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슬란이 그려낸 역사적 예수 전기란 빈농 출신의 정치 혁명가 일대기

이슬람 교도 레자 아슬란의 예수론 비판

 

I. 방법론적 오류: 신앙의 그리스도와 역사적 예수의 분리

머리말

▲ 김영한 박사 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대표 숭실대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올해 2014년에 들어와 정치 혁명가로서의 나사렛 예수 전기(傳記)가 논픽션 형식으로 출판되어 화제가 되었다. 미국 아마존, 뉴욕타임스 1위를 휩쓸고 영국, 중국, 독일 등 25개국 이상에 수출된 화제작으로 소개되고 있다. 다시 유대 독립운동가, 사회 혁명가로서의 나사렛 예수에 대한 논란을 일으켰다.

화제의 책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 리버사이드대 교수 레자 아슬란(Reza Aslan)이 저술한 젤롯(Zealot)(Reza Aslan, Zealot: The Life and Times of Jesus. Thorndike Press, 2014, 민경식 역, 젤롯, 서울: 와이즈베리, 2014.)이다. 그는 이 저서에서 예수를 로마 체제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혁명가로 그리고 있다. 이란 출신의 이슬람교도가 나사렛 예수에 관해 연구한 작품을 발표했다는 데에 대하여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 미디어인 폭스 TV가 저자 아슬란을 불러놓고 왜 이슬람교도가 예수에 대해서 썼느냐고 저자에 대한 공격적인 인터뷰는 오히려 반이슬람 감정에 대한 반성과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논쟁의 기회를 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책은 베스트셀러 톱에 랭크되었다.

아슬란이 그려낸 역사적 예수 전기란 빈농 출신의 정치 혁명가 일대기

아슬란은 예수의 진정한 모습을 추적하기 위해 20년간 학문적으로 연구하면서 주요 복음서를 분석하고, 당시 로마 문헌에도 널리 알려진 유대인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를 중심으로 타키투스, 요르게네스 등이 집필한 고대 문헌들 및 존 P. 마이어, 리처드 A. 호슬리, 존 핸슨, 마틴 헹엘 등 저명한 학자들의 수백 건에 달하는 저작들을 근거로 예수가 그 당시 사회에 널리 퍼졌던 젤롯의 신념을 간직한 정치적 혁명가라고 주장한다.

아슬란에 의하면 이 책은 20년 이상의 역사적 고증을 통해 완성한 예수의 전기로 교회의 틀에 갇혀 신적인 존재로서만 알려진 예수 그리스도를 벗어나 유대의 독립과 민중을 위해 싸운 혁명가 나사렛 예수로서의 면모를 제시하고 있는 논픽션(non-fiction)이다. 그는 이란 출신으로 미국에 이주해서 살면서 한 때 복음주의 기독교인이었다가 다시 자기 민족의 이슬람교로 되돌아왔다고 한다. 아슬란은 이미 1960년대 기독교 신학에서 해방신학자들이 그려놓은 예수상을 종교사회학적 맥락에서 나사렛 예수를 로마 시대의 아들로서 정치적 혁명가 모습으로 다시 그려내고 있다. 그에 의하면 예수가 대외적으로는 로마의 제국주의와 맞서 싸운 빈농(貧農)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며 내부적으로는 친()로마 보수주의자들과 싸운 사회 혁명가라는 것이다.

대학에서 종교학 외에도 문예창작을 가르치는 탁월한 스토리텔링 기법을 활용하여 아슬란은 전통교회가 복음서에 입각하여 믿고 신앙고백한 신약 복음서의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논픽션적 혁명가상()으로 왜곡하고 있다. 아슬란은 대제사장의 살인으로 시작되는 1장의 첫 구절이라든지 예수의 자취를 더듬어가는 주요 에피소드에서는 종종 소설적인 기법을 끌어와 몰입도를 높인다. “자객은 군중 틈을 비집고 들어가 대제사장 요나단에게 바싹 다가갔다. 몰래 손을 내밀어 대제사장의 성스러운 예복을 움켜쥐고는, 그를 휙 잡아채 성전 경비병에게서 떼어놓았다. 그러고는 그를 꼼짝달싹 못하게 꽉 붙잡고, 순식간에 단검을 빼 그의 목을 그었다. 또 다른 종류의 희생 제의인 셈이다. 대제사장의 피가 성전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대제사장이 주저앉는 것을 경비병들이 느끼기도 전에,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누군가가 눈치 채기도 전에, 자객은 군중 사이로 유유히 사라졌다. 이 자객이 살인이다!‘라는 말을 가장 먼저 외쳤다 하더라도 이상할 게 전혀 없었다.”(Reza Aslan, Zealot. 민경식 옮김, 젤롯, 1부 프롤로그 중에서). 카리스마 있는 리더로서의 예수는 물론, 단도를 들고 다니며 폭력적인 혁명 활동을 벌인 시카리(sicari, 단도단)와 같은 독특한 집단이나 가야바, 안나와 같은 비열한 대제사장들의 캐릭터가 실감나게 그려져 마치 역사 소설을 읽는 듯하다. 이렇게 20년간 탐구를 통해서 복원한 혁명가로서의 예수의 모습은 마태복음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10:34)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고 본다.

아슬란은 나사렛 예수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확증할 수 있는 두가지 사실에서 출발한다. 하나는 유대 민중 운동을 일으킨 열심을 품은 예수요 다른 하나는 그가 십자가에 처형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을 유대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유대고대사(Antiquities) 등 역사실증학의 자료들과 결합시킨다면 정치 혁명가 예수상을 복원할 수 있다고 본다. “결국 나사렛 예수에 대한 보도 가운데 확실하게 신뢰할 수 있는 실증적 역사적 사건은 두가지 뿐이다. 첫째는 예수가 기원후 1세기 전반에 팔레스탄에서 유대 민중운동을 일으킨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두가지 사실만으로는 2천년 전에 살았던 인물의 생애를 완벽하게 재현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두가지 사실을 예수가 살던 격동시대에 대한 우리의 모든 지식과 결합한다면(로마인들 덕택에 유리는 실제로 잉대한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이는 복음서의 보도에 따른 예수의 초상보다 역사적으로 훨씬 더 정확한 나사렛 예수의 초상을 그리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실재로 이러한 역사적 재구성을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낸 예수(그 시대 모든 유대인들이 그러했듯이 1세기 팔레스타인의 종교적 정치적 혼란에 휩싸인 열광적인 혁명가들로서의 예수)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만들어낸 순한 목자의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Reza Aslan, Zealot. 민경식 옮김, 젤롯, 26-27.)

아슬란은 인터넷 서점 아마존과의 인터뷰에서 다음 같이 말한다: “나는 이 책이 예수가 살았던 세계의 완전한 감각을 제공하길 바란다. 그 시대의 종교 역사적 문맥을 떼어 놓고는 예수의 말씀을 진실로 이해할 수 없다. 당신이 예수를 선지자, 스승, 신의 대리자로 생각하는 것과 별개로 그가 진공 속에서 살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는 어쨌든 의문의 여지없이 그 시대의 사람이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이것이 진실이다. 예수가 누구였는지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이해 하에 두는 것이 열쇠다. 이 책은 그것을 담았다. 당신을 예수의 세계 한 가운데 떨어뜨리고 설교에서 벗어나 그 문맥을 이해하는 것을 도울 것이다.”(아슬란의 인터넷 서점 아마존인터뷰 중에서, 2014.)

