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C 개혁신앙 1차 포럼이 열려

지난 8.23[] 오전8시 서울 및 수도권 SFC동문들이 이른 아침에 제1회 개혁신앙 포럼에 참석하기 위해서 서초동 박종흔 동문 사무실로 모였다. 학신 동문 운동이 영역 운동을 주된 과제로 설정하고 노력하는 가운데, 수도권에서 영역 운동의 역량 강화를 위해서 함께 모이고 중요 주제들을 다루어가자는 취지에서 개혁신앙 포럼을 시작하였다.

첫 모임의 주제는 "한국교회의 대형교회 현상, 어떻게 볼 것인가?"이고, 발제는 이세령 동문이 했다. 대형교회 현상이 본질적으로는 영적인 공동체가 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죄를 다루지 못하기 때문이며 치리회의 무력함이 그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구조적으로는 대형교회가 다부제 예배를 통해서 형성되는데, 이는 성도들이 가져야 하는 참된 성도의 직분을 제도적으로 가로막아서 영적인 교회의 본질을 가로 막고 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대형교회 형성의 바닥에 있는 개교회와 성도 개인들의 태도에 있어서 이명증 없는 수평이동을 주장했다. 이것이 개교회주의와 맞물려서 큰 것이 좋다는 자본주의 가치에 함몰된 현상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치리회가 죄를 다루어 내는 역할을 잘함으로서 영적인 공동체로 회복되어야 하고, 다부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교회의 분립은 좋은 것을 넘어서 당위적 차원임을 인식하고 나아가 성도의 이명증 제도를 활성화해서 무분별한 수평이동을 막아야 한다고 대안 제시를 하였다.

사회는 정병오 동문이 맡았고, 20여명의 동문이 모여서 열띤 논의를 하였다. 이후 2차 포럼은 1018일 오전8시 서울 영동교회당에서 가지기로 하고, 강사는 우병훈 동문이 '만인 제사장론과 성도의 직분론'이란 제목으로 발제를 한다. 종교개혁의 중요한 열매인 만인 제사장론에 기초하여서, 목사 장로 집사의 직분이 성도의 본연의 직분을 잘 세우기 위한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에 중요한 과제라는 인식에서 이런 주제를 선택하였다.

교회 개혁의 과제가 모든 영역 운동의 최우선 과제라는 인식에서 교회론적인 주제를 먼저 선택하였다. 향후 개혁신앙 포럼이 격월로 모든 삶의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는 현장이란 인식으로 운동의 장으로 삼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예정이다.

 

▲ 발제하는 이세령 동문

발제 한국교회의 대형교회 현상, 어떻게 볼 것인가?

많음의 성경적 의미많음의 성경적 의미를 위해서 먼저 신17:14-20을 보자. 이스라엘의 왕은 먼저 형제들 중에[민족주의라기 보다는 구속을 경험한 형제를 말함] 세우고, 둘째는 병마, 아내, 은금을 많이 두지 말 것이며, 셋째는 율법서를 복사하여 옆에 두고 읽어 여호와 경외를 배우고 율법의 규례를 행하라고 했다. 그러면 형제위에 교만하지 않고 좌우로 치우치지 않아 장구하리라.

부정적인 명령의 내용으로서 병마, 아내, 은금은 각기 국방과 정치와 외교, 경제를 많이 관심을 두는 일을 경고한다. 그러면 무엇이 많음이고 왜 문제인가? 많음의 정의는 하나님 경외를 포기하고 교만과 율법의 명령을 무시하는 상태로 접어드는 상태로 이끄는 정도이다. 전혀 국방과 정치와 외교 그리고 경제에 관심을 두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경외함과 형제 위에 교만함이 없는 통치권이 되어서 하나님의 율법의 의와 공평을 추구하는 나라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실제로 솔로몬 왕은 신명기의 경고에 나타난 대표적인 인물이다. 결국 그의 나라가 아들 르호보암에 이르러 분열된다. 애굽에서 들여온 말들, 그리고 바로의 공주와의 결혼, 또한 은금의 흔함으로 상징되는 나라가 견고한 나라가 아님을 말해준다. 유다의 아하스 왕은 아람과 북왕국 이스라엘의 연합적인 침략 앞에 임마누엘의 표징을 거부하고 앗수르를 의지한다. 이것은 국난의 시작이었다[7]. 북 왕국 멸망의 중요한 이유도 앗수르와 애굽을 의지한 것이다[31;1, 12;1].

