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가을 개혁신학회 학술대회 열려

20141011일 오전10시 사당동 총신대 제2종합관 카펠라 홀에서 개혁신학회 2014년 가을 학술대회가 '개혁신학과 로마가톨릭주의'라는 주제로 열렸다. 최근 교황의 한국 방문과 관련해서 시의성 있는 주제를 가지고 로마가톨릭과 개혁파 신학의 차이를 살피는 시간을 가졌다.

1부 예배에서 김근수 목사는 믿음으로라는 제목으로 돈과 빽이라는 시대정신에 저항하는 학자들의 발표들이 되기를 말했다. 그리고 발표에서는 제1발표에서 김재윤 박사가 의롭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의: 레겐스부르크, 트렌트, 합의문서[1999]로 본 로마카톨릭의 '칭의'교리로 발표했고, 2발표에서는 이상웅 박사가 로마 카톨릭 교회의 마리아 론과 유정모 박사가 개혁파 정통주의와 예수회의 중간지식 논쟁과 함영주 박사가 예수님의 교수방법으로서의 전환학습과 기독교교육적 함의를 발표했고, 3발표에서는 문병호 박사가 그리스도의 의의 유일성과 객관성을, 김요섭 박사는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칼빈의 비판 연구를, 임경철 박사가 에스라를 통해 본 이 시대의 바람직한 리더십을 발표했다.

 

▲ 설교하는 김근주 목사

1부 개회예배

1부예배에서 김근수 목사는 롬1:16-17을 가지고 '믿음으로'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면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이 실제로 고백되고 있는가를 질문하였다. 믿음이 아니고 오히려 돈과 빽으로 사는 것이 아닌가? 아브라함이 양자나 서자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약속의 아들을 얻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하박국 선지자도 불의가 둘러싼 상황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씀을 붙잡고 살았다[2:4]. 바울 사도도 롬1:17에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고통이 시대정신인 자율종교에 저항하였다. 초대교회도 히10:37에서 로마의 박해에 대해서 오직 믿음으로 산다고 고백을 했다.

중세의 교회가 상업과 형식주의에 빠져있을 때 개혁가들을 오직 믿음으로 산다고 고백을 하였다. 오늘날은 더 심하게 타락한 세계가 아닌가? 정말 시대 정신인 돈과 빽에 의존하는 시대를 저항하는 야성과 광야의 음성을 듣고 싶다. 학자들이 이런 논문들을 발표할수 있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말씀을 맺었다.

 

▲ 카톨릭의 칭의 교리 변화 가능성을 발표하는 김재윤 박사

발표 1

의롭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의: 레겐스부르크, 트렌트, 합의문서[1999]로 본 로마가톨릭 '칭의' 교리/ 김재윤 박사[아신/조직신학]

논문의 배경은 최근 교황 방문으로 인해서 개신교 혹은 개혁파와 로마가톨릭의 차이점이 있는가라는 질문이 있다. 이를 위해서 종교개혁이후 핵심 차이점인 칭의 교리의 1999년 레겐스부르크 합의를 살펴본다. 합의라는 것은 차별이 있었음을 말하기에 그 차별을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두번째는 로마교회의 음성을 들음으로 칭의 교리에 대한 변화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함이다.

구체적인 서술 방식으로 개혁파 칭의 교리와 대립되는 진술이 트렌트 공의회에서 확정되었기에 확정 이전에 레겐스부르크 회의에서[1541] 로마교회가 어떤 칭의 교리들을 가졌는지를 콘타리니와 그로퍼등의 목소리로 듣고 레겐스부르크 합의를 살펴본다. 그리고 트렌트공의회의 칭의 교령을 살피고, 1999년에 루터교와 로마교의 칭의에 대한 합의 문서를 살펴본다.

 

트렌트 공의회 이전의 로마 카톨릭의 칭의론: 레겐스부르크 합의를 중심으로

로마 카톨릭은 루터 칭의 교리에 대해서 처음부터 전적으로 반감을 가지지는 않았다. 먼저 교황대사였던 콘타리니는 이중적인 의를 말하면서 첫째는 우리안에 내재하는 고유한 의로서 의로와지기 시작하면서 신적 본성에 참여자가 된다고 했고, 둘째는 우리 안에 내재하지 않고 그리스도와 함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인데, 이것을 그분의 모든 공로와 함게 하는 그리스도의 의라고 부른다고 주장했다. 이 두번째 의는 루터의 전가된 의와 동일한 견해를 가진 것이다.

레겐스부르크 회합에 참여한 요하네스 그로퍼는 부쩌와의 유사한 칭의 개념을 가졌다. 칭의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관점에서 다루면서 칭의를 선언적인 측면과 효력적인 측면으로 나누어서 설명했다. 두 사람은 두 측면에 대한 이해와 강조점이 달랐다. 부쩌는 전가된 의가 이웃에 대한 사랑을 통해 이루어지는 효력있는 의를 추구하는 자극제로 보았지만, 그로퍼는 전가된 의는 실체적인 의가 온전히 실현되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나누어 주는 의를 의미했다.

 

레겐스부르크 합의는 제5항이다.

