 전개했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가 추석명절을 기독교의 추수감사절기로 받아들이는 실천을 해야 한다. 이것은 민족 복음화를 위한 문화적 접근의 길이다.

 

I. 추석 한가위의 의미

1) 한민족 최대의 명절, 한가위 축제: 추석(秋夕)은 한가위, 중추절(仲秋節), 가배(嘉俳)로 부르기도 하며, 음력 8월15일에 치르는 명절로서 설날다음으로 한국인에게 전통적으로 깊은 뜻을 지니고 있는 명절이다. 한해 농사를 끝내고 오곡을 수확하는 시기이므로 명절 중에서 가장 풍성한 때이다.

한가위는 고대사회의 풍농제에서 기원했으며 한가위라고 불리는 추석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가배라는 신라시대의 명절이나 10월에 지내던 동명절과 관련되어 있다고 추정된다. 고려시대부터 명절로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국가적으로 선대 왕에게 추석제를 지낸 기록이 있다.

추석날 아침에는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가서 여름비에 무너진 무덤 보수와 벌초를 한다. 조상 상에 바치는 제물은 햇곡으로 준비하여 먼저 조상에게 선보이며 1년 농사의 고마움을 조상에게 전한다. 성주· 터주·조상단지 같은 집안신()들도 햇곡식으로 천신(薦新)하며 추석치성을 올린다. 천지신명에게 드리는 일종의 추수감사에 해당한다. 추석에는 정월 대보름보다는 작지만 풍성한 민속놀이도 행해졌다. 씨름·소놀이·거북놀이·줄다리기 등을 즐긴다.(金明子. 歲時風俗機能과 그 變化, 1992; [네이버 지식백과] 추석 [秋夕], 한국세시풍속사전, 국립민속박물관)

2) 뿌리로서의 고향에 대한 향수: 한가위는 말 그대로 가을의 한 가운데란 뜻을 가지고 있으며, 한 해의 농사를 끝내고 오곡을 수확하는 시기여서 우리 명절 가운데 가장 풍성한 시기이다. 추석은 지금까지도 우리 민족의 고유한 명절로 자리잡고 있어, 추석이 되면 많은 사람이 고향을 찾아간다. 가을 추수를 끝내고 햅쌀과 햇과일로 조상들께 감사의 마음으로 차례를 지내며, 특히 송편은 추석에 먹는 별미로 들 수 있다.

사람은 아무리 타향에서 오래 살아도 그곳은 어디까지나 타향이지 고향이 될 수 없다는 의식을 갖고 있다. 고향은 오직 한 곳, 자기의 뿌리가 있는 그 곳이란 것이다. 사람들은 고향에 대한 향수(鄕愁)를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종교성과 관련이 있다. 고향에 대한 향수는 인간의 마음 속에 보편적으로 심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계발하는 것이 인간성이 메말라 가는 현대인들에게는 필요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고향이 있다는 사실을 복음을 통하여 듣고 알고 믿는 자들이다.

3) 성경적 유비: 뿌리에 대한 귀속 사상: 창세기에서 고향을 떠나 이집트에서 총리까지 지낸 요셉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요셉이 창세기 5024절부터 25절에서 유언을 하면서 나는 이제 죽을 터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어 이 땅에서 이끌어 내시고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게 주시리라고 맹세하신 땅으로 올라가게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반드시 찾아오실 것이다. 너희는 그 때 여기에서 내 뼈를 가지고 그리로 올라가거라고 말했다. 요셉은 후손들에게 즉 고향으로 돌아갈 때가 되거든 반드시 돌아가고 그 때 자기 유골도 가지고 고향으로 가라고 부탁한 것이다.

이러한 구약적 개념을 넘어 신약 시대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고향이 영원한 본향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안다. 히브리서 11장의 말씀대로 성경의 인물들은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그것을 멀리 바라보고 즐거워하였으며, 땅 위에서는 손과 나그네로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본향을 찾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11:13-14). 이들은 왜 고향으로 찾아 가는 것일까? 뿌리로의 되돌아가려는 본능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종족들에게 주어진 영원에 대한 향수를 말하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오랜 세월동안 추석 때 제의 행위를 함으로써 조상을 찾고 자기 본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왔다.

이 추석의 기원은 신라의 한가위를 너머서 고구려의 동맹(東盟; 10), 부여의 영고(迎鼓; 12), 동예의 무천(舞天; 10), 삼한(三韓)의 계절제(季節制; 10)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때의 의식은 조상들의 묘를 찾아 새로운 수확물로 예를 올리는 일보다 제천행사, 제천의식적인 내용이 더 강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전경미, 한해 농사 끝내고 오곡 수확가장 풍성한 시기, [기획]전경미의 문화유산을 찾아서 (41) 다시 바라보는 추석, 20130922() 예원예술대학교 문화재보존학과 교수·문화재& APSUN@sjbnews.com). 이는 조상에 대한 예의(禮儀) 이상으로 천지신명에게 경배의식을 드러내는 종교성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 조상들은 성경의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에 천지신명에게 그러한 종교성을 표현한 것이다.

 

II. 공동체 축제로서의 한가위

1) 차고 기움이라는 삶의 축제: 한가위 날 우리 선조들은 음식을 차리고 가무를 하고 패를 나누어 놀이를 즐겼다. 이는 한가위란 개인이 각자의 가정에서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장마당을 벌려서 음식을 나누고 음악을 즐기고 놀이를 했다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삶의 결실을 기념하고 즐기는 공동체의 축제를 벌렸다. 이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에 천지신명에게 기도하고 감사제를 드렸던 것이다.

오래 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밝고 큰 달을 볼 수 있는 음력 815일을 명절로 정해 가을 추수를 끝낸 후 결실을 온 가족과 이웃들이 함께 기뻐하며 축하하는 행사를 갖는 기회로 삼았다. 이 날에는 지역별로 씨름, 소싸움, 길쌈, 강강술래, 줄다리기 등 여러 민속 공동체 놀이를 즐기면서 공동체 의식을 고취했고 또 토란국, 송편, 햅과일 등 많은 명절 음식을 나누면서 온 가족과 이웃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또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조상의 은덕을 기리며 추수를 축하하는 풍습을 이어왔다.