필자는 아슬란의 역사적 예수 전기(傳記)가 갖는 문제점을 네 가지 큰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I. 방법론적 오류: 신앙의 그리스도와 역사적 예수의 분리

1. 역사의 예수를 복음서의 예수와 분리

아슬란은 역사적 교회가 경전으로 읽는 복음서의 예수상()은 본래적 예수상이 아니라 복음서 필자들에 의하여 각색한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신앙의 그리스도와 역사적 예수 사이를 방법론적으로 분리시키고자 한다. “불신자들이 던지는 의혹에 네 복음서가 증어하는 예수의 모습과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예수의 모습 사이의 괴리가 커졌다. 그러니까 신앙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와 역사적 인물, 나사렛 예수의 거리감이 커져만 갔던 것이다.”(Reza Aslan,젤롯, 16.)

이러한 방법론적 접근은 이미 19세기 자유주의적 역사적 예수상 논구와 20세기 예수 세미나의 영지주의적 예수상 탐구의 방법론적 접근과 다른 것이 없다. 아슬란 자신은 기독교인이 아니라 이슬람교도이다. 그는 1972년 이란에서 태어나 1979년 이란혁명 때 미국으로 건너와서 한 때 복음주의 기독교에 심취했다가 다시 가족의 종교인 이슬람교로 개종하였다. 이러한 이슬람적인 시각에서 보는 역사적 예수는 복음서 필자들이 제시하는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다. 그는 예수전기(傳記)로서 교회의 틀에 갇혀 있는 신적 존재로 그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적인 베일을 벗기고자 하며, 역사적 예수를 유대의 독립과 민중들을 위해 싸운 혁명가로서 제시하고 있다. 그는 혁명가인 나사렛 예수상을 제시함으로써 교회가 2천년 역사와 전통을 통해서 경배해온 신앙적 예수 그리스도상에 도전하고 있다.

아슬란은 미국 보수 언론 폭스 TV의 공격적인 질문에 다음같이 대답하였다. “나는 고대 헬라어에 능숙하고 신약학 및 4개의 학위가 있는 종교학자로서 앵커가 보여준 이런 편견이 없는 진실을 추구하고자 한다.” 그는 이 대답으로 오히려 반이슬람 감정에 대한 반성과 종교 다원주의에 대한 논쟁의 기회를 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책은 베스트셀러 톱에 랭크되었다.( cafe.naver.com/sdfstptkd/2074182). 이 작품이 바로 젤롯이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의 진정한 모습을 탐구하는데 고대 헬라어에 능숙하고 신약학과 중동의 종교사회학에 학위를 가졌다는 것은 하나의 외부적인 조건이 될 수 있으나 내면적이고 충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이 될 수는 없다. 자가 강조하는 것은 연구자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인격적 신앙의 관계에 있지 않으면, 복음서 필자들의 기록들은 모두 후대의 왜곡 내지 종교적 왜곡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2. “젤롯의 시각으로 교회적인 예수의 이미지를 변형

아슬란은 방법적으로 교회의 베일 속에 있는 신앙의 그리스도라는 베일을 벗기고 역사적 사실의 예수를 그려내고자 한다. 아슬란은 종교적 믿음이 아니라 실증적 사실을 바탕으로 신적 존재가 아닌 인간적 존재인 예수에 접근하고자 한다. 아슬란은 미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같이 말한다: "예수가 살았던 시대를 통해 그를 정의하고 이해하는 게 최상의 방법이라고 본다. 예수가 다윗의 왕국을 복원할 메시아였는지 하나님의 아들인지 하나님 그 자신인지 어느 쪽이건 예수는 그의 시대의 산물이다.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를 고대했다. 수많은 사람이 스스로 메시아라 주장했다. 우리는 1세기 유대의 그 많은 메시아들 중에서 오로지 예수만을 기억한다."(뉴욕 중앙일보, “'예수 전쟁' 부른 책 '젤롯'의 필자 레자 아슬란”: 04/15/2014  중앙일보 미주판 25   기사입력: 04/14/2014 17:01). 그러나 이는 방법론적으로 일면적인 것이다.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단지 시대사적 접근으로써는 나사렛 예수의 실재성을 밝힐 수 있으나 그의 내면적 세계와 그의 존재의 정체성은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신앙의 그리스도 없는 순수한 역사적 사실로서의 예수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미 19세기 독일 괴팅엔의 신학자 마르틴 켈러(Matin Kähler)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그린 소위 사실적 예수(so called historic Jesus)는 성경적이고 역사적 그리스도(biblical historical Christ)와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성경적 예수는 신앙고백의 그리스도라고 결정적으로 통찰한 바 있다. 필자도 역사적 예수를 파악하는 있어서 신앙과 사실의 불가결한 연결을 강조한다. 이것이 바로 해석학적 실재론(hermeneutic realism)이다. 신약 복음서 저자들(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복음서는 사실적으로 존재했던 역사적 예수로부터 신앙적 감화를 받았고, 이러한 신앙적 감화 자체가 역사적 예수를 보게하는 중요한 신앙적 관점으로 쓰여진 것이다. 이러한 신앙적 관점을 떠난 중립적 순수 사실로서의 역사적 실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해석학적 실재론이란 실재란 해석자의 관점 안에서 해석되어 존재한다는 관점이다.

아슬란은 전통적 기독교의 예수상을 기독교인들이 허구적으로 그려낸 것이라고 하여 이를 제거하고 예수를 정치적 혁명가로 그리고 있다. 아슬란은 기독교 신자들 머릿속에 각인된 예수의 이미지를 하나 하나 지우기 시작한다. 그는 교회가 가르치는 예수, 즉 절대자와 동일시되는 천상적인 존재로서 놀라운 기적을 일으켰고 온 인류를 위해 무조건적인 사랑과 평화를 가르친 선한 목자로 익숙해진 이미지, 현대인에게는 여전히 미스터리하게만 느껴지는 예수라는 존재가 행했다는 기적과 부활했다는 교회의 강요된 메시지 모든 것이 꾸며낸 황당한 이야기내지 완전한 날조요 거짓이라고 본다.

그래서 아슬란은 예수라는 존재 앞에 드리워 있던 기독교적 장막들을 하나하나 걷고 그의 실체를 목격하고자 한다. 그는 기독교 신약학을 전공했으나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 이슬람교도로서 여태까지 기독교 전통신자들이 가져왔던 교회적인 예수의 이미지를 변형시키고자 하는 반기독교적인 시각(an anti-Christian view)을 가지고 있다. 아슬란은 다음같이 피력한다. “일반적으로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고 다른 쪽 뺨마저 내어 주는 평화주의자로 묘사되는데, 이러한 습관적 이해는 그 당시의 정치적으로 불안한 세계에 대해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비정치적인 설교자라는 예수의 초상에 뿌리를 둔다. 이러한 예수의 모습이 완전히 날조(a complete fabrication)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살펴 보았다. ..분명히 예수는 무저항 비폭력주의자는 아니었다.”( Reza Aslan, Zealot, 민경식 역, 젤롯, 185.)

그리하여 아슬란은 역사적 예수를 오늘날 이슬람의 원리주의자 같이 로마지배 체제를 전복시키는 독립운동가 내지 사회혁명가로 그리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종교적 베일 걷어내는 학문적 실증적 접근이라고 하지만 그의 탐구의 이면에는 잠재적으로 신적 존재인 예수를 비하하고자 하는 이슬람교도적 반기독교적 정서가 도사리고 있다. 비록 그가 이슬람 신자이며 이슬람은 예수를 선지자로 인정하면서 예수에게 좀더 친밀하게 다가가기 위해 예수 전기(傳記)를 저술했다고 하드라도 그는 이러한 방법론적 제한성에 포로되어 있다.

