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2013 가을 개혁신학회 학술대회(2013. 10. 5)에서 발표한 원고를 수정 보완하였습니다. -필자-

분량이 너무 커서 2회에 나누어 올릴 수밖에 없음을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각주는 파란 글씨로 문단 끝에 달았습니다. -코닷-

쉐마교육(쉐마 교육연구원)에 대한 개혁주의적 조명(1) 

1 서론

▲ 서영준 고신대학교 기독교교육과 조교수 동 대학원 기독교교육과(PH. D.) 고신의대간호대 벧엘의료선교회 간사 부민교회 교육목사

교회는 지속적으로 성장을 꿈꾸고 그 꾼 꿈이 실현되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최선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 왔다. 한국 교회는 교회의 성숙과 성장, 그리고 성경적 교회를 세우기 위한 운동과 움직임을 다방면에서 일으켜 왔다. 그러한 운동에 교육은 상당한 일조를 했다. 교회는 기독교교육을 통해 성경을 가르치고 고백하는 교리로 교회와 가정의 자녀들을 양육해 왔다. 그리고 한국의 기독교교육은 교회만이 아니라 한국 근대 교육의 발전을 도모하고 보편화시키는데도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의 교육적 노력과 활동에도 불구하고 작금의 교회는 성장이 멈추고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고 걱정하고 있다. 믿음의 자녀들조차도 교회를 등지거나 기독교와 성경에 관심을 두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하고 있기에, 이런 일이 지속되면 앞으로의 교회가 어떻게 될 것인가라고 고민하고 있는 것이 현 실정이라 하겠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를 타개하고 성경적인 교육이 교회교육에 정착되어 과거 역사 속에서 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더 활발한 운동과 기독교의 정체성 회복 및 자리매김을 할 수 있는 방안이나 비책을 찾는 일에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나름대로의 주장을 가지고 성경적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상당히 대중적이라 할 만큼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교육열풍 가운데 하나가 쉐마교육이다. 쉐마교육은 가정교육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이론적으로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교육과정을 통해 교육의 열매를 얻고 있으며, 쉐마의 명령에 따라 부모를 통한 자녀의 신앙교육이 세대간의 단절을 극복시킨다는 의미에서 성경적인 교육프로그램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교육내용인 성경교육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다양한 측면에서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점은 교회학교가 활용할 수 있는 긍정적인 교육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므로 본 연구는 쉐마교육의 교회교육 적용 가능성 여부에 대하여 개혁주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성경적 교육이라는 이름만으로 개혁교회가 교회교육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확인하지도 않고 사용하는 것은 그 자체가 성경적이지 못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개혁주의 기독교교육과 그 기초를 언급하고, 성경적 관점에서 쉐마교육이 말하는 내용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교회교육에 적용 가능한 교육적인 함의점을 찾고자 한다.(1)

(1)쉐마교육연구원은 왜 기독교교육에 유대인의 선민교육이 필요한가?” 라고 묻는다. 이에 대한 답으로 현용수는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에서 기독교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유대인의 선민교육, 즉 쉐마교육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본 연구는 기독교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하는 현용수의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를 중심으로 쉐마교육연구원의 교육에 대하여 개혁주의 관점에서 조명하고자 한다. 쉐마교육원(현용수)의 전체 관련 도서를 대상으로 연구가 되지 못한 것은 연구의 제한점이다. 하지만 본 연구가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에 한정하여 연구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본서에서 쉐마교육을 기독교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본서에서 기독교교육에 유대인의 선민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셋째, 본서에서 쉐마교육을 개혁주의 기독교교육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넷째, 본서에서 바른 신앙, 바른 지식, 바른 생활의 균형 있는 성경적 자녀교육의 지침서가 쉐마교육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다섯째, 본서에서 쉐마교육을 무너진 교육의 혁명적 대안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쉐마교육원의 관련 도서들이 주장하는 내용들은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의 내용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본서를 쉐마교육의 신학적 기초라고 하기 때문에 이 문헌을 중심으로 연구하고자 한다. 개혁주의 신학으로 쉐마교육을 조명하는 연구이기에 교리(교의, 조직신학)적인 시각으로 접근하였음을 밝힌다. 교리적인 시각을 사용한다는 것은 사용하는 단어, 실례들이 교리와 상반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한다. 단어 하나하나에 신중을 기해야 하고 정확하게 사용해야 함을 말한다. 결코 단어와 문장과 문맥과 단락과 전체 내용을 따로 떼어 설명할 수 없다. 그러므로 본 연구는 쉐마교육원이 사용하는 단어와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실례들은 신학적 오류 없이 정확하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본문에서 언급된 내용들은 심각하게 문제시 되는 단락들을 중심으로 연구 본문에 먼저 언급하였고, 추가하여 관련되는 내용들은 설명(각주)으로 정리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연구의 혼돈을 피하기 위해 쉐마교육원을 쉐마교육으로 통일하여 사용하고자 한다.

 

2 개혁주의 교육

개혁주의 신학의 핵심은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 오직 예수님으로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는 데 있다.(2) 삶의 한 부분만이 아니라 삶 전체를 왕되신 그리스도께 헌신하며 하나님의 말씀인 기록된 성경을 따라 살아가는 것에 초점을 둔다.(3) 개혁신학에 기초를 둔 교육은 성경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를 알도록 하는 가르침과 배움의 활동으로써 다음과 같은 기초를 그 특성으로 하여 교육적 역할을 수행한다.

