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

중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청교도운동’

-중국 가정교회의 청교도운동

▲ 이병길 목사

16, 17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청교도운동은 영국 국교(國敎, State Church) 에 대한 비국교도(非國敎徒, Nonconformist) 의 개혁운동이다. 20세기 중국에서 시작된 가정교회는 중국 당국이 관리하는 삼자교회(官方敎會)에 대한 중국의 청교도운동이라고도 부른다. 중국 교회의 특징은 교파 구분이 없다는 것이다. 다만 국가 공인(公認) 삼자교회와 비공인(非公認) 교회인 가정교회가 있을 뿐이다. 중국 가정교회를 영국의 청교도와 비교하는 이유는 그 연원과 진행 과정이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20세기 중국 교회를 말할 때 먼저 두 기관과 두 인물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두 기관 중 하나는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中國基督教三自愛國運動委員會, TSPM, Three-Self Patriotic Movement), 다른 하나는 중국기독교협회’(中國基督教協會, CCC, China Christian Council’), 이 두 기관을 합쳐서 량훼’(兩會) 라고 한다. 두 기관의 조직 목적과 활동 범위의 공통점은 중국공산당과 인민정부의 지도하에 통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삼자회는 외견상 교회 조직인 것 같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정부 기관이다. 기독교협회는 삼자회에 등록된 전국 교회 연합체다.

이들 두 기관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두 인물은 이미 중국 역사속에 사라진 우야오쫑(吳耀宗, 1893-1979) 목사와 띵꽝쉰(丁光勳, 1915-2012) 성공회 주교다. 여기서는 삼자회와 가정교회, 그리고 우야오쫑에 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

공산당 외곽조직: 淸洗基督敎內的反革命分子

기독교 안의 반혁명분자 숙청이라는 뜻이다. 최근 중국 공산당 편향지 홍콩의 따꽁바오(大公報, 1902)에 실린 기사 제목이다. 좀 생뚱맞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사에 언급된 반혁명분자는 중국 사회주의 혁명에 역행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중국 관계 당국은 반혁명분자들이 기독교 교회를 은신처로 이용하여 반혁명 활동을 하고 있다고 보고, 이들 검거에 공권력을 대거 투입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중국 당국은 기독교는 일찍부터 제국주의 침략에 이용된 종교라는 전제하에서 외국인 기독교 인사가 중국내에서 포교하는 것을 허용치 않을 뿐아니라, 외국인 기독교 인사의 중국 내에서 종교 활동은 삼자종교원칙’(三自宗敎原則) 에 의하여 종교 정책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아시아방송(RFA, Radio Free Asia, 14.2.18) 에 의하면 중국 삼자회의 발기인 우야오종의 아들 우쫑수(吳宗素, 84) 는 삼자회를 가리켜 ‘100분의 100은 공산당 외곽조직’(百分百是共产党的外围组织) 이라고 지적한 것을 보도했다. 이는 20142,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미국 거주 화교 기독교인 집회 강연에서 한 말이라고 한다. 강연에서 우쫑수는 삼자의 애국교’(愛國敎) 는 다 거짓이며, 내 아버지는 비극적인 인물이라고도 회고했다.

제국주의 잔재 청산 : 삼자회는 어언 64년의 역사를 지녔다. 1950923,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르언민르바오(人民日報) 는 중국 기독교 전국 대표자 1,527명이 서명한 삼자회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날이 바로 중국 기독교 삼자회가 사실상 발족한 날이며, 공식 조직은 1954722~86, 베이징에서 열린 전국 기독교 대표자 232명이 참석한 제1차 회의에서다.

당시 베이징의 60여 기독교 단체 중 11개 단체 대표 100명만 회의에 참석했다. 이날 비로소 중국기독교삼자애군운동위원회라는 명칭이 공식화 되었고, 동시에 139명의 전 중국 기독교를 대표하는 위원을 선출하므로 써, 명실 공히 삼자회가 중국 공산당 외곽 기구로서 정식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이에 앞서 당국은 삼자회를 반대하는 기독교인을 규탄하는 일종의 인민재판격인 공소운동’(控訴運動) 을 벌여 측면 압력을 가해, 19514월에 18만 명, 19546월에 417,389명이 각각 서명하게 했다. 이는 당시 전국 기독교 인구 70만 명의 과반이 서명에 참여하게 한 셈이다. 1950년 경 중국 기독교 인구는 개신교 100만 명, 로마 천주교 300만 명이었을 것으로 추산한다. 그러나 공식집계는 70만 명이라고 했다.

