쉐마교육에 대한 개혁주의적 조명(2)

본 연구는 2013 가을 개혁신학회 학술대회(2013. 10. 5)에서 발표한 원고를 수정 보완하였습니다. -필자-

분량이 너무 커서 2회에 나누어 올릴 수밖에 없음을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각주는 파란 글씨로 문단 끝에 달았습니다. -코닷-

 

4.3. 교육관의 문제

▲ 서영준 고신대학교 기독교교육과 조교수 동 대학원 기독교교육과(PH. D.) 고신의대간호대 벧엘의료선교회 간사 부민교회 교육목사

교육관은 교육목적, 교육내용, 교육방법, 교육평가를 결정한다. 다양한 교육현상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교육관이다. 교육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읽어내고 적절한 그 대안을 제시하며, 그 문제와 관련하여 교육내용을 선정하고 조직하며 적합한 교육방법을 결정하고 목적에 부합한 교육이었는지를 평가하는 일, 그 일련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교육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쉐마교육이 일상의 삶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교육적 현상을 어떻게 읽어내고 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쉐마교육의 교육관을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쉐마교육은 새로운 교육의 패러다임으로 교육현상을 읽을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은 교육의 내용형식을 제시한다:

<1> 교육의 내용형식’(37)

 

교육의 내용

추상적-내면적

교육의 형식

구체적-가시적

유교

()

(), 많다

기독교

사랑(EQ), 믿음

(하나님 사랑, 인간사랑)

기독교

적다(구체적이지 않다)

유대교

사랑(EQ), 믿음

(하나님 사랑, 인간사랑)

율법(율례와 법도:IQ)

(구체적으로 많다)

바울의 설명

(2:28-29)

이면

(마음의 할례)

할례

(육신의 할례)

 

무턱대고 아무런 관련 근거도 없이 교육의 형식과 내용을 구분하는 것은 교육학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나 이해가 부족하여 표현한 것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새로운 기독교교육의 패러다임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교육학이 요구하는 기본적인 틀이 있어야 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주장하기 때문에 논리를 뛰어 넘는 비약성을 가질 수는 있어도 현실 가운데 정착하기 위해서는 설득성과 논리성을 갖추어야 한다. 왜 율법이 형식이며 사랑과 믿음이 내용인가? 왜 율법은 IQ이며, 사랑은 EQ인가? 왜 유교가 새로운 기독교교육의 패러다임에 속하는가? ‘는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교육의 형식과 내용인가? 왜 사랑과 믿음은 추상적이고 율법은 구체적이며 가시적인가? “육을 하나님의 말씀과 예로 다스려야 인간다운 인간이 될 수 있다.”고 하는데 이때 란 무엇인가?(38)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윤리적 삶을 살지 못한 것이 예()를 갖추지 못한 배은망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예()를 갖추지 못한 것이며 배은망덕이다. 하나님에 대한 는 윤리나 도덕적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에 대한 가 갖추어진다. 그 어떤 일지라도 그리스도가 없다면 그것은 그저 하나의 껍데기와도 같은 형식에 불과하다. 성경은 그것을 외식이라 한다. 인간다운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결코 로 다스려 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다운 인간, 즉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 할 때만 가능하다.

구약의 율법은 형식과 내용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말씀은 형식과 내용으로 구분되어 있지 않다. 말씀은 그대로가 내용이며 형식이다. 무엇보다 형식은 내용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지 형식이 내용을 결정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그렇게 될 경우 형식은 내용을 변질시키게 된다.

