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교회’이해에 따른 설교 방향

▲ 황창기 박사 Th.D. 한국동남성경연구원장

한국동남성경연구원의 제 3회 겨울 세미나에 오신 여러 분을 환영한다. 이번 세미나의 주제는 신구약에 나타난 교회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이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를 바로 알고 있는가를 다시 살피고, 이에 따라 무슨 목적으로 설교할 것인지를 살피고자 한다. 그 일환으로 우선 개혁주의 교회론(1)에서 교회의 임무(task)(2)에 집중하고자 한다. 특히 최근 미션얼(missional,소명적)(3) 교회가 학계에서 회자되는 이유와 관련이 깊은 한국교회 문제점에서 시작하고자 한다.

미션얼(missional,소명적)이라는 말은 인도에서 30 여 년간 선교했던 Lesslie Newbigin에서 비롯되었다. 그가 고국(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많은 교회가 없어지고, 문을 닫고 있는 상황임을 발견하고 그 이유가 하나님의 창조 시의 목적을 잃은 데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영국에서 교회가 본래의 목적을 찾아야 한다고 외치며, 은퇴 후 영국교회 재건을 위한 각종 사역을 펼친 데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가 미션얼 성경읽기, 미션얼 교회, 미션얼 성도세우기로 기독교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학문적 노력으로 발전하고 있다.

 

. 한국교회 문제점 요약

근래 전반적으로 한국교회 생태계가 죽어가고 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 당시 미션얼(missional,소명적) 임무에 따른 본래의 교회 존재 목적의 상실일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 임무에 따른 성경 읽기, 성경해석학, 설교 및 목회로, 그 사명에 충실한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한국교회가 이러한 핵심적 근본에서 일탈한지 오래되었다. 대부분의 성도는 근본 하나님의 의도보다는 자기 개인의 영달과 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교회에 다니며 신앙 생활하는 현실이다. 그 이유는 성공 및 성장주의, 1 등주의, 출세주의 등의 황금만능주의가 교회 강단의 위조복음, 가짜복음으로 변질시킨 결과이다. 또 성경을 문자주의로 이해하는 근본주의의 일색으로 복음의 변혁기능이 마비된 지 오래 되었기에 오늘의 한국교회 사태를 낳았다.

교회도 자기교회 성장과 발전만을 위해서 전력투구하다가 기업화되거나 구멍가게로 전락되고 있다. 그 결과 교회의 양극화를 촉진한다. 주님의 근본 목적과는 달리, 교회버스 등을 동원해서 교인을 긁어가 대형교회가 되는 반면에, 그 지역 여러 교회들의 생태계를 말살해 왔기 때문이다. 대형교회 목회자는 섬기는 자, 돌보는 자를 넘어 대기업의 회장처럼 군림하는 체제를 굳힌다. 반면에 지역교회의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고갈시키는 면이 예사 일이 아니었다. 필자는 3만 명 규모의 대형교회보다도 3백 명 모이는 작은 1백 교회가 더욱 성경적이라 본다. 한국교회는 언론매체와 사회로부터 온통 싸잡아 비난받고 외면당하고 있다. 교회는 갈수록 더 어려워진다. 지금 그런 대형교회들의 비리와 추태는 한국교회 생태계를 고갈시키고 있다. 이 모든 책임은 교회목사들이 짊어져야 한다.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원인을 찾아 처방에 나서야 한다.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 후 동산을 세우고 아담과 하와에게 맡기셨다. 아브라함을 불러, 이삭, 야곱의 가족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 세워도, 하나님 창조 시의 근본 목적, 곧 소명에 충실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사람이 되신 예수그리스도로 오시어 그 목적, 즉 소명을 완결하시었다. 이제 그의 백성 된 교인들로 이 미션얼(missional,소명적)임무를 감당하고 이 시대를 변혁시키는 역군으로 살게 하신 것이다. 이 본연의 미션얼(missional,소명적)임무에 신실한 한국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그리스도가 어떤 분(Person)인지 아는 것이 절실하다.

교회를 논하면서, 옛 이스라엘이 지나고, 새 이스라엘로 예수님께서 오셨는데도 예사로 역사의 한 인물로 축소 내지 무시되고, 대신에 신약 교회만이 새 이스라엘의 자리를 차지해 온 셈이다. 이와 같이 새 이스라엘 개념에 그리스도가 무시당하는 형편이 일반적이다. 그리스도가 제외된 채, 교회만이 새 이스라엘이라는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 + 교회가 곧 새 이스라엘이라고 수정되어야 한다. 옛 이스라엘--->예수 그리스도 (새 이스라엘) --->신약교회라는 도식에서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를 합쳐서 새 이스라엘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 그리스도 완결적 성경이해