그러나 삼자회를 반대한 왕밍따오(王明道, 1900-1991), 니투오썽(倪柝声, 1903-1972, Watchman Nee) 등 수많은 기독교인은 신앙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모진 박해의 길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소운동의 매서운 칼바람은 1950년대를 거쳐 대약진’(大躍進, 1958-1960), ‘문화혁명’(1966-1976) 시기까지 이어졌다. 삼자회에 가입하지 않거나 반대하는 개인과 교회를 가정교회라고 하고, 이들을 중국의 청교도라 부르게 된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삼자원칙 종교관리 정책 삼자원칙은 원래 19세기 영국의 선교 이론가 및 행정가인 헤리 벤(Herry Venn, 1796), 그리고 미국의 선교 이론가 루퍼스 앤더슨(Rufus Anderson, 1796-1880) 이 정립한 토착교회(Indigenus Church) 개념에서 비롯된다. 즉 자전(自傳,self-propagating), 자양(自養, self-financing), 자치(自治, self-governing) 를 내용으로 한 선교원칙 이다. 이 원칙을 실제로 선교지에서 적용한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 소속 네비우스(John Livingstone Nevius, 1829-1893) 목사다. 이를 네비우스 선교방법이라고 한다. 그러나 중국에서 네비우스 선교 방법은 기대한 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오히려 한국 환경에서 실효를 나타냈다.

중국 당국이 삼자원칙을 정치적으로 교회에 적용한 기본 정신은 명분상 중국 교회의 독립이다. 그러나 실제적인 목적은 기독교 내에 잠재된 제국주의 색채를 제거하는 데 있었다.

이는 19504월 당시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893) 가 우야오쫑과 만난 자리에서, ‘기독교 내부에 제국주의 주구를 청산하고, 종교계의 유해한 존재를 제거해야 한다’(指出要清算在基督教裏甘心做帝國主義走狗的教徒要清除宗教界的害群之馬) 는 신중국 종교정책 메시지를 전하면서 그 진의가 파악된 것이다. ‘하이췬즈마’(害群之馬) 는 중국 고사성어로서 다른 조직이나 개인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를 가리키는 은유적 표현이다. 저우언라이에게 기독교는 하이췬즈마에 불과했다. 말하자면 기독교는 중국 사회주의 혁명전선에서 타도의 대상이었다. 기독교는 사회주의 혁명 과정에 유해한 종교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저우언라이는 유해한 기독교를 사회주의 혁명전선에 유익하게 이용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고, 기독교를 국가 통제하에 둔 것이다.

우야오쫑은 정치적 감각으로써 저우언라이의 내심을 파악하고, 교회의 행정독립 자치(自治), 경제적 독립의 자양(自養), 인사적 독립의 자전(自傳) 을 원칙으로 하는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이 되었다.

삼자회와 중국기독교 신생’ : 1949101일 이후 중국 현대사는 신중국’(新中國) 이라는 이름을 매우 의미 있게 사용해 왔다. 이 말은 중국근대 사상가· 정치가· 교육가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 의 정치 이상 新中國未來記(1902) 에서 인용된 말이라고 한다. 중국은 신중국 이전을 반봉건반식민半封建半植民시대로 보고, 그 중심에 봉건적이고 식민지배 구조의 기독교가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의 체질 변화가 불가피했던 것 같다.

중국 공산당은 신중국 이전을 구중국’(舊中國), ‘구사회’(舊社會) 로 규정하고, 새로운 중국 시대에 맞는 종교 형태가 필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공산주의 이론과 기독교 신학의 접목을 구상한 우야오쫑이 삼자회라는 작품을 만들어냈고, 이 작품을 통하여 신중국 정치 질서에 부합된 기독교 형질 변화를 중국기독교 신생’(新生) 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 같다(中國網). ‘신생이라는 말은 기독교 교리의 중생을 연상케 하는 것 같다. 삼자회는 기독교에 침착(沈着) 봉건적이고 식민적인 뿌리를 완전히 도려내는 정치 공학적 의미를 갖고 태동한 것이다.

우야오쫑이 언급한 중국기독교 신생은 삼자회 혁신운동, 즉 기독교 내에 미 제국주의 색채를 도려내는 것이었다. 중국 당국이 삼자회를 통일전선전위대로 이용하여 기독교 내 제국주의 잔재 청산을 기도(企圖) 한 내용에는 미국의 정치적 위선과 문화침략이 포함된다. 미국의 정치적 위선이란 기독교 선교를 가장한 정치적 침략, 문화 침략은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학교를 세워 교육을 통한 중국 정신문화에 상당한 악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뜻한다. 삼자회 조직의 궁극적 목적은 중국 땅에서 기독교를 소멸시키는 데 있다(博訊新聞網,2009.12.11). 이를테면 1950년대 말 일부 교회와 신학교가 병합 축소되는 사례가 있었다. 상하이의 40개 교회가 8개 교회로, 베이징의 66개 교회가 4개 교회로, 전국 10개 신학교가 4개로 각각 병합 축소되었다(新疆智庫網,2014.11.19)

삼자회 발기인 우야오쫑 : 출신과 경력: 우야오쫑은 중국 광저우(廣州) 출신, 1918년 베이징 감리교에서 세례를 받고, 한 때는 세무사, 1920년부터는 베이징 기독청년회(YMCA) 간사로 활동했다. 1924년 미국 뉴욕에 있는 유니온신학교와 콜럼비아대학교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석사학위를 취득, 1927년에 귀국하여 상하이 중화기독교청년회(YMCA) 전국연합회 간사로 활동했다.