비록 의롭게 여겨진 사람은 의를 수여받고 또한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재적 의를 소유한다... 그러나 신실한 영혼이라면 이 내재적인의를 의지하지 않고 오직 선물인 그리스도의 의만을 의지할 것이다. 이 그리스도의 의가 없다면 그 어떤 의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으로 우리는 의롭다 여겨진다. .. 우리안에 내재하는 의로 우리는 의롭다고 말해지는데 요한이 요일3:7에서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다고 말한 것을 따라서 우리가 행하는 선행은 의롭기 때문이다.

이 합의문이 두 진영의 입장의 누더기라는 입장과 반대로 전가된 의를 바탕으로 설명한다는 입장이 있다.

이상의 두 로마 학자와 레겐스부르크 합의문을 통해서 확인하는 점은 첫째 로마교회의 칭의의 대한 근본적인 이해는 의롭게 여겨지는데 있지 않고 의롭게 만들어지는데 있다는 것이다. 칭의 사건과 칭의 과정의 구분이 불가능하다. 두번째는 전가된 의를 전향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트렌트 공의회의 칭의에 대한 교령

트렌트 공의회는 1546622일에 개최된 회의에서 여섯가지 질문이 설정되었다. 칭의의 의미, 원인, 성례나 선행과의 관계등이다.

칭의 논의 과정에서 세리판도 추기경은 두번째 초안에서 '이중칭의'라는 독립된 장을 포함시켰다. 의롭게 된 자가 얻을 수 있는 불완전한 의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더해질 때만이 영생을 받을 가치가 있는 것이 된다. 그렇게 때문에 마지막 심판 때 기독교인은 하나님에 자비에 호소해야 하고 그리스도의 공로에 자신의 모든 신뢰를 두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제안들은 최종적으로 거부되었다.

칭의에 대한 트렌트 교령의 내용은 그리스도안에서 중생하지 않는 자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다. 중생은 칭의에서 필수적인데 이 중생에서 그분의 고난의 공로인 은혜가 수여되어서 의롭게 만들어진다. 16항에서 정리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세워진 것으로 말해서 하나님의 의를 무시하거나 거절하지 말아야 한다. 동시에 우리의 의를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내면적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는 동시에 하나님의 의인데 왜냐하면 그것을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입되었기 때문이다.

트렌트 공의회가 말하는 칭의는 칭의의 공식적 원인으로서 하나님의 의, 공로적 원인으로서의 그리스도의 고난, 그리고 우리의 선행이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것에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이 모든 삼위 하나님의 은혜적인 칭의의 원인들이 사랑안에서의 선행, 곧 내재적인 의라는 것을 매개로만 실현되고 나타난다는 것을 주장했다.

 

▲ 단체사진

합의 문제[1999]

루터교와 로마 카톨릭의 공식적인 기구간의 대화와 합의가 1999년에 있어졌다. 트렌트 공의회 문서를 평가하면서 칭의의 궁극적인 원인과 근거에 대한 것이 종교개혁과 로마 카톨릭을 구분짓는 핵심 쟁점인 것을 확인했다. 칭의의 원인과 근거가 궁극적으로 어디에 있고, 무엇을 매개로 최종적으로 나타나는가가 두 진영을 가르고 있다.

합의문제 제15항에서 칭의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으로 규정하였다. 16항에서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의롭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바로 이 구원을 믿음으로 받을 때 그렇습니다. 15항은 적어도 우리 쪽의 어떤 공로가 아니라는 진술을 명확하게 한다. 칭의를 근본적으로 삼위 하나님의 사역으로 본다. 그러나 우리 쪽의 어떤 공로가 아니라는 것을 트렌트 교령의 첫번째 단계 즉 인간의 본성과 율법으로는 의롭게 되지 않는 상태만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여지가 있다.

로마카톨릭은 칭의에서 하나님의 선물인 은혜가 인간의 협력으로부터 항상 독립적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않는다[24]. 믿음의 칭의의 관계에서 로마 카톨릭의 가르침은 의롭게 만드는 은혜에 의해서 삶의 새롭게 함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믿음, 소망, 사랑안에서의 새롭게 됨은 언제나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에 의존해 있고 하나님 아페서 그것을 자랑할 수 있는 칭의에는 어떤 공로도 없다[27].

트렌트 교령이 종교개혁의 칭의론에 대한 반대라는 역사적 상황을 많이 반영하지만, '합의문서'는 트렌트 교령이 가진 래디컬한 톤들을 걸렀다. 은혜는 인간의 내적인 칭의를 통해서 성령으로 새롭게 함이라는 존재론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 원인이지만 인간의 선행이 은혜를 주도하거나 그것을 넘어설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합의문서'는 로마 카톨릭이 말하는 칭의의 공식적인 원인인 하나님의 의가 반드시 그것의 결과인 인간의 내재적인 의에 의존하는가 하는 개신교의 집요한 질문에 대한 로마 카톨릭의 완화된 표현들이다. 은혜가 칭의의 원인과 장소를 전적으로 인간의 내재적인 의에만 두지 않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를 독립적인 것으로 보려는 해명들이 들어있다.

따라서 레켄스부르크 합의나 1999년 합의문서에 충실하다면, 로마 카톨릭의 칭의 교리는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칭의의 근거와 원인을 그리스도의 의에만 두어야 할 가능성을 열어 놓게 된다. 이 가능성이 현실이 된다면 로마 카톨릭의 칭의 교리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대앞에서 조차도 내가 실제로 의로워진 그 본질로 인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 영생으로 받아 들여지는 생각을 수용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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