첫 번째 기초는 성경이다. 성경은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두 번째 기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다.(4) 기독교교육은 성경적 인간형성을 위한 계획적인 활동이기에 성경적인 인간이해를 교육의 기초로 한다. 인간관은 교육의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기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인간이 책임적, 반응적, 응답적, 관계적, 종교적, 전인적, 다차원적 존재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 존재라는 의미이다.(5) 세 번째 기초는 지식이다. 지식은 중립적일 수 없고 일련의 틀로서 이론과 실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지식에 기초하여 의미를 형성하고 삶을 능동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지식을 기초로 삼는 것은 결국 신앙이란 참된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서, 그 자체가 지식이며 지식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이 지식을 교육하고 지식의 기초를 가르치는 일이 개혁주의 교육이 감당해야 할 교육관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또 그에게로 간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교육이 말하는 지식은 모든 지식의 기초이며 완성이신 하나님을 알도록 하는 것이기에 결국 하나님을 아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6)  

(2)황기우, “개혁주의 성경관의 연구”, 總神大論叢28(2008): 390. 

(3)김영한, “기독교 세계관의 독특성-개혁주의 관점에서”, 기독교철학3(2006): 11; Fred H. Klooster, “The Uniqueness of Reformed Thoelogy: A Preliminary Attempt at Description”, in Calvin Theological Journal 14, No.1(1979): 32-53; 김동춘, “개혁주의란 무엇인가: 개혁신학의 형성과 특징”, 국제신학13(2011): 85; 참고)김성수, “기독교교육의 정체성”, 강용원 편집, 기독교교육학개론(서울: 생명의 양식, 2007), 15-45. 

(4)참고) 서영준, “성경적 인간이해에 기초한 기독교교육”, 인간연구23(2012/가을):147-176. 

(5)Van der Walt, B. J., Being Human in a Christian Perspective(Potchefstroom: Pochefstroom Univercity for Christian Higher Education, 1977), 11. 

(6)Harro Van Brummelen, Steppingstones to Curriculum: A Biblical Path(Seattle, Washington: Alta Vista College Press, 1994), 88; 알버트 그린, 안경상 역,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기기(대구: 기독교대학설립동역회, 1995), 26.

 

3 쉐마교육연구원

쉐마교육연구원은 쉐마교육학회 창립취지문을 통해 쉐마교육연구원을 소개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7)

쉐마교육학회 창립 취지

현용수의 인성교육론과 쉐마교육신학론이 대안이다.

     먼저,  쉐마교육에 관심을 가지신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한국의 가정교육교회교육공교육에 적신호가 켜진지 오래 되었고 교회성장도 멈추었습니다. 한국 교회가 쇠퇴기에 들어섰다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신약의 교회들은 초대교회부터 세계선교에는 성공했지만 끝까지 살아남는 데는 실패해 왔습니다. 각 지역마다 한 때 왕성했던 교회들이 지금은 폐허된 건물만 남겨놓고 사라졌거나 관광지화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은 한국 교회를 되살릴 수 있는 대안을 찾기 위해 무던히도 기도하며 노력했지만 쉽지가 않았습니다. 목회 현장에서 자녀들에게 성경적 자녀교육을 시키고 싶은데, 기독교교육학자들이 쓴 책에는 성경에 근거한 자녀교육서를 찾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우리는 현용수 박사가 4000년간 자손 대대로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 및 전통을 전수하는데 성공한 유대인 자녀교육을 연구했다는데 주목했습니다. 그는 첫째, 유대인을 모델로 인성교육의 원리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논리화했고, 둘째, 자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수하라는 구약의 지상명령, 쉐마(18:19; 6:4-9)를 발견하고 성경적인 쉐마교육신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영역을 개척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두 학문의 영역이 한국교회를 살릴 수 있는 확실한 대안이라는 데 동의했습니다. 그간 현 박사가 저술한 방대한 인성교육론과 쉐마교육신학론시리즈의 내용을 교육학과 교육신학 및 구약신학적 입장에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기독교교육에 유대인 자녀교육이 필요한 당위성 증명: 기독교 역사 2000년간 기독교인은 유대인을 핍박해 왔습니다. 유대인에게는 복음이 없고, 율법적이고, 예수님을 죽인 민족이라는 것들이 그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자녀교육이 구약성경에 근거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자료들을 배척하거나 등한시 했습니다.

그런데 현 박사는 유대인 자녀교육이 왜 기독교교육에 필요한지를 구원론적 입장이 아닌, 선민 교육신학적 입장에서 통쾌하게 논증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가졌던 유대인에 대한 깊은 편견을 풀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신약교회가 가졌던 교육신학의 약점을 성경적인 유대인 자녀교육에서 찾아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둘째, 인성교육학의 새로운 학설 정립(Pre-Evangelism): “왜 현대교육은 더 발달하는데 인성은 더 파괴되는가?” 현 박사의 인성교육론은 이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인성교육학적 및 종교심리학적 측면에서 왜 자녀들에게 그리고 현대인에게 전도하기가 힘든지 그 이유를 분석하고 그 대안을 제시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 복음적 토양교육의 필요성과 방법의 문제이기도 합니다(Pre-Evangelism). 주로 수직문화와 EQ의 필요성과 수평문화의 폐단을 자세히 논증합니다. 대인이 전 세계를 유랑하면서도 자신들의 토라, 역사 및 전통을 자녀들에게 전수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며 다른 문화에 동화되지 않았던 이유를 교육학, 문화인류학 및 철학적으로 분석하고, 그 대안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제시합니다. (9)

ㅅ  세째, 구약의 지상명령 쉐마를 발견: 신약시대의 교회는 2000년간 세계선교에는 성공했지만 자손 대대로 말씀을 전수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현 박사는 유대인이 어떻게 아브라함 때부터 현재까지 4,00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자손들에게 전수했는지 그 비밀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구약의 지상명령(18:19)입니다. 현 박사가 정리한 구약의 지상명령에 근거한 교육신학은 신약교회가 자손 대대로 말씀을 전수 할 수 있는 성경적 대안입니다.