추석은 그동안 농사를 잘 하게 해준 것을 감사하는 농공감사일(農功感謝日)이며 농사의 결실을 보는 절일이다. 아울러 한해 농사의 마무리를 하는 시기로서, 또 이듬해의 풍농을 기리는 시기로서 깊은 의미가 있다. 농경사회에서 보름의 만월(滿月)은 농사의 풍작을 비롯하여 풍요다산을 상징하여 대단히 중시된다. 추석은 만월이 뜨는 보름날이다. 만월인 보름달은 곡물로 치면 수확 직전의 알이 꽉 찬 모습이다. 그래서 추석을 달의 명절이라 한다. 곡물 농사는 싹이 돋아 만개하여 열매를 맺으면 거두어들인다. 농사는 한해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해마다 반복, 순환한다. 말하자면 자연의 재생을 한다. 이는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달의 속성과도 같다. 초승에 소생한 달은 보름에 생명력의 극치를 보여주다가 그믐 무렵이면 소멸하고 이어서 다시 초승에 소생하여 차고 기움이라는 순환을 반복한다. 이는 죽음과 삶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곧 재생하는 속성을 의미한다.(任東權. 韓國歲時風俗硏究. 集文堂, 1985; [네이버 지식백과] 추석 [秋夕], 한국세시풍속사전, 국립민속박물관). 여기서 자연종교, 달을 섬기거나, 천지신명을 숭배하는 자연종교가 나타나게 된다. 아브라함의 고향 우르(Ur) 지역은 월신 난나(Nanna)를 숭배하는 곳이었고, 성경의 하나님은 아브람을 자연종교의 고장을 떠나라고 명령하셨던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어느 지역에 매이는 월신이 아니라 어느곳에나 계시는 천지만물을 주관하시는 열조의 하나님이셨다.

2) 고향으로 민족의 이동: 추석에는 고향을 방문하는 풍습이 있다. 이 때문에 전국민의 75%가 고향을 방문하여 추석이 되면 전국의 고속도로가 정체되고 열차표가 매진되는데, 이러한 현상을 '민족대이동'이라 부르기도 한다. 1970년대 경제발전으로 도시가 발달되면서 농촌에서 도심지로 인구가 몰리는 도심화현상이 가속화되면서 한가위는 고향을 찾아가는 명절이 되었다.

1960년대에는 10만 명 정도였고 1980년대에도 크게 늘었다지만 8백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2012년 한가위 경우 본격적인 귀성 전쟁이 시작되었다. 무려 3천만 명 정도가 이동했다. 참고로 남한 인구는 사천 팔백만 정도이다.(한가위 3,000만명 대이동 얄팍한 선물꾸러미 그래도 설레는 歸鄕(귀향), 1998.10.03 동아일보 23면 사회 기사). 사실 귀성은 꼭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하진 않는다. 그래서 귀향(歸鄕)이 아니라 살필 성() 자를 써서 귀성(歸省)이라고 한다. 부모와 친지의 안부를 살피고, 조상의 묘소를 살피기 위해 돌아간다는 뜻이다. 귀성은 인간의 유전자에 있는 귀향 본능이 보다 현실적으로 표현된 것이라 볼 수 있다. 2014년에도 3천만명의 이동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귀성전쟁에는 우리 자신의 정신의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인간 깊은 내면성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3) 동아시아 민족의 관습, 중추절 지킴: 중국의 음력 815일은 중추제(中秋節)이다. 이름 그대로 가을의 한가운데 있는 날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중추제에는 달을 상대로 제사를 지내고 달을 감상하는 풍습이 있다. 이들은 보름달을 닮은 월병이라는 음식을 먹는다. 중추절에 월병을 만들어 먹는 것은 당나라 때부터 시작하였다. 둥근 모양은 가족의 화목을 상징한다 하여 온 가족이 함께 모여 나눠 먹었다. (전경미, 상게서). . 춘제(春節·)101일 건국기념일과 같이 1주일에 달하는 긴 휴가 대신 3일가량의 미니 연휴를 즐긴다.
일본에는 오봉이라는 축제가 있다. 오봉은 음력 715일을 중심으로 일본에서 행해진 죽은 조상의 영혼을 추모하는 행사를 일컫는다. 지금은 양력 815일로 바뀌어 이날 전후로 3일가량 쉬는 것이 일반적이다. (전경미, 상게서).

동아시아인들은 이러한 민속절기를 맞이하여 한결같이 거대한 무리를 이루어 고향으로 내려간다. 이는 명절에는 가족들과 함께 보내야 한다는 가족 유대(紐帶)적인 생각이 강하게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한가위는 흩어져 있던 가족들과 친지들이 오랜만에 함께 모여 담소를 나눌 수 있는 특별한 날이라 할 수 있다. 가족들이 둘러앉아 햅쌀로 송편을 빚고 갖가지 음식을 장만해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고 산소에 찾아가 성묘를 하는 것도 한가위와 같은 명절에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4) ‘알지 못하는 신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중추절은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 땀을 흘려 길쌈을 매고 노력하여 가꾼 농작물들에 가을에 결실을 주신 천지신명에 대한 추수감사제다. 이러한 중추절은 창조주를 알지 못하던 시절에는 우리 선조들과 동아시아 민족들이 천지신명에게 드리는 감사제였다. 우리의 선조들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천지신명에게 감사를 드렸다.

사도 바울은 아덴을 방문하여 아레오바고에서 아덴인들에게 저들이 섬기는 알지 못하는 신’(To the unknown god)에 대하여 해석한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17:22-25) 바울은 아레오바고 설교에서 아덴인들이 섬기는 알지 못하는 신이란 바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시고”(17:’26),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17:25),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라고 증거하였다. 이 하나님은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17:27-28) 이라고 설교하였다.

