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라는 소설에 보면 <대심문관>(the Grand Inquisitor)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는16세기 스페인의 세비야를 배경으로 합니다. 스페인은 당시 인근에서 제일 부유한 나라였지만 무서운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가톨릭 추기경이 대심문관이 되어 유대인을 포함한 무수한 사람을 이단으로 몰아 죽였는데, <대심문관> 이야기도 이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종교재판 끝에 화형에 처해진 어느 여름밤이 지나고 이튿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1,500년 만에 말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금방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대심문관이었던 추기경은 예수님을 체포해서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날 밤에 대심문관은 아무도 모르게 예수님을 찾아와서 마치 이교도를 대하듯 예수님을 심문합니다. “당신은 어째서 우리를 방해하러 온 거요?” 대심문관이 던진 첫마디입니다. 그의 심문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교회가 세상 사람들을 사로잡으려면 예수, 당신 방식으로는 절대로 안 된다. 세상 사람들은 특별히 세 가지를 원하는데 그것은 기적과 신비와 권위다. 먼저 교회는 사람들에게 기적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 기적이라는 게 뭔가? 돌이 변하여 떡이 되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교회에 묶어두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현세적 이익을 제공해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들은 절대로 교회나 당신을 따라오지 않을 것이다. 다음으로 신비가 필요하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의 올바른 삶보다는 내세의 존재를 확신시켜야 한다. 이들이 내세를 믿지 않으면 결코 교회에 오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권위가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벌을 내리는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러한 권위가 없으면 사람들은 따라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렇게 이단을 처형하고 잡아 가두고 하는 것 아닌가!”
대심문관의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예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 가르친 복음 그 자체만으로는 결코 교회를 유지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로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예수식으로 하지 않고 대중이 좋아하는 방식을 따라야 한다는 말이죠. 소설에서 대심문관은 예수에게 다음과 같은 말도 합니다.
“당신은 마귀가 유혹했을 그때 왜 돌을 떡으로 만들지 않았나? 그때 떡을 만들어줬으면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중은 등 따습고 배부르면, 그것으로 만족하는데 왜 거기다 대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라고 했는가? 이 불쌍한 사람들에게 빵을 주었더라면 혁명도 안 일어나고, 도둑질도 없고, 굶어죽은 자식 앞에서 통곡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 때 마귀가 시키는 대로 했으면 기독교는 지금 대단했을 것이다.”
대심문관의 말은 얼핏 휴머니즘으로 들립니다. 빵 때문에 죄를 짓고 빵 때문에 슬퍼하는 자가 너무나도 많은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교회가 하나님 말씀보다는 빵을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빵이야말로 사람들이 믿고 따를만한 참된 기적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지난 1,500년 동안 ‘대심문관’으로 상징되는 교회가 빵이라는 기적을 베풀기 위해서 이렇게 노력해 왔는데 갑자기 예수가 나타나서 그 빵이 사실은 ‘돌’에 불과하며, 참된 빵, 생명의 빵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다시 가르치기 시작하니 대심문관은 어쩔 수 없이 예수를 감옥에 가둘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왜요?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끔찍한 교회의 역설입니다.
그리고 또 500년이 지나갔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교회는 어떤 모습입니까? 예수님이 어느날 우리에게 찾아오신다면 어떻게 반응할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대심문관> 이야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