     네째, 구약의 지상명령에 필요한 가정신학 정립: 하나님이 최초로 창조하신 기관이 가정입니다. 그 가정은 거룩한 성전입니다. 가정은 구약의 지상명령을 실천하는 교육의 센터입니다. 현 박사는 가정에서 부모가 왜 자녀를 낳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자녀를 거룩한 경건한 자손으로 양육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성경적인 가정신학과 방법을 유대인을 모델로 소개합니다. 이 책에서 왜 구약의 유대인은 신앙명가가 있는데(아브라함, 요셉, 다윗, 다니엘, 예수님 및 바울 등), 신약시대에는 신앙명가가 없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10)

     다섯째, 구약의 지상명령에 필요한 아버지 신학 정립: 가정의 구조는 아버지, 어머니 및 자녀 등 삼각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가정의 제사장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3:2)로 자녀에게 말씀을 전수할 책임이 있습니다. 현 박사는 성경을 근거로 아버지 신학을 정리했습니다. 아버지 신학은 구약의 지상명령적 측면에서 아버지의 정체성과 교육학적인 임무를 잘 설명해 줍니다.

     한 가지 더 언급할 것은 구약을 경전으로 삼는 종교들은 유대교, 가톨릭, 개신교 및 이슬람 등이 있는데, 유독 유대민족만 우수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는 것입니다(노벨상 32%). 그것은 유대인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말씀을 가르칠 때 4차원 영재교육 방법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도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마음은 비둘기같이 순결하지만, 머리는 뱀같이 지혜로워야 합니다(10:16). 그래서 현 박사는 자녀들이 세상에서도 머리가 되는 방법을 소개합니다(28:13).(11)

    여섯째, 구약의 지상명령에 필요한 경제 신학 정립: 다섯 번째에 이어 유대인은 경제력도 세계에서 으뜸입니다. 그것은 유대인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경제교육을 성경적으로 잘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현 박사는 유대인을 모델로 성경에 기초한 노동신학 및 돈 버는 법과 쓰는 법을 정리하여 경제신학서를 저술했습니다. 기독교인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많은 민족에게 꾸어 줄지라도 꾸지 아니하는 방법(28:12)을 배워 세상에서도 풍요를 누려야 합니다. 구약의 지상명령을 성취하기 위함입니다.(12)

    일곱 번째, 구약의 지상명령에 필요한 효신학 정립: 5계명인 부모공경은 구약의 지상명령을 실천하는 데 가장 중요한 계명입니다. 왜 그럴까요? 현 박사는 그 이유를 성경에 근거한 효신학적 입장에서 3권으로 정리했습니다.(13)

     여덟 번째, 구약의 지상명령에 필요한 어머니 신학 정립: 하나님께서는 왜 어머니를 창조하셨을까요? 현 박사의 어머니 신학은 구약의 지상명령적 입장에서 가정에서 어머니의 정체성과 교육학적 임무가 무엇인지를 잘 설명해 줍니다.(14)

     아홉 번째, 구약의 지상명령에 필요한 고난의 역사신학 정립: 고난의 역사교육은 자녀의 좋은 인성을 형성하게 하는데, 그리고 말씀을 전수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현 박사는 왜 고난의 역사교육이 자녀교육에 필요한지를 신학적으로 정리하고 고난의 역사교육 방법을 유대인을 모델로 가르쳐 줍니다.(15)

     열 번째, 탈무드 편역: 구약을 깊게 연구하기 위해 그리고 유대인의 자녀교육과 지혜를 알기 위해서는 탈무드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현 박사는 그 양과 깊이를 감당하기 힘들어, 아쉬운대로 랍비 마빈 토카이어가 요약한 6권의 탈무드를 한국어로 번역하며 편역을 시도했습니다. 랍비 솔로몬의 책도 그렇게 했습니다.(16)

     반가운 소식은 위 내용들을 바탕으로 하여 수많은 이들의 가정과 교회가 성경적으로 빠르게 변한다는 데 주목합니다. 이유는 부모와 자녀가 변해야 가정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현 박사가 창안한 인성교육론과 쉐마교육신학론이 가정교육교회교육교회 성장 및 학교교육 위기의 대안이라고 확신합니다.

      이제 현 박사가 개발한 인성교육론과 쉐마교육신학론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대학 강단과 신학 강단 그리고 목회 현장에서 더욱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쉐마교육을 배운 동문들이 협력하여 자신들의 전공에 맞게 인성교육론과 쉐마교육신학론을 더욱 깊고 넓게 연구 발전시키어 한국 민족만 살리는 것이 아니고, 지구촌 곳곳의 무너진 가정과 교회 및 학교교육을 살리는 사명을 가져야 한다는 데 동의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거룩한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여러분의 기도와 동참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설립취지문은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의 내용을 기초로 하여 쉐마교육의 필요성, 교육목적, 교육내용, 교육방법 등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본 연구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쉐마교육원의 인간관, 성경관, 구원관, 교육관은 설립취지문에서만 명시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이 내용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조명하기 위해서는 취지문이 기초로 한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를 조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연구의 제한점을 갖는다. 첫째, 쉐마교육원의 전체 문헌을 사용하여 쉐마교육원의 교육을 개혁주의로 조명하는 것이 마땅하나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에 한정하여 접근한 것은 연구의 제한점이라 하겠다. 하지만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는 쉐마교육원의 설립취지를 설명하는 문헌이며 교육의 방향을 결정하는 배경문헌이라 는 점을 고려한다면 다소간의 제한점을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둘째, 쉐마교육이 현상적으로 또는 통계적으로 얼마나 많은 현장에서 적용되고 있고, 어떤 긍정적인 교육결과를 얻고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한 현장이 실질적인 조사를 하지 못한 것은 연구의 제한점이라 하겠다.