당시 중국 사회는 5.4학생운동(1919) 으로 이어진 지식계층의 신사조, 신문화운동의 열기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때마침 소련의 10월 혁명 성공 여파가 중국에 미치자 이에 고무된 중국 공산당 활동이 탄력을 받게 되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 편승한 우야오쫑이 사회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을지 모른다.

사상적 활동: 어쨌든 우야오쫑은 20세기 초 기독교 현대 사조의 하나였던 사회복음주의파로 경도 경도되었으며, 1947년에 이미 공산주의를 지지하고 있었다. 중국 기독교 근본주의 관점에서 우야오쫑은 불신파’(不信派), 중국 공산당 관점에서는 기독교 내부의 진보주의 자로 각각 분류되었다.

우야오쫑의 아들 우쫑수가 아버지가 한 모든 일 배후에는 검은 손, 즉 공산당이 있다’(父親所做的一切背後都有一隻黑手這隻黑手就是中國共產黨)(阿波羅網) 라고 한 회고에는 그 시사하는 바가 많다. 2010622일 홍콩 중문대학에서 거행된 세미나에서 우쫑수는 그의 아버지를 화해주의’, ‘사회주의’, ‘기독교 사회 활동가라고 소개하고, 우야오쫑의 중심사상을 유심론(唯心論)과 유물론(唯物論) 의 조화라고 평가하고, 아울러서 신앙은 우주와 사회법칙에 대한 인식과 생활’(阿波羅網) 이라고 회고했다.

대표적인 저서: 1940, 50년대 중국 신학의 대표적인 세 권의 책은 우야오쫑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沒有人看見過上帝, 우레이촨(吳雷川, 1869-1944) 기독교와 중국문화: 基督敎與中國文化, 짜오쯔천(趙紫宸, 1888-1979) 기독교철학: 基督敎哲學을 꼽는다. 우뢰촨과 삼자회 상무위원을 역임한 짜오쯔천은 1920년대 베이징에 있는 옌징대학(燕京大学) 의 교수를 역임한 학자들이다. 특히 짜오쯔천은 문화혁명 당시 갖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옌징대학은 1919년 미국 감리교와 영국의 교회들이 연합하여 세운 유수한 사립대학이다.

이들 세 사람은 공히 중국에서 기독교의 토착화(本色化) 에 이바지한 인물들로 평가된다. 즉 기독교에서 제국주의 색채와 외국인 선교사의 영향에서 탈피한 중국 문화와 사회주의 혁명에 부합하는 교회 체질을 바꾸는데 공헌했다는 말이다.

우야오쫑은 기독교의 중심사상을 구속론적 관점이 아닌 구조적 사회 관점에서 평화주의’(唯愛主義, Pacifist Movement) 라고 판단하고,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모순이 충돌하는 폭력을 반대했다. 그러나 우야오쫑은 비폭력으로 공산주의와의 타협 방법을 모색하는 중에 결국 공산주의에 굴종하게 되었고, 그 결과는 폭력을 생산하고 말았다. 그 폭력이 바로 삼자회에 협조하지 않는 교회와 기독교 지도자들을 채포 구금하는 공소운동’(控訴運動) 형국으로 몰고간 것이다.

신학사상: 우야오쫑은 기독론에서 도덕적 이상과 민족주의적 정서로써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근했다. 즉 우야오쫑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도덕적 모범 자였으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인을 구속하러 오신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지 않았다. 우야오쫑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적 모델이었으며, 특히 산상보훈에 대한 이해에서 그 실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한 우야오쫑은 성경에 기록이적, 오병이어’(五餠二魚) 이적을 하나의 비유로 보았다. 중국 가정교회가 보는 우야오쫑의 신학사상은 다음 다섯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성경의 무오성 부인.

성경은 역사적 비판의식으로 이해 해야 하며, 하나님의 창조를 부인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부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은 믿지만 동정녀 탄생은 부인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표현.

하나님의 죄에 대한 분노와 심판, 그리고 구속의 대가를 부인

육체적 부활 부인.

부활을 믿지만 육체적 부활은 부인

그리스도의 재림 부인.

