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사업회 제19회 월례기도회 열려
2014년 9월 13일[토] 오전7:30에 종교개혁500주년 기념사업회는 제19회 월례 기도회를 종로5가 기독교연합회관내 기독교학술원에서 가졌다. 1부 경건회와 기도회를 가지고 2부로는 제14회 종교개혁신학 특강을 가졌는데, 아신대의 한병수 박사가 "사이먼 그리네우스의 신학과 종교개혁에의 기여"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했다. 칼빈의 첫 주석인 로마서 주석을 헌정한 인물이 바로 사이먼이고, 칼빈은 그의 성경해석 원칙인 명료한 간결성의 원칙에 동의한 것으로 종교개혁사에 알려진 인물이지만 그의 생애나 영향력을 상세하게 연구한 것은 한병수 박사의 노고이다.
제1부 경건회 및 기도회
안명준 목사의 사회와 배경식 목사의 기도에 이어서 김병훈 목사가 눅10:25-37절의 말씀을 가지고 믿음과 선행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였다. 이어서 합심기도 시간을 가졌다. 첫째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는 이남규 목사가, 한국교회의 개혁과 갱신을 위해서는 박상봉 목사가 사업회의 임무 완수를 위해서는 김성욱 목사가 기도했다. 이종윤 목사가 축복하였다.
김병훈 목사는 “신자의 삶이 선행을 내포한다. 그러나 선행이 구원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본문은 영생을 질문하는 율법교사가 등장한다. 예수님께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신 말씀이 율법과의 관계를 노정한다. 율법교사가 이를 행하라는 말씀을 가지고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내 이웃이 누구인지를 묻게 되고,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라인의 비유를 드신다.
나의 이웃이 누구인지를 묻는 자에게 강도 만난 자를 중심해서 이웃의 개념을 설명하신다. 그럼으로 자비를 베푼 자가 이웃이 된다. 예수님께서 왜 이런 비유를 통해서 영생을 설명하셨을까?
여기서 너도 가서 이 같이 행하라는 말씀은 자신이 받은 것이 무엇인지를 계산하라는 말이다. 율법의 마땅한 길은 은혜를 기초해서 주어졌다. 율법은 죄를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이 비로소 제3용법의 용도로서 기능을 한다.
본문의 깊은 뜻은 이것이다. 선행을 통해서 좌절하기도 하고, 노력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다른 이는 죄를 깨닫고 은혜를 바라본다.
종교개혁 500주년에 교회론과 존재론 등을 살필 수 있지만 본문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신학 실천개혁의 운동이다. 은혜를 입었으니 어찌할꼬하는 운동이다.“라고 설교했다.
제2부 사이먼 그리네우스[Simon Grynaeus]의 신학과 종교개혁에의 기여/ 한병수(아신대, 역사신학)
종교개혁은 여러 인물들이 상호 조화속에 진행된 운동이다. 당대에는 존경과 칭찬이 있었지만 이후에 잊혀진 인물중에 하나가 사이먼 그리네우스이다.
사이먼에 대한 단행본이 헝가리 학자 블라지 아르파드에 의해서 헝가리어로 출간되었다. 사이먼은 바젤의 개혁자 외콜람파디우스의 후계자로 지목되었고, 멜랑히톤 및 칼빈에게 학자적 탁월성을 인정받았다. 사이먼은 '막후에서' 평강과 겸손의 자리에 어떻게 머물수 있는지의 가능성을 보여준 탁월한 범례이다.
사이먼은 1493년 독일의 스와비아 베링켄 지역의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고, 인문주의자 로이힐린의 고향인 포르츠하임 지역 라틴어 학교 입학한다. 1511년에 비엔나 대학에 진학하여 4년간 공부하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부다페스트의 문법학교 교장직을 수락하지만 루터의 개혁정신에 반대하는 무리들에 의해 투옥되고 결국 도시를 떠나게 된다. 이런 피난중에 1523년에 결혼을 하게 되고 비텐베르크에 이주한다.다음해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가 된다. 그때 칼 쉬타트를 만난 이후에 루터의 성찬 견해보다는 쯔빙글리의 견해를 따르게 된다. 그는 학문과 경건의 균형을 추구하였다.
사이먼을 바젤의 헬라문헌 교수직으로 앉히려고 외콜람파디우스가 1529년에 초빙되어 거기서 여생을 보냈다. 에라스무스는 사이먼이 라틴어와 헬라어에 능통하고 철학과 수학으로 무장되었고, 어떤 거만과 과도함에 이르지 않는 극도의 고매한 인품을 가졌다고 평가했다. 고대 판단들이 간행에 함께 참여했다. 또한 희귀문헌 발굴에 각별한 재능을 가졌다.
사이먼이 영국을 방문했을 때 헨리8세의 이혼을 찬성하는 일에 협력함으로 무어의 정치적 입김에 의해 영국을 떠나기도 했다.
1535년 7월에 바젤로 돌아온 사이먼은 36년에 신학부 교수직에 들어가 헬라어 신약과 로마서를 강의했다. 칼빈은 사이먼의 로마서 강의를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성경해석학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이먼은 칼빈과의 관계에서 해석학적 동지였다. 칼빈의 첫 주석인 로마서를 그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주석가의 으뜸가는 덕목으로 명료한 간결성에 동의했다. 사이먼의 입장에서 명료성과 간결성은 가하학적인 방법론을 모든 학문에 적용한 결과였다.
사이먼과 칼빈의 관계에 있어서 비판도 했다. 베를린의 루터주의 성직자 피터 쿤츠와 세바스칸 마이어에 대한 칼빈과 파렐의 적대감을 비판했다. 서로 평화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사이먼은 첫 아내와 사별한 후에 1539년에 재혼한다. 그는 또한 보름스 회의에 스위스 대표자로 참석할만큼 공인된 권위를 가졌고 개혁주의 신학을 바젤에 정착시킨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