(7)http://www.shemaiqeq.org/academy_info; 본 연구에서 쉐마교육연구원의 교육목적은 쉐마교육연구원의 설립취지문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취지문은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들을 중심으로 정리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8)참고) 현용수.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 2. 서울: 쉐마, 2005; 현용수. 잃어버린 구약의 지상명령 쉐마. 3. 서울: 쉐마, 2009. 

(9)참고) 현용수. 잃어버린 구약의 지상명령 쉐마. 3. 서울: 쉐마, 2009; 현용수. 문화와 종교교육. 서울: 쿰란출판사, 1993; 현용수. 현용수의 인성교육 노하우4. 서울: 동아일보사, 2009. 

(10)참고) 현용수. 신앙명가 이렇게 시켜라2. 서울: 쉐마, 2011. 

(11)참고) 현용수. 유대인 아버지의 4차원 영재교육. 서울: 동아일보사, 2006. 

(12)참고) 현용수. 자녀들아 돈은 이렇게 벌고 이렇게 써라. 서울: 동아일보사, 2007. 

(13)참고) 현용수. 자녀들의 효도교육 이렇게 시켜라(부제: 현용수의 효신학 노하우)3. 서울: 쉐마, 2010. 

(14)참고) 현용수. IQ는 아버지 EQ는 어머니 몫이다3, 서울: 쉐마, 2005.  

(15)참고) 현용수. IQ는 아버지 EQ는 어머니 몫이다. 3, 서울: 쉐마, 2005. 

(16)참고) Marvin, Tokayer. Talmud. 현용수 역은이. 탈무드 1: 탈무드의 지혜, 서울: 동아일보, 2007; Marvin, Tokayer. Talmud. 현용수 역은이. 탈무드 2: 탈무드와 모세오경, 서울: 동아일보, 2007; Marvin, Tokayer. Talmud. 현용수 역은이. 탈무드 3: 탈무드의 처세술, 서울: 동아일보, 2009; Marvin, Tokayer. Talmud. 현용수 역은이. 탈무드 4: 탈무드의 생명력, 서울: 동아일보, 2009; Marvin, Tokayer. Talmud. 현용수 역은이. 탈무드 5: 탈무드의 잠언집, 서울: 동아일보, 2009; Marvin, Tokayer. Talmud. 현용수 역은이. 탈무드 6: 탈무드의 웃음, 서울: 동아일보. 2009; Solomon. B. M. 현용수 역. 옷을 팔아 책을 사라, 서울: 쉐마, 2005.

 

4 개혁주의적 조명

4.1. 성경관의 문제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의 기초이며 삶의 유일한 기준이다. 그러므로 어떤 성경관을 가지고 있는가는 결국 삶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성경관의 문제는 신앙생활 전체를 판가름하는 절대적인 기준이다. 교육에 있어서 그 교육이 성경적인 가치를 따르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어떤 성경관을 가지고 있는가의 문제인데, 쉐마교육원은 특정학문의 시각으로 성경을 읽을 수 있고 그렇게 읽을 것을 주장한다:

기독교 2000년간 구약성경을 기독교교육학적 입장에서가 아니라 거의 구속사적 입장에서만 해석해 왔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다. 즉 복음과 선민교육의 차이점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 박사의 논지는 기존 기독교교육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구약성경에 기초한 유대인의 자녀교육 모델을 구체화하려는 교육 패러다임의 근원적 전환을 강조점으로 두었다. 그리고 이 교육의 공헌은 복음주의자들이 대체로 소홀히 다루어 온 구약의 율법 내용을 기독교교육학적 관점에서 집중적으로 접목시켰다는 점이다. 유대인의 선민교육의 내용인 모세오경에 나타난 율법이 기본적으로 왜 기독교교육에 필요한지를 구체적으로 논증하였다.(17) 따라서 그들이 성경을 다른 외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도 신세대에 맞게 히브리 사본의 글자를 다른 말로 바꾸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18)

기독교는 신구약 성경을 구속사적인 입장에서 읽어왔고 지금도 그렇게 읽고 있다. 모든 본문을 그렇게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구속사적 입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있다. 성경은 특정 학문의 시각으로 읽을 수 있는가라는 가능성의 여부를 떠나서 그것은 올바른 성경읽기라 할 수 없다. 기독교교육학적인 시각으로 성경을 읽고 그 안에서 교육의 함의점을 찾아 낼 수는 있지만, 그러한 성경읽기가 정당화되거나 일반화되어 하나의 이론으로 정립되는 것은 바른 성경읽기가 아니다. 이것은 가능성의 여부나 한번 시도해 볼 수 있는 그런 영역의 문제가 아니다. 구약성경을 읽고 교육의 형식, 내용, 방향을 만들었다고 해서 그것이 자동적으로 성경적 교육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유대인 교육이 구약성경을 기초로 해서 만든 자녀교육의 모델이라 하지만, 바른 신학에 기초하여 바른 성경 읽기를 통해 구체화된 교육이 아니라면 단정적으로 기독교 가정교육 및 자녀교육의 모델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은 바른 인식이 아니다. 성경은 어떤 신앙고백(신학)으로 읽느냐가 중요하다. 도로시는 교회가 신뢰를 잃은 이유는 신학을 너무 고집해서가 아니라 신학으로부터 도망쳤기 때문이며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차이는 교리의 차이다. 교리의 차이를 제외하면 별반 다른 차이가 없다고 한다.(19)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성경(구약)만을 성경으로 인정하고 자신들만이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전수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성경 번역의 필요성을 강조하지 않는다. 이러한 인식은 자신들만이 선민이라는 왜곡된 인간이해와 신학에서 기인한다. 성경은 누구의 전유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그러므로 성경번역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이 온 세상에 알려지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도구이기에, 그 시대의 언어로 번역되어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해야 하는 또 하나의 교육적 사명이라 하겠다. 개혁주의 신학은 오직 66권만을 정경으로 고백한다. 66권만이 성경이며 다른 것에 의미성을 부여하고 교육적 효과가 있다고 하여 정경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아닐텐데 쉐마교육원은 성경 66권에 대하여 탈무드도 성경으로 간주한다고 주장한다:

신약교회는 성령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유대인의 율법과 전통을 업신여겼다. 특히 개신교회는 교회법이나 전통이 너무 빈약하다. 유대인은 어떻게 하나님의 영(성령)이 떠났을 때도 계속 하나님의 율법을 전수 할 수 있었는가? 유대인은 성령의 능력이 약해졌을 때라도 자신들이 율법과 율법에 기초하여 이를 더 잘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각종 규례와 전통을 만들어 이를 열심히 지켜 왔기 때문이었다. 토라를 포함한 이러한 탈무드가 현재 그들의 영적 말씀이며, 지혜서이며, 삶의 교과서다. 유대인이 말하는 토라라는 단어는 세 가지의 뜻을 포함하고 있다. 첫째, 모세오경, 둘째, 전체 구약 성경, 셋째, 탈무드를 포함한 유대인 교육 전체를 말한다. 유대인은 기록으로 남겨진 모세오경 뿐 아니라 구전으로 내려오던 미쉬나에 지혜자들의 글과 주석까지, 그리고 이에 성문서나 선지서 등을 총망라한 탈무드를 평생 교육 교과서로 삼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탈무드 전체를 토라와 구분하지 않고 똑같은 성경으로 간주한다.(20)

유대인들은 토라를 말할 때 장로의 유전 및 탈무드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성경(토라)은 결코 구약성경만이 아니다. 유대인의 사상을 알기 위해서는 탈무드를 분석해야 하고 탈무드의 내용 전체를 확인해야 한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탈무드 전체 내용이 공개되거나 번역된 적이 없는 상황에서 탈무드의 내용은 성경적이며 상반되는 내용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탈무드가 성경에 기초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그 내용 전체를 하나하나 살펴 본 후에 평가할 일이다. 기독교는 성경 66권만을 정경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다.(21)

성경적인 신앙생활과 복음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유대인의 율법과 전통은 방해되는 요소가 있었고, 복음을 오해하게 만들 소지가 많았기에 신약교회는 유대인의 율법과 전통을 받아들이는 일에 있어서 상당히 신중했다. 성령의 강조가 신약교회의 위축을 가져 온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강조는 말씀 앞에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잘못인지를 분별하는 믿음의 눈을 뜨게 하여 말씀에 반대되는 율법과 전통을 업신여기게 한다. 신약교회는 성경의 뜻과 반대되지 않고, 성경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범위 안에서 전통과 교회법을 만들어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왔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이기에 성령 없이 성경교육과 말씀전수교육은 가능하지 않다. 유대인들은 성령 없이 율법을 전수했기에 각종 규례와 전통을 만들어 자신들의 업적과 외식을 만드는 데 열심을 내었다.

유대인의 절기와 기독교의 절기는 같지만 다르다. 유대인은 아직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절기를 지키지만, 기독교인은 이미완성된 상태에서 절기를 기념한다. 유대인은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면서 절기를 지키지만 기독교인은 오신 메시야를 기념하며 절기를 지킨다.

구약을 몰라서 신약을 해석할 수도 없지만, 신약을 모르면 구약을 해석할 수도 없다. 구약 없이 신약도 없지만, 신약 없이 구약도 없다. 그 어떤 경우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성경읽기는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 유대인들이 올바른 성경이해와 해석으로 말씀전수 교육이 되었다면 결코 메시야로 오신, 즉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교육이 틀렸기에 예수님을 구원자로 고백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유대인의 쉐마교육 현실이며 한계다.

기독교교육은 성경중심에서 시작하여 교육과 관련된 모든 문제를 기독교세계관이라는 관점에서 충실하게 그 작업을 실행해왔기에 쉐마교육연구원이 지적하는 것처럼 구약을 잘못 이해했거나, 율법관에 문제가 있거나, 교회교육 및 자녀교육을 소홀히 하지 않았기에 비판 받을 요소가 없다.(22)

유대인의 쉐마교육은 먹음직스럽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교육적 요소와 효과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기에 개혁주의 신학으로 항상 경계하고 조명하는 것이 개혁주의 기독교교육이 감당해야 할 사명이다.(23)

(17)현용수,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1, 14; 고용수, “쉐마교육원을 추천하며”, 현용수,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1, 17. 

(18)현용수,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2, 154; 참고)현용수,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1, 44, 74, 76-77, 79-81, 91, 136-137, 169, 213, 217, 230, 233, 249, 262-263. 

(19)Dorthy L. Sayers, Letters to a Diminished Church: Passionate Arguments for the Relevance, 홍병룡 옮김, 기독교 교리를 다시 생각한다(서울: IVP, 2009), 52, 57. 