특별히 은금을 자기를 위하여 쌓지 말라고 했다. '자기를 위하여'라는 표현은 십계명의 제 2계명의 특징이다.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이다. 따라서 은금과 우상은 동질의 가치를 구약 시대에 이미 가지고 있음을 확인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수 없다고 선언하신 것이다[6:24].

따라서 많음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는 정도를 말한다. 하나님 중심성을 포기하고 인간적이고 보이는 힘을 의존하게 만드는 정도가 많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교만하게 만드는 것이 많음이나 큼의 의미라고 할수 있다.

논의를 방해하는 중요논점: 대형교회 논의가 있을 때마다 논의를 방해하는 논리가 등장한다. 두 가지의 논리이다. 첫째는 큰교회는 큰일한다. 역활론으로 문제의 논점을 회피한다. 그러나 기능은 교회의 본질이 아니다. 두번째로는 큰 것은 나쁘고 작은 것은 선하다는 이분법의 논리를 가지고 대형교회 자체의 문제를 희석시킨다. 작은 교회는 더 문제가 많지 않는가? 실제로 작은 교회는 더 문제가 많다. 그러나 이런논리들은 기능이나 현상을 본질과 혼동하는 것이다. 기능의 많고 적음은 본질과 관계없다.

 

▲ 포럼에 참석한 동문들

대형교회 형성과정

대형교회가 어떻게 형성되게 되었는가?: 먼저 한국 사회의 산업화와 그에 따른 도시화가 인구 집중을 불렀다. 그럼에도 교회로 그 인구들이 몰리게 된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는 사회적인 현상으로만 풀수 없는 교회 내부적 요인이 있다. 교회가 따뜻하게 고향을 떠난 젊은 남녀 들에게 안식처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두번째로는 빌리그래함 전도집회와 엑스폴로 74와 같은 대형전도집회와 개교회 부흥집회를 통한 복음 전도 열기이다. 전자가 복음에 대한 관심을 일으켰다면 후자는 비록 기복신앙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교회 성장의 긍정적인 측면이 존재했다.

세번째로는 캠퍼스 선교단체의 복음 전도와 양육이다. 이는 대학가를 복음이 관통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특별히 선교단체는 전통적인 교회보다는 사람에 더욱 관심을 가졌다. 사람을 키우고 훈련해서 복음을 가진 좋은 사람을 교회에 배출해 주었다. 이런 인재들이 대학 졸업후 교회에서 역할을 하면서 교회 성장의 순기능에 기여해 왔음을 부인 할 수 없다. 현재의 대형교회 목사들이나 주된 직분자들 층이 선교단체 출신이라는 사실에서 이를 알수 있다.

네번째로는 교회의 사회참여와 민주화에 대한 기여가 인정을 받은 측면도 있다. 이것은 보수적인 교회의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실제로 진보 교회의 헌신이었지만 전반적인 교회의 이미지가 약자를 위한 교회라는 인식을 주었다.

이런 요소들로 인해서 몰려드는 인구들을 교회가 수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형교회가 마침내 형성되었다. 대형교회가 70년대 이후의 현상이기에 이것은 정확한 판단이다. 그러나 문제는 복음을 담은 좋은 사람이 있을 교회론이 부재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복음을 가진 좋은 사람들이 기존 교회와 교회 성장 이론에 흡수되고 말았다. 이것은 사회현상으로서의 가치에 교회가 사회적 기관으로서만 존재한 것이다. 당시 한국사회는 미국식 자본주의가 이식되는 과정이자 특히 신자본주의적 가치가 이입되고 있었다. 큰 것이 좋다는 가치가 기복적 신앙과 만난 현장이었다. 그럼으로 성장 중심의 개교회주의는 대형교회들을 만들어 내었고, 이것이 교회적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어 버린 것이다. 복음을 가진 좋은 사람들이 이런 교회적인 가치를 비판적으로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성장 지향주의에 흠쓸려서 기여를 하고 만것이다. 교회론의 빈약이 만든 결과물이다.

대형교회의 정의(다부제 예배를 드리는 교회): 대형교회는 어느 정도의 규모가 되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대형교회 현상이 먼저 일어난 미국이 규정을 하고 있다. 대 공항이후 산업화로 인해서 대형교회들이 1920-30년대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대형교회를 미국에서는 학문적으로 2천명이 함께 모이는 교회를 대형교회[Mega Church]라고 규정하고 만명이상 모이면 초대형교회[Super Mega Church]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이런 수에 의한 기준이 정당한가? 17장에서 많음을 규정하는 것이 본질을 깨뜨리는 상황이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대형교회는 교회적인 본질을 깨뜨리는 현상에 진입하는 측면을 다루어야 한다. 정확한 숫자보다는 일단 가설적으로 다부제 예배를 드리는 교회를 대형교회라고 규정해 두자. 자세한 논의는 대형교회 문제점을 다루는 장에서 이야기 하자.