우리 선조들도 아덴인들처럼 알지 못하는 신()인 천지신명에게 봄에 씨를 뿌림, 여름에 길쌈을 맴, 가을에 결실과 추수를 주심에 대한 감사를 드렸다. 아덴인들이나 우리 선조들이나 동일한 종교성이 있다. 이는 아담 타락 후에 인간에게 남아있는 하나님 형상의 잔재이다. 이것은 칼빈이 말한 바 같이 인간에게 있는 신앙의 씨’(the seed of religion)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신앙의 씨가 인간의 원죄 타락 때문에 바르게 발현하지 않고 왜곡되어 자연신이나 우상에게로 향하여 진다. 추석이란 인간이 오곡백과를 주신 창조주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있는 하나의 신앙적 계기가 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아레오바고 설교에서 헬라인들을 향하여 다음 같이 알지 못하는 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라고 증거하였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17:30-31). 추석을 맞이하여 사람들이 풍성한 수확을 준 대자연(大自然)에게 감사하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들이 만나는 믿지 않은 이웃들에게 대자연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한다.

 

III. 추석/한가위의 기독교신앙적 의미

필자는 자연신학적 접촉점으로서 민속 명절인 추석의 기독교신앙적 의미를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서의 명절,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감사, 조상에 대한 효는 미신적 제사 아닌 기독교적 추도식으로 표현, 공동체 축제, 소외된 이웃과 나누고 돌보는 실천계기, 영원한 고향 암시, 고향교회로의 관심 환기, 추석 명절을 추수감사절로 지키기 운동 등 8가지로 설명하고자 한다.

1)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서의 명절: 추석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기여하는 민족의 명절이다. 한국인에게는 추석, 미국인에게는 추수감사절, 프랑스인들에게는 투생((Toussaint), 독일인에게는 옥토버페스트(Oktoberfest), 중국인들에게는 춘절, 일본인에게는 오봉 등이 이들 민족의 축제일로 지켜지고 있다. 이러한 명절은 지구촌 민족들로 하여금 하나의 공통적 가치관과 관습을 형성하도록 하고 사회적 통합에 기여한다. 한국 민족에게 추수를 감사하며 조상의 은덕을 기리고 이웃과의 나눔을 추구하는 추석 고유의 전통은 민속 절기를 지키는 지구촌의 다른 민족과도 나눌 수 있는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이다.

추수는 모든 피조물에게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특히 농부들에게 결실을 주시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총 가운데 하나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약속하는 요한 계시록에서도 새로운 예루살렘에 각 민족들이 자기들의 영광을 가지고 들어오는 약속: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21:24),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21:26)을 기록하고 있다. 창조가 비록 원죄로 인하여 죄 권세 속에 얽매어 노예화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창조의 영광은 이러한 인간성과 자연의 부패성 가운데서 그 영광스러운 모습이 작렬하고 있다. 우리 인간들은 매일 아침에 동쪽 지평선 위로 넘실거리면서 떠오르는 영광스러운 태양의 광휘 속에서 그리고 저녁 지평선에 붉게 물들면서 지는 태양을 보면서 창조안에 남아있는 창조자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발견한다. 이 태양은 인간이 들어갈 영원의 세계를 지시하고 있다. 이것은 신앙을 통해서만이 영원을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2)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감사: 그리스도인들은 추석을 농부의 피땀 흘린 농작물에 결실을 주시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추수감사절로 이해하는 것이 요청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추석에 농부들의 노력에 결실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표현한다. 교회는 초교파적으로 기독교적 감사절 예식을 제정하여 동일한 예식서를 통하여 창조주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헌신을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 속에는 다양한 종교가 있기 때문에 이웃종교가 하는 감사 예식은 우리와 다를지라도 이를 존중해주어야 한다. 동방 정교회나 로마 천주교가 하는 감사예식은 방식은 다를지라도 창조주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다.

창조주에 대한 감사의 표현은 가족과 이웃과의 원만한 관계로 나타나야 한다. 이웃과의 원만한 관계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권면한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12:14). 추석 가족들 모임에서 가족들 관계를 어렵게 할 수 있는 과도한 언행(지나친 자기 사업이나 아이들 자랑이나 상대방에 대한 비난 등)은 삼가야 한다. 추석 명절 가족들의 모임은 어려운 형편을 들어주고 어려운 짐은 나누고 서로를 격려하고 한 해 동안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새로운 헌신의 다짐과 그 구체적인 실천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 이처럼 분명한 창조 신앙에 입각한 올바른 기독교적 이해는 추석에 나타날 수 있는 허례 허식을 바로잡고 민족 최대 명절의 새로운 가치와 의의를 부각시켜 줄 수 있다.

3) 조상에 대한 효는 미신적 제사 아닌 기독교적 추도식으로 표현

) 조상에 대한 효성을 반드시 표시: 추석에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의 관습과 전통에 따라 우리들에게 신체적, 물질적 유산을 남겨주신 조상들에 대한 효성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먼저 아직도 살아계시는 가문의 어르신들을 방문하여 예()와 존경을 표현하고 덕담을 들으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인격과 성품을 함양한다. 추석에 자손으로서 표현하는 조상의 은덕에 대한 감사는 조상에 대한 미신적 숭배가 되어서는 안된다. 조상에 대한 효와 감사는 조상을 통해 우리에게 생명을 전해주시고 많은 물질적, 정신적 가치를 전수하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일반 은혜에 대한 감사로 전환되어야 한다.

) 제사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전도의 길을 막는다: 제사를 미신숭배로 간주하고 조상 제사에 참석도 하지 않고 심지어는 가족들이 모이는 제수비용에 참여하기도 거절하거나 인색하게 내는 것은 전도의 길을 막는 길이다. 이것 때문에 조선시대에 천주교 전래시 천주교는 조상을 경배하지 않는 사교(邪敎)로 오해받아 박해를 받은 것이다. 제사에 참여하는 불신가족들도 거의 대부분이 귀신이 와서 먹고 간다고 생각하지 않고 유교 예법이 그러하니 따라 하는 것 뿐이기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절은 안한다고 하면 허용해준다. 다른 분들이 절할 때 신자들은 조용히 한 쪽에서 정성스럽게 무릎꿇고 절하는 대신 조상들의 은덕을 생각하고 저들의 영혼을 주님께 부탁드리는 기도를 하는 것은 전도의 길이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벨론에 끌려간 다니엘과 세 청년처럼 왕의 진미를 먹지 않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반드시 참석은 하되 옆에서 절은 하지 않고 기도를 하도록 가문의 어른들을 사전에 찾아가 잘 설명을 하여 허락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그때 기독교는 효의 종교라는 것을 강조하고, 단지 방식이 귀신에게 절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조상의 은덕을 기리는 기도를 드리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필요하다.