그리스도의 재림은 시() 적 상징이며 죄악에 대한 정의를 표현

-인용每週論壇 615: 舍禾溫州家庭教會傳道人2004.5.26/6.28-

가정교회는 우야오쫑의 위와 같은 신학사상을 윗물이 맑아야 흐르는 물이 맑고, 윗물이 탁하면 흐르는 물도 탁하다’(源清則流清源濁則流濁) 라고한 순자(荀子) 의 고사 성어를 들어 삼자교회를 비판했다. 윗물인 삼자회가 탁류인데 아랫물인 삼자회 소속 교회들이 맑을 수 있겠는가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중국 삼자회는 엄격하게 말해서 중국 공산당이 추구하는 신중국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애국단체, 즉 중국 공산당 구미에 맞게 교회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국영기업에 불과하다는 표현이 매우 흥미롭게 받아들여진다. 물론 삼자회에 등록된 교회를 통하여 개인적으로 성경적 신앙을 가진 신도들도 존재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일부 산자회 교회 교인들은 삼자회 통제에 대하여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가정교회는 삼자교회를 팟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판 국가 기구라고 한다.

최근 중국 정부 종교국이 삼자회와 중국 기독교협회의 자료에 근거한 발표에 의하면, 전국 기독교 인구는 2,305만 명, 교회당은 5만 개, 목사 4,000, 교회 사무원등 187,000, 전국에 신학교와 성경학교 20, 그중 대표적인 신학교가 바로 난징(南京) 에 있는 금릉(金陵) 신학교, 지금까지 출판된 성경은 5,800만 권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금릉신학교는 원래 1911년 미국 감리교에서 설립한 난징성경학원(Nanking Bible Training School) 에서 시작되었으며, 1952112, 삼자회 원칙에 의하여 애국애교배양’(培养爱国爱教) 을 목적으로 다시 조정되었다.

우야오쫑은 중국 당국에 의하여 모범적인 애국종교인사’(愛國宗教人士的典範) 로 분류되지만중국 가정교회에서 우야오쫑은 종교의 탈을 쓴 공산당 공안(披上宗教外衣的共黨特務)혹은 기독교의 반도’(基督教的叛徒), ‘중국의 가룟 유다’(中國的猶大) 라는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중국 가정교회의 청교도운동

가정교회와 지하교회: 가정교회’(House Church in China) 라는 이름은 20세기 중국의 역사과정 중 특수한 정치적 상황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비합법적인 교회, 즉 개인적 자원에 의하여 생성된 무형 교회를 일컫는 말이라 볼 수 있다. 가정교회를 지하교회라고도 하는 것은 집회의 장소와 시간이 비공개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물론 지하교회는 중국 국무원령 제145: 종교활동 장소관리 법법에 위반이다. 중국 당국은 기독교, 로마 천주교, 도교, 불교, 이슬람교 등 5대 종교를 공인하고 있다. 공인 종교는 종교 활동을 공개적으로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가정교회는 공인되지 않은 비합법적 교회이기 때문에 신앙 활동이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가정교회 생성과정: 중국 가정교회의 역사를 꼭 찍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대체적으로 1951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이해된다. 왜냐하면 중국 변경(邊境) 의 한반도 상황이 신중국 건설과 맞물려 발생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 이 신중국 통일의 마지막 해방구’(解放區) 타이완 도해작전’(渡海作戰) 준비를 완료하고 타이완 해협의 기상 조건을 검토하고 있던 중 한반도의 전쟁 소식을 전해들이 것이 바로 그때였다. 마오쩌둥은 타이완통일을 걱정했다. 19495, 마오쩌둥은 김일성(金日成, 1912-1994) 의 비밀특사를 통하여 한반도의 전쟁에 이미 동의한 상태였지만 타이완 해방이 더 중요했다.

타이완 해방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한반도의 전쟁 소식은 신중국 건설에 대한 풀기 어려운 대내외적인 정치적 난제였다. 왜냐하면 한국전쟁이 타이완으로 패주한 국민당에게 대륙으로의 반국(返國) 빌미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첫째 우려였고, 대내적으로는 국민당 잔류자들을 비롯한 반공 계층의 수습과 통합이 난제라는 부담이었다. 이 두가지 난제를 풀 수 있는 것이 바로 한국전쟁 참전 결심이었다. 사실 신중국 건설 발판이 불안한 상황에서 사회주의 혁명전선을 타이완 해협전선과 국내전선, 급기야는 압록강 전선으로 분산 시키는 것은 물리적으로 만만치 않았다.

마오쩌둥이 한반도 전쟁에 동의할 때만 해도 미국이 본토에서 태평양을 건너 한반도 전쟁에 참전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한국전쟁 전세는 급변하여 급기야 한만국경이 위협을 받게 되었고, 때를 기다린 마오쩌둥은 19501019일 사전 선양(瀋陽) 에 집결시켜 둔 인민해방군을 압록강을 건너게 했다. 한반도에서 미 8군과 혁명전선을 펴기 위해서였다.