 

대형교회의 문제점

본질적 측면(죄를 다루는 공동체의 본질을 상실): 영적인 공동체의 교회적 기초는 죄를 사유하는 복음의 선포이다. 이는 보이는 말씀이요 복음인 성찬으로 표현된다. 이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은 자격을 필요로 하는데, 이를 판단하는 것이 바로 권징과 치리이다. 여기서 교회의 영적인 성격이 보장된다. 이런 영적인 성격을 잃어버리는 순간 교회는 인간적 집단과 친목에 불과하다.

교회는 복음을 통해서 세상과의 분리된 공동체이다. 분리의 중심에는 거룩성이 있다. 즉 죄에 대한 분리이다. 영적인 공동체는 죄를 근절하기 위한 공동체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 노력이 바로 죄를 다스리기 위한 권징과 치리이다. 그런데 대형교회들은 이런 치리와 권징이 전혀 시행되지 않는 집단이다. 물론 현대에 있어서 작은 교회들이 권징을 시행하는가도 유효한 질문거리이다.

그러면 왜 대형교회는 죄를 다스리지 못하는 집단이 되었는가? 실제로 건전한 중형 교회로 알려진 교회를 조기 은퇴하신 선배 목사님께 권징이 실시된 적이 있는가를 물었을때 거의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나머지 중대형 교회들은 말할 것도 없는 형편이다. 과연 교회가 출교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가?

이신칭의의 교리는 믿음이 중요하다. 그로인해 사죄의 모든 은혜가 주어진다. 사죄의 은혜를 교회가 구체적으로 누리는 삶을 살아내는 것은 우리의 회개의 삶의 열매를 증거로 보이는 것이다. 죄를 구체적으로 들어내는 것이다. 사적이며 공적인 면에서 들어내어야 한다. 이것이 이신칭의의 종교개혁적 교회의 실체이다.

천주교의 고해성사는 성도가 사제에게 나오는 것만 다룰 수 있지만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는 목사나 장로가 성도의 삶의 자리로 찾아간다. 그래서 거기서 삶의 부족과 잘못과 죄의 현장을 살핀다. 그리고 잘못을 돌이키도록 만든다. 이것이 치리와 권징의 참뜻이다. 그럼으로 사죄의 은혜가 있는 영적인 공동체가 유지되도록 한다. 이를 위한 치리회의 참된 권위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오늘날 죄에 대해서 무력한 교회들이 되었다. 죄가 들어오면 이것을 처리하지 못하고 뜨거운 감자가 된다. 또한 범죄 사건을 정치적 사건으로 잘못다루어서 재판의 절차도 무시한 공정하지 못한 치리가 이루어지게 만든다. 그래서 교회 재판정인 당회와 노회의 판단이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재판은 절차가 반듯해야 공정성을 획득할 수 있는데, 이런 절차적 공정성이 교회 치리회에서 확보되지 못하고 있다. 죄를 다루지 않다보니 이런 절차적 공정성에서 더욱 멀어지게 된다.

이렇게 멀어진 결과가 무엇인가? 결국 죄를 안고 사는 공동체가 되었다. 서로의 죄가 있음을 인정하고 서로 아무 권면도 없는 공동체가 된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죄가 끓게 되고 이로 인해서 도덕적인 수치와 부끄러움이 터져 나오게 된다. 목사의 성적인 죄와 물질적인 탐욕 그리고 명예에 대한 탐욕이 교회 안에서 넘쳐서 이제는 세상 가운데 수치로 드러나게 되었다. 죄를 다스리지 않은 공동체의 비참한 결과물들이다. 도덕성이나 윤리성의 회복은 교회 치리회의 권징의 회복에서 드러나야 한다. 즉 죄를 다스리는 영적인 공동체가 회복되어야 한다.

구조적 측면( 다부제 예배): 한국교회에서 다부제는 1970-80년대에 시작되었다. 이는 사회적으로는 산업화와 도시화의 진행이고, 그 결과 교회적으로 부흥과 성장의 시기였다. 그런데 이런 성장의 결과물이 왜 대형교회로 귀착되었는가 하는 것은 별도의 질문거리가 된다. 한국 교회의 성장의 결과물이 개교회주의와 대형교회로 귀착되었던 것이다.