(20)현용수,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2, 115116, 157-166. 

(21)김정우, “개혁주의 정경적 성경 해석학에 대한 제안”, 신학지남763(2009): 98-99. 개혁주의적 정경적 해석을 제안한다. (1)우리의 정경적 해석은 개혁주의 정경관인 성경의 영감성과 무오성과 권위에 근거한다. (2)우리의 정경적 해석은 단순히 성경의 역사적 배경이나 개념의 역사적 발전을 축적하는 작업이 아니라 신구약의 유기적 통일성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계시가 어떻게 완성되어 가는지를 살피는 신학적 작업이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의 정경적 해석은 성경 계시가 발전되며 더욱 심화되고 신약성경으로 완성되었다고 보기 때문에, 두 성경의 의미는 서로 유기적 조화와 통일성을 이룬다고 본다. (3)우리의 정경적 해석은 성경이 형성되어 가던 과정 속에 있었던 자료들이나 양식이나 전승의 과정을 추적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최종 형태가 담고 있는 신학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4)우리의 정경적 해석은 정경이 형성되고 확대되어 가던 과정 속에 있었던 원래의 의미와 고유한 의미를 훼손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독자적 의미를 살필 뿐 아니라, 두 성경의 유기적 통일성을 살리기 위하여 구약성경의 발판을 딛고 신약성경으로 넘어가야 한다”. (5)구약성경의 최종적 의미는 신약성경에서 제시되므로, 우리는 구약성경 속에서도 기독론적이며, 종말론적 해석을 정경적으로 시도하여야 한다. (6)신약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께서는 구약 성경의 모든 율법과 예언과 시와 지혜를 기독론적이며 종말론적으로 완성하신다(24:44); 참고) 김상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근거한 개혁주의 성경관 연구”, 總神大論叢22(2003): 159-178.   

(22)안영혁, “개혁주의 교육학의 신학적 변호”, 신학지남762(2009): 191.

(23)기독교 신앙은 교리적인 형태로 보전되고 보호되어 왔다. ‘교리’(딤전1:10; 1:9)가르침’(딤전6:3)이 결여된 바른 신학은 존재할 명분을 잃게 되어 복음 생활의 변두리에 남아 중심의 자리를 박탈당한 결과로 신앙조차 모두 잃게 된다. 그런 기독교 신앙은 절대로 존재할 수 없게 된다(David Wells, No Place for Truth, 김재영 역, 신학실종(서울: 부흥과개혁사, 2006), 159-164).

 

4.2. 인간관의 문제

잘못된 인간이해는 결국 잘못된 교육을 발생시키고 바람직하지 못한 인간을 형성할 가능성이 많다. 대부분의 교육은 어떤 인간이해를 하고 있느냐에서 출발한다. 인간이해는 교육의 방향성을 결정하기 때문에 쉐마교육의 인간관을 살피는 일은 교회의 쉐마교육 수용여부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이라 하겠다. 쉐마교육은 인성교육을 설명하면서 인성교육의 여부에 따라 예수 믿기 전의 신분상태가 예수 믿고 난 이후에도 그대로 존속된다고 설명한다:

양반이 예수님을 믿으면 양반교인, 상놈이 예수님을 믿으면 상놈 교인된다. 예수님 믿기 이전에 인성교육이 잘 된 사람이 성화의 과정도 쉽다. 바울이 개척한 고린도교회 교인들과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전자 교회는 성령님의 은사가 많은데도 교회에 부도덕한 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후자 교회는 성령님의 은사는 많지 않았지만 온 아가야 지방의 모범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 전자는 타락한 항구도시의 시민들이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고, 후자는 양반들이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예는 같은 기독교인인 박윤선 박사님이나 박형룡 박사님과 대도 조세형과 깡패 두목 양은이파 김태촌의 차이에도 나타난다. 전자는 어린시절 고향에서 서당을 다니며 양반교육을 받은 분들이고, 후자는 어린시절부터 험악한 곳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전자는 예수님을 믿은 후 그분들의 생활이 모든 목사들의 모본이 되었고, 후자는 예수님을 믿고도 여러 번 죄를 지어 감옥에서 살았다.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예수님을 믿으면 인격이 변한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상대적이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가 강할 때는 변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약해지면 옛 습관이 다시 나타나기 쉽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기 이전 어린 시절 인성교육을 잘 시켜야 한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이어령 교수가 몇 년 전에 예수님을 믿으므로 기독교의 위상이 높아졌다. 그의 인격이 예수님 믿기 이전에 형성된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을 믿은 후에 형성된 것인가? 물론 예수님 믿기 이전에 형성된 것이다. 바울이 다른 기독교인보다 더 훌륭한 인격을 가진 것은 예수님 믿기 이전에 어린 시절 유대식 양반교육을 잘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 인성교육을 잘 시켜야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음적 마음의 토양이 옥토가 되어 예수님을 믿기도 싶고 믿은 후 성화의 과정도 쉽다. 오늘날 전도가 힘든 이유와 기독교인이 된 이후에도 제자화가 잘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예수님 믿기 이전에 인성교육이 잘 안 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이나 일본은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나라이지만 한국민족이 하나님을 잃는다면 또 다시 일본의 종이 될 수밖에 없다.(24)

