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가 우리 사회가 이렇게도 악해졌는지 모르겠다. 아님 본래부터 그러했는데 인터넷이란 매체가 생기면서 숨어있던 이런 악이 지층을 뚫고 올라온 화산재처럼 표출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지만 인터넷을 통한 악담은 그칠 줄을 모르고 계속 더해지고 있다. 단순한 비방과 욕설이 아니라 분노와 악의와 저주가 가득하고, 살기마저 느끼게 하는 “악플”들이 난무하고 있다.

더욱 답답하고 안타까운 사실은 이런 “악플”의 주인공들이 대개 젊은이들이라는 것이다. 아직은 때 묻지 않고 정의감이 강한 사람들이 젊은이들인데, 어디에서 그런 증오와 살의가 솟아나는 것일까? 비록 일부의 젊은이들이겠지만, 어찌 그들의 마음은 그렇게도 찌들고 한이 맺히고 상처가 많은지 모르겠다.

그런데 꼭 이런 “악플”들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주장이나 글들에 대해 응답하거나 반박하는 글들도 보면 예의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상대방의 글에 나타난 의도나 주장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채, 서로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안하무인으로 막무가내로 글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다.

예의란 삼강오륜과 같은 낡고 거창한 행위규칙이 아니라 인격을 인격으로 대하는 마음의 기본자세이다. 다른 사람의 생명과 인격을 존중하는 배려가 바로 예의다. 사랑도 그렇다. 참된 사랑은 불특정다수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된다. 내가 아는 사람, 가까운 사람,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 이런 이유들로 사랑하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으로는 참 사랑의 여부를 알 수 없다.

상대방이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 사람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상대를 존중할 수 있는 것이 참된 사랑이다. 이런 사랑이 없다면 민족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인권이니 정의니 함부로 말하지 말라. 사람을 사람으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마음 없이 무슨 인권이며 사랑인가. 인격을 무시하는 것은 바로 살인행위와 같다.

특히 우리 기독인들은 더욱 조심해야 한다. 예수님은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살인이라고 말씀하셨고, 사람을 보고 “라가”(특별한 뜻이 없는 히브리인들의 욕설이다)라 하거나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다. 또 토론은 모름지기 치열하게 이루어져야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치열한 토론에 불가피한 것은 냉정하고 치밀한 비판이다. 그러나 상대방을 무시하고, 짐짓 왜곡하고, 미워하고, 악담하면서 어찌 의를 이룰 수 있겠는가.

우리 코닷은 토론을 중시한다. 우리는 죄인이다. 그래서 잘못된 주장과 고집이 있을 수밖에 없음으로 토론이 필요하다. 토론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고, 서로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건강한 토론문화를 구축해서 타락한 인터넷 문화를 변화시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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