인민해방군의 한국전쟁 참전은 신중국 건설에 몇 가지 중요한 통합의 명분을 갖게 한 것으로 이해된다. 즉 인민행방군의 한국전쟁 참전은 정치적으로 미국과 싸우고 북한을 도와 가정을 보호하고 나라를 지킨다’(抗美援朝 保家衛國) 는 명분이었다. 이것은 중국민족 정서에 강한 호소력을 지닌, 인민해방군 동원의 결정적인 구호였다. 왜냐하면 북한을 구하는 것이 곧 중국을 구하는 것’(救朝鮮就是救中國) 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 인민해방군의 사기를 진작케 한 중국 속담이 바로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순망치한’(脣亡齒寒) 이었다. 즉 중국과 북한의 관계를 비유하는 말이다.

당시 신중국은 한국전쟁을 타이완에 망명한 국민당을 지원한 미국이 한반도에서 중국의 완전통일과 안보를 다시 위협하는 전쟁이라고 판단하고, 북한군과 함께 미군을 공동적으로 대항하기 위해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것이다. 이 명분은 대외적으로 북한을 지원하여 한반도에서 미군을 막는 것이고, 대내적으로는 1807년부터 143년 간 중국에서 선교한 미국, 영국 등의 제국주의 잔재를 청산하는 명분이기도 했다. 이로써 중국 인민해방군의 한국전쟁 참전은 역리적이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우려했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신중국의 정치적 안정은 동일 맥락에서 공소운동으로 종교적 결집을 도모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가정교회가 생긴 것이다.

가정교회와 공소운동: 기독교 선교는 중국의 전통과 문화를 침략한 하이라는 전제에서 이를 중국내에서 청산하는 작업이 바로 삼자회가 주관한 공소운동’(控訴運動) 이었다. 공소운동은 1950년대 초 중국에서 진행된 토지개혁, 항미원조, 반혁명 진압과 함께 중요한 사건으로 취급된다. 공소운동은 북한의 인민재판과 같다고 할 수 있을까.

공소운동 1951416~21일까지 베이징에서 중국 정무원 문화교육위원회 종교사무처가 주관, ‘미국이 점거한 기독교 단체 접수 처리 회의에서 시작되었다. 회의는 전국 31개 종교단체 대표 154명이 모인 가운데 진행되었다. 회의의 목적은 중국 기독교 안에 남아있는 미국의 잔재를 청산하는 것이었다. 이 회의에서 공소운동이 결정된 것이다. 공소운동이 신학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을 뒷받침한 사람이 바로 삼자회 발기인 우야오쫑 목사다. 그래서 우야오쫑을 중국의 가룟 유다라고 한다. 그 후 중국 전역에는 공산당에 협조하지 않는 종교인들을 대량 체포와 구금하는 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1951년 전국 137개 지역에서 228차 대규모 공소대회가 열려 수많은 목회자와 교인들이 고난의 행군에 참여하게 되었다. 베이징회의를 마친 425일 우야오쫑은 그의 생애에서 또 다른 불명예스러운 회의를 주관, 회의에서 산동성 중국인 목사 최헌상(崔憲詳, 1895-1980) 이 먼저 발의하여, ‘제국주의 분자첫 공소 대상자로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상하이 국제교회의 목사 프랭크 프라이스(畢範宇, Frank Wilson Price, 1895-1974) 를 비롯한 18명의 선교사와 중국인 목사들을 지목했다. 프라이스 선교사의 죄명은 국민당 장제스(蔣介石, 1893-1976) 의 정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혐의였다. 프라이스는 항일전쟁 당시 장제스의 고문이었다. 프라이스는 바로 체포되어 사형 언도를 받고, 실제로는 1950-1952년까지 가족들과 함께 상하이에서 22개월간 연금 상태로 지내다가 1952년 추방되어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볼 때 가정교회는 1951년 베이징회의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 때부터 중국 전역에 공소대회가 열리면서 신실한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삼자회의 박해를 피하여 흩어지게 되었고, 혹은 소수의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은밀하게 모여 예배를 하면서 가정교회가 시작되었다.

