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오전 7시 신반포교회(김성봉 목사)당에서는 제46회 샬롬나비토마토시민강좌가 한국교회 성도로서 이 땅에 더불어 살아가는 자세라는 주제로 열려 강영안 교수(서강대 철학과)성도와 인문교양이라는 제목으로 한 시간 강의했다.

이날 강교수는 인문학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는가에 대해, 그리고 인문학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그리고 인문학이 삶을 변화시키는가? 마지막으로 성도는 인문학으로 어떤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강의하였다. 

▲ 강의하는 강영안 교수 고려신학대학(고신대 전신) 신학과에서 1971년부터 1973년까지 공부하다가 한국외국어대학교로 옮겨 네덜란드어와 철학을 공부하였다. 1978년 벨기에 정부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벨기에로 건너가 루뱅대학에서 철학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1981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 박사 과정에 들어가 1985년 칸트 철학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네덜란드 레이든 국립대학 철학과 전임 강사로 1년간 형이상학과 인식론 강의를 했으며 귀국한 뒤 계명대 철학과에서 4년간 가르쳤다. 1990년부터 지금까지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그간 루뱅대 초빙교수, 미국 칼빈 칼리지 초빙교수로 동서양철학을 가르쳤다. 기독교학문연구회 회장,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공동대표, 한국칸트학회 회장, 대한철학회 회장, 한국철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기독교철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고신측 주님의 보배 교회 장로로 섬기고 있다. 『주체는 죽었는가: 현대철학의 포스트모던 경향』(문예출판사, 1996)에서부터 『철학은 어디에 있는가』(한길사, 2012), 『어떻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인가?』(한길사, 2012)에 이르기까지 단행본 저서 15권, 번역서 3권, 공동저서 33권, 개인 단독 논문 110 여편이 있다.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인문(人文)에 반대되는 말이 있다 천문(天文)이다. 천문은 천문지리(天文地理)인데 거기 은 무늬이고 는 결을 말한다. 옥을 쪼개려면 결을 따라 쪼개는데 결을 따라가는 것이 이치를 찾아나가는 과정이다. 그것은 근본적인 사물의 구조이다. 존재하는 세계 속의 내재해 있는 합리성을 찾아내는 것이다.

인문은 사람이 만들어낸 무늬, 즉 표현과 형태이다. 인문학은 그것을 연구하고 바라보고 해석하고 나의 인간성을 빚어나가는 것이다.

인문주의 혹은 인간주의를 휴머니즘이라고 한다. 다른 말로 인간다움이다. 휴머니즘은 아무래도 그 뜻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근대 휴머니즘은 여러 형태로 발전되었다. 1)르네상스 휴머니즘, 2)계몽주의 휴머니즘, 3)마르크스적 휴머니즘, 4)실존주의적 휴머니즘, 5)기독교적 휴머니즘, 6)세속적 휴머니즘이 있다. 어떤 것이든 인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모두 휴머니즘이라 할 수 있기에 그 외연이 넓다고 할 것이다.

기독교적 휴머니즘은 하나님의 존재와 전통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에게 인격적,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는가 하면 세속적 휴머니즘은 이성의 자율성과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신념을 가지면서도 신에 대한 신앙은 부정한다. 인문학의 위기는 이런 애매성에 있다.

▲ 샬롬나비 토마토시민강좌가 진행되고 있다.

르네상스 휴머니즘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는 1336년 방투산을 등정했다. 그는 아름다운 산야의 자연풍광을 구경하다가 배낭에 넣어온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꺼내 그냥 펼쳐 든 곳이 10권이었다. 거기에 사람들이 산과 들, 자연의 아름다움에 경탄 하면서 자기 속에 있는 영혼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비탄을 읽는다. 여기서 자연에 대한 연구보다는 인간의 내면, 영혼에 대한 관심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르네상스 인문학의 출발이요 특징이다. 그리고 문헌연구(고전), 교육의 중요성을 연구하게 되는 것이 르네상스 인문학이다.