교회 문제들의 밑바닥에 천착된 똬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Person)인지에 대하여 별로 관심이 없거나 오해한 결과에서 비롯되었다. 이리하여, 복음을 그리스도의 하신 일(works)에 치중하여 온 셈이다. 이러한 한국교회 문제에 대한 효과적인 처방에는 그리스도 완결적 성경이해가 필수라고 강조하고 싶다. 그리스도 완성 또는 완결 해석’(4)이란 말은 최근에 나온 말이다. ‘그리스도’(Χριστς)목표혹은 완성’(τλος)이란 말을 합성시켜 그리스도 텔릭(Christotelic)이라 하는데 필자가 그리스도완결이라 번역하였다.(5)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목표요 구약 이야기와 이스라엘 백성들 역사의 완결()이란 말이다. 이 성경이해 방법은 제 2성전 유대주의 성경 해석방법 및 전통에 따라 신약 저자들이 구약을 인용하고 적용하는 사도들의 해석 (apostolic hermeneutics)에 대한 연구를 기본으로 삼는다.(6) 따라서 목회자는 신약의 구약인용을 잘 살피고 연구해야 할 것이다.(7)

이 새로운 용어는 성경신학, 특히 구속사적 성경해석학 및 설교학에서 사용되고 있는 그리스도 중심(Christocentric), 또는 그리스도론적(Christological)이란 말과 비슷한 점이 있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비슷한 점이란 성경 특히 구약 본문을 그리스도 자신(Person)과 사역(works)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절정과 통합시켜 해석하는 점이다.(8) 그리고 차이점이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중심의 종말론적 맥락에서 성경을 보는 방향의 차이다. 즉 그리스도 중심적 성경해석은 1차적으로 문법적- 역사적으로 본문을 석의한 후 구약에서 신약을 향하여읽는다. 반면에 그리스도 완결(Christotelic) 해석은 그리스도께서 이끄시는 해석(Christ -driven hermeneutic)으로 신약 기록자의 상황에서 구약을 다시 2 차적으로 되돌아읽는 것이 그 특징이라고 하겠다. 2차적으로 읽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이룩된 결과를 알고 읽는다는 말이다. 마치 소설의 결말을 알고서 두 번째 읽어 처음보다 명확하게 이해된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성도 자신을 포함한 만유가 변혁된 차원의 안경으로써 다시 본문을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에게는 여기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종말론적 사건, 또는 묵시적 사건” (the apocalyptic event of the death-resurrection of Jesus)으로 보는 안목도 필요하다고 본다. 원래 묵시(apocalyptic)(9)란 일반적으로 미래에 대한 신앙 및 신념에 대한 마음 자세를 묘사하는 말이다. 그러나 묵시는 우주적 혹은 신학적인 의미가 은밀하게 함축되고 도색된 상징(은유)적 암시를 시공간의 현실에다 드러내는 표현이다.(10)즉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하는 안목도 필요하다. 말하자면 묵시는 복음을 약화시키는 면도 있으므로 주의하면서, 주님 죽음과 부활을 우리의 단순한 사고방식으로 가볍게 이해서는 안 될 사건이기 때문이다.

신약 저자들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말세 또는 종말(eschaton)이 왔음을 믿었다. 그래서 그리스도 완결 해석은 그리스도 안에서 임한 종말이 우주보다 더 큰 만유에 전무후무한 대변혁 (the Great Transformation)이 일어났다는 견지에서 성경을 풀이하고 적용하는 것이다. 성경 해석자 자신도 이 대변혁을 받은 사람임은 물론이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의 구속 목표가 달성되고 성취되었다는 입장에서 구약 쪽으로 되돌아보는 것이다.

다시 요약하자면 이 말은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과 차이가 있다. 이제까지 우리는 구약 창세기에서 출발하여 신약 그리스도를 향하여 내다보는 구원역사가 시대적 진전을 따라, 신약 종말을 이해하여 왔다. 반면에 그리스도 완결 해석은 이스라엘 구원역사의 결말인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이룩된 대변혁의 입장에서 구약 쪽으로 되돌아보는 점에서 둘 사이의 공통점 및 차이점이 있다는 말이다.(12)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실제로 마태복음 2:15 절은 아기 예수님이 헤롯왕의 위협 때문에 애굽으로 피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개인적 출애굽이 구약 호세아서 11:1을 성취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단순히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하지 아니하고, “마태복음은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함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는 하나님 아들을 부른 사실을 이루기보다, ‘아들을 불러 이루고자하신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를 예수님을 통하여 완결하신다는 말이다.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피난 생활을 마감하고 돌아오는 예수님의 출애굽과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요 장자인 (4:22)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과는 하나님의 미션얼(missional,소명적)임무 성취 면에서 서로 정반대라고 할 정도로 대조됨을 암시한다. 어떻게 대조되는가?