개신교와 유대교 및 천주교 간의 장단점의 문제는 내용의 문제이거나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그 본질에 대한 것이다. 서로의 장단점을 보완하여 한 집에 거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혹 신앙생활의 방법적 측면에서 교훈을 찾을 수는 있겠지만 신앙고백의 일치성 없이 서로의 장단점을 보완하여 함께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쉐마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쉐마교육만이 새로운 기독교교육의 패러다임이라고 말한다:

세상의 방법 위주로 교육받은 학생들이 대학을 들어가면 다수가 교회를 등진다. 왜 기독교교육에 유대인 자녀교육이 필요한가? 먼저 인성교육적 입장과 구속사적 입장에서 그 필요성을 알아보기 위하여 다음 두 가지 질문이 필요하다. 첫째, 왜 인간은 교육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더 타락하고 있는가? 둘째, 왜 초대교회는 살아남지 못했는가?(39)

초대교회로 돌아가면 죽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세 교육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교회개척이나 성령운동은 초대교회처럼 해야 하지만, 기독교교육을 초대교회처럼 하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신야교회는 왜 2000년간 다른 민족에게 복음을 전수하는 데 성공했으면서, 자신의 가족과 민족교회는 오랫동안 살아남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다. 1970년대 이후 왜 한국의 교회교육이 90%이상 실패하고 있나요?(40)

유대교는 아브라함 때부터 4200년간 그리고 천주교는 2000년간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 반면 기독교와 개신교는 역사에서는 타민족에게 선교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자자손손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촛대를 전수한 민족은 없다.(41)

유대인은 신약의 복음 없이 구약의 선민교육만으로도 세계에서 으뜸가는 인재들을 많이 배출하고 있는데, 우리가 신약의 복음에 유대인의 선민교육을 더하면 성령의 능력으로 유대인보다 더 나은 교육을 시킬 수 있지 않겠는가?(42)

분명 교육이 인간의 인성을 말살하거나 파괴하는데 전혀 관여 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교육의 잘못으로 인간의 타락을 설명하는 것은 올바른 교육인식이 아니다. 역사 가운데 교육이 끼친 수많은 영향과 업적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바른 교육관, 통전적 교육관을 결여한 결과라 여겨진다. 무엇보다 유대인이 인식하고 있는 그들만의 쉐마교육도 하나의 교육에 지나지 않음을 망각한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의 자녀들이 교회를 등지거나 떠나게 되는 것은 세상의 방법 위주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교육에 대한 불신을 만들게 되고 교회와 세상 사이에 장벽을 세우게 하여 교회로 하여금 사회로부터 고립을 자초하게 할 뿐이다. 쉐마교육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게 된 것은 사회구조의 변화, 가치관의 변화, 직업의 변화, 인구의 변화, 신앙관의 변화, 그리고 성장주의에 대한 거부감 등이라고 할 수 있다.(43)

잘못된 교육관은 결국 기독교교육 역사 자체를 편협하게 인식하거나 잘못 이해하는 결과를 가져와 기독교교육 역사 자체를 부인하게 된다. 교육의 실패가 교회의 실패는 아니다. 2세 교육이 중요하지만 2세 교육이 기독교교육의 목표는 아니다. 초대교회도 분명 그들 나름의 2세 교육을 했지만, 2세 교육이 그들의 주된 사명은 아니었다. 교육적 사명이 있었을지라도 교육사명은 많은 사역과 사명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형태의 교육도 완벽할 수 없다. 하나님이 만드신 쉐마는 완벽하지만 쉐마를 가르치는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그것을 실행하는 교육적 행위나 실천적 모습들은 당연히 실수투성이고 잘못된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성경교육의 목적이 왜곡되어 있다. 세계에서 으뜸가는 인재들을 배출한 것,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인지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교육의 부수적인 효과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결코 기독교교육의 목적은 아니다. 그리고 유대인을 본 받아야 할 이유는 그렇게 많지 않다. 세계 역사에서 기억될 만한 민족도 아니다. 다만 유대인의 교육방식, 존재방식 등을 탐구하여 그 안에서 배울만한 점을 발견하고 활용하는 정도에서 의미가 있을 뿐이다.