) 제사를 기독교 추도식으로 바꾸기: 그러므로 어느 정도 어른들이 허락해 주시면 추석 명절에 조상에 대한 존경을 유교 제사 대신에 기독교 추도식으로 드리는 것이 요청된다. 따라서 추도 예배를 드린 후에 참가한 가족들이 같이 가족 애찬을 하면서 친교를 나눈다. 추석 추도예배와 애찬식을 준비하고 거행할 때 햅과일들과 음식들은 더 많은 복을 받기 위한 기복적인 제물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진솔한 감사의 표현이 되어야 한다. 조상들이 남겨준 아름다운 신앙과 유형무형적 가치를 기념하면서 그것을 보다 창조적으로 계승하고자 하는 마음과 결단이 있어야 한다. 유교 제사가 조상에 대한 효성을 표현하는 것은 인정하나 죽은 조상 혼령이 와서 제사 음식을 먹고 간다는 미신적 의식은 기독교적으로 계몽해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4) 공동체의 아픔을 나누는 축제로 승화: 추석은 추수의 결실을 함께 나누며 이웃을 돌아보는 공동체적인 명절이었다. 특히 추석이 가진 공동체 정신, 풍족한 추수를 거둔 부유한 농부들이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추수한 결실들을 함께 나누었음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사회의 상처 받고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위하여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베풀고 양보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민족의 최대의 명절 추석을 가족들이 서로 만나고 성공과 기쁨과 정()을 나눌뿐 아니라 아픔과 어려움을 같이 나누는 공동체적 축제로 승화시키도록 요청받는다.

2014년 추석은 우리 민족 안에 남아 있는 많은 갈등과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올해 한국 사회는 많은 국내외의 어려움으로 인해 혼란과 갈등을 계속하고 있다. 특히 세월호 사건의 상처와 그로 인한 사회적 갈등은 지금도 여전히 치유되지 못한 채 계속되고 있다. 세월호 참사 후 교회와 기독교 단체와 신자들이 쉬지않고 이들의 슬픔의 현장에 가서 자원 봉사를 한 것은 교회의 존재 이유를 분명히 드러내는 일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이번 추석을 맞이하여 우리 사회는 함께 아픔을 나누며 힘을 합쳐 난관을 극복하는 상생의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특히 같은 명절을 지내며 결실을 나누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유의 억압과 배고파 굶주리고 있는 북한의 주민들에게 참다운 자유와 인간다운 생존권 보장, 민족 공동체로서의 동질감의 회복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나눔의 정신을 발휘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5) 소외된 이웃과 나누고 돌보는 실천계기: 더욱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추석이라는 공동체 축제를 통해서 소외된 이웃을 돌보고 나누는 사랑의 실천계기로 삼는 사명을 주님으로부터 부여받고 있다. 한국 교회와 신자들은 2014년 추석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은총과 풍성한 은혜를 전하고 실천함으로써 사회적 갈등의 중재자와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는 봉사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영국과 미국의 청교도 조상들은 모든 수확의 결실을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기회로 삼았으며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이웃을 돌보는 실천을 통해 표현해 왔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복을 개인적으로 누리는 데서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이 복을 사회의 소외된 이웃과 나누도록 구제와 사회적 책임의 사명을 부여받았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청교도적 이해를 바탕으로 진정한 효의 실천과 가정의 회복을 위해 구체적인 노력을 전개해야 한다. 한국교회와 신자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신앙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전하고 나누어야 할 책임을 부여받고 있다. 특히 사회적인 갈등 속에서 맞이하게 된 올 추석에 세월호 참사로 인해 꽃다운 아들 딸을 잃은 학부모들이 심리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한국교회는 분명한 사랑의 실천을 통해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일하고 싶으나 제대로 된 직업이 없어서 비정규직 등으로 전전하는 젊은 이들과 우리 사회에 아직도 문화적으로 낯선 다문화 가족들, 그리고 제대로 시민 취급을 받지 못하는 탈북민들의 바른 정착 등은 국가가 해야할 일이라고 방치하지 말고 자기 교구 안에 있는 이들에게 사회적 도움과 정서적 도움과 신앙적 도움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이들에게 전달해주는 것이다.

6) 영원한 고향 증거: 추석에 생겨나는 고향 생각은 영적 고향을 잃은 현대인들에게 영원한 고향을 암시한다. 믿음으로 산 사람들의 최후의 본향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영원한 나라다. 고향을 찾아가는 우리의 불신 이웃들에게 이 이 명절이라는 시기에 영원한 본향을 생각하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같이 말한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11:16). 이 영적 고향의 흔적은 인간 영혼의 깊은 내면 속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하여 성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주여 우리 영혼이 주님을 찾기까지는 안식을 찾을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였다.

미국의 상담목회자 헨리 나우엔(Henry Nouwen)은 현대인이야말로 가야할 본향을 상실한 영적 방랑자라고 말했다. 현대인들은 영적인 방랑자로서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나그네인 것이다. 방랑자로서 인간은 자기 영혼 깊은 내면에 남겨진 하나님의 관념, 영원의 자취의 충동을 받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인은 영적 고향을 찾기 위하여 오늘날 각종 종교 요가나 쾌락이나 오락이나 스포츠에 심취하고 있다. 인간에게 있는 종교의 씨가 그릇된 모습으로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진정한 무신론은 존재하지 않는다피력하였다. 인간의 선험적 경험 속에 하나님의 의식이 작용하기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추석을 맞이하여 고향을 찾아가는 저들에게 하늘 나라와 그리고 이 땅에 오시는 하나님의 통치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무엇보다 가족과 가까운 친지들에게 이 영워한 고향을 증거 해야 한다.