호세아서의 문맥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였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배반하였음을 나타낸다. 즉 그들은 주님의 미션얼(missional,소명적)임무 달성에는 실패하였다. 그들은 더 바알에게 제사 드리며 우상에게 분향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배반해왔던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마태복음은 새 이스라엘인 예수님께서 그 하나님의 미션얼(missional,소명적)임무를 이루실 것이라 한다. 즉 초대교회 전통에서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자리를 채울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13) 좀 더 다른 각도에서 말하자면, 호세아서의 본문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마태복음 저자가 이렇게 기록한 배경은(14) 하나님이 부르신 의도를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옛 이스라엘)은 불순종하였으나 새로 오신 예수님(새 이스라엘)은 이룬다는 점에서 대조적이라 하겠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애굽에서 부르신 그 뜻을 배반한 호세아 시대 이스라엘 백성(옛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새로 태어난 예수님(새 이스라엘)이 하나님 목적을 이루려 함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까 예언된 사실이 때가 되어이루어진다는 의미보다도 그 이루어짐이 예수님임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의도를 이스라엘은 이루지 못하였지만, 새 이스라엘이신 예수님은 이루셨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성취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아주 빈약한 편이다

사실 이것은 호세아서 11:1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한 결과로 얻어낸 것이 아니다. 아무리 역사적 문법적으로 해석해보아도 호세아 본문에서 예수님을 가리키는 어떤 단서도 발견하지 못한다. 오히려 마태복음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와 부활로 아들을 부르신 하나님 목표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룩되는 (Christotelic) 입장에서 호세아서를 되돌아본 해석의 결과였다.(15) 즉 하나님의 옛 맏아들’(4:22)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름 받은 목적, 미션얼(missional,소명적)임무를 무시하였지만, ‘새 아들인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도를 잘 이루신다고 대조시키고 있다. 여기서 성취라는 말에도 이런 면을 내포하고 있음도 감지하여야 한다.(16) N. T. Wright성취란 그냥 약속한 것을 이루는 차원을 넘어 롬 8:3-4절에서처럼 하나님 목적 및 의도를 이루는 면을 강조하는 점(17)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따라서 호세아서의 예언이 마태복음에서 시간에 맞춰 성취되었다는 사실보다도 누구는 실패자이고 누구는 성취한 분(Person)이라는 대조적인 안목으로 보아야 한다.

또 바울이 고린도후서 6:2에 이사야 49:8절을 인용한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앤즈(Peter Enns)는 말한다.(18)여기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라고 인용된 이사야 49:8절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것이다. 이것을 바울이 인용한 것은 이사야 49:8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석의 한 후에야 이 구절이 그리스도에 대해 말한다고 결론 내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보다도 그리스도 완결[] 입장에서 이사야 49:8을 새롭게 이해하고 고린도 후서 6:2에 인용하였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지를 나는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유수에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exodus: 출 바벨론) 하겠다는 하나님의 예언 사건 내용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심(exodus: 출 예루살렘)이 곧 옛 세상(죽음)을 탈출하여 새 세상(부활)로 돌아오는 대변혁(9:31)으로 표현된다. 다시 말해서 옛 이스라엘 백성은 지리적으로 먼 나라에서 돌아오는변혁을 맛본 것처럼, 고린도 (이방인)들이 흑암의 권세에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옮겨오는변혁을 맛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즉 새 이스라엘 백성이 되어야 할 지금의 때’(고후 6:2)라는 말이다.

옛 이스라엘 백성의 돌아옴과 새 이스라엘인 예수님이 죽음을 거쳐 부활로 돌아오는 대변혁을 마가복음 첫머리 기사에서도 이미 연결하고 있다. 즉 옛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를 거쳐 돌아오는 예언’(1:2-3), 세례 요한의 죄 사람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1:4)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새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 및 세례 받음(1:5)으로 이어진다. 나아가서 새 이스라엘 되신 예수님 자신이 친히 세례 받으심(1:9-10)으로 임박한 대변혁(십자가 죽음 및 부활)을 확고히 예고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스라엘 구원역사 근간적인 대변혁을 알고서 바울의 말을 이해해야 한다. 곧 기독교인의 뉘우침의 배경에는 이런 이스라엘 구원역사의 근간이 되고 대변혁을 이룬 예수님의 이야기가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고린도 사람들을 죄와 사망에서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신다는 바울의 말도 아브라함 이후의 구원역사가 새 이스라엘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대변혁으로 완결되었음을 바탕으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이와 비슷하게 라이트(N. T. Wright)죄용서는 (바벨론)포로에서 돌아오는 다른 방식이다고 말한다.(19) 설교자들은 이와 같이 옛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를 새 이스라엘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완결로 연결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기독교가 그냥 뉘우치는 일반 종교정도가 아니고, 그리스도에 연합된 신자들이 값없이 그저 받은 은혜라는 사실을 올바로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기독교의 회개는 그 사회의 도리에 어긋나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고치는차원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새 창조의 대변혁을 깨닫고 하나님의 미션얼(missional, 소명적) 임무를 친히 이루어 나아가는 것이다.