세계 정복이라는 말이 역사에 남긴 상처와 아픔을 신약교회는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지, 정복을 교육의 목적으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샬롬을 모르는 비성경적인 교육관이다. 새로운 정복을 계획하고 힘으로 어떻게 해보려는 시도 자체를 포기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성경적인 교육관이다. 잘못된 교육관은 그릇된 방향에 교육의 목적을 두게 하고 결국 성경 자체를 왜곡하게 만든다:

한국 사람도 여러 면에서 유대인처럼 선민적인 요소가 많다. 첫째, 단일민족으로 혈통과 문화가 같고 유대인들처럼 독특하다. 둘째, 고난의 역사가 유대인과 비슷하다. 셋째,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다. 넷째, 교육 이념이 홍익인간이다. 다섯째, 경천애인 사상이다. 여섯째, 효사상을 중요시 한다. 일곱째, 독특한 단일 민족의 혈통과 고유문화를 갖고 있다. 여덟째, 작은 민족 중 하나이며, 자랑할 것이 없는 민족이다. 아홉째, 한국의 지형적 구조가 비슷하다. 열 번째, 한민족은 영적 이스라엘이라 할 만하다. 열한 번째, 한민족도 유대인처럼 한민족 디아스포라를 형성하였다. 열두 번째, 우리나라의 애국가는 성서적이다.(44)

선민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 은혜의 결과다. 어느 누구도 선민이라는 조건을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도, 민족도 없다. 단일민족, 고난의 역사, 평화를 사랑함, 홍익인간 교육이념 등은 선민의 요소가 아니다. 유대인과 한국인이 비슷한 점이 있다면 둘 다 죄인이라는 것이며,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선민이 될 수 없고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개혁주의 기독교교육과 유대인의 쉐마교육의 근본적인 차이는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보는 교육과 거울로 보는 교육과의 차이라 할 수 있다. 아직도 답을 찾는 교육과 이미 답을 찾은 교육, 즉 인격적으로 답을 만난 교육과의 그렇지 못한 교육의 차이다. 유대인의 쉐마교육은 몽학선생의 교육이며, 교육이 아니라 잘못된 의식화이며, 박제된 종교의 습관적 행동을 만들어내는 교육이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쉐마교육은 개혁주의 교육이 말하는 교육을 표현하고 개혁주의 기독교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매김 하기에는 부족한 교육이다.

개혁주의는 모든 역사와 문화가 하나님의 주권과 심판 아래 있음을 인식하면서 영적인 삶과 함께 윤리적인 삶을 강조한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역사에 참여하게 하며 일상의 삶과 문화변혁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결코 개혁주의 교회는 윤리적 실천의 삶을 가르치는 것과 실제적인 삶을 살도록 하는 일을 등한히 하지 않는다.(45)

그러므로 구원받은 백성은 모든 영역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왕되심을 고백하도록 자신의 삶을 바꾸게 하는 삶의 체계로서의 개혁신학을 고백한다. 개혁신학은 거룩한 부르심을 받은 공적신학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에 공공의 영역 전체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실현하고 바로 그곳에서 사람의 제일된 목적의 삶을 추구하게 한다. 그래서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개혁주의 신학과 교육은 도피적 종교가 아니라 형성적 종교이며 세계형성적 기독교라고 규정했고 칼빈주의적 사회적 경건이라고 했다.(47)

만일 유대인의 쉐마교육을 개혁주의 기독교교육에 적용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선결해야 할 조건이 있다. 첫째, 성경에 대한 신앙고백이 개혁주의 성경관과 동일해야 한다. 둘째,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신앙고백이 개혁주의 인간론이 동일해야 한다. 셋째, 균형잡힌 교육관을 소지하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유대인의 쉐마교육은 교육적 함의점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정도에서 의의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새로운 기독교교육의 패러다임이거나 성경적 기독교교육은 될 수 없다.

(37)현용수,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2, 95.

(38)현용수,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2, 92-93, 113-114.

(39)현용수,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1, 13, 59-60.

(40)(40)현용수,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1, 9-10, 37.

(41)현용수,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2, 105, 112.

(42)현용수,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2, 118, 121.