맺음말

아슬란이 그려낸 역사적 예수론의 결정적인 오류는 그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시도한 역사적 예수 탐구(일반적으로 제1탐구라고 함)의 관점을 반복하여, 역사적 역사적 예수와 신앙적 그리스도를 분리하여 역사적 예수를 기독교적 복음서의 관점이 아닌 이슬람의 전사(戰士)의 관점에서 보려고 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복음서 자료들 가운데 아슬란 자신의 관점에 맞지 않는 것을 역사적 예수의 본래의 모습에서 제거해 버리고 이슬람의 투쟁적 전사에 맞는 부분을 가지고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그러니 아슬란에 의하여 그려진 역사적 예수란 성경적 하나님의 아들이기 보다는 팔레스타인의 사회적으로 로마체제에 대항하여 일어난 민중으로서 정치적 혁명가였다.

이러한 예수상은 오늘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영토 분쟁 속에서 그리고 특히 이스라엘에 의하여 사회적으로 고립당하고 살아가는 민중 팔레스타인들에게 하나의 혁명가적 비전을 불어 놓는 인물일 수는 있으나 신약 4복음서와 역사적 교회가 가르쳐주는 인류의 구속자와는 전혀 다른 인물인 것이다. 더욱이 성경이 가르치는 역사적 예수는 원수를 대항하고 죽이는 혁명가적 투사가 아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15:13)고 가르치고 심지어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고(5: 44) 사랑하라고 가르친 사랑의 교사로서의 역사적 예수와도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다.

 

II. 아슬란은 신약성경의 고유한 텍스트 세계를 인정하지 아니한다.

머리말

레자 이슬란의 예수 전기(傳記)는 하나의 난픽션(non-fiction)같이 그럴듯 하게 보이나 그가 상상력으로 그려낸 하나의 종교적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예수 전기는 말만 전기이지 자기가 임으로 선정한 역사적 사실의 자료에 문학적 상상력을 덧 붙여 마치 그럴듯하게 개연적으로 사실처럼 보이게 하나 전혀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이슬람 학자로서 아슬란은 기독교 신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성경 읽기의 중요한 렉치오 디비나(Lectio Divina: 거룩한 독서, 이를 통해서 역사적 기독교인들은 성경 말씀을 통하여 오늘날 현재하시는 하나님(예수 그리스도)과의 교통을 가졌음)가 가져다 주는 신약성경의 고유한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실증주의적 역사 개념

레자 아슬란은 이슬람의 관점에서 신약 성경이 지니는 고유한 텍스트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성경 텍스트의 세계란 이천년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기독교 신자들이 역사를 통관하면서 공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면서 이루는 영적 공동체의 세계이다. 이는 해석학적 세계로서 복음서 저자만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시대적 공간적 제약을 넘어서서 공동적으로 신앙고백을 공유한 영적 세계를 말한다. 그런데 아슬란은 복음서 필자들이 철저히 성경적 테두리 안에 갇혀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또한 아슬란은 그의 저서 전반에 걸쳐 복음서 저자들의 이러한 집필 동기 등을 이유로 복음서가 전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거듭 주장하며 성경에 갇힌 해석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한다. 아슬란은 복음서 저자들이 발견한 나사렛 예수의 구속 복음 사역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실증적으로 관찰될 수 있는 사실만을 인정하는 실증주의적 역사개념으로 역사적 예수상을 그려내면서 복음서 저자들이 증언한 성경적 예수상을 왜곡하고 있다. 이슬란의 관점에 의하면 기본적으로 복음서는 하나같이 윤식되었고” “완전히 꾸며낸 이야기”(Reza Aslan, Zealot, 민경식 역, 젤롯, 93.)로서 예수의 언행에 대한 목격담도 아니고 살아 생전 예수를 알고 있던 사람들이 쓴 것도 아니다고 본다 그는 복음서 필자들에게 현대주의적 비평적 관점이 결여되었다고 본다: “관찰할 수 있고 입증할 수 있는 과거의 사건을 비평적으로 분석한다는 개념의 역사는 현대사회의 소산물로 이러한 현대적 역사 개념은 복음서 기자들에게는 너무나도 생소했으며 그들에게 역사란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드러내는 것”(Reza Aslan, Zealot, 민경식 역, 젤롯, 93.)이었다. 따라서 아슬란은 19세기와 20세기 역사적 예수에 관한 자유주의적 비평학적 논구를 그대로 수용하면서 본래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극단적으로 분리시키고 있다.

2. 복음서 기록에 대한 왜곡의 세 가지 실례

아슬란은 복음서들 사이의 모순점을 드러내면서 그것을 하나의 논픽션처럼 자기 상상력으로 해설함으로써 복음서 필자들이 증언한 역사적 예수의 진정한 모습을 왜곡시키고 있다. 다음 두 실례를 보자.

첫째 예로, 누가복음에는 열두 살 된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에 서서 히브리 성경의 핵심을 두고 랍비들과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 나오지만, 마가복음에서 언급한 테크톤(당시 로마에서는 그리스어인 테크톤을 문맹 소농의 의미로 사용)이라는 직업, 가난한 갈릴리 시골 마을이라는 성장 환경, 유대 농민 가운데 문맹률이 97%였던 당시 사회 상황을 감안해보면 예수는 문맹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아슬란의 이러한 주장은 복음서가 전하는 사실을 전적으로 왜곡하는 것이다. 예수는 구약성경에 능통한 그 시대의 랍비였다는 것은 복음서가 증언하는 사실이다. 누가는 예수가 자기 고향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 배치된 구약성경 이사야를 펴시고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61:1-2)을 찾으시고 이 예언이 오늘날 성취되었다고 말씀하신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4:21). 이는 예수가 문맹자가 아니라 소년기 시절부터 회당에서 구약성경을 읽고 연구한 선비(rabbi)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둘째 예로, 예수를 무조건 평화론자로, 그리고 정치적 선동과는 상관없은 사람으로 묘사하는 보도는 의심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예수를 무조건적 평화를 가르치고 실천한 사람이라든가 당시의 정치적 동란과는 전혀 상관 없는 사람으로 묘사하는 복음서의 보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Reza Aslan, Zealot, 민경식 역, 젤롯, 27-28.) 그러나 네 복음서는 역사적 예수는 당시의 유대교의 열심당이 가졌던 급진적 메시아 민족주의(radical Messianic nationalism)에 동조하지 않으셨고 철저히 그것과 자신의 구속사적 십자가의 길을 구분하셨다. 사도요한은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민중들이 예수를 왕으로 만들려고 했을 때 예수는 저들을 피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6:14-15).

세째 예로, 빌라도 총독은 예수에게 무혐의를 확인한 것이 아니라 그를 일반 죄수처럼 재판없이 즉각 처형했다는 해석이다. 예수의 처형 결정을 내린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잘못이 없음을 알고 풀어주려고 애쓰는 인물로 그려지지만, 이 역시 로마인을 대상으로 선교하기 위해 그들이 껄끄러워할 부분을 미화한 것일 뿐 문헌상의 총독 빌라도는 유대인 수십 명을 처형하는 것은 일도 아닌 잔혹한 인물로, 틀림없이 예수와 짧게 대면한 후 곧바로 형을 집행했을 것이라고 아슬란은 주장한다.