예수님을 믿는데 있어서 상놈과 양반이라는 인간의 구분은 없다. 오직 한 사람, 즉 죄인인 인간,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만 존재한다. 양반이 예수님을 믿기에 더 좋은 조건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전혀 없는 주장이다. 양반과 상놈이라는 구분 자체가 이미 폐기처분된 인간존엄성을 헤치는 전근대적 가치관이다.(25) 상놈이 예수님을 믿으면 상놈 그리스도인, 양반이 예수님을 믿으면 양반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상놈이 예수님을 믿으면 그리스도인, 양반이 예수님을 믿으면 그리스도인이다. 둘 사이에 그 어떤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인성교육이 신자가 된 이후에 결정적인 교육적 효과를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은 다양한 견해를 가질 수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인간 자체의 차이를 만들만큼 결정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기준은 인성교육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기 이전과 이후이다. 교육적 효과라는 것도 교육내용의 문제와 교육 평가의 기준에 따라 달라 질수 있기 때문에 인성교육을 두고 효과성을 언급할 수 없다.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 인성교육이 잘 되면 성화의 과정이 쉬울 수는 없다. 이것은 인간의 어떤 능력이 구원에 도움이 되는 조력구원으로 여겨질 가능성이 많다. 즉 인간의 전적타락을 부인하게 된다. 엄밀한 의미에서 구원론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주장이다. 어느 누구도 구원받기에 더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모든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 자랐건, 무슨 교육을 받았건, 아무런 영향력도 없거니와 중요하지도 않다. 이는 불가항력적 은혜와 무조건적 선택을 폐기처분하지 않고서는 절대 받아들여질 수 없는 내용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기에 더 좋은 조건을 가진 도시나 사회도 존재하지 않는다. 타락한 항구 도시의 사람들이나 양반들이 사는 도시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 양반이나 상놈이나 일반이다. 박형룡이나 박윤선이나 이어령이나 조세형이나 양태춘이나 모두가 다 그리스도 앞에서는 일반이다. 이방인이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두가 다 일반이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을 만한 이유가 있어서 선택받은 것이 아니다. 분명한 것은 인성이나 도덕법으로는 어느 누구도 악의 세력을 이길 수 없고 선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산물이기 때문이다.(26)

인간의 종류와 신분을 언급하는 것은 인종차별적 시각이며, 사람을 계급으로, 출신성분으로 분류하는 것은 건강한 인간관이라 볼 수 없다. 그리고 세상에 존재하는 개인은 물론이고 어느 나라이든지 상관없이 하나님 없이 잘 살 수 있는 사람도 나라도 있을 수 없다.

대한민국이 일본의 지배를 받은 것이 하나님을 섬지기 않아서 그렇다고 말하면 전적으로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국이 일본에 의해 지배를 받은 것은 한국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아서가 아니라 일본의 악행이 만들어 낸 결과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는 악행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사람들의 마음과 삶에 강력한 호소력을 지니고 은혜가 된다고 하여 그러한 삶의 방식에 박수를 보낼 수는 없다.(27)

인간관의 문제는 결국 구원관과는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 인간관의 문제는 다름 아닌 구원관의 문제라 할 수 있다. 구원관의 문제는 일상 생활영역에서 삶의 방식(성화), 즉 어떻게 살 것인가를 다루고 교육영역에서 가르침과 배움에 대한 가치관을 결정한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예수님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일이다. 교육의 결과나 교육이 원인이 되어 구원에 끼칠 수 있는 영향은 없는데 쉐마교육원은 13세 이전의 인성교육이 복음을 위한 토양교육에 필요한 교육으로 소개한다:

구약의 유대인은 오실 메시야(예수님)를 믿고 구원받지만, 신약의 기독교인은 오신 메시야(예수님)를 믿고 구원받는다.(28)

왜 현대교육은 많이 발전하는데 인간은 점점 더 타락하고 있는가? IQ교육을 많이 받은 현대인에게 복음을 전하기가 더 힘든가? 왜 그들은 복음을 받아드린 후에도 헌신도가 약하여 제자화하기에 힘이 드는가? 그 이유는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올바른 인성교육이 없이 수평문화에 물들게 방치하고 IQ교육만 시키면 그들의 마음 밭이 황폐화되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태어나 복음을 접하기 전에 인성교육을 잘 받아 마음 밭이 옥토가 되어야 복음을 영접하기도 쉽거니와 구원을 받은 후 예수님을 닮는 제자화도 쉽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어린 자녀들에게 예수님을 믿기 전에 깊은 생각을 하게하고 바른 행동을 할 수 있게 하는 인성교육을 시키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13세 이전의 인성교육이 평생을 좌우한다. 이를 Pre-Evangelism(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복음 전 토양 교육)이라 한다.(29)

예수님 이전의 구원은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가장 은혜로운 방식으로 구원을 결정하실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오신 이후의 구원은 오직 한 길 밖에 없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은 받는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는 길에는 준비 과정이 따로 있거나 준비된 자가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준비가 더 많이 되었거나 따로 무엇인가를 준비한 사람을 먼저 구원하는 것도 아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에게는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는 믿음이 필요했지만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는 그가 유대인이든 아니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는다.