 

인문학을 왜 하는가?

사람들은 인포메이션(정보, information)에서 그치고 트랜스포메이션(변화, transformation)을 하지 않는다. 정보를 아무리 많이 가져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인문학은 바로 우리 인간에 대한 문제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왜 사는지? 자연은 우리에게 무엇인지, 이웃은 내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보고 느끼는 학문이다. 이 학문을 하기 위해 읽고, 말하고, 생각하고, 파악하고 글을 쓰는 과목을 해야 한다. 거기에 언어학, 문리학, 철학, 문학이 있다. 그 모든 것은 결국 트렌스포메이션을 하기 위한 것이다.

 

인문학은 삶을 변화시키는가?

자건거를 배운다. 뒷바퀴가 체인에 연결되어 있어서 체인을 돌리면 자전거가 앞으로 나가고 핸들을 조작하면 의도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어 있다. 이런 지식을 아무리 상세하게 가진다 하더라도 자전거에 올라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자전거는 머릿속에만 있을 뿐이지 나를 유익하게 하지 못한다. 자건거를 잘 탈 수 있는 능력을 가지면 자전거는 쉽다. 양손을 놓고도 여유롭게 달릴 수 있다.

신앙 역시 마찬가지다. 아무리 머릿속으로 많은 지식을 채운다 하더라도 실천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실천해 보면 그것이 자신을 즐겁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다. 인문학은 인간의 학문이고 인간의 변화를 연구하는 학문이기에 사람의 바른 삶의 이치를 깨닫게 하기에 사람을 변화 시킬 수 있는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이 기독교와 결합되어 기독교인문학이 되면 금상첨화이다.

 

성도는 어떻게 인문학을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먼저 나를 바로 알아야 한다. 나의 한계, 능력을 바르게 발견하여야 한다. 인문학은 자신을 알게 할뿐 아니라 남을 바로 볼 수 있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는 인문학을 해야 한다. 그 마음은 비움의 마음이고 낮아짐의 마음이다. 그것은 십자가의 인문학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낮아지고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나고 함께 영광을 얻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생명이다. 각자의 생명이 받은 달란트를 충분히 드러낼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이 풍성하게 넘쳐서 평화를 이루는 것이 기독 인문학이라 할 것이다.

▲ 단체사진

기자와의 인터뷰

강영안 교수는 강의를 마치고 기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3시간을 해야 제대로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을 30분에 이야기 하라고 하니 못한 이야기가 많아 너무 아쉽다는 말로 화두를 삼았다.

옛날 71학번으로 고신대에 입학했을 때 본과 학생들까지 7학년이 한 울타리 안에서 신학대학원과 대학이 구분이 없는 커뮤니케이션을 가진 것, 교수들도 대학과 대학원이 하나 되어 있었고 구분 없이 가르치고 아름다운 소통의 세계를 가진 것이 참 이상적이었다는 회고를 하면서 다시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대학의 신학과와 신대원이 한 울타리 안에서 지내며 대학에서는 폭 넓은 인문학을 가르쳐 학생들의 학문의 안목을 넓히고 그리고 신학의 기초를 닦은 다음 신학대학원으로 연결된다면 참 이상적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인문학적으로 대두되고 있는 평등법에 관한 명쾌한 해석을 피력했다. 오랜 세월을 거쳐 남녀평등이 이뤄지고(그래도 아직은 완전하지 못하지만) 인종간의 평등, 고용 평등, 장애인의 평등, 교육의 평등 등의 평등법이 제정되고 있다.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성적지향이다. 사람이 차별을 받지 않을 권리 중에 취향이 있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에 대한 것은 그 사람의 취향이다. 그것을 강제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인권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성적인 것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그것을 도덕적인 것으로 보아 죄악시 하였고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금지시킨 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적 인문학이 더욱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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