(43)통계청이 1995년과 2005년 실시한 인구센서스 종교부문 조사 가운데 연령대별 변화를 분석한 결과, 특히 20세에서 34세 사이의 젊은 층에서 기독교 이탈 현상이 두드러졌다. 조사에 의하면 2034세의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났던 이유는 고교시절 학습 부담이 높은 상황에서 교회를 멀리하는 것이 습관화됐고 이후 대학이나 군대를 다녀오면서 신앙을 제때 회복하지 못했다는 것이 전형적 패턴이다. 부모가 입시에 대해 지나치게 높은 기대를 갖고 있거나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강요하는 것도 신앙생활을 막는 요소다. 학교나 직장 때문에 거주지를 자주 옮기는 세대라는 특성도 불교나 천주교에 비해 보다 주거지 밀착형인 기독교에서 젊은이들이 빠지는 원인이었다. 성장주의에 거부감을 가지게 되고 자연스럽게 마음도 멀어졌다. 조지 바나는 비기독교인이란 보고서에서 미국 내 2400만 명에 이르는 1629세의 청년들 가운데 기독교인 비율이 60% 아래로 떨어졌다고 말한다. 젊은 층이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보게 되는 이미지 키워드는 위선적인, 전도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동성애를 혐오하는, 안일한, 지나치게 정치적인, 타인을 손쉽게 판단하는 등이다. 문화적 맥락은 다르지만 한국 젊은이들에게 교회의 이미지는 부정적인 모습으로 떠올리게 하며 겉으로 드러나는 교회의 외형적 성장이 불필요한 거부감을 불러온다(우성규,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국민일보, 2008. 12. 10).

(44)현용수,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2, 235-240.

(45)김영재, “개혁주의란 무엇인가?”, 신학지평8(1998): 49.

(46)J. Bolt, A Free Church: A Holy Nation: Abraham Kuyper’s American Public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as, 2001.

(47)N. Wolterstorff, Until Justice and Peace Embrace, 홍병룡 역,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

 

4.5. 함의점

첫째, 교육의 장()으로서 가정교육과 교육 책임자로서 부모교육 강조한다: 일반적으로 가정은 사람의 성장과 발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곳이기 때문에 항상 교육에 있어서 주목을 받아왔고 가정교육의 소중성은 늘 강조되어 왔다.(48)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교육적 행위가 처음 발생하는 현장은 가정이다. 가정은 신앙을 삶의 현장에 경험할 수 있는 자리이며 그 신앙의 내용을 전수하고 알게 하는 교육의 장이다. 가정은 하나님이 직접 제정하신 원초적 제도이며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교육 경험의 시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은 역사 속에서 가장 오래 해 왔지만 가장 오래 동안 잊혀진 교육현장이다.(49) 가정에서 부모를 통해 배우는 신앙교육은 매우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교육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유대인 부모는 자녀교육에 대하여 의무화하고 부모에 의하여 신앙이 전수되게 한다.(50)

부쉬넬은 기독교가정은 한 사람이 태어나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게 되는 가장 기초적인 장으로 말한다. 언약공동체인 가정은 유기적인 관계를 통해 서로의 성장을 도모한다.(51) 부모의 양육의 결과로 자녀들이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부모의 모범과 신앙양육은 자녀들의 신앙과 성품을 성숙시키는 중요한 교육의 한 방법인 것은 분명하다.(52) 스마트는 기독교교육의 중심 주제를 계시로 보았고 구약의 가정을 중심으로 하는 가족 구조와 신약의 세례로 이어지는 가정 구조를 성경적인 가정이라고 보았다.(53) 쉐마교육이 잊혀진 교육의 원초적 현장인 가정을 재발견하고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재인식 시킨 점은 높이 평가 할만하다.