3. 아슬란 해석은 복음서 기록과 전혀 상반

그러나 이러한 아슬란의 해석은 복음서에 나타난 기록과는 전혀 상반된다.

1) 요한의 기록: 총독 빌라도는 예수가 죽을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도 요한은 소설을 쓴 것이 아니라 구속사라는 하나님의 사역에 속하는 빌라도의 심문을 기록했다. 요한은 빌라도 법정에서 사형선고 받게된 사실조차도 우연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대로 십자가에 처형될 하나님 아들의 사건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빌라도는 예수와 짧게 대면하고 사형을 선고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진지하게 심문한다. 그리고 예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하고 묻기까지 한다(18:38a). 그리고 예수에게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놓아주려고 하나: “빌라도가 이르되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18:38b-39). 민중들은 예수가 아니라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한다: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18:40). 빌라도는 민중들의 참소에 못이겨 예수를 죄수로 정하고 군인들로 하여금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 하게하고(19:1), 가시관을 머리에 씌우고 자색옷을 입히고(19:2) 유대인의 왕이라고 조롱하고 손으로 때리도록 한다(19:3).

빌라도는 죄수복을 입은 예수를 민중들 앞에 데리고 나오도록 하고 예수에게서 죄를 찾지못했다고 말한다. 요한은 증언한다.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19:4). 가시관을 쓰시고 자색 옷을 입은 예수께서 대제사장과 민중들 앞에 인도되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라고 이들이 아우성 치는 것을 보고 다시 빌라도는 여전히 예수에게서 죽을 죄를 찾지 못했다고 말한다.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19:5-6).

<1> 유대인들은 비정치적 예수에게 정치적 반역자라는 누명을 씌운다.

빌라도가 예수에게 고소할 거리가 없다고 하자 유대인들은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는 신성모독으로 고발한다.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19:7). 이에 빌라도는 예수의 고발이 종교적인 문제라 더욱 두려워하여 예수를 다시 관정으로 불려 들어 심문하나 예수는 대답하지 아니하신다. 빌라도는 예수에게 말한다.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19:10). 이에 대하여 예수는 빌라도에게 대답하신다.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19:11). 예수가 빌라도에게 하신 말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은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를 언급하는 구절이다. 이 말씀은 빌라도가 예수를 처형할 권세도 우주적 통치자인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예수의 발언은 그가 메시야요, 그의 메시아 시대는 지금(고난의 종의 시대)이 아니라 다가오는 종말(역사와 우주 심판의 시대)의 때라는 것을 언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빌라도는 예수의 진술이 종교적인 것이지 황제에 대한 정치적인 모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을 보고 그를 놓아주려고 애를 쓴다. 사도 요한은 다음같이 증언한다: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2> “예수 석방은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다는 유대인들의 비난에 굴복하는 빌라도

유대인은 빌라도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예수를 놓아줄 경우 황제의 신실한 신하가 아니다라는 논리를 가지고 빌라도에게 압력을 가한다.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19:12). 이 말을 듣고 빌라도는 재판석에 예수를 끌고 가서 재판대에 세우고 자신은 재판석에 앉고 말한다. “보라 너희 왕이로다”(19:14b). 이에 대해 유대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고함을 지른다.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19:15a). 대제사장들이 로마 황제 이외는 유대인의 왕이 없다고 말한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19:15b). 빌라도는 민중들의 항의에 못이겨 예수에게 십자가 처형을 언도하게 된다(19:16).

이상에서 보듯이 예수는 전혀 정치적 항거나 민중 반란을 의도하지 않았으나 예루살렘의 종교세력들이 예수가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참칭(僭稱)했다고 고발함으로써 로마 황제에 반란을 꾀하는 인물이라는 정치적 반란의 혐의를 씌인 것이다. 예수는 자신이 유대인의 영적 왕이라는 사실을 증언했으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이 발언을 예수가 로마 황제에 대한 반역했다는 정치적 발언으로 왜곡시키고 십자가 처형을 받도록 한 것이다.

2) 누가의 기록: 빌라도,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누가의 기록도 요한의 기록과 다르지 않다. 누가는 대제사장들과 그의 무리들이 예수를 고발한 내용이 내란 선동이라고 적고 있다.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23:1-2). 빌라도는 예수를 심문한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23:3a). 예수는 대답하신다. “네 말이 옳도다”(23:3b). 예수의 증거를 들은 빌라도는 예수가 종교적 확신에 찬 비범한 현인(賢人)으로서 열심당이 저지른 폭력을 행사하여 로마 체제에 반란을 꾀하는 죄가 없다고는 것을 알고는 고발한 유대인들을 향하여 예수에게 죄가 없다고 말한다.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23:4). 이에 대하여 대제사장들과 무리는 예수가 갈릴리 지역에서의 순수한 복음전파와 치유활동을 사회정치적인 백성선동으로 왜곡하여 고발한다. “무리가 더욱 강하게 말하되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23:5). 빌라도는 예수가 갈릴리 지역에서 활동한 것을 듣고 그 지역관할자인 헤롯 왕에게로 인계한다. 당시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었으므로 헤롯이 예수를 심문하나 이미 헤롯의 인물됨을 익히 아시는 예수는 그의 질문에 일체 대답하지 아니하신다. 그리하여 헤롯은 다시 예수를 빌라도에게 돌려보낸다.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들을 불러모으고 로마법에 의하면 예수가 죽을 죄를 짓지 않음을 확인하고 채찍을 처하고 석방하려고 한다.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23:14-16).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라고 고발건에 대하여 동의하지 아니하였다.

백성 미혹이라는 예수에게 붙인 죄목은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위협을 말하는 것이지 로마 체제에 대한 저항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빌라도는 인지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제사장의 사주를 받은 유대인들이 아우성치면서 반대한다.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23:18). 이 장면에서 누가는 살인범인 열심당원 바라바는 로마체제에 반란을 꾀한 자였다는 것을 해설하고 있다.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23:19). 빌라도는 민란과 살인을 저지른 열심당원 바라바를 십자가에 처형하고 예수를 놓아주려고 두 번째 군중들을 설득한다. 이에 다시 대제사장들과 그 무리들은 예수를 처형하라고 빌라도를 압박한다. “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23:21). 빌라도는 세 번째 예수에게 죽을 죄가 없다고 그를 놓아주려고 한다.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23:22). 이에 다시 대제사장들과 무리들은 빌라도를 압박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라고 재촉하여 빌라도를 설복한다.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23:23). 이에 빌라도는 살인자는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기를 결정한다.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를 놓아 주고 예수는 넘겨 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23:24-25). 누가의 기록에서 우리는 예수가 로마 황제에 대항하여 반란죄를 획책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을 죄가 없음을 빌라도가 알고 예수를 세 번이나 놓아주려고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예수에게 죄가 없다 사실에 대한 빌라도의 확고한 인식은 예수가 정치적 혁명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것이다.

3) 마태의 기록: 빌라도는 예수를 두려워하였고 십자가 처형 언도와는 무관하다고 선언했다.