7) 고향교회로의 관심 환기: 추석에는 도시교회에서 고향교회로의 감사가 전달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추석 명절은 도시 교회가 시골 교회로 일시적이나마 교인들을 되돌려 주는 절기다. 대다수 목회자들은 자신들의 교회에서만 예배를 드리기 원한다. 그래서 교회의 뒷문을 막아라는 섬뜩한 책 제목까지 등장한다. 그러나 열린 목회자는 정성껏 목회하면서 교회 뒷문은 열려 있다고 가르친다. 필자의 제자인 어느 목회자는 말하기를 자기 조부 목회자는 4천명, 부친 목회자는 15백 명까지 교인수를 성장시켰지만, 다음 같은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뒷문이 활짝 열렸으니 좋은 교회로 언제든지 가라.” 이 말은 목회 태만이 아니라 양들 위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조부와 부친의 목회 철학을 따라서 명절 때 가르친다고 한다. 그는 추석 명절에 자기교회 신자들이 고향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며 고향 교회에 생기를 주자는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다.(양진우, 추석 연휴 기간 고향 교회에서 예배드리기 운동해야, 2013-09-13 14:31 l 교회연합기자 epnnews@empal.com).
추석 명절에 대도시의 중·대형교회는 시골 농·어촌의 고향교회인 작은 교회들에게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배려하고 격려해 주는 방법을 취해 도시교회와 시골교회가 상생하는 넉넉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도시교회의 성장은 산업화로 인한 농촌, 산간, 어촌교회 성도들의 도시진입에 빚지고 있는 면이 있다. 설 명절이나 추석 명절은 이러한 빚을 되돌려 주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고향가는 신자들을 통하여 도시교회와 농촌, 산간, 어촌교회 사이에 자매결연을 맺고 신앙적 교류와 농수산물 사주기 운동을 통하여 상생하는 길을 모색하면 어떨까? 이번 가을에도 농촌, 산간, 어촌의 작은 교회들은 생존의 문제에 직면해 있고, 폭우로 인해 형편이 어려운 교회도 많다. 이렇게 지치고 힘들어 일어설 힘이 도저히 없을 때, 스스로 일어서거나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없을 때, 이들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 바로 같은 신자로서의 배려와 격려다.

그래서 추석 명절에는 농촌, 산간, 어촌교회로 가라고 적극 권유해야 한다. 이러한 명절을 기독교적으로 유도해 추석 가정 예배 모범을 배포하고, ‘고향교회에 헌금 듬뿍하기 운동고향 교회에서 온 종일 봉사하기 운동을 펼치는 것도 좋은 방안이 될 것이다. 이러한 운동을 펼치려면, 대도시 대형 교회들이 본 교회에 빠짐없이 출석하기를 강요하지 말고, 교회 차량운행을 중단하고 고향교회에 감사 선물이나 헌금을 드리도록 권장해야 한다.(양진우, 추석 연휴 기간 고향 교회에서 예배드리기 운동해야). 이러한 고향교회 도우기 캠페인은 85%가 아직도 미자립인 한국교회의 기형구조를 정상화하는 데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8) 추석 추수감사절 운동: 교회와 신자들이 중심되어 추석 추수감사절운동을 전개하기를 제안한다. 이제 기독교 신앙은 우리 민족의 삶 속에 상황화 되어야 한다. 이미 우리 조상들이 지켜온 가배, 한가위, 중추절이라는 이름으로 수천년 지켜온 민속의 명절은 바로 당시에는 천지신명에게 감사드리던 우리 선조들의 추수감사절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추수감사절을 우리 조상과는 상관 없이 미국 청교도들이 지켜온 11월 추수감사절만을 지키고자 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상황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들에게 있는 자연신학적 접촉점을 스스로 포기해버리는 결과에 이른다. 기독교 신앙의 형식은 서구 선교사들로부터 왔으나 그 신앙의 자연신학적 접촉점은 천지신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증언하는 일이다.

사도 바울이 아테네의 아레오바고에서 알지 못하는 신이란 바로 창조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라고 증거한 바 같이,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러한 자연신학적 접촉점을 초대한 사용하여 우리 조상이 고백했던 천지신명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한다. 매년 추석 명절에 한국교회는 우리 선조들이 중추절에 감사드렸던 천지신명이 창조주 하나님이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다는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 이러한 내용의 크고 작은 여러 종류의 전단지를 중요한 곳에 붙이고 전도하고 미디어나 인터넷을 이용하여 추석 명절을 이러한 복음 전도의 절호의 기회로 선용할 수 있었으면 한다.

 

IV. 복음의 상황화로서의 한국인의 추수감사절

복음의 상황화(contextualization) 논의 가운데서 민속 절기인 추석 명절을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로 받아들이는 시도는 1907년대 제기되었고 선견지명이 있는 교회들은 벌써 실천해 왔다. 이는 복음의 상황화로서 매우 필요한 시도라고 본다. 이 시도는 민속절기와 기독교 절기 사이의 갈등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으며, 기독교가 한국문화 속의 토착해 들어간다, 말하자면, 뿌리를 내린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진보 성향의 교회에서 그렇게 시도되었으나 보수 성향의 교회는 이에 대하여 선뜻 호응하지 않았고 현재 한국교회는 이중 감사절을 지키고 있다. 이는 아직도 민속문화와 기독교 절기 사이의 갈등이 해결되지 못한 것에 기인한다. 현재 한국교회 일각에서는 한국 농촌의 실정에 맞는 시기인 중추절(추석)을 전후하여 한국교회 다운 추수감사절을 새롭게 제정하자는 주장이 적지 않다. 필자는 이 견해를 지지하면서 추석을 한국인의 추수감사절로 지키자는 보수와 진보를 포함한 범교회적 운동을 제안하고 싶다.