가정교회의 청교도운동: 영국에서 종교개혁은 헨리 8(Henry , 1491-1547) 의 아들 에드워드 6(Edward , 1537-1553) 때 상당한 진전을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블러디메리(Merry, 1516-1558, 재위1553-1558) 여왕이 집정하면서 개혁이 25년 정도 후퇴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메리 여왕의 통치하에서 존 칼빈(1509-1564) 사상 추종 개혁자들은 고난의 행군 가운데서 300명이 화형장으로 끌려가 순교를 당하기도 했다. 개혁자들은 1558년 엘리자베스 1(Elizabeth , 1533-1603) 의 집정과 때를 같이하여 개혁의 목소리를 한층 높였다. 이 개혁자들을 교회 역사는 청교도’(Puritans) 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 후 청교도들은 찰리 1(Charles, 1600-1649) 의 잔혹한 통치에서 길고도 모진 박해를 감수해야 했다.

영국의 청교도운동과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중국 가정교회 운동은 각기 다른 시대 배경과 역사적 동기에서 발생한 것이지만 순결한 신앙 본질에서 서로 비교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영국 국교와 중국 가정교회: 영국 국왕권이 국교의 수장 위치에 있다면, 중국에서 삼자회는 구조적으로 삼자회에 공인된 교회 위에 군림하고 있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영국의 국교와 중국의 삼자회 교회가 서로 비교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삼자교회는 제도적으로 마르크스주의 이념을 중심한 권력이 교회에 군림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삼자교회 안에도 많은 신도들과 목회자들 일부가 삼자회 제도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는 않는다. 이는 마치 영국 국교 안에 있었던 당시의 현상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가정교회와 분리파: 청교도는 영국에서 분리파혹은 분리주의자들로 분류되었다. 영국에서 청교도는 국교와 분리된 독립교회, 국가의 권력으로부터 분리, 순결한 교회를 개혁 목표로 삼았다. 청교도는 예배와 교회제도 등에 있어서 국교와는 달리 성경 중심적이었다. 마찬가지로 중국 가정교회는 삼자회 조직체계와 국가 공권력으로부터 완전 독립된 교회다. 이것은 중국 사회주의 신중국 건설 질서에 역행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교회는 지난 6여년 간 박해를 감수하면서 순결한 교회운동을 진행하고 있다는 차원에서 청교도 시각으로 보는 것이다.

청교도와 가정교회의 박해: 영국 청교도들이 받았던 박해와 중국 가정교회가 받고 있는 박해는 역사의 과정과 시대배경 및 박해 형태가 같은 것은 아니다. 중국 가정교회는 1949년 공산당 집권 이후 신중국 건국초기, 문화혁명시기, 개혁개방시기 후, 도심지 교회의 부흥에 대한 정부의 일관된 정책 보호 밖에 있었다. 중국에서 가정교회는 여전히 당국의 감시 하에 있다. 영국에서 메리 여왕 시기에 청교도가 당했던 박해와 16세기 프랑스의 위그노 박해 중에서도 청교도와 위그노가 각각 발전했던 것처럼, 중국에서 가정교회가 발전하고 있다는 점은 21세기 교회들에게 주는 하나의 역사적 희망 메시지라고 생각된다. 중국 가정교회연합회 회장 장() 아무 목사는 예수 믿은지 22년 동안 12번 채포, 구금을 당했다고 한다.

신앙자유와 민주주의: 영국에서 청교도운동은 영국의 민주주의를 재촉했다고 생각된다. 중국에서 가정교회는 표면적으로는 구조적 힘이 없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낙관적 해석가들은 중국 가정교회가 중국의 민주화에 촉진제가 될 것을 믿고 있는 것 같다. 중국 가정교회는 지금도 영국 청도들이 걸었던 그 고난의 길을 묵묵히 걷고 있다.

강정교회 발전과정: 개신교 중국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중국 가정교회의 발전은 세 단계로 구분된다. 이 세 단계는 관점에 따라서 조금씩 다를 수 있다.

소형화 교회시대: 1978년 개혁개방, 1979년 종교개방 이후

197948일 이른바 정부 관리하의 관방(官方) 교회인 삼자회 소속 닝뽀(寧波) 의 바이넨탕(百年堂, 1848) 이 문화혁명 후 처음 닫힌 문이 열리면서, 197992일에는 상하이의 무언탕(沐恩堂, 1874), 베이징의 미쓰탕(米市堂, 1865) 등이 차례로 문을 열었다. 미쓰탕은 영국 런던선교회가 세운 교회로서, 문화혁명 당시 패쇠되었으나 1973년 화교를 위해 유일하게 문을 열었던 교회이기도 하다.

대형화 교회시대: 1990년대

1990년대까지 중국에서 가장 유명했던 5대 농촌 가정교회는 탕허(唐河), 팡청(方城), 리신(利辛), 잉쌍(穎上), 온저우(溫州) 교회로 꼽힌다. 당시 삼자회 교회 전국 인구가 1,500만 명 정도였던 반면에 가정 교회는 약4,000만 명에 달했다.