부모는 신앙의 전수자로서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가정의 자녀가 출생에서부터 끊임없이 말씀에 노출되도록 가르치고, 사명을 고취시키고, 그러한 가르침이 형성되는 환경을 만드는 조성자로서의 역할한다. 결국 자녀가 하나님의 말씀을 익혀 말씀을 직접대면하게 하고 순종을 배우도록 하는 것은 부모의 역할이다. 이것에 대하여 파즈미뇨는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서 가능한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54) 그러므로 부모는 그 자녀가 기독교적 삶의 스타일을 형성하고 신앙공동체의 양육을(55) 통해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교사가 된다.(56)

둘째, 교육내용인 성경교육과 교리교육을 강조한다: 쉐마교육은 성경(구약)을 교육내용으로 한다.(57) 성경을 삶의 교과서로 사용한다는 것은 성경이 무엇인지에 대한 그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것 뿐 아니라, 실제적인 교육이 성경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한다.(58) 성경을 교육내용으로 하는 것은 무엇에 초점 지워진 교육인지를 말해주는 단적인 증거라 할 수 있다.

쉐마교육은 모든 생활의 문제에 대한 답을 성경에서 찾으려고 노력하고 부모가 자녀를 교육시킬 때에도 성경의 권위에 절대적 가치를 둔다는 측면에서 볼 때, 개혁주의 교육에 주는 함의점은 크다 하겠다.

스마트는 기독교교육의 중심 주제를 계시로 보았다.(59) 그러하기에 쉐마교육이 성경을 교육의 기초로, 교육의 내용으로 구성한 것은 가장 잘 한 일이라 여겨진다.

쉐마교육에 대한 개혁주의 조명은 교육내용으로 교리교육의 중요성과 시급성을 강조한다. 교회교육에서의 교리의 중요성에 대하여 이상규는 말한다:

종교개혁은 단순히 교리적인 개혁운동만이 아니라 영적부흥운동의 성격이 있었기 때문에 교리적인 개혁이 영적 쇄신운동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이념화 혹은 이데올로기화되기 쉽고, 반대로 영적 쇄신운동이 건전한 교리적 기초를 지니지 못하면 신비주의적 혹은 주관주의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이상적인 교회개혁은 교리적 개혁과 영적 부흥의 성격을 동시에 지녀야한다. 또한 신학 없는 교회’, ‘교회 없는 신학은 교회이 목회자 개인의 주관주의와 신비주의에 빠지는 결과를 가져온다.(60)

오스머는 신학적인 성찰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그 내용이 기독교적 진리와 어떻게 관련되는가를 물어야 한다”(61)고 말한다. 교육은 가르침의 내용을 결정할 권위를 누가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교사는 바른 신학적 바탕위에서 가르침을 행할 수 있다. 넬슨은 신학적 성찰에 대하여 신학에 관한 교육자의 첫 번째 관심은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신앙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기 위하여 충분한 신학을 소유해야 한다는 것이다.”(62)고 말한다.

그러므로 깊은 교리적 성찰과 반성 없이 교회교육 안에 쉐마교육을 적용하는 것은 사실상 개혁주의 신학에 심각한 가해를 입힐 가능성이 많다. 이는 매우 위험한 시도며, 복음의 진리를 상당부분 왜곡할 우려가 있다.(63) 올바른 신학 없이는 교육의 목표선정도, 그 목적과 목표를 달성하는데 필요한 올바른 내용을 선정하는 것도, 그 내용을 가르치는 방법도 위협을 받게 된다. 올바른 신학, 개혁주의 신학 바탕위에서 시행되는 교육만을 기독교교육이라 한다.(64)