1) 추석과 추수감사절의 공통점: 구약의 감사 절기들이 기독교에서 추수감사절로 이어진 것처럼 한국교회는 추석 명절도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절기로 만들어서 전도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리려면 지역교회가 무엇보다도 먼저 추석에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교인들로 하여금 추석이 바로 한국 선조들의 토착적 추수감사절이었다는 것을 알도록 해야 한다. 추수감사절은 한국인들이 절기로 지키고 즐길 수 있는 문화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추석에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이다. 그리하면 교인들이 추석 때 가족 모임이나 가문 모임에 참석해서 이 사실을 가족들과 친지들에게 전하게 된다.

우리의 추석(중추절)은 농사를 지은 후 기쁨의 행사로 음력 8월 한가위를 맞이하여 행하는 한민족의 명절이다. 한국인들은 종교 의식을 가미해서 행하게 됐고 조상들의 은덕을 감사하며 조상들에게 성묘를 하며 제사를 지내고 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기독교인들에게 익숙한 추수감사절이다. 우리의 추석처럼 연례 최대 행사 중 하나로 매년 11월 넷째 주 목요일에 열린다.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청교도의 신대륙 정착을 기념하는 축제다.("The 1621 Thanksgiving". MayflowerHistory.com. 2010. Retrieved 2010-11-22). 1620년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the Mayflower)를 타고 신대륙 미국에 정착한 영국 청교도들(the puritans)이 이듬해 추수를 마치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린 데서 유래했다. 청교도 순례자 선조들(the pilgrim fathers)은 낯선 이방인들에게 경작법을 가르쳐 준 인디언을 초대해 칠면조를 나눠 먹었고, 이 풍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Bradford, Of Plymouth Plantation, 1620-1647, pp. 85-92). 미국에서는 추수감사절 다음 날은 일년 중 최대 쇼핑 시즌인 블랙프라이데이’(Black Friday)로 새벽부터 쇼핑센터 앞에 장사진을 이루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유럽의 감사절의 기원은 기독교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비슷한 의식이 로마제국이나 그리스 등지에 있었고 유대인들도 수케’, ‘시케라는 가을 수확 무렵의 축제를 지냈다. 영국은 전통적으로 81일을 추수 감사절(Lamas)로 지키고 있다. 그리고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부활절 후 40, 즉 승천일(목요일) 3일간을 추수 감사절로 지키고 있다.

독일의 추수감사제(Erntedankfest)10월 초에 있다. 이 축제는 중요한 종교적 의식일 뿐만아니라 북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거대한 저녁식사(대체로 가을에 추수한 곡식)와 행렬을 동반한다. 바바리안 맥주 축제인 옥토버페스트(Oktoberfest)는 보통 에언테당크페스트 가까운 날에 개최된다. ‘옥토버페스트’(Oktoberfest)19세기(1810) 경마경기로 시작하여 214년의 전통을 가진 민속축제다. 오늘날에는 맥주 축제로 탈바꿈하여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뮌헨에서 열리며 전 세계에서 6백만명이 참가하는 세계적 축제다. 이 축제는 기독교적 신앙과는 무관하다. (옥토버페스트, 201491,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유럽의 감사축제는 이처럼 자기들의 민속과 연관되어 있다. 미국도 감사축제일을 앞서 말한 바 같이 청교도가 미국에 정착하던 초창기에 만들었다. 1623매사추세츠 주에서는 추수감사절을 공식 명절로 선포하여 이 날은 매사추세츠 주코네티컷주의 연례적인 명절이 되었으며, 이 관습은 서서히 다른 지역들로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1789미국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처음으로 추수감사절을 국경일로 지정했으나 3제퍼슨 대통령이 추수감사절은 잉글랜드 왕의 관습이라는 이유로 국경일에서 제외시켜 몇 개의 주에서만 추수감사절을 지키게 된다. 그러나 링컨 대통령이 1863103 남북전쟁 중에 1126 목요일 추수감사절을 연례 국경일로 선포하고,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정하였다. 그 후 19411226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11월의 4번째 목요일로 하기로 정하였다.( "Proclamation of Thanksgiving (October 3, 1863)". Abraham Lincoln Online. Retrieved 2010-11-24.)

이제 한국교회는 뒤늦은 감이 있으나 추석을 한국민족의 추수감사절로 만들어가는 시민운동이 필요하다. 이미 목회자들의 의식이 앞선 교회에서는 이런 방식이 이미 1970년대 실행되었다. 다른 종교들이 반대하니까 이를 법제화까지는 할 필요는 없다. 한국교회가 자연스럽게 문화적으로 추석에 전 국민이 하나님에게 추수를 감사하는 운동을 벌이자는 것이다.

2) 추석과 추수감사절의 차이점: 추석과 추수감사절과의 차이점은 전자는 농경사회의 자연종교에서 나온 축제요, 후자는 기독교 청교도 전통에서 유래한 축제다. 추석은 천지신명에 대한 자연종교적 감사제이며, 추수감사절은 창조주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감사제다. 감사 표현에 종교적 제례가 행해지는데 유교인들은 유교제사를 드리나, 기독교인들의 기독교 예배를 드린다. 유교제사에서는 선조의 영이 귀신(鬼神)이 되어 와서 제사음식을 먹는다고 믿는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이를 강력히 부인하고 이는 조상 존경이 아니라 귀신숭배가 된다고 본다. 여기서 갈등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갈등은 제사를 우상숭배로 보는 기독교적 가치관과 조상에 대한 효성의 표시라는 유교적 가치관이 충돌하면서 빚어진 것이다.

제사문제로 갈등을 빚는 것은 상황화 신학의 과제로서 유교 제사를 기독교 추도식으로 변혁시킴으러 해소되어야 한다. 특히 한국교회 안에는 제사문제로 인해 가족들과 갈등을 겪는 교인들이 많다. 가족들 전체가 교인일 경우엔 상관이 없으나, 홀로 신앙을 가졌을 경우엔 다른 불신 가족들로부터 조상의 은혜도 모른다며 따가운 눈총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래서 교인들 가운데는 제사와 성묘에 참석을 해야 할지 말아야할지 고민을 하는 분들이 아직까지 많이 있으며, 일부 교인들은 절은 하지 않되 제사에는 참여라는 절충안을 선택하기도 한다. 이러한 절충안은 아직도 전 가족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처지에 있는 교인들에게는 전도를 위한 매우 적극적인 방법이며 권장할만하다.