즉 이사야의 그 예언을 문법적-역사적 석의로는 도달하지 못하는 것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고 부활(출 예루살렘)하시어 하나님의 목적 및 의도를 새 이스라엘이신 그리스도께서 완결한 (Christotelic) 입장에서 바울이 외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바울은 신약에서 구약을 되돌아보는 입장에서 이사야 49:8절의 역사적인 포로귀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사역으로 만유가 변혁하면서 하나님의 목적 및 의도가 궁극적으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이사야의 예언을 단순히 그 문맥에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도입단계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단순히 이사야 49:8을 미래를 내다보는 예언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역사적으로 한 민족을 외국 포로에서 구출하는 차원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종국적이요, 단회적인 전 인류 구원 사역을 위한 슈퍼 성취(superfulfill)가 예수 그리스도로 이룩되었다고 본다.(20)

사실 하나님께서 동산을 세우고 아담 하와로 이룩하고자 한 원래의 계획을 배반한 인류구원을 위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유대인)을 택하여 소명, 성전, , 토라 등을 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기 일쑤였다. 일종의 하나님의 딜렘마인 셈이다. 그래도 하나님은 신실하시어 약속대로 자기 백성도 사랑하시고, 죄는 형벌하시는 의로우신 분임을 동시에 이루시기 위하여 스스로 사람이 되시어 오시었다. 그 분이 곧 예수그리스도였다. 즉 새 이스라엘이신 그 분의 죽음과 부활로 구원역사의 근간 및 대변혁의 이스라엘 이야기를 이룩하시었다. 옛 이스라엘이 실패한 것을 새 이스라엘인 예수님 (물론 신약교회도 포함)이 하나님의 목적 및 결말 (completion)을 달[]성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문법적-역사적 석의 후 그리스도 중심적 성경해석이 필수적이지만,(21) 종말론적이며 그리스도 완결적 성경 독법 (Christotelic reading)이 아니면 성경을 우리 신약성도가 올바로 이해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24:27,44; 5:39,46; 벧전1:10-12).

이미 앞에서 언급한대로 그리스도 완결적이란 말이 그리스도 중심적, 또는 기독론적 (christological)이란 말보다 더욱 효율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후자는 사실 묻지 마, 그리스도!’식으로 잠언이나 전도서 등 구약의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보아야하는 무리한 연결도 내포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성경의 본문을 그리스도 완결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소설의 결말을 알고 읽듯이, 그리스도가 구약 이야기의 완성()임을 알고 읽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이스라엘 백성 구원역사의 근간적 흐름과 대변혁 사건으로 이스라엘 이야기를 완료시켰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의 목표 및 그 완성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리스도 죽음과 부활로 인한 대변혁에서 하나님의 목적 달성이 발견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으로써 하나님께서 친히 그 언약의 결말을 확정하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리스도 죽음과 부활로 완성된 대변혁의 안경으로써 성경을 읽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다.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필라델피아)에서 이와 관련하여 바울신학 분야(22)에서 학위를 받은 후 아세아연합신대원 교수가 된 정성욱 박사도 비슷한 주장을 한다.

....그리스도 완결적 해석[Christotelic hermeneutics]은 바울이 종말론적 계시인 그리스도 사건의 의미를 깨닫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구약성경의 진정한 의도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완결해석은 구약전체를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로 전제하고, 그리스도 죽음과 부활이라고 하는 전체 이야기기의 완결된 관점에서부터 그 이야기의 이전 대목들을 거꾸로 재해석하는 읽기를 말한다. 이 해석 원칙은 그리스도께서 구약성경과 이스라엘 역사의 성취와 목적임을 강조함과 동시에, 옛 계시의 관점에서만 볼 때에는 그리스도 사건이 예상치 못했던 성취와 완결이라는 점을 함께 지적한다. 바울이 보이고자 했던 것은, 그것이 예상치 못했던 완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약의 모든 사건들이 그리스도라는 목적, 완결에 연결될 때에 각각의 숨겨진 의미들이 비로소 드러나게 되고, 또 구속사라는 전체 이야기도 통일성과 일관성을 확보하게 된다는 점이다. 바울의 구약사용을 이해하는 해석학적 원칙으로서 그리스도-완결적 해석이 제공하는.....토대는, 구약과 맞닿아 있지만, 엄격히 말해서 구약 밖에 있는 그리스도 사건이다.(23)

앞에서 말한 대로 옛 이스라엘 ---> 새 이스라엘(예수 그리스도) ---> 신약교회의 도식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면, 주님이 죽음 및 부활의 획기적인 중요성도 무시되기 쉽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 교회 완결적 성경이해

그리스도 완결적 성경이해는 사실상 교회 완결적(ecclesiotelic) 성경이해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말씀이 육신이 된 전무후무한 사건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육신을 입고 오신 사건이다. 하나님은 창조 목적과 언약에 신실하심으로 배교하여 실패한 이스라엘 대신에 새 이스라엘로 때가 되어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보내시어, 그의 죽음과 부활의 십자가 사역으로 하나님의 목적 및 의도를 완결하시었다(8:3,4; 10:4).

주님은 지상 사역 시에 12 제자, 70인 제자, 120 문도로 교회를 이루어나가게 하시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20:21)고 하신대로 제자들도 하나님의 목적을 완결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 위임명령(The Great Commission)도 주시었다(28:19-20).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승천에 따른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새롭게 재창조된 하나님의 백성 즉 교회적 차원 (ecclesiological dimension)으로 연결된다. 사실 앤즈는 그리스도 완결(Christotelic)이란 말이 듀크 대학교의 교수인 헤이즈( Richard Hays)가 바울의 해석을 교회적 완결(ecclesiotelic)이란 말로 표현하여, 바울이 하나님의 구속사역이 새로운 백성 (교회) 형성을 지향 한다(24)는 주장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25)그러면서 사도들의 구약 사용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Person)에만이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body)된 교회를 이루는 그의 백성에게도 집중한다고 강조한다.(26) 이리하여 그는 교회란 아브라함의 자손들 (seed)인데, 곧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복수: 3:29)인 새 이스라엘이지만 네 자손이란 단수로 표현함으로 그리스도 한 분 (σπερματι αυτου 3:16)으로 규정하는 것을 실례로 삼았다.