마태의 기록도 요한이나 누가의 기록과 다르지 않다. 대제사장들과 백성들이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를 데려다 자칭 그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였다고 고발한다. 빌라도는 예수를 심문한다. 예수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27:11a)라는 빌라도의 심문에 네 말이 옳도다”(27:11b)라고 대답하신다. 그후 대제사장들과 백성들의 비난과 고발에 대하여 예수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는 것을 보고 빌라도는 크게 놀라워한다”(27:14). 마태는 기록하기를 빌라도는 예수가 죽을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시기로 인하여 고발된 것을 알았다고 증언한다.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27:18).

마태는 빌라도의 아내가 예수 때문에 지난 밤에 매우 애태운 꿈 꾼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27:19).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주려고 하였으나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세 번이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고 강권하므로 빌라도는 대야를 가져오라 하여 이 결정에는 자기는 무관하다고 손을 씻기까지 한다.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27:24). 그리하여 빌라도는 민란을 두려워하여 예수를 처형하도록 허락한다. 빌라도가 민란을 두려워 하였다는 것은 예수가 예루살렘에 와서는 민중들이 그를 추종하였던 것이 아니라 입성할 때의 메시아 열기가 완전히 식고 고난의 종에 대한 실망으로 가득찬 데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사실도 예수가 민중이 열광한 민중의 해방자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민중이 싫어한 고난의 종으로 이해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27:26). 빌라도는 대야를 가져오도록 하여 손을 씻을 정도로 예수에게 십자가 처형언도를 내림에 있어서 깊은 내적 갈등과 양심의 가책과 주저함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복음서 기자들의 일치된 증언은 아슬란이 왜곡하여 서술하듯이 예수의 심판이 다른 로마체제에 대한 반란자인 열심당원을 처형하듯이 즉결심판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맺음말

아슬란은 실증적으로 관찰될 수 있는 사실만을 인정하는 실증주의적 역사개념에 자신의 문학적 상상력을 가미하여 역사적 예수상을 그려내면서 복음서 저자들이 증언한 성경적 예수상을 왜곡하고 있다. 아슬란이 왜곡하듯이 예수는 문맹자가 아니었고, 정치 혁명가적 의도가 없었다. 민중의 소요죄란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사회정치적 안전을 위하여 예수에게 뒤집어 씌운 죄목이었다. 그래서 요한, 누가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총독 빌라도는 예수가 혁명가적 혐의가 없는 것을 알고 세 번이나 풀어주려고 했다. 따라서 예수는 정치적 혁명가가 아니었다. 예수에게 구태어 혁명가라는 딱지를 붙인다면 영적 실재로 다가와서, 하나님 나라의 능력으로 인간과 사회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영적 혁명가라고 말할 수 있다.

 

III. 아슬란은 역사적 예수를 정치 이데올로기적으로 해석한다.

머리말

아슬란은 역사적 예수를 정치 이데올로기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정치혁명가적 이데올로기를 역사적 예수에 투영시켜 복음서에 나타난 신앙을 주는 구원과 평화의 왕이요 고난의 종인 예수를 정치 이데올기적으로 해석하여 정치 혁명가로 왜곡시키고 있다.

1. 아슬란의 왜곡: 네 복음서는 로마의 지적 엘리트층을 위하여 예수의 혁명가적 흔적을 제거

아슬란에 의하면 A.D. 70년 예루살렘의 함락과 함께 예루살렘 교회의 흔적은 사라져 버렸다고 본다. 그는 예수를 메시아로 추종하던 유대인은 성전이 파괴되고 유대교가 추방되었을 때 혁명주의적 메시아상을 유지하든지 아니면 평화주의 메시아상을 추구하든지 두 가지 선택의 길에 섰다고 본다. A.D. 70년 이후 기독교는 예루살렘에서 지중해 지역의 그리스와 로마시로 옮겨가서 1세기 말이 되자 로마의 지성적 엘리트층을 기독교 선교의 핵심표적을 삼았다. 이들을 선교하기 위하여 예수의 메시아상에서 본래의 혁명적 흔적을 제거해야 했다고 해석한다. “주요한 복음서들이 이미 기록된 1세기 말이 되자 로마(특별히 로마에 사는 지적 엘리트층)가 기독교 선교의 핵심표적이 되었다. 이 특별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접근하기 위해서 복음서 기자들은 어느 정도 창조성을 발휘 할 필요가 있었다. 예수의 삶에서 혁명적 열정의 흔적을 모두 제거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의 죽음에 대한 로마인들의 책임을 완전히 씻어주어야 했던 것이다. 이제 메시아를 죽인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다”(Reza Aslan, Zealot, 민경식 역, 젤롯, 225).

아슬란은 마태, 누가, 요한 복음이 증언하는 바 빌라도가 예수의 재판에 깊이 관여하고 예수를 처형한 사실을 이들 기자들이 혁명가적 예수를 제거하는 가운데서 조작된 것으로 본다. 아슬란은 이들 복음서 기자들의 기사(記事)들은 본래의 정치혁명가적 예수상과는 상관없는 후대에 생긴 로마의 책임을 면하게 하고 반유대주의적 사상에 입각한 치장에 불과하다고 본다. “원래 마가의 이야기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로마의 책임을 벗겨주려는 순전히 선교적인 목적으로 만든 것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여기에 불합리한 왜곡이 덧붙였다. 이 이야기가 2천년에 걸친 반유대주의의 토대가 된 것이다.”(Reza Aslan, Zealot, 민경식 역, 젤롯, 227).

이러한 아슬란의 해석은 그 자신이 세운 정치 혁명가가설(假說)에 입각하여 복음서 저자들의 기록을 왜곡한 것으로서 4복음서 내용과 상반되고 있다.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는 분명히 그의 복음서에서 그의 기록이 예루살렘 함락(A.D. 70) 이전인 것을 알려주고 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13:1-2). 이 구절은 성전 파괴에 대한 예수의 예언으로서 아직도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에 의하여 함락되기 이전에 한 말씀인 것을 명료히 알려준다. 그리고 이어서 마가는 다가올 이방군대(로마 군대)에 의한 도시 예루살렘의 파멸에 관한 예수의 예언을 기록하고 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라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거늘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13:14-20)(마가복음 131-2; 14-20에 대한 독일 성서 공회판 해석관주, 1992 Deutsche Bibelgesellschaft, Stuttgart, 110, 111)

마태의 증언도 다음과 같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24:1-2). 이 구절에서 예수는 성전 건물의 화려함 따위에 전혀 눈길을 돌리지 않으시며 예루살렘 성전의 파멸을 예언하신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는 다가올 이방군대(로마 군대)에 의한 도시 예루살렘의 파멸에 관하여 예언하신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24:15-22). 여기서 마태는 이미 일어난 사건을 말하지 않고 앞으로 예루살렘에 다가올 환난과 파멸에 관하여 언급했던 역사적 예수의 예언에 관하여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기록에서 마태복음 역시 주후 70년 이전에 쓰여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마태복음 241-2; 15-22에 대한 독일 성서 공회판 해석관주, 1992 Deutsche Bibelgesellschaft, Stuttgart, 58).

누가의 증언도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뜨려지리라“(21:5-6). 이 기록에서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의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며진 예술적 가치에 대하여 전혀 무관심하시며 성전이 파괴될 것을 예언하신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파멸을 예언하신다.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21:20-24). 이 구절은 이미 일어난 예루살렘의 파괴가 아니라 장치 일어날 파괴에 대한 예언이다. 앞으로(A.D. 70) 로마 군대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포위되고 그해 여름에 예루살렘과 성전이 점령되고 파괴될 것을 예언하시고 있다.(누가복음 215-6; 20-24)에 대한 독일 성서 공회판 해석관주, 1992 Deutsche Bibelgesellschaft, Stuttgart, 193).