부모가 자녀들을 신앙으로 양육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은 동의할 수 있지만, 부모가 자녀들을 신앙으로 양육한 결과로 그들의 자녀들이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이며,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30) 신자인 부모와 자녀라는 혈통적 관계가 자녀를 자연적으로 믿음을 발생시키거나 회심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예수님 믿기 이전, 인성교육이라는 Pre-Evangelism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행위는 그대로의 행위일 뿐이지, 그 행위로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31) 이런 것은 믿음의 변종이며 외식으로서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32)

쉐마교육이 말하는 것처럼 신약 백성에게는 윤리적 삶이나 믿음의 삶이 약하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주권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야 할 것을 고백하기에 당연히 믿음과 삶을 연결한다. 믿음의 삶은 달려갈 길을 마칠 때까지 계속된다. 달려가야 할 삶의 영역은 온 우주이기에 살아야 할 삶이 엄청 많아진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더 많이 보게 되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찬양하게 된다. 하지만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라 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없다고 하는 것도 오해며, 달려가야 할 일이 많기에 우리가 전적으로 살아내야 할 우리들만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오해다. 열심히 살아야 할 많은 신앙의 삶 중에서 구원의 다양한 성격이 가장 잘 나타나는 영역은 교육분야다. 교육은 구원의 성격이 다른 어떤 영역보다 가장 풍성하게 표현되고 구원 안에서 읽어지는 구원의 삶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구원의 은총이 삶 안에서 충분히 누려지도록 개혁주의 구원관을 가르쳐야 할 교육적 사명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다음주에 계속)

(24)현용수,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2, 122; 참고) 현용수,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2, 92-97, 101, 115-116, 133, 138-139, 141, 145-147; 현용수, “쉐마교육에 대한 개혁주의적 조명에 대한 논평”, 개혁신학회 가을 학술대회 2013: 103; 현용수,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1, 49. 

(25)유승원, “조선시대 양반계급의 탄생에 대한 시론”, 역사비평79(2007): 232; 오종록, “조선시대의 양반은 어떤 존재였을까”, 내일을 여는 역사25(2006): 254; 지승종, 박재홍, 김준형, 정진상, “현대 사회의 양반 문화에 관한 연구: 양반 가문 의식과 양반 문화의 잔존 형태를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55(1999): 145, 190; 이병휴, “양반이란 무엇인, 한국사시민강좌29(2001): 3; 김성우, “18-19세기 지배 양반되기의 다양한 조건들”, 대동문화연구49(2005): 192; 윤사순, “양반의 정신세계”, 한국사시민강좌29(2001): 48, 66: 그 용모가 추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상인은 아닌 듯했습니다. 상인은 용모마저 추한 존재로 상정되고 있다. 상인이 단순한 비양반의 범칭을 넘어서 명예도 없고 품행도 나쁘며 용모도 추한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발전되자 경멸의 뜻을 좀 더 노골적으로 담은 용어까지 생겨났으니, 그것이 바로 상한(常漢)’ 즉 상놈이다. 어떤 사람이 지금 자신이 양반임을 자처한다면, 사람들은 그의 시대감각을 의심할 것이다. 이 개념 자체가 케케묵은 전근대적 유물로서 이제는 사회체제상 존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민주사회를 지탱하는 개인의 자유와 인간의 평등이 실현되지 못하던 신분적 봉건사회로서, 소수의 양반 이외에는 대다수 국민의 민권과 인권이 말살되었던 사회였다. 양반들은 국가로부터 부여받은 일정한 권한을 소유하였으므로, 그것을 기반으로 선민적 특권의식을 자아의식의 근간으로 가지게 되었다. 권력을 소유한 양반의 자아의식에 선민적 지배층 의식이 자리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양반은 스스로의 우월감과 긍지를 느끼는 정신 상태에 있었을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양반이 원래 등차를 엄격히 구분하는 신분적 봉건체제에서 존립하였던 것인 만큼, 그 정신은 이미 낡고 무용한 전근대적 특성인 부정적 측면을 꽤 많이 지니고 있었다.  

(26)Dorthy L. Sayers, Letters to a Diminished Church: Passionate Arguments for the Relevance, 홍병룡 옮김, 기독교 교리를 다시 생각한다(서울: IVP, 2009), 78. 

(27)Dorthy L. Sayers, Letters to a Diminished Church: Passionate Arguments for the Relevance, 홍병룡 옮김, 기독교 교리를 다시 생각한다(서울: IVP, 2009), 69. 

(28)현용수,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1, 153. 

(29)현용수,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1, 35; 참고) 현용수,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2, 138-139, 143-147, 178, 185-186, 188, 190. 

(30)Perry G. Downs, “Christian Nurture: A Comparison of Horace Bushnell and Lawrence O. Richards” Trinity Journal 3, (Fall, 1982): 200-201. 

(31)현용수,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2, 95. 

(32)전광식, 경건의 길(부산:고신대학교 기독교 사상연구소, 2005), 26. 

(33)이복수, “기독교의 사회활동과 복음 커뮤니케이션의 관계에 대한 개혁주의 이해”, 복음과 선교3(2003): 220; Millard J. Erickson, Christian Theology, 신경수 역, 복음주의 조직신학(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5), 152-169; Stanley J. Grenz, The Theology for the Community of God, 신옥수 역, 하나님의 공동체를 위한 신학 조직신학(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3), 635; Harold Whitney, The Teaching of Calvin for Today, 윤두혁 혁, 기독교강요 핵심정리(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7), 174; Stanley J. Grenz, The Theology for the Community of God, 639-640. 

(34)Stanley J. Grenz, The Theology for the Community of God, 643.   

(35)Daniel L. Migliore, Faith Seeking Understanding: An Introduction to Christian Theology, 장경철 역, 기독교 조직신학개론: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2), 257; 김동춘, “개혁주의란 무엇인가: 개혁신학의 형성과 특징”, 80. 김동춘은 개혁주의가 추구하는 성화는 개인의 성화를 넘어 사회적 성화, 노동의 성화, 정치적 성화, 문화의 성화를 포괄한다고 말한다(참고. A. Bieler, 홍치모 역, 칼빈의 경제윤리. 서울: 성광, 1985; C. Plantinga, Engaging God’s World: A Christian Vision of Faith, and Living. Grand Rapids: Eerdmans, 2000). 

(36)김광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과 성화(서울: 총신대학교출판부, 2000), 357-388.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