사실 창세기 12:6에 말한 하나님의 목표 및 완결(결말: τλος)이 바울서신 교회에서 비로소 실현된다. 창세기 12:6의 교회적 완성 차원 (ecclesiotelic dimension) 그리스도 완결의 출발점(Christotelic starting point)의 연[]장으로 보았다.(27)

시편 69:9절을 인용한 로마서 15:3-4 절도 이 점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바울은 여기서 교회를 교훈하도록 기록된’(the ecclesiotelic dimension) 방식도 역시 그리스도 완결 충만(Christotelic fullness) 안에서 시편 69:9절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먼저 보았다. 즉 그 말씀도 우리를 교훈하기 위하여 기록 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 텍스트는 교회가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15:4)을 가지는 삶을 살도록 먼저 역사하신 분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구약의 사건이나 기록의 목표를 오직 먼저 그리스도께서 완결하셨기에 교회에서도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앤즈(Peter Enns)는 그리스도 자신(Person)과 그 몸인 교회와의 관계를 강조하면서도 그 순서는 그리스도 완결이 먼저이고 그 다음이 교회적 완결 차원임을 분명히 하였다.(28) 그리스도를 가볍게 다룰 수 없는 이유가 여기 또 있다.

필자는 이미 다른 글에서 그리스도는 온 교회적인 분 (whole church Person)이요, 만유적인 분(panta Person)이라 규정함으로 그리스도 완결이란 용어 자체에 그리스도와 교회의 밀접한 관계를 설정한 셈이었다.(29) 그래서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union with Christ)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자신(Person)이 곧 하나님 백성들의 연합된 몸 (body)인 교회라고 그 관계를 밝혔다. 즉 구약은 많은 사람 (many)이 한 분(One)으로 줄어지고, 신약은 한 분(One, 2:15)이 많은 사람(many)으로 늘어나며 아직도 태어나지 않은 하나님의 백성도 그리고 하늘의 예루살렘 교회(12:22)도 포함되어, ‘인자로 오신 그리스도 한 분이 사실상 보이지 않는 교회’(invisible church)를 나타낸다고 하였다.(30)

그리고 그리스도 완결(Christotelic)이란 용어 사용으로 언약 및 구속사적 이해에다 현실감을 더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아담 언약 --->노아 언약 -==>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 -==> 다윗 언약 -==>회복 언약 -==> 새 언약으로 구속역사가 진행하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신학계 주류가 그리스도를 시간적으로 1 세기에 한정하고, 공간적으로 팔레스타인에 한정하여 이해하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또 사람들이 구속 역사적 흐름을 지나치게 시대별로 (chronologically)만 이해하기 때문에, 그냥 그리스도 중심 설교(Christocentric preaching)라고 하면서도 사실상 그 그리스도를 2천년 전의 인물로 한정하여 이해한다. 이것은 창조주 그리스도를 그 분이 만드신 시간과 공간으로 제한시키는 오류임이 명백하다.

이렇게 이해하면 사실 주님 죽음과 부활을 사실상 무시하게 되는 큰 문제로 이어진다. 주님 죽음 및 부활을 한갓 2천 년 전의 사건으로만 도외시하면, 오늘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 크리스천들 각자와 그 분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 연결고리를 분명하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무시하고 바로 옛 이스라엘에서 교회로 대체하여 새 이스라엘의 자리를 차지한다. 이러한 예수님을 제외하고 바로 교회를 새 이스라엘로 넘어가는 것을 대체주의 (supersession)로 이는 잘못된 것임을 N. T. Wright도 지적하였다.(31)

필자가 보기에는 성경을 윤리 도덕적으로 해석하고 설교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옛 이스라엘 백성에서, 예수님을 생략하고, 곧 바로 신약교회 성도를 새 이스라엘로 여기는 도식적 이해라고 생각한다. 이미 언급한 것을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세워서, 또 아브라함과 사라의 후손으로 이스라엘을 언약의 백성으로 삼고 창조의 목적 및 의도를 이루려하시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고 자기들의 욕구를 추구하다가 결국 바벨론 포로라는 징벌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심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참 성전으로 새 이스라엘로 보내시어 그 목적인 미션얼(missional,소명적)임무를 다 이루시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인한 대변혁으로, 곧 예상 밖의 묵시적 사건으로, 하나님의 미션얼(missional,소명적)임무와 이스라엘 역사를 완결하게 하시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도외시하면, 온 교회적인 분이요 만유적인 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한 대변혁을 무시하고, 주님 스스로 하나님 나라 (autobasileia)인 점을 제외하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 그리하여 참 성전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생략하여 신약교회로 하여금 윤리 도덕적 공동체로 전락하게 된다. 즉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성취하는 미션얼(missional,소명적)임무를 쉽게 잊어버리게 한다. 그러므로 참 성전이신 그리스도 완결 (Christotelic)이란 용어를 확장하여 교회 완결적 (ecclesiotelic) 공동체를 부각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로 변혁된 하나님 나라에서 재창조 된 새 사람의 입장에서 우리 자신 (교회)을 파악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 곁들여 기억할 것은 이 하나님 나라는 죽은 다음에 오는 것이라기보다 이미 이 세상에 와 있다는 점,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이 공존하는 점을 교인들에게 각인시켜야 할 것이다. 물론 주님이 재림하시면 이 세상은 새 세상(하늘과 새 땅)으로 새롭게 변화할 것이다(벧후 3:11-13).