그러므로 주후 70년 이후에 마가복음이나 다른 복음서가 로마인들을 책임을 모면하기 위하여 쓰여졌다는 아슬란의 주장은 전혀 신빙성이 없는 조작이요 허구인 것이다. 영국의 신약학자 브루스가 언급한 바같이 누가는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을 주후 60년경에 저술하여 바울의 친구요 동역자로서 유일한 이방인 의사로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 후 일어난 30년간의 일들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F. F. Bruce, The New Testament Documents. Are They Reliable? 생명의 말씀사 역, 신약성경문헌, 1977, 82, 95.). 마가복음은 누가복음보다 더 전에 쓰여졌기 때문에 아슬란의 주장은 전혀 신빙성이 없는 것이다. 마가, 누가, 마태복음서가 예루살렘 함락의 예언을 한 내용으로 보아 이 세 복음서는 주후 70년 예루살렘 함락 이전에 쓰여진 것이 분명하다고 볼 수 있다. 세 복음서는 후대 교회의 조작이 아닌 역사적 예수께서 앞으로 다가올 예루살렘의 함락을 예언하신 신빙성 있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2. 정치 혁명가 가설을 복음서 해석에 투명, 날조

아슬란의 접근방식은 역사적 예수를 철저하게 정치 이데올기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그는 복음서 기자들이 역사적 예수를 왜곡했다고 보고 이를 제거하고 혁명적인 투사에 적합한 자료들을 조합하여 예수를 재구성하고 있다.

아슬란에 의하면 1세기 팔레스타인 민중들은 숱한 침략과 핍박의 역사 속에서도, 과거의 예언을 실행하기 위해 메시아를 자처하는 리더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봉기했다. 예수는 그들 메시아적 리더 중에서도 단연 카리스마가 넘치고 정치 혁명적인 리더였다고 본다. 예수는 로마 권력에 의하여 십자가에 처형당했으나 그의 메시지는 종교가 되어 로마 권력을 삼켰다고 본다. 절대 굴복을 모르는 의지, 하나님의 나라가 기어코 오리라는 열정적인 신념, 이것이 젤롯(zealot)이라는 것이다. 아슬란은 젤롯이 열심당(The Zealot Party)과는 다르다고 한다. 열심당은 예수가 죽고난 후 기원후 66년에 생겨난 당파라고 본다. 예수가 살아 있는 동안 열심이라는 말은 특정 분파나 정치적 당파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고, 이때만 해도 열심은 사상이나 포부 또는 종교적 경건의 모범이었다고 본다. 아슬란은 예수가 그 당시 사회에 널리 퍼졌던 젤롯의 신념을 간직한 정치적 혁명가였다고 주장한다.

3. 두 가지 반론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나사렛 예수는 결단코 자신을 정치적 메시아나 정치 혁명가로 이해하지 아니했다. 필자는 예수가 젤롯신념을 가진 혁명가였다는 아슬란의 해석에 대하여 두 가지 반론을 제기하고자 한다.

1) 아슬란이 말하는 제롯당의 연대(年代)는 일반신약학자들의 연대와 빗나감

첫째, 개인 신념인 젤롯과 정치적 당파인 젤롯당(Zealots)을 구별하고 젤롯당은 예수 사별 후 66년에 생겨난 당파라고 보는 아슬란의 견해는 일반 신약학자들의 견해와 빗나가는 주장이다.

스위스의 신약학자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 등을 비롯한 복음주의적 신약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열심당(젤롯당)은 유대 백성의 법률과 그들 고유의 생활에 대한 열렬한 수호신들로서 헤롯시대부터 예루살렘과 마사다 요세 반란까지 호전적이고 광신적인 전투당이었다. 열심당이라는 이름은 원래 종교적 광신주의(religious fanatism)를 의미하였고, 주전 2세기 마카비 반란 시대에는 우상숭배자와 우상에 대한 유대인의 관계를 규정하는 유대 율법학자 랍비의 율법을 엄격히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이미 헤롯(Herot the Great, BC 37- BC 4)의 통치가 로마 권력에 동조한 반민족적 행위라고 규정하는 정치적 집단으로서 열심당의 결성을 촉진시켰다. 헤롯을 왕으로 부르도록 강요하는 어떠한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고 이에 반대했던 자들, 히스기야(Hezekiah)와 소위 강도의 무리들(robbers)이라고 불리운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사실상 열심당이었다.(Oscar Cullmann, Jesus and The Revoluionaries, Gareth Putnam, 1970; 고범서 역, 예수와 혁명가들범화사, 1984, 부록: “열심당들은 어떠한 사람들이었는가,” 76-78.).

열심당은 당시 유대의 지배자였던 로마에 대항하여 무력으로 항거하고 로마로부터 유대를 해방하고자 전쟁을 준비했다. 열심당은 로마 군병들만이 아니라 이들에게 동조 혐의가 있는 동족에게도 비수를 휘둘렸다. 로마에 협조한 사람들을 하나씩 암살한 후에 그들은 전 백성을 66년의 대전쟁으로 몰아 넣었다.”(André Trocmé, Jesus et la Revolution non Violente; 영역, Jesus and the Nonviolent Revolution, Wipf & Stock Publishers, 1998; 박혜련. 양명수 공역, 예수와 비폭력 혁명,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6, 207.)

2) 아슬란의 혁명가 예수 주장은 이미 1960년대 제기되어 폐기된 해방신학자의 견해

둘째, 역사적 예수는 정치적 혁명가가 아니라, 영적인 혁명가요, 종말론적 선포의 메시아였다.

예수가 정치적 혁명가였다는 아슬란의 주장은 전혀 새로운 주장이 아니라 서구에서 이미 18세기에 라이마루스(H. S. Reimarus)( H. S. Reimarus, Von dem Zwecke Jesu und seiner Jünger, Fragmente eines Ungenanten, vol 7, 1778. 이 저서는 너무나 급진적인 내용이어서 박해가 두려워서 생전에 출판을 못했다. 라이마루스 사후(死後)에 그의 딸이 부친의 원고를 레싱(Lessing)에게 주어 익명으로 출판케 한 저서임)에 의하여 주장되었고, 그 후에는 카우츠키(K. Kautsky)와 아이슬러(R. Eisler) 그리고 1960년대 영국의 신약학자 브랜던(S. G. F. Branden) 등 해방신학과 혁명신학에 심취한 학자들에 의하여 그리고 한국에서는 1970년대 안병무와 서남동 등을 비롯한 민중신학자들에 의하여 주장된 이론이다.  

스위스 복음주의 신학자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예수가 정치적 혁명가라거나 또한 열심당의 동조자라고 생각했다는 주장이란 예수의 종말론적 선포의 테두리 안에서는 도출될 수 없다(O. Cullmann, 예수와 혁명가들, 서문. 13.)고 피력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 대하여 미국의 신약학자 존 라빈슨(John A. T. Robinson)도 쿨만의 소책자 예수와 혁명가들추천사에서 쿨만의 입장에 동의한다: “나는 권위 있는 신약학자로부터 제기되는 이 입장은 예수를 정치적 혁명가로 재구성하고자 하는 최근의 무모한 시도에 반대하여 제기된 균형잡힌 평가라고 환영한다. 예수는 참으로 혁명가였다. 그러나 정치적 혁명가는 아니었다.” 같은 신약학자 쉰(Fulton I. Sheen)도 다음 같이 쿨만의 입장을 변호하고 있다: “나는 혁명가다 그러므로 예수도 혁명가라는 주장에서 출발하는 자들은 쿨만에게서 칼(swords)이 이웃보다는 자신을 가르키는 극단주의(radicalism)를 발견할 것이다.”

