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1122일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한국목회상담학회 주최로 열린 2014 한국목회상담학회 가을학술대회는 신학과 심리학의 동행, 왜 그리고 어떻게는 주제로 대강당을 가득 메울 정도로 대성황을 이뤘다. 심리학, 상담학에 관심이 많은 현 세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 학술대회가 진행되고 있다.

이날 주제강연으로는 홍영택 박사가 자기초월: 신학과 심리학의 접촉점에 대해, 강연자로는 홍구화 박사가 이중언어로 이루어지는 상담, 이희철 박사가 보이는 것에 눈먼 상담사: 목회상담 방법론의 시도, 김기철 박사가 인간이해를 매개로 한 신학과 심리학의 만남: 하나님 형상과 개성, 하재성 박사가 심리학의 자율성과 신학적 자심감을 각각 강연하였다. 이중 주제강연과 하재성 박사의 강연내용을 요약한다.

▲ 홍영택 박사가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자기초월: 신학과 심리학의 접촉점 /홍영택 박사(감리교신학대학교)

신학적 인간상과 심리학적 인간상

신학적 인간상: (1)초월성 강조: 인간을 넘어서는 초월적 존재를 향하여 자기를 넘어서도록 간조한다. (2)윤리적 모델: 인간의 문제를 기본적으로 윤리적 책임의 실패로 간주하여 이를 죄라고 규정한다. (3)인간의 한계 및 인간 타락의 강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개입을 통하여만 구원이 가능함을 강조한다. (4)의존의 함정

심리학의 인간상: (1)내재성 강조: 내적 경험에 대한 이해를 강조한다. (2)질병 모델: 인간의 문제를 도덕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의료적 모델을 취하는 경향이 있다. (3)인간의 잠재성 강조:억압된 잠재성을 일깨우고 격려함으로써 온전한 자기 및 삶의 실현이 가능함을 희망한다. (4)고립의 함정: 자기애적 환상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자기초월에 대해

틸리히(Paul Tilich): (1)자기:개인의 통합된 인격전체(the centered whole)를 가리킨다. 사람만이 완전한 자기중심이 있는 발달된 자기를 가진다. (2)자기초월(selftranscendence): 자기는 세가지 기능을 통해 삶으로 실현된다. 자기-통합(selfintegration) 즉 자기중심의성의 실현이다. 자기-창조(self-creation)이다. 세계속에서 자기가 성장하고 확장되는 과정이다. 자기-초월(self-transcendence)의 개념으로 종교의 기능이다.

(Carl G. Jung): (1)자아(ego): 무의식이 우선적인 것이며 의식은 무의식에서 탄생된 것이다. 의식의 중심에 자아가 있다. 자아는 개인이 자기 자신이라고 인식하는 의식을 가리킨다. (2)초월적 기능과 개성화: 자아는 하나의 콤플렉스(complex)이다. 자아는 상호 작용하는 콤플렉스 중의 하나이다.

(Walter E. Conn): (1)자기실현과 자기부정: 자기실현에 대한 심리학적 관심과 자기부정에 대한 신학적 관심 사이의 긴장에 주목하면서, 어떻게 사람이 초월의 차원을 자신의 삶속에 진정으로 통합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신학적 관심사에 있어서는 자기부정을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로 간주한다. (2)자기실현으로서의 자기초월: 자기초월은 인간실존의 기본성질로서 모든 사람은 자기를 넘어 나아가고자 하는 근본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다. 이 욕구는 모든 특정한 욕구들의 기초를 형성한다. 자기초월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과의 일치이다.

자기초월의 네 계기

자기와의 부딪힘: 생후 몇 개월에서 1년 사이에 서서히 자신이 분리된 존재임을 깨닫기 시작한다. 두 가지 차원이 있는데 첫째는 타나와의 분리임을 아는 것이고, 둘째는 자신이 경험의 주체임을 아는 것이다.

타자와의 부딪침: 나와 같은 또 하나의 인격을 만나고 그 인격으로부터 인격적 대우를 받게 됨으로서 나는 나됨이 무엇인지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인격발달의 본질적 요소인 동시에 상담 및 심리치료의 기봉요소이기도 하다.

세계 또는 한계의 부딪침: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며 죽는 곳이기도 하다. 사람은 이 세계에 수동적으로 속해있지마는 않다. 사람은 세계에 대한 구성을 통해 자기를 실현한다. 우리는 이를 문화라 부른다. 이 세계가 우리에게 주는 한계는 죽음으로 대표된다. 다른 의미를 찾지 못하면 인간은 공허를 경험한다. 우리는 창조행위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의미를 찾아야 한다. 여기서 자기와 타자와 세계를 초월해야 하는 요청에 직면한다. 로더는 공허는 거룩성의 그림자라고 말한다. 사람이 인격안에 내재하는 성령의 현존에 눈을 뜨려면 문화에 매여져 있는 자기를 내려놓아야만 한다.

궁극적 존재와의 부딪힘: 궁극적 존재는 자아-타자-세계의 조건을 넘어서야 만날 수 있다. 신앙 안에서 전 생애를 마감하는 것은 인간의 영이 드디어 창조주의 영과 하나 되어 그리스도가 만물 안에서 모든 것이 되게 하기 위하여 죽음을 이긴 이김에 참여하는 것이다.