이 용어는 출애굽 주제(Exodus Motif)(32)로 그리스도의 자신과 몸 된 교회 차원의 구속역사도 매우 구체적으로 이해하도록 해 준다. 말하자면 그리스도 완결이란 말이 곧 교회 완결적으로 이어져 그리스도와 성도를 통합적으로 드러낸다. 구속역사 및 종말의 맥락에서 출애굽 주제는 아브라함의 출 하란 -==> 이삭의 출 블레셋 -==> 야곱의 출 메소포타미아 -==> 이스라엘의 출 애굽 -==> 이스라엘의 출 블레셋 -==> 이스라엘의 출 바벨론으로 이어진다. 이는 (어린) 예수님의 출애굽(2:15) -==> 예수님의 출 예루살렘 (십자가 사건:9:31) -==> 우리 (신약 교회)의 출 죄악 = 우리의 출 사망 = 우리의 출 사탄 = 출 어두움 = 출 세상 형식으로 묶어서 그리스도 예수님과 우리 성도를 연합시키는 재창조의 천국 도래로 이해된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단지 2 천 년 전의 사건이 아니라, 아담과 아브라함을 비롯한 구약 성도의 구원이면서, 동시에 우리 뿐 아니라 앞으로 태어날 주님의 백성들의 구속 사건도 되는 것이다. 이러한 주님의 몸 된 교회에 속한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이미 받았고, 지금 구원을 받고 있고, 장차 구원받을 것이다.’라고 3 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 사실 시간과 시대를 초월하는 그리스도 자신(Person)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말론적 표현을 포괄적으로 잘 나타내는 말이 그리스도 완결 (Christotelic)이란 용어이다. 또 그리스도가 오심이 세상 끝 (9:26)으로 이 세상’ (this Age)이 마감되고 오는 세상’(Age to come)이 들어와 송구영신(送舊迎新)이 이루어진 셈이다. 실제로 우리 성도는 이미 하늘에 앉힌 자요, 새 예루살렘에 이미 들어와 있음(12:22)도 그리스도 완결 (Christotelic)이란 용어의 관점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구원역사 및 언약을 따라 성경을 이미 이해하면서도 그리스도 죽으심과 부활로 전무후무한 변혁된 관점을 내포하는 적절한 용어가 부족하였던 터에 앤즈(Peter Enns)와 그 동료들이 귀한 공헌을 한 셈이다. 또 역사적 접근 특히 유대주의 속의 예수님 연구에 많은 공헌을 한 라이트(N. T Wright)가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우리 성도[교회]와의 구원 역사적 관계를 더욱 확연하게 해주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이 단순한 윤리 도덕이 아니라, 종말에 처한 교회의 생명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에 근거함을 보여준다.(33) 이와 같은 유대주의의 역사적 맥락에 근거한 예수님 연구서들이 평소에 성경을 구속 및 언약사적으로 이해하려는 우리의 노력을 더욱 구체화하였음을 증명하고 재확인해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최근 복음주의 학자들이 유대주의의 문화적 맥락 즉 제2 성전 문서와 신약 저자의 해석방법에서 그리스도 완결 성경이해를 하는 것과 상통한다.

 

. 결론

그리스도 완결적 성경 이해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한 이스라엘 구속 역사와 하나님의 목적 즉 미션얼(missional,소명적)임무가 완결되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 배교와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신실하시어 예수 그리스도로 도성인신(道成人身)하시어 그 창조목적 및 의도를 다 이루시었다.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도록 명령하셨다. 교회는 이 사명에 충실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다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Person)인지를 바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보아야 한다. 옛 이스라엘은 불순종하되, 예수님은 새 이스라엘로서 하나님의 목적 및 의도를 다 이룩하시었다. 또 제자들로 시작하여 몸 된 교회를 하나님의 목적 즉 미션얼(missional,소명적)임무를 이루는 공동체로 세우셨다. 그러므로 이러한 미션얼 임무 수행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이룩하기 위하여서 그리스도 완결적 및 교회 완결적 성경이해가 필수적이다. 그리하여 올바른 교회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미션얼 임무를 바로 이해시키기 위하여 설교자는 성경전체의 큰 그림을 구속 역사적으로 자주 요약 설명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천국(autobasileia)이요 온 교회적분이시며 만유적인 분임을 가르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신약교회는 이미(already) 도래한 천국이요 하나님의 목적 즉 미션얼(missional,소명적)임무 실현의 공동체임을 인식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한 대변혁으로 자신이 하늘에 앉은 주인, 왕으로서 천국건설을 위한 사명에 충실하도록 설교하여야 할 것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미션얼 임무를 설교함으로 교회는 이를 구현하는 교회 완결적 공동체요, 미션얼(missional,소명적)임무 수행 공동체가 형성되도록 교인들을 가르쳐야 한다. 기독교는 자기 스스로 깨달아 뉘우치는 일반종교와 다르다. 이미 2 천 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대변혁으로 각 교인 자신도 변혁된 것을 발견하고 교회 생활하는 기독교임을 올바로 알려주는 설교자요, 교역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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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John M. Frame, Systematic Theology: An Introduction to Christian Belief, (Phillipsburg <NJ>: P&R Publishing, 2013) 1017-1072 