독일 튀빙엔 신약학자 마르틴 헹엘(Martin Hengel)도 그의 논쟁적 저서 예수는 혁명가였는가?(War Jesus Revolutionär?)에서 예수를 열심당 운동과 관련시키는 시도에 반대하면서 예수는 평화와 비폭력의 메시지를 전했다고 주장한다. “예수는 아가페(Agape)를 가지고 아주 다른 방법을 제시해 주는데, 그것은 바로 비폭력적인 항거와 기꺼이 고통을 감수하는 방법, 곧 낡은 야만적인 폭력적인 방법보다 휠씬 더 혁명적인명칭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방법이다.”(Martin Hengel, Was Jesus a Revolutionist?, 고범서 역, 예수는 혁명가였는가?(서울: 범화사, 1983, 60.). 헹엘은 누가복음 627-37절과 마태복음 538-48절에 나타는 예수의 선포에서 예수의 방법은 개인의 양심에 주로 초점을 맞춰 개별적으로 호소하는 비폭력(Gewaltlosigkeit)의 방법이요, 끈질긴 설득과 삶 속에서의 구체적인 도움의 방법이다.”(Martin Hengel, 예수는 혁명가였는가?, 56.)고 말한다.

미국의 진보신약학자 월터 윙크(Walter Wink)는 그의 저서 예수와 비폭력 저항: 3의 길(Jesus and Nonviolence: A Third Way)에서 예수는 악에 대한 대응방법으로 수동적인 태도와 폭력 모두를 몹시 싫어하셨다.”고 지적한다.(Walter Wink, 김준우 역, 예수와 비폭력 저항: 3의 길. 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2003, 31.). 예수는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는 태도로, 즉 수동적인 위치에서 운명적인 굴레에 얽매여 사는 삶이나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억압에 대하여 투쟁하시면서 그 폭력에 대항하는 혁명가적인 삶이 아니라, 예수는 자기에 대하여 다가오는 폭력에 대하여 적의로 공격하시지 않으시고 제3의 길, 평화의 길을 제시하셨다. 마태복음 1822절에서 예수는 잘못을 범한 형제에 대하여 용서하되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가르치셨다.

맺음말

아슬란이 말하는 제롯당의 연대(年代)는 일반신약학자들의 연대와 빗나간다. 아슬란이 개인 신념인 젤롯과 정치적 당파인 젤롯당을 구별하고 젤롯당은 예수 사별 후 66년에 생겨난 당파라고 보는 견해는 일반 신약학자들의 견해에 빗나가는 주장이다. 일반적으로 신약학자들은 열심당원이 유대 백성의 법률과 그들 고유의 생활에 대한 열렬한 수호신들으로서 헤롯시대부터 예루살렘과 마사다 요새(要塞) 반란까지 호전적이고 광신적인 전투당이었다. 아슬란의 혁명가 예수 주장은 이미 1960년대 제기되어 폐기된 해방신학자의 견해다. 역사적 예수는 정치적 혁명가가 아니라, 영적인 혁명가요, 종말론적 선포의 메시아였다.

 

IV. 정치 혁명가 예수는 복음서 예수상과 전혀 다른, 낯선, 날조(捏造)된 인물

머리말

대림절 네 번째 주일, 지구촌의 모든 그리스도 교회가 오시는 그리스도를 맞이하고 있다. 대림절(待臨節, adventus, Advent)이란 성탄절에 오신 역사적 예수를 기다리고 준비하면서 대망하는 성탄절 앞의 4 주간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인류의 대속주이시기 때문에 온 지구촌 교회가 그분을 대망하는 것이다.

아슬란은 그의 예수 전기에서 그 자신이 설정한 갈릴리를 배회하던 젤롯(열망)을 가진 민중 혁명가의 이데올로기를 투영하여 복음서에 증언된 고난의 종, 세상의 구주 예수를 전통교회가 신앙고백한 역사적 예수와는 전혀 다른 정치적 인물로 그려내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복음서와 전통교회가 신앙고백한 역사적 예수, 고난의 종이요 세상의 구주예수란 초대교회가 날조한 인물이며,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의 왕국을 건설하고자 했던정치 혁명가 예수가 본래 역사적 예수의 본래 모습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복음서 기자와 다른 전혀 다른 인물: 정치적 혁명가 날조

아슬란의 예수상은 복음서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역사적 예수를 사실적으로 재구성하기보다는 논픽션적으로 문예창작적으로 자신의 종교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나사렛 예수를 복음서들이 알려주는 인물과는 전혀 다르고 낯선 인물인 정치적 혁명가로서 날조(捏造)하고(fabricating) 있다. 아슬란은 머리글에서 다음같이 피력한다. “이 책은 실존 인물로서의 예수가, 즉 기독교가 생기기 이전의 예수의 모습을 되도록 많이 찾아내기 위해 기획되었다. 바로 정치의식이 투철한 유대혁명가로서의 예수다. 그는 2천년 전 갈릴리 시골 지역에 흙 먼지를 일으키며 돌아다닌 인물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겠다고 추종자들을 끌어 모아 메시아 운동을 펼친 인물이다. 도발적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배짱있게 성전을 공격했으나 선동죄로 로마에 체포당하고 처형당했으니, 결국 그의 활동은 실패로 끝난 셈이다.”( Reza Aslan, Zealot. 민경식 옮김, 젤롯, 29-30).

이에 반해서 복음주의 신약성서학자 이반스는 그의 저서에서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역사적 예수상이 진정한 실재의 참 예수상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상상해낸 상을 그의 연구에 투영시킨 만들어진 예수”(fabricating Jesus)라고 지적하고 있다.(Craig Evans, 성기문 옮김, 만들어진 예수. 누가 예수를 왜곡하는가, 새물결플러스 2011. 275-298.). 그리하여 역사적 예수의 사실과 진실과는 전혀 다른 혁명가 예수를 날조하여 내놓고 있다.

아슬란은 네 복음서(마가, 누가, 마태, 요한복음)가 제시하는 기독교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신앙의 그리스도를 제거하고 단지 하나의 혁명적인 열정을 지닌 인간의 모습을 드려내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예수는 예루살렘에 비해 상대적으로 시골인 갈릴리에서도 더욱 가난한 동네인 나사렛이라는 동네에서 태어난 아주 극히 평범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는 많은 기적을 행하고 병자들을 치료하고 죽음에서 살린 그리스도가 아니라 젤롯 즉 열망을 가진 인간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의 왕국을 세우려고 하는 그 젤롯...그것이 바로 핵심이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고 메시아로 아니었다는 것이다. 나사렛 예수는 본래 혁명가로서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의 왕국을 건설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는 이 땅에 유대인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 제자들을 이끌고 갈릴리를 배회하던 젤롯(열망)을 가진 인물, 예루살렘 성전 제사장들의 권위에 반발한 매혹적인 설교자였으며, 로마의 압제에 도전하다 실패한 과격한 민족주의자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본래의 예수였는데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죽은 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복음서 필자들에 의해 날조(捏造)되었다는 것이다. 아슬란은 또한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복음서가 여러 사람에 의해 각색(脚色)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역사적 예수라는 인물의 역사적 실재는 인정하지만 예수가 우리를 위하여 희생과 순교를 당한 그리스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란 더 이상 순교와 희생의 상징이 아니라 단지 역사적인 사형틀에 불과하며, 예수는 분명히 역사적으로 존재했던열심을 가진 인물이라는 것이다.