셋째, 교육방법으로서 암기교육과 토론식교육을 강조한다: 반복적 학습을 통한 암기교육은 무조건 반복 연습의 횟수를 증가 시키는 것을 통해 남용되어 왔거나 아니면 오용되어 왔다. 하지만 암기는 거의 모든 학습을 위해서 초기단계에 반드시 필요하다.(65) 기독교교육의 텍스트인 성경은 기독교교육의 기초이며 신앙교육의 시작이기에 기본적으로 그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암기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분명 암기교육의 단점도 있지만 이해를 기반으로 한 암기교육은 종교교육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하겠다. 단순한 암기가 아니라 개별 교육자와 교육대상자의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암기교육은 신앙교육에 있어서 확고한 의식의 기반을 형성하게 한다.(66) 암기 내지는 암송을 통한 반복교육은 신앙언어의 친숙성과 신앙언어의 체질화, 그리고 신앙언어의 회복을 가능하게 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매우 유익한 교육방법이라 여겨진다. 수많은 언어의 홍수와 언어 단절로 인한 세대간의 의사소통 단절과 어려움이라는 현실 앞에서 매우 필요한 실제적인 교육방법이라 할 수 있다.

토론교육은(67) 단순히 율법을 암기하는 암기교육의 단점을 극복하게 하는 것으로 교육에 있어서 해당 내용을 지속적으로 질문하고 대화한다. 토론교육은 고등정신을 함양하는 데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었다.(68) 대화를 통해 질문하고 생활과 관련된 삶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성경의 내용이 몸에 배이도록 하는 교육방법이며, 생활 속에 성경의 내용이 일상화되도록 하는 교육방법이라 하겠다.(69) 탈무드식 논쟁법이라고도 하는 토론은 둘씩 짝을 지어 탈무드 책을 펴 놓고 읽어가며 상대방의 설명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이해를 구하는 교육방법이다.(70) 파브리지오는 지속적인 반복과 익힘을 가능하게 하는 훈련을 통해 자녀가 교육내용인 성경말씀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연스럽게 표현되고 실천되도록 하는 교육이 기독교가정교육에 필요하다고 한다.(71) 자녀들을 가르치기만 하고 훈련하지 않는 것은 기독교가정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이다. 그것은 중요한 것을 배우기는 하나 몸에 배인 교육이 아니기에 다른 가르침을 받고 떠날 수 있다. 쉐마는 바로 이 부분을 정확하게 지적하였고 이 문제점을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질문법 및 대화교육, 그리고 구전과 이야기교육을 통해 몸에 배이는 교육을 한다.(72) 볼스윅이 기독교가정교육의 한 방법으로 제안한 대화는(73) 쉐마교육이 중요하게 여기는 질문법을 포함하는 교육방법이다. 대화는 부모와 자녀의 유대관계를 강화하고 세대간의 차이를 해소하는 가장 손쉽고도 자연스런 학습방법이라 할 수 있다. 교육의 목적이 성경적 가치관의 확립과 실천적 삶에 있기에 성경의 내용을 익히고, 반복하고 순종하도록 하는 교육방법을 택한 쉐마의 교육방법은 개혁주의 기독교교육이 사용해야 할 교육방법에 주는 시사점이다. 질문교육은 생각을 자극시킴으로써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대화를 가능케 한다. 성경을 가르칠 때 강론(talk about)을 하는데, 이는 질문하고 토론하는 대화를 통한 교육을 의미한다. 어린 시절부터 말씀과 그에 관한 지식들을 배움으로 아이들의 삶 속에는 말씀에 대한 깊은 인상이 언젠가는 생명으로 역사할 하나의 씨앗으로 심겨지게 된다.(74)

(48)김재은, “구약 성서시대의 종교교육”, 오인탁 외 4, 기독교교육사(서울: 한들출판사, 1992), 19-22.

(49)참고) D. Campbell Wyckoff and George Brown, Jr.(ed.), Religious Education: 1969-1993, Cannecticut: Greenwood Press, 1995; 박구서, “손양원 목사의 가정교육에 대한 기독교교육 신학적 해석: Horace Bushnell의 가정 교육이론을 중심으로”(계명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8), 박진숙, “현대 기독교가정교육에 관한 연구: 바울의 몸 개념을 중심으로”(서울신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4), 황지영, “하나님의 형상 개념을 중심으로 한 관계적 기독교 부모교육에 관한 연구”(고신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 기독교교육학은 일반적으로 교회의 교육관 관련되어 연구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가정이나 기독교부모교육과 관련한 연구는 간과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황지영, “기독교가정교육”, 강용원 편집, 기독교교교육학개론(서울: 새명의양식, 2007), 248).