(2) ibid.,1032-1046

(3) 필자는 이 말을 미션얼(missional, 소명적)’이라 번역한다. 이렇게 번역함으로 이 말이 선교학, 선교사라는 표현에서 쓰는 선교와 구분되고, 문화적 사명(mandate)과도 다르고, 구원의 서정 중의 하나인 부르심(소명)’과도 구분된,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론을 구현하는 새 개념임을 드러내고자 한다.

(4) 황 창기, 예수님, 교회 그리고 나(서울: 성광문화사, 2005), 270-279 [초판(1998)에는 없음]의 내용을 일부 수정 보완하였음; 황 창기, 예수님, 만유 그리고 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비춰본 그리스도 완결적 해석 및 설교, 서울: 생명의 양식, 2010; 이 두 책은 앞부분의 해석 및 설교가 가능한 지를, 뒷부분에는 그 이론의 기초논문을 실은 것이 특징이다. 독자들을 위한 일종의 귀납법적 편집이라 하겠다.

(5) 정 성국, “바울의 선교적 구약 사용” (63회 신학포럼, 2013), 7 n.15 [학위논문, Paul’s Missional Use of Scripture: A Redefined Approach with Special Reference to 2Cor 3, (Unpublished Ph.D. Dissertation, Philadelphia: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2010,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논문에서, ‘그리스도 완결적이라고 최초로 번역한 사람은 황 창기 교수라고 밝히고 있다.]. 정 성국교수가 이 논문제목에 쓴 선교적이란 말도 필자는 미션얼(missional, 소명적)’으로 이해한다.

(6) Peter Enns, "Apostolic Hermeneutics and an Evangelical Doctrine of Scripture: Moving beyond a Modernist Impasse"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65 (2003):263-87; 특히 275 페이지 이하 참조.

(7) 이 분야에 좋은 안내서가 최근에 나왔다. 송 영목, 신약과 구약의 대화: 구약이 녹아있는 신약의 대화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0; 또 그 동안 국제적으로 논문을 발표해 온 송 교수는 주다해[AD]2014년 여름에도 오스트리아 빈에서 개최 된 SBL 학회에서 계시록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8) idney Greidanus, "Preaching Christ", Calvin Theological Seminary Forum, vol.10.No.2 (2003), pp.3-5; ----,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A Contemporary Hermeneutical Method, (Grand Rapids: Wm. B. Eerdmans Publishing Co.1999),10; Sidney Greidanus Christocentric Preaching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is to preach sermons which authentically integrate the message of the text with the climax of God's revelation in the person, work, and /or teaching of Christ as revealed in the New Testament.

(9) 이 분야의 작은 책자로는 Leon Morris, Apocalyptic, (Wm. B. Eerdmans Pub.Co. 1972)를 참고하라. 저자는 묵시의 특징으로는 계시, 상징주의, 염세주의, 기초가 흔들림, 하나님의 승리, 결정주의, 이원론, 가명, 문학형식, 다시 쓴 역사, 윤리적 교훈, 예언, 역사관을 열거한다.

(10) N.T. Wright, The Letter to the Romans (The New Interpreter’s Bible, X: Abingdon Press, 2002), 401

(11) 아시아 연합신학대학원 대학교 신약교수 인 이강택 교수는 그의 학위논문에서 이 구원역사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일어난 이스라엘의 근간 및 변혁된 이야기” (the dominant and renewed story of Israel in the death and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또는 이와 비슷한 표현을 자주 쓰고 있다. 참조 : Kangtaek Peter Lee, “Matthew’s Vision of the Old and New in Jesus : Social World of the Matthean Community vis-a-vis Matthew’s Understanding of Torah,” Unpublished Ph.D dissertation, (Philadelphia: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2011), 9-10, n.25, 11, 160, 173.