 사실 추석은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선조들의 추수감사절 내지 익명의 추수감사절이라고 할 수 있다. 한반도에서 한가위는 고대사회의 풍농제(豐農祭)에서 시작했다. 풍농제는 한 해의 농사를 끝내고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풍습이었다. 이러한 전통이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유교사상과 혼합되어 제사의 대상이 하늘이 아닌 조상(祖上)으로 바뀌게 되었다. 결국 한가위에 지내는 차례(茶禮)는 조상에 대한 제사가 유교적인 사상과 결합되어 나타난 풍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제사 자체를 우상숭배로 보는 기독교인들에게 효 사상은 공감할 수 있어도 제사에 참석하는 것은 신앙적인 양심에 갈등을 야기시킨다. 제사 참여를 거부하는 교인들에 대해 불신 가족들은 조상에 대한 존경을 표하지 않는 불효한 후손이란 인식을 갖게 되고, 이로 인해 가족 간의 갈등 상황이 전개된다. 그러나 이 갈등은 복음적 상황화를 통하여 해소되어야 한다. 민속의 절기인 추석이야말로 기독교의 추수감사절의 문화적 등가어(cultural equivalent)이다. 4세기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화 되면서 기독교는 성탄절을 정하는데 새로운 날자로 정하지 않고 당시 로마의 민속종교가 관습적으로 지켜왔던 태양절의 형식(동지가 지나면 태양절은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는 날이기 때문에 로마인들에게 중요시)을 받아들였다. 로마의 기독교는 로마종교의 태양절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그 내용을 그리스도의 탄신일로 채웠던 것이다. 태양절의 이방신화를 제거하고 아기 예수의 탄생일로 채운 것이다. 문화적 변혁을 일으킨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민속절기와 기독교 절기 사이의 갈등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으며, 기독교가 한국문화 속의 토착(土着)해 들어간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우리 민속 절기 추석이야말로 너무나 문화적으로 한국민에게 선교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문화적 소재이다.

3) 한국교회 추수감사절의 원형 회복’ 시급

) 맥추절: 햇곡식을 바치는 축절: 추석은 단연 우리 민족 최대의 감사절이자 명절이다. 이러한 감사절은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첫 추수에 대한 감사의 성경적 근원은 구약의 초실절이다. 이스라엘은 햇 곡식을 바치는 축절이란 의미로 초실절을 지켰다.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추수한 첫 곡식을 하나님께 바치며 감사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너희에게 줄 땅으로 들어가서 추수를 하거든 추수한 첫 곡식단을 제사장에게 바쳐라”(23:10).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첫 단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원형적 의미이다. 유대인들은 맥추감사절을 통해 하나님께 한 해의 수확을 거둔 기쁨과 감사의 표시를 했다. 이 맥추절은 유대인의 가장 오래된 절기이며, 일반적으로 칠칠절, 오순절 등으로 불려 왔다. 보리농사를 감사하는 절기이다. 칠칠절은 보리 수확의 첫 단을 하나님께 드린 초실절부터 시작하여 7주간의 곡물 추수기가 끝난 뒤의 시기에 해당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오순절 명칭 또한 추수기와 관계된 용어로, 이 날이 초실절 다음 달부터 계산하여 50일째 되는 날에 해당되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해석된다. 이스라엘 민족은 1년간의 노력과 그에 따른 결실에 감사하는 의미에서 맥추감사예배를 드렸다. 여기서 원형적인 것은 첫 곡식을 하나님께 드림과 감사이다. 이 원형적 의미야말로 추수감사절의 본질이며, 핵심이라 할 수 있다.

) 추수감사절의 원형: 첫 수확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감사: 민속의 명절 추석에 햇 곡식을 수확하여 천지신명에게 감사드리는 제례는 비록 신관이 다르지만 구약의 초실절의 첫 곡식을 거두고 하나님께 감사드림에 형식적으로 상응하고 있다. 신학월보에 따르면 기록으로 남아있는한국교회의 첫 추수감사예배는 1902105일 여주 큰곰감리교회 감사절 예배로서 10월 첫 주에 드려졌다. 당시 여주지역에서의 첫 수확이 이 시기에 이뤄진 점을 비춰볼 때, “첫 수확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추수감사절의 원형적 의미가 잘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기독교적 효와 감사 담긴 '한가위' 맞이 필요, 전통과 신앙 사이의 절충안으로 갈등 최소화해야, 2013-09-12 10:48:13, 기독교신문).

장로교는 1904년 제4회 조선예수교 장로회공의회의 서경조 장로의 제의로 우선 1110일을 감사절로 지키기로 결정하였다. 1914년 각 교파 선교부 회의를 통하여 선교사가 처음 한국에 입국한 날을 기념해 11월 셋째 주 수요일을 감사절로 지키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추수감사예배 시 헌금을 거두어 총회선교부의 전도사업에 쓰도록 하였다. 그 후 수요일을 일요일로 변경하여 매년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기로 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러한 시도는 추석이라는 민속의 추수감사절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아니한 결정이었다. 당시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의 민속적 감사절인 추석이라는 한가위의 의미를 제대로 알았더라면 바로 추석을 추수감사절로 드릴 수 있었을 것이다.