신학과 심리학

편중된 무게중심: (1)심리학은 자기와의 부딪침과 타자와의 부딪침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고 (2)신학은 세계 또는 한계의 부딪침과 궁극적 존재와의 부딪침을 가종하는 경향이 있다. 심리학을 우선시 하려는 것은 좁음의 오류가 될 것이다. 그것은 궁극적 맥락을 보지 않고 자기 내면의 동기와 경험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신학을 우선시 하는 것은 넓음의 오류가 될 것이다. 궁극적 맥락에 의한 방향과 경계를 말하면서 개별적 인격의 동기와 경험을 간과할 수 있는 것이다.

신학과 심리학의 균형: 둘의 구분이 아니라 신학적 심리학, 심리학적 신학의 출현이 필요하다. 신학의 관점과 심리학의 관점 사이에는 변증법적 균형이 필요하다.

교회를 향한 목회상담의 교훈

교회의 전통적 자원의 강점: 교회는 하나님의 초월적 현존을 명시적으로 표현하고 경험하는 도구들을 갖고 있다는 강점이 있다.

목회상담가의 과제: 초월적 부름의 도구들이 권위적 억압의 도구가 되어 개인들의 자율적 경험과 과정들을 억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긍정과 자기초월 사이의 역동적 균형을 이루기 위한 목회신학들을 만들어 가야하는 과제를 가지는 것이다.

▲ 하재성 교수가 발표를 하고 있다.

심리학의 자율성과 신학적 자신감 /하재성 박사(고려신학대학원)

심리학을 비롯한 사회과학의 필요성(실천신학과 인간고난의 현장): Vanderbilt 대학교의 Bonnie Miler-McLemore 교수는 인간이 경험하는 고난과 갈등의 현장에 대한 광범위하고 심도있는 진술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그녀는 목회신학 및 실천신학이 심리학을 비롯한 사회과학의 다양한 학제들의 도움으로 인간의 고난을 둘러싼 인간의 심층적 심리 이해와 사회 문화적 환경에 대한 심도있는 진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현실의 실천적 이해에 있어서 과학의 중요성은 같은 대학교의 Edward Farley에 의해 오랫동안 강조되었다. 그는 인간 삶의 상황과 실천에 대한 독특한 신학적 해석을 제시하기 위해 1980년대에 신학의 범위를 확장했던 사람이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상황성의 해석이었다.

인간 해석 및 상황 해석의 결핍: 선구적 신학자들의 논의에 비추어 한국 교회와 지도자들은 자기 비판적 성찰의 결핍, 인문과학 및 사회과학에 대한 폐쇄성, 권력을 가진 개인이나 조직과의 맹목적 결탁과 같은 자기파괴적인 요소들을 골고루 갖고 있다. 물론 한국전쟁 같은 특수한 상황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교회와 신학의 대처는 너무나 안일하다.

1970년대의 민중신학이 잊혀짐과 더불어 한국사회를 행한 교회의 대화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오직 교회성장, 번영주의적 신앙, 대형교회당의 건축, 지도자들의 권력과의 밀착은 가속화 되었다. 그 결과 한국사회의 교회, 혹은 목회자는 탐욕자, 혹은 종교꾼들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것은 실천신학적 문제들에 눈감아 버린 결과였다. 그리고 실천신학의 결핍의 저변에는 사회과학에 대한 거부감 및 이데올로기적 근본주의가 자리하고 있다.

심리학은 과학인가? vs 과학은 기독교적인가?: 옥성호의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의 논란에서 보듯 옥성호와 일군의 기독교인들은 심리학 자체를 기독교를 위협하는 심각한 오염물질로 보았다. 그의 질문은 심리학은 과연 과학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심리학은 과학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심리학은 과학이 아니므로 진리가 아니라면서 인간중심적이고 반성경적이며 구원보다 치유를 앞세우므로 성경과 대치된다고 한다. 그러나 그 말은 심각한 논리적 문제를 가지고 있다.

물론 심리학은 과학적이지 않다는 말은 나름 의미 있는 진단일 수 있다. 심리학은 과학이라기보다는 인간행동의 의미에 대한 해석학적 영역이라는 말이 더 옳기 때문이다. 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심리분석학은 정신분석학 자체가 과학보다는 종교의 입지를 지향하고 있다. 그러기에 과학을 기독교적이라고 말하는 옥성호의 오류는 결정적인 것이다.

과학의 자율성과 신학적 자신감: 목회신학자나 상담자가 신학을 다른 사회과학에 비해 우선순위에 둔다는 것은 결코 신학이 과학을 소유하고 있거나 통제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중세 이후 과학은 더 이상 신학의 지배아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심리학이 과학인가 하는 분제는 심리학자들이 대답해야할 몫이다.

심리학을 비롯한 과학의 발전에 대한 근볹의적??태도는 위축감이나 두려움을 가진다. 그러나 그런 신학을 반드시 건전한 보수신학이라고 말하기도 힘들다. 왜냐하면 아브라함 카이퍼는 과학의 자율성을 신학이 인정해야 할 일반은총의 영역에 포함 시켰기 때문이다.

칼빈은 일반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이런 모든 것을은 하나님의 은사이며 그 원천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죄를 억제하시고 인간문화가 유지되게 하시기 때문이다. 타락한 인간 속에 남은 흔적혹은 잔여물은 여전히 그 원저자인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카이퍼는 인간 문화와 학문과 예술이 온전히 정결케 되어 영원히 천국에 보존될 것이라고도 까지 했다. 비기독인들에게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형상은 그 본래적 가치를 존중해야 할 것이다. 이는 심리학과 상담의 훈련을 받고 목회상담에 임하는 모든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이 반드시 기억해야할 우리 사역의 중요한 신학적 근거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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