(12) 그리스도 완결적이란 용어는 그리스도적 [Christological] 또는 그리스도 중심적’ [Christocentric]이란 말보다 더 정확한 말이다. 이유는 구약이 드러내는 그리스도 증거에 대하여 이 말이 신약성도들의 성경 이해를 더 잘 전달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리스도 중심 해석이란 말은 거의 모든 구약 페이지에서 그리스도를 찾아내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주는 인상이 짙다고 하겠다. 심지어 잠언이나 전도서에서도 그리스도를 찾아내어야 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 중심은 구약의 이야기와 인물을 지나치게 그리스도께로 가져가는 약점도 있다. 즉 아브라함, 요셉, 모세, 다윗이 무조건 그리스도로 둔갑하는 모형론이 근거한 성경 이해 일변도의 폐단도 있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반면에 그리스도 완결 해석은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구약 기사가 지향하는 목표’, 또는 완성()’ 이라는 사실을 신약해석자들이 이미 알고서 구약을 읽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대 변혁 사건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사역-죽으심, 부활하심, 승천하심-이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절정 [climax]일 뿐만 아니라 만물을 충만케 하는 완결또는 완성임을 고려하지 않는 성경해석은 올바른 이해에 도달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올바른 성경해석은 그리스도 완결 해석[Christotelic interpretation]에서 비롯된다는 말이다.

(13) 마 2:15 “....을 이루려함이니라를 나타내는 (πληρow, fulfil)는 마3:15, 5:17에 쓰인 대로 미래에 대한 예언을 적중시킨다는 뜻보다도 예수님이 구약의 진정한 목표 즉 미션얼(missional, 소명적)임무인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신다는 뜻이다. 즉 로마서 10:4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 (Christ is the end of the law)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Dan McCarthney and Peter Enns, "Matthew and Hosea: A Response to John Sailhamer",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63 (2001), 103-04

(14) Dan McCarthney and Peter Enns, "Matthew and Hosea‘. 97-105 참조; 여기서 그들은 신약저자들이 제 2성전 유대주의에 비롯된 성경해석 환경을 무시하면 안 된다고 한다.(99). 그리고 장소-이름 상징성 (place-name symbolism)을 강조하는데 그 일례로 호세아 선지자는 애굽은 당시 앗수르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고 한다.(102)

(15) Peter Enns, “Apostolic Hermeneutics.”276. 사실 Peter Enns는 신약 사도들이 구약을 인용하면서 구약에는 없는 내용을 신약에 활용한 여러 가지 예를 들면서, 사도들이 당시 제 2성전 문서의 해석방법과 해석 전통을 따르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266-75) 

(16) Peter Enns, Inspiration and Incarnation, 161-62

(17) N. T. Wright, “A Missional Reading of the New Testament”(November 20-21, 2013), http://calvinseminary.edu

(18) Peter Enns, “Apostolic Hermeneutics...”, 276 

(19) N.T. Wright, Jesus and the Victory of God,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6), 268

(20) Peter Enns, Inspiration and Incarnation, 136

(21) 사실 문법적-역사적 석의를 이용하여 원래의 문자적 의미 (original sensus literalis)만을 강조함으로, 사실상 현대판 합리주의의 도구로 전락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복음주의 해석 중에는 문법적- 역사적 석의에 무조건 그리스도를 갖다 붙여 억지 해석을 하여 그리스도 중심해석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문법적-역사적 석의를 한 후에 종말이 그리스도 안에 도래하였으며, 해석자 자신도 성령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목표를 이루는 수행자(agent), 청지기로서 구속사에 따른 그리스도 완결 해석을 해야 할 것이다.

(22) 구약내용을 바울이 그 시대 제2 성전기의 해석방법과 전통에 비추어 이해한 사도적 해석을 그 당시 청중에게 호소할 수 있는 그리스-로마 세계의 논리와 결부하여 이방인들에게 복음으로 전달되었는지도 살피는 데 학자들은 관심을 가졌다. [아래 정성욱 학위논문 참조].

(23) 정성욱, (2013년 제 63차 신학포럼) “바울의 선교적 구약사용”(63차 신학포럼, 2013). 7.

(24) Richard B, Hays "On the Rebound: A Response to Critiques of Echoes of Scripture of the Letters of Paul," in Paul and the Scriptures of Israel [ed. Craig A. Evans and James A. Sanders: JSNTSup 83; Sheffield: JSOT Press, 1993],77-78

(25) Peter Enns, “Apostolic Hermeneutics” 277 n.33

(26) Peter Enns, “Apostolic Hermeneutics” 277 n.33

(27) ibid.

(28) ibid. 278

(29) 황창기, 예수님, 교회, 그리고 나 (서울: 성광문화사, 1988) 268-277 ; 황창기,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이해(서울: 이레서원 2000) 21-51

(30) 그리고 구약 교회를 Many in One; 신약교회를 One in Many으로 요약적으로 표현하면서, 위에 열거한 필자의 논문 여러 곳에 언급하였지만 이것을 도식적으로 이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구속사는 직선적으로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나선형으로 전진하기 때문이다.

(31) “A Missional Reading of the New Testament”(November 20-21, 2013), 

        ttp://calvinseminary.edu

(32) Richard D. Patterson and Michael Travers, "Contours of the Exodus Motif in Jesus' Earthly Ministry",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66 (2004) 25-27

(33) N. T. Wright, Jesus and the Victory of God,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6), p.268 ; --- The Challenge of Jesus: Rediscovering Who Jesus Was and Is, (Downers Grove, Inter Varsity Press, 1999),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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