돌아가진 한경직 목사에 대한 손봉호 장로의 비판이 있다. 한 목사를 추모하는 자리에서 손 장로는 모든 좋은 것 가운데 한가지 잘못한 일은 큰 교회를 만든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매우 정직하고 용감한 손장로다운 비판이다.

그런데 이런 대교회, 혹은 대형교회로 귀착된 한국교회의 구조적인 측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대형교회를 구성하는 실체는 다부제 예배라는 구조물이다. 성도들이 교회로 몰려온다. 이것을 한 교회가 수용하는 방식이 다부제 예배이다. 그래서 구조적인 측면이 된다. 여기서 교회는 많은 본질적 요소들을 상실하게 된다.

먼저 예배적 공동체가 같은 목사의 설교를 듣는 것을 제외하고는 공유하는 실체가 거의 전무하다. 이것은 목사 중심의 교회를 만들어가는 현상이다. 목사의 좋은 설교를 듣고 싶어하는 중심이 물론 있다. 그러나 교회가 목사의 설교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이것을 다부제 예배를 만들어서 몰려오는 교인을 무한정 수용하려고 작정을 하고 있다. 이제 다부제 예배가 왜 온전한 교회상을 무너뜨리는지를 살펴야 한다.

먼저 다부제 예배는 성도의 직분적 역할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직분이라고 한다면 다들 목사, 장로, 집사의 직분을 기억한다. 그러나 이런 구체적인 공적 직분이 수행할 본질적인 역할은 성도의 직분이 잘 수행하도록 해야 한다. 성도의 직분이란 공적 직분이 수행할 일들을 성도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말씀을 나누고, 성도를 서로 돌아보고, 연약을 짊어지는 역할을 하는 것이 성도의 직분이다. 이것이 바로 만인 제사장 이론의 근거이기도 하다.

이런 직분이 가능하기 위해서 서로 알아야 한다. 구체적인 교제가 가능해야 한다. 그런데 다부제 예배는 제도적으로 이런 교제가 불가능하게 만들어 놓았다.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분리를 한 것이다. 단지 같은 목사의 설교를 듣는다는 것으로 한 교회로 유지하게 만들고 있다. 이런 대형교회들이 두 날개 이론 등을 내세워서 대그룹과 소그룹의 조화와 균형을 통해서 자신을 합리화한다. 사실 어떤 조직이든지 대소의 균형이 필요하다. 그러나 다부제의 경우는 절대적으로 같은 교회 안에서 단절을 만든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는가? 다부제를 통한 성도의 교제의 단절은 구체적으로 서로를 모르게 만든다. 서로를 모르게 되면 성도의 직분을 수행하지 못한다. 몰론 같은 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성찬의 교제를 나누더라도 개개인이 구체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마찬가지이긴 하다. 그러나 문제가 다르다. 교회가 구조적으로 단절을 시킨 것하고, 개인이 노력을 하지 않은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다부제 예배는 구조적인 문제이다.

이미 대형화가 된 교회에서 다부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간적인 문제가 있다. 개혁교회에서는 이런 숫자의 증가를 교회 분립이란 방식으로 해소해 왔다. 숫자가 교회당이 감당하기 어려운 상태에 이르면 분립위원회를 구성해서 분립을 준비하다가 적당한 장소와 교회 건축까지 하는 분립의 방법을 결정하여서 지역으로 정확히 분립을 한다. 그런데 분립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경우도 있다. 대도시의 경우 경제적인 문제나 장소가 없는 경우에는 아에 한지붕 두 살림을 하기도 한다. 독립된 치리회를 구성한 두 교회가 한 지붕아래 같은 공간을 사용하기도 하다. 이것은 다부제 예배와는 다른 독립된 교회들이다. 그럼으로서 교회적 가치와 본질을 유지하여 간다. 그리고 양 교회가 협력하여서 일을 행해 간다.

성도의 직분이 수행되지 못하면 그 결과로 인해서 공적인 직분도 제대로 수행되지 못한 것이다. 구조적이고 원천적인 장벽이 있는데 어떻게 공적인 직분들이 수행될 수 있겠는가? 그래서야 어떻게 죄를 제거하는 영적인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다부제는 대형교회로 가는 발판을 구조적으로 마련해 놓았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됨을 파괴하는 주범이었다. 영적인 측면을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영적인 측면을 말하는 성도의 직분이란 조직적이고 질서적인 측면을 상실하게 한다.