아슬란은 예루살렘 함락 이후 목숨을 보전한 유대인들이 스스로 회복하기 위해 그리고 로마에 사는 초기 기독교인들을 선교하기 위해 집필하기 시작한 것이 복음서라는 것이다. 복음서 집필을 위해서는 유대 민족주의, 혁명주의 색채를 지울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예수의 원래의 모습, 정치적 혁명가상도 점차 희석되어 갔다고 본다. 그는 누가복음 2444-48절에서 부활한 예수가 말하는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이나 시편에 예수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날 것에 대한 어떠한 내용도 찾아 볼 수 없다고 말한다.

2. 아슬란의 은폐한 욕망이 그의 예수상에 투영

아슬란이 제시한 혁명적 예수상에는 그의 은폐된 욕망이 투영되어 있다. 아슬란은 젊은 시절 기독교 근본주의자로서 성경 무오설과 축자성경설을 맹목적으로 믿었으나 그것으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근본주의적 신앙의 성벽 앞에서 좌절을 맛보고 다시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이러한 기독교 신앙에 대한 그의 좌절은 이제 혁명가 예수의 정치실험으로 나타난 것이다. 영문학 교수 출신 목회자 이인기는 젤롯서평에서 아슬란의 예수상에 내재되어 있는 이러한 은폐된 욕망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은폐된 욕망이라고 지적할 수 있는 이유는 역사적 예수에 대하여 1960년대 해방신학자와 혁명신학자들을 통하여 이미 알려진 정보를 새로운 언어로 포장하려고 한 시도는 20여년간 예수를 연구한 진지한 학자에게서 예상할 수 없는 태도이기 때문에 이러한 태도는 그가 자신의 집필의도를 자신의 저서 속에 심어 놓았음을 암시하는 장치로 볼 수 있다.”(이인기, “레자 아슬란의 젤롯:은폐된 욕망 읽기,” in; 신학과 교회, 창간호 2014 여름, 혜암연구소, 308.). 이러한 은폐된 욕망을 지적하는 이인기의 통찰은 주목할만하다. 아슬란은 젤롯을 통해 정치혁명가적 예수를 재구성한 의도가 이와 같이 기독교의 근본주의에 대한 자신의 혁명적 욕구와 그것의 좌절을 형상화하려는 것이다. 아슬란이 자신의 저술 곳곳에서 부각시킨 난공불락의 공고한 로마제국과 지배세력에 항변한 예수의 모습으로부터 이슬람으로부터의 개종자가 느끼는 기독교 근본주의에 의한 좌절과 혁명적 욕구를 투영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인기, “레자 아슬란의 젤롯:은폐된 욕망 읽기,” 309.).

3. 역사적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은 구약이 예언한 사건

아슬란의 혁명가 예수상은 전혀 복음서에 나타난 역사적 예수와 다르다. 아슬란이 인용하는 마태복음의 1034절이란 사회적 갈등을 부추기고 기존 체제의 전복을 말하는 혁명가로서의 예수의 말씀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이 구절은 복음의 전파 과정에서 나타나는 각종 영적 갈등과 가족의 갈등을 수용내지 감수해야 하는 복음 극단주의(Gospel radicalism)를 말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예수는 당시 로마시대에서 이미 세상의 평화가 세상의 질서를 거슬리고 세상의 이치와는 다르게 이루어짐을 지적한 것이다.

아슬란의 이러한 신약성경에 대한 해석학적 오해는 그가 지식적으로는 신약학자라고는 하나 신구약의 구속사적 체계적 연관성을 제대로 알지 못한 데서 기인한 것이다. 오순절 베드로는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을 예언하는 시편을 인용하였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16:8-11).

그리고 베드로는 다윗의 시편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110:1)을 인용하면서 다윗이 예수의 높이 올리우심과 승천을 예언했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예수가 그리스도와 주가 되게 하셨다”(2:36b)고 시편을 인용하고 있다. 예수의 메시아 되심에 관하여 누가는 사도행전(2: 25-28; 2:34-35)에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기록하면서 구약의 예언과 신약의 성취를 해석학적으로 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언약신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창세기 구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3:15). 출애굽기 구절,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18:18). 시편의 구절들,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의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110:4-5)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2:7). 이사야 구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7:14) 등의 성경 구절은 구약에 나타난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다.

이러한 구약의 예언들이 나사렛 예수의 인격과 사역에서 성취되었음을 복음서 필자들과 사도들은 그들의 서신에서 증언하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을 인용하면서 이러한 메시아 예언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을 증언하고 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1-3).

총결론

초대교회 시에는 영지주의들의 예수상이 사도적 교회에 도전했으나 사라졌고, 19세기에 자유주의적 인본주의 예수상이 나타났으나 오늘날 그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다. 20세기 말 이래는 영지주의 예수상이 다시 현대의 역사비판학의 방법과 결합하여 다시 나타나고 있다. 해방신학의 혁명가적 예수상은 1960년대 나타났다 사라졌다가, 2010년대 오늘날 아슬란(Reza Aslan)의 저서 젤롯(Zealot)을 통하여 다시 잠간 주목을 받고 있다. 혁명가적 예수상은 20019.11 테러 이후 일어난 아프칸 전쟁과 이라크 전쟁, 그리고 이슬람 원리주의자 알카에다의 테러가 오늘날 미국인과 유럽인들의 위협이 되고 있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기독교에 대한 이슬람의 안티기독교적 공격에 민감한 사람들에게 종교적 관심을 끌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상은 이미 1960년대 풍미한 해방신학과 혁명신학의 예수상처럼 오늘날 9.11 테러 이후 시대에 관심을 끌고 있으나 시대적 상황이 바뀌면 사라지게 된다. 앞서 언급한 바 같이 아슬란의 예수상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아니라 이미 지난 것의 되풀이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시대적 유행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의 역사적 사실과 진실에 충실히 머무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1세기에 역사적 예수에 관하여 영감적 통찰을 제시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13:8). 예수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대제사장”(5:10), “하나님의 아들”(5:5)이요, “영원한 구원(5:9)이시다.

기독교의 진리는 역사를 통하여 증명된다. 그것은 2천년 기독교 역사가 이를 말해준다. 서구와 북미의 기독교가 쇠퇴한 것은 사실이나 역사적 예수를 신앙의 그리스도로 믿는 복음주의 기독교는 여전히 부흥하고 있다. 서구에서 기독교 이후 시대가 도래하자 기독교의 축이 부구와 북미와 북반구에서 아시아와 남반구로 이동하고 있다.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의 기독교에서 역사적 예수는 바로 신앙의 그리스도로서 신자들을 통하여 경배되고 선포된다. 지금 12월 세계적으로 온 기독교가 대림절을 지키고 있다. 세계교회는 단지 지나간 기록상의 예수만을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오시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는 이러한 대림절과 성탄절에서 현재적으로 오시는 구세주로서 신앙 안에서 교회와 신자들의 현재적 인격적 체험 속에서 오늘도 살아계시는 구주(Kyrios)로서 증시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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