) 1970년대 경동교회와 향린교회의 창의적 시도: 선교사의 첫 입국을 기린다는 의미에서 추수감사절 시기를 최종적으로 ‘11월 셋째 주일로 결정한 것은 추수감사절의 본 뜻을 제대로 계승 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뿐 아니라 추수가 마무리되고 월동준비로 김장을 담글 시기인 11월 하순에 감사예배를 드리는 것은 시기적으로도 적절치 않다. 추석과 추수감사절을 지킴으로써 한국기독교인들은 이중 추수감사를 하는 셈이 된다. 한국교회 내에서 상황화에 대한 깊은 의식을 가진 진보성향의 목회자들이 자기 교회의 월력에 추석을 추수감사절로 지키기로 한 것은 획기적인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민족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정서에 따라 기독교를 이해해야 한다는 토착화 논의가 있었던 1970년대에 감사절 시기에 대한 보다 상황신학적 시도가 나타났다. 경동교회, 향린교회 등 기장에 속하는 진보교회에서 이러한 창의적 시도를 하였다. 1974년부터 한가위에 맞춰 추수감사예배를 드려온 경동교회는 한국의 지리적 특성과 문화, 전통을 고려하지 못한 추수감사절기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예배를 새롭게 구성해나가고 있다. 또한 향린교회에서는 추수감사주일에 진행하는 성찬예식에서 고유음식인 떡을 사용하고, 전통형식과 국악찬양 등 다양한 전통문화를 예배에 접목하며, 한국인들에게 친숙한 감사절을 지키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외에도 많은 농촌교회들이 한가위 부근에 추수감사절을 지키며, 1년 동안 땀 흘려 지은 첫 결실을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개교회 차원에 머물며, 교계 전체로 확산되진 못했다. 대형교회가 많은 보수교회의 참여는 저조(低調)하였다. 오늘날에도 한국보수교회에서는 다만 목회자들의 의미해석과 의도에 따라, 9월에서 11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기에 추수감사절이 지켜지고 있을 뿐이다.

4) 복음의 상황화 과제로서의 추석 명절:  한국 민속의 추수감사절인  추석은 농사를 지은 후 기쁨의 행사로 음력 8월을 맞아 행하는 한민족의 명절이다. 한 해의 수확에 대해 감사하고, 이를 가족 및 이웃과 나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미 고대시대부터 한 해의 농사를 마치고 그 결실을 맺게 해준 하늘에 감사를 지내던 풍농제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고려시대부터 이 풍농제는 하나의 절기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국가적 행사로 추석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한가위는 그 시작이 결실을 맺게 해준 하늘에 감사를 드리는 의식(儀式)에서 비롯된 만큼 기독교의 추수감사절과 통하는 부분이 많다. 그리하여 제사와 성묘 등의 우상숭배적 행위로 지내게 되는 추석을 기독교적인 감사절로 탈바꿈시켜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추수감사절은 본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첫 열매를 드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천신만고 끝에 북미땅에 도착한 51명의 청교도들은 혹독한 첫 겨울을 지나면서 만난 수많은 역경을 극복하며 땅을 개간하고 씨를 뿌려 생존에 필요한 추수를 하게 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과 감사에서 그들은 첫 추수에 대하여 감사의 예배를 드린 것이 추수감사절의 유래라 할 수 있다. 이후 매사추세스 주지사, 조지 워싱턴 대통령, 링컨 대통령들에 의해서 매년 11월 마지막 주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있다.

한국교회는 미국장로교회의 전통을 따라 여태까지 11월 셋째 주를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있다. 추수감사절의 시기는 미국과 한국과 문화적 상황이 다르다.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맥추절에서 볼 수 있듯이, 한해 농사를 마무리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추수감사절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현재 한국교회가 일반적으로 지키는 추수감사절은 모든 추수가 끝나고 겨울이 시작되는 11월에 지켜지면서, 추수감사절 본래의 의미인 첫 수확을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의미가 퇴색되고 있다.

한국에서의 첫 수확은 11월이 아니라 9월이나 10월이 되어야 한다. 이 시기에 관해서는 우리민족 고유의 감사절이라고 할 수 있는 한가위를 기준으로 정하다면 가정 무난한 것이다. 신자들이 추석을 추수감사절로 지킴으로써 한국의 문화적, 종교적 전통을 기독교와 접합시키는 토착화가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기독교의 추수 감사절을 한국의 추석 명절에 지키는 것도 기독교의 한국적 토착화에 속한다 필자는 토착화라는 용어가 혼합주의의 위험성을 내포한다고 보기 때문에 상황화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복음의 상황화에 관심이 있는 목회자들에 의하여 실제 한가위를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보수교회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우리 실정에 맞고 전통을 지키면서도 기독교적 신앙과 가치관을 훼손하지 않기 위한 방안인 것이다.

5) 복음 전도의 계기로서 민속의 한가위를 기독교의 추수감사절로 지키자: 복음의 상황화라는 측면에서 추석을 추수감사절로 지킴은 더 나아가 우리 고유의 문화인 추석이라는 절기를 통하여 불신자 전도를 가능하게 한다.  그리하여 추수감사절을 추석과 맞춰 지내는 것이 요청된다. 햇 곡식과 햇 과일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에서 한가위와 추수감사절은 일맥상통하는 부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벌써 오래전부터 일부 교회에서는 추수감사절을 한국의 정서에 맞게 한가위를 기점으로 자체적으로 추수감사절을 보내고 있다. 특히 이렇게 추수감사예배를 한가위 때에 드리고 있는 각 교회들은, 한국인의 정서에 맞게 예배를 재구성하며, 교계와 교인, 그리고 지역주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추석과 추수감사절을 일치시키는 것은 한국교회 2세기를 향하여 복음을 상황화시키는 첫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추석을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시도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도 친숙한 문화로 이해돼, 전도활동에 있어서도 더욱 효과적이라는 평가이다. 예배와 전통문화의 만남에 있어서 어떻게 둘 간에 적절한 조화를 만드는 과제는 여전히 남아 있으나, 그러한 시도 자체만으로 기독교에 대해 이질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불신자들이 기독교 복음과 만나는 문화적의 통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맺음말

우리 민족 고유의 감사절이라 할 수 있는 한가위와 한국교회의 추수감사절은 그 본질적 의미에서 상통하기 때문에, 이 추석 명절시기를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것은 이제 복음의 상황화를 위하여 필요한 단계로 보아진다. 기독교의 추수감사절은 하나님께 첫 수확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드리고, 이웃과 풍성함을 누리는 시기이다. 이러한 전통문화와 결합된 토착예배는 우리민족의 특수성을 반영하고 있어, 추수감사절의 의미를 더욱 부각시킬 수도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제 한국교회는 추수감사절에 대한 원형적 의미(첫 수확을 하나님께 드린다)를 되새기며, 추수감사절의 시기를 추석과 일치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그 의미를 오늘날 한국교회가 오늘날 시대에서 문화적 차원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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