개교회적이며 개인적 측면(이명증 없는 수평이동): 가는 교인 막지 않고 오는 교인 다 받는다. 이것이 대형교회의 실체이다. 필자가 서울 강남에서 담임 목회를 하던 곳 옆에 복음주의 4인방 중에 한분이 목회를 하고 계셨다. 부임후 그에게 인사를 하려고 갔다. 그때 자신의 현실을 토로하였다. 큰 교회를 은퇴하고 이곳으로 왔는데 교인들이 몰려오는 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은 오는 교인을 막지 못한다는 행복한 하소였다.

복음주의 4인방이라고 불리우는 한 시대의 대표적인 목회자들은 모두 한결같이 대형교회를 일구었다. 즉 그들은 좋은 메시지를 가지고 나름의 교회들을 만들어가면서 대형이란 공통의 장을 만들어 갔다. 저들은 교회론적인 본질적 반성을 하지 않은 채 모든 한국교회의 성장의 열매들을 거의 독식하면서 성장을 하였다. 그리고 와서 이제 자신들의 어깨에 서서 뛰어 넘으라고 한다.

대형교회는 죄를 다스리지 않는 영적이지 못한 공동체이고, 구조적으로는 다부제 예배를 통해서 조직된다. 그리고 대형교회가 된 개체 교회나 그리고 간 성도들은 이명증 없는 수평이동을 통해서 가능했다. 이명증이란 교회와 교회가 하나로 연결된 상징물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인 교회의 구체적인 증거가 이명증이다. 그런데 이명증 없이도 교인들이 마음대로 슈퍼마켓을 선택하듯 교회를 선택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자본주의 세상에서 승자의 독식 권리를 대형교회도 향유했다.

성도가 교회를 옮기는 기초는 원래 적이 있던 교회나 새로이 옮겨나는 교회가 성도를 주고 받음에 있어서 교회적 질서를 세우는 것이다. 이는 보내는 교회나 받는 교회가 이명증을 주고 받음으로 현시된다. 그런데 교회 성장이란 가치와 목표아래서 이명증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교회적 일치는 고려의 가치도 되지 않았다. 오는 교인들을 다 받겠다고 나선 것이다. 자기 교회가 좋다는 증거라고만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개교회주의의 말단 현상이었다. 그 결과 교회와 교회 관계는 경쟁의 관계로 내 몰리기 시작한 것이다. 성장이란 가치아래 교회가 가진 보편성이나 일치성도 다 포기 된 것이다.

이명증없는 수평이동의 결과 대형교회로의 성장은 이루어 내면서 이를 수용하는 방식으로 다부제 예배를 구조화 했고 나아가 그 결과물로서 영적이지 못한 공동체가 된 것이다. 그럼으로 인해서 대형교회는 교회가 불릴수 없는 자리에 서 있게 된 것이다.

이명증 없이 이렇게 성장한 교회들은 작은 교회들은 몰살시켜 가고 있다. 브랜드 파워로 지역 교회를 파고 드는 행위를 작은 교회들이 집단으로 거부하는 사태가 생겼다. 도대체 교회적 질서가 이렇게 정글이 되어가고 있다.

이제 이런 이명증없는 수평이동은 오늘날 이단 문제에 대해서 얼마나 무력한 교회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누구나 오면 좋다고 하던 시절이 다 지나고 이제 이단들이 교회를 접수하러 들어온다. 잘 믿는 것 같은 성도들이 다수가 들어오면 오히려 더 겁을 내는 형국이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이명증이란 교회의 적을 무시한 결과물이다. 성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기록물인 이명증은 교회가 성도들을 돌아보고 양육하는 더 없이 귀한 산물이다. 온 교회가 한 성도를 위해서 섬긴 산 역사의 증거물이다. 그런 것을 무시한 한국교회의 재앙이 이단 앞에 서있는 현실이다. 개교회 성장주의가 가져온 절대적 폐해의 산물이다.

 

▲ SFC 개혁신앙 1차 포럼 기념촬영

글을 맺으면서

대형교회의 문제점을 돌아보면서 내리는 대안은 이렇다. 첫째 본질적인 차원에서 치리회를 통한 권징이 살아있는 교회가 됨으로 영적인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구조적인 차원에서 다부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교회 분립을 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개교회나 개별성도들은 교회를 옮기는 일에 있어서 이명증을 소지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대형교회 현상을 극복하면서 교회적 바른 질서를 회복하는 대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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