도시화 교회시대: 2,000년 이후

이 시기 농촌 인구가 도시로 집중되면서 농촌의 가정교회는 점차 쇠락 현상을 보인 대신, 도심지 가정교회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현상이 빚어졌다. 현재 중국 인구의 50%가 도시에 집중되어 있으며, 20년 후에는 도시 인구가 전체 인구의 75%를 차지할 것이라는 전망을 하기도 한다. 현재 중국에는 인구 100만 명 이상의 도시가 600개 인 점을 고려하면, 가정교회의 도시화는 계속 발전할 것으로 보인다.

가정교회의 신앙고백:1998년 중국 가정교회 연합회는 가정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신앙고백 내용, 즉 성경론, 삼위일체론, 기독론, 구속론, 성령론, 교회론, 말세론을 성명서 형식으로 발표했다. 가정교회의 신앙고백은 전 세계 모든 개혁교회가 믿는 신앙의 원리와 행위의 준칙인 성경에 두었다. 가정교회는 교회론에서 교회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신 자들로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 하나님의 집, 진리의 기둥과 터인 것을 믿는다고 명시했다. 따라서 교회의 행정은 성경의 원칙을 따르며, 신령한 일에 있어서 세속 권세의 지배와 통제를 받지 않는 것을 원칙적인 전제로 하고, ‘다만 (그리스도인의) 공민권 의무에 있어서는 국가의 법률을 준수한다고 했다. ‘교회와 정부의 연합을 반대하고, 교회의 발전을 위해 국외 정치에 의존하는 것도 반대하며, 교회가 민족단결과 국가 통일을 파괴하는 활동을 반대한다는 내용이다.

이 성명은 중국 화베이(華北)에서 모인 전국 가정교회 지도자 연합회에서 채택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정교회의 신앙고백은 네 가지 중요한 목적을 위해서 재정되었다. 즉 가정교회 자체 내부 신앙의 공동 표준을 위하고, 가정교회와 국내외 그리스도인 형제 교회와의 결속을 다지는 기초, 정부와 시민들에게 가정교회의 신앙입장 천명, 특히 가정교회가 이단과 사교와의 구별 짓는 목적이 있다.

가정교회의 전통:  1949~2009, 중국 가정교회는 60여년 간 근본주의 신앙과 십자가의 길을 견지(堅持) 하며, 내재적 생명과 회개, 기도, 성령의 역사를 중시해 왔다. 신앙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유일한 머리 되심을 믿으며, 현대문화에 대하여는 성경의 무오성과 계시의 완전성, 정교합일체제(삼자체제) 하에서 정교분립 원칙, 박해중에서 비폭력 원칙, 민족주의 국가 체제하에서 하나님의 보편적 세계 인정 등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


도전 받는 중국 교회

한 때는 중국 대륙을 기독교의 청정 지역이라 할 만큼 종교적 순박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 중국 교회는 놀라운 발전과 함께 피해갈 수 없는 거대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는 것 같다. 관방의 삼자 교회이든 가정 교회이든 공히 도전을 받고 있는 현실이다.

정치화 도전: 중국 당국의 통제 하에 있는 관방의 삼자교회 목회자들은 거의 정부 행정구조에 매여 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최근 베이징의 쏘우왕(守望) 가정교회 사건은 중국 교회가 만나고 있는 정치적 현실을 실감케 한다. 쏘우왕교회는 1993년에 시작된 교회로서 1,000명의 교인으로 성장한 교회다. 중국 기독교 언론에 의하면, 교회가 당국의 압력으로 집회장소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자 당국과 충돌, 교인 중 일부가 채포 연행되었다고 한다. 사건의 진상은 차치하고라도 당국이 교회와 충돌을 야기한 것은 정치적 간섭이라는 비판에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이다.

이단화 도전: 기독교 역사 발전에서 극단적이고도 이단적인 시비는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중국에서도 현재 그 이단에 대한 심각성이 대두되고 있는 것 같다. 중국에서 자생된 동팡선덴교’(東方閃電敎) 1991년 중국 헤이롱장성(黑龍江省) 하얼빈에서 짜오웨이산(趙維山, 1951) 에 의하여 시작되어 중국 전역을 포함하여 한국, 일본,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미국, 카나다에 이르기까지 신속하게 확산되었다. 당국에서 이미 내사에 들어갔다고는 하지만 그 귀추가 주목되는 현실이다. ‘영원교회永源敎會’, ‘전능신교全能神敎라고도 하는 이 이단은 1990년대에 1,000명의 신도로 급성장했다고 한다. 한국 교회에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교회로 매우 강한 기세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세속화 도전: 중국 교회의 발전은 전 세계 교회가 주목할 만큼 놀라운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일각에서는 중국 교회에 대한 우려의 시각도 만만치 않다. 그 우려는 바로 세속화의 문제다. 교회의 발전은 역사의 어두운 상황과 시대의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언제나 새순처럼 생명을 유지하는 특성을 지닌다. 중국 경제 발전은 비즈니스 하는 교인들에게도 좋은 기회와 환경이 되고 있다. 그러나 신앙의 가치관과 비즈니스가 서로 양립 상태에서 충돌을 빚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중국 교회 역시 서방교회들이 과거에 겪었던 것처럼, 교회 안에서 물질주의가 팽대해 지고 있다고 한다. 더 큰 우려는 중국 교회는 서방교회와 달리 물질주의에 대한 면역력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맺는 말