(50)김도일, 맑은 영성 맑은 가르침(서울: 쿰란출판사, 2003), 208-210.

(51)Horace Bushnell, Christian Nurture, 김도일 역, 기독교적 양육(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004), 68-71; 황지영, “기독교가정교육”, 255 재인용; R. C. Miller, 장병일 역, 기독교교육 개론(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61), 121-135.

(52)참고) 김은미, “호레스 부뉘넬의 기독교적 양육이론에 대한 개혁주의적 비판”, 신학정론292(2011): 632-652.

(53)James D. Smart, The Teaching Ministry of the Church, 장윤철 역, 교회의 교육적 사명(서울: 대한기독교교육협회, 1991), 234; 황지영, “기독교가정교육”, 254 재인용.

(54)Robert W. Pazmono, Foundational Issue in Christian Education: An Introduction in Evangelical Perspective(Grand Papid, Michigan: Baker Book House, 1998), 18, 오인탁 외 10인 역, 기독교교육사(서울: 한국기독교교육학회, 2008), 20에서 재인용.

(55)John H. Westerhoff III, Will Our Children Have Faith?, 정웅섭 역, 교회의 신앙교육(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3), 12-15.

(56)Horace Bushnell, Christian Nurture, 김도일 역, 기독교적 양육(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004), 70, 85-86, 216-230; 황지영, “기독교가정교육”, 255 재인용; John H. Westerhoff III, A Colloquy on Christuan Education, 김재은 역, 기독교교육논총(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78), 72.

(57)현용수,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1, 98-119.

(58)현용수,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1, 152.

(59) James D. Smart, The Teaching Ministry of the Church, 장윤철 역, 교회의 교육적 사명(서울: 대한기독교교육협회, 1991), 234.

(60)이상규, “종교개혁과 한국교회의 갱신”, 미래목회포럼 종교개혁 496주년 기념 포럼, 20131011.

(61)Richard R. Osmer, “Teaching as practical Theology”, Jack L. Seymour & Donald E. Miller(ed.), Theological Approaches to Christian Education(Nachiville: Abingdon Press, 1990), 216-238.

(62)C. Ellis Nelson, “Theological Foundations for Religious Nurture”, Marvin J. Taylor(ed.), Changing Patterns of Religious Education(Nashville: Abingdon Press, 1984), 16.

(63)김철홍, “바울신학의 새 관점 비판”, 한국기독교학술원의 바울신학에 대한 새 관점학파의 비판적 연구44회 학술공개세미나.

(64)한춘기, “개혁신학적 관점에서의 기독교 교육론”, 總神大論叢20(2001): 116.

(65)김영환, 박수경, “암기전략유형과 학습자의 학습능력이 초등학생의 기억에 미치는 효과”, 교육공학연구16권 제1(2004): 69-90; 장종철, “포로기 이후 유대인의 학교교육”, 현대와 신학161(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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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최기수, “유대인의 성경교육에 관한 연구”, 성결신학연구7(2002); 박미영, 유태인 부모은 이렇게 가르친다(서울: 생각하는 백성, 1997), 40-45; Kenneth O. Gangel, Warren S. Benson, Christian Education: Its History and Philosophy, 유재덕 역, 기독교교육사(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2), 75; Roy B. Zuck, Teaching as Paul Taught, 김태한 역, 바울의 티칭 스타일(서울: 도서출판 디모데, 2002), 196.

(68)장종철, 기독교교육의 역사(서울: 감리교신학대학교 출판부, 1993), 81-83.

(69)현용수,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1, 174.

(70)현용수,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1, 172; 전성수, 자녀교육 혁명 하브루타(서울: 두란노, 2012), 129-152.