2014년 중국 전체 인구는 133474만 명, 그 중 기독교 인구 점유율은 1.74%2322만 명, 이는 아직도 중국 전체 인구의 98.26% 가 한 번도 기독교 복음에 접해본 적이 없는 것을 나타낸다(FEBC CHINA MINISTRY ). 중국 23개 성() 5개 자치구, 4개 직할시, 홍콩과 마카오 2개 특별행정구의 성별(省別) 기독교 인구는 474만 명의 허난성(河南省) 이 가장 많고, 그 뒤를 이어서 안휘성(安徽省) 300만 명, 저장성(浙江省) 186만 명, 장수성(江蘇省) 155만 명, 윈난성(雲南省) 119만 명이 차례로 뒤를 이었고, 기독교 인구가 가장 저조한 지역은 하이난성(海南省) 4만 명, 가장 저조한 자치구는 1만 명의 시장(西藏) 자치구라고 한다.

중국 당국이 확인한 56개 민족 중 인구 100만 명 이상의 소수 민족 18, 10만 명에서100만 명의 소수 민족 17, 10만 명 이하 20개 소수 민족이 현재 전혀 기독교 복음을 접하지 못하고 있으며, 미확인 소수민족 734, 438, 중국 귀화 외국인 941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기독교의 실제 인구는 위의 공식적인 통계보다 훨씬 높게 추산하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한 중국의 공식 채널에 근거한 중국 교회의 성장은 고난과 박해 가운데서 성장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00년의 중국의 전국 기독교 인구 9만 명은 49년이 지난 1949년에 100만 명으로 증가했고, 1982년의 300만 명의 기독교 인구는 14년이 지난 1996년에 1,000만 명, 그리고 2006년에는 700만 명으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실 중국에서 인구수를 말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국토 면적이 큰 데다가 섬세하게 조사할 수 없는 조건 때문에, 실제로는 기독교 인구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 같다.

중국의 기독교 인구는 미국과 브라질에 이어서 전 세계 3대 기독교 반열에 들고 있다. 비공식적인 통계이기는 하지만 현재 중국의 기독교 인구는 11천만 명, 매일 1만 명의 기독교 인구가 증가한다고 한다(新浪新聞, 2011.481) 물론 로마 천주교를 포함한 통계다. 놀라운 것은 매일 증가 인구 중 6%가 가정교회 교인이라고 한다. 혹자는 이런 증가 추세로 볼 때 20내에 중국이 전 세계에서 최대 기독교 국가가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중국에는 최소한 80만 개의 가정교회 조직(新浪新聞. 李凡) 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대체적으로 중국 13억 인구 중 6%~10%가 기독교 인구일 것으로 추산한다면, 중국 경제가 2050년에 미국의 국민 평균소득 수준을 넘어선다고 가정할 때, 기독교의 인구가 전체 인구의 51%를 차지할 수도 있다고도 한다.

중국 기독교는 1900년 의화단(義和團, 1899-1901) 사건을 기점으로 1920년대에 이르기까지 반기독교 정서가 팽배했다. 당시 가혹한 핍박 가운데서 189명의 기독교인이 순교한 가운데 79명이 내지회 선교사들이라고 한다(傳書.David Aiman)

그런가 하면 중국 교회의 양적 성장과 함께 세속화를 우려하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한 매체에 의하면 중국 교회는 양적 성장을 보이고 있는 대신 질적으로 심각하게 쇠락하고 있다고 한다. 즉 교회가 본래의 맛이 변하고 있다’(正在变味) 는 것이다. 예배당은 퇴임한 노인들의 휴식공간과 놀이장소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중국 경제의 신속한 발전과 함께 교인들이 순결한 영혼에 대한 거룩한 갈망보다 물질적 치부에 기울고 있다는 것이다.

무신론 공산당 60여년 통치하의 중국에서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삼자교회이든 가정교회이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할 수 있고,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는 교인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청교도를 모델로 삼아 중국 땅에서 순결한 교회 건설을 위해 십자가의 길을 선택한 가정교회, 영국 청교도들은 뉴잉글랜드로 망명이주 했으나 중국의 가정교회는 중국 대륙을 지키고 있기에 더 존경스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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