(71)황지영, “기독교가정교육”, 261.

(72)Margaret A. Krych, Teaching The Gospel Today, 이민규 역, 이야기를 통한 기독교교육(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12), 109-110.

(73)Jack O. Balswick & Judith K. Balswick, The Family: A Christian Perspective on the Contemporary Home(Grands Rapids: Baker Book House, 1991), 35. 50.

(74)Sherrill, L. J. The Rise of Christian Education, 이숙종 역, 기독교교육의 발생(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4), 44-45.

 

5 결론

한국 교회의 기독교교육이 개혁주의 신학에 충실한가 하는 문제는 교육이 발생하는 모든 영역에서 검토되어야 할 일이며, 개혁주의 기독교교육이 어떤 방향으로 발전해 가야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끊임없이 반성되어야 할 일이다.(75) 어떤 형태의 교육일지라도 꿩 잡는 것이 매라고 개혁주의 신학으로 검증되지 않은 교육은 교회교육과 기독교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가 자신의 주장과 생각을 글을 표현하게 되면 그 글을 접한 사람은 그 주장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반대 주장과 다른 의견 및 대안적 생각을 피력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러하기에 쉐마교육원의 교육과, 신학사상은 이제 검증받을 필요가 있고, 누구나가 질문을 하면 충실하게 답하는 것이 공공기관의 역할이며 사명이라 하겠다. 다양한 형태의 모든 질문을 성실하게 답해야 한다. 이 질문들은 단순히 지나가는 나그네식 질문이 아니라, 교회와 신앙의 핵심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기에 성경적인 신앙을 가진 기관이라면 당연히 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 과연 유대인의 쉐마교육이 성경적 교육인지, 그들이 주장하는 율법이 과연 성경적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율법교육의 당위성의 문제는 전반적인 신학의 문제이기에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아무런 검증적 절차 없이 한국교회, 특히 개혁주의 신학의 신앙고백을 하는 교회들이 쉐마교육을 교회교육에서 사용한다고 하여 유대인의 선민교육과 율법 교육의 당위성을 인정했다고 언급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다만 교회교육과 기독교교육의 발전과 현실적인 문제점을 개선하는데 하나의 안으로 제시되는 것은 고려해 볼 만한 하다. 개혁주의 기독교교육은 모든 형태의 교육에서 선함과 좋은 점을 발견하고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신학에 근거하여 교육의 방향을 정하고 성경을 해석하는가에 따라 개혁주의가 될 수 있고 개량주의(改良主義)가 될 수도 있으며, 개악주의(改惡主義)도 될 수 있다(76) 사실을 명심하고 개혁주의 기독교교육이 확립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개혁신학에 기초한 개혁주의 기독교교육은 소명이라는 공적신학(77)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에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실현하고 바로 그곳에서 기독교교육의 목표인 사람의 제일된 목적-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추구하게 한다.

그러므로 앞으로 개혁주의 기독교교육은 자신의 구원에만 관심을 두는 유아적 신앙을 넘어서, 뭇 영혼들이 구원받아 함께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해야하며, 동시에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도록 하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교육은 개혁주의 신학의 고백을 따라 성경을 교육과 삶의 최종적이며 유일한 권위로 인정하는 교육이어야 한다. 교육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왕권을 인정하는 인재를 양성하고 자녀를 양육하며 삶으로 그것을 보이는 삶을 살게 하는 소망을 가지기 위해서 개혁주의 기독교교육은 개혁신학을 통해 오늘의 시대적 상황과 교육적 문제에 응답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75)김영재, “고신 신학과 개혁주의 전통”, 기독교사상연구3(1996. 10): 117-118.

(76)오덕교, “개혁주의 신학 전통과 한국교회”, 神學正論132(1995): 433; 김영한, “기독교 세계관의 독특성-개혁주의 관점에서”, 기독교철학3(2006): 10.

(77)J. Bolt, A Free Church: A Holy Nation: Abraham Kuyper’s American Public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as,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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