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사랑의교회 사랑아트홀에서 열린 제18차 기독교통일학회(학회장 오일환) 정기학술 심포지엄에서 총신대 조남혜 교수는 하갈 기사에서 얻는 교훈이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탈북자들이 하갈에게서 어떤 교훈을 얻을 것인가를 발표했다.

탈북은 그리 쉬운 결단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고향을 등지고 위험한 세상속으로 뛰어드는 일종의 모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앞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고향에 있을 때보다 더 나은 삶을 살는지 아니면 지옥 같은 구덩이에 빠질지는 미지수다.

실제로 중국에 머울고 있는 탈북자들, 특히 여성들은 기대한 만큼의 생활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하더라도 과연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때로는 심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고통하는 그들을 보면서 한 사람의 인격, 그리고 가정과 사회에서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중요한 일일 것이다.

▲ 발표하는 총신대 조남혜 교수

하갈 그는 누구인가?

하갈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다. 하갈은 고향 애굽을 떠나 아브라함의 집에 노예가 되었으며, 주인들에 의해 원치 않는 임신을 하였고 학대 받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

이 하갈에 대한 평가는 시대마다 달랐다. 중세 시대에는 하갈을 동정하기 보다는 오히려 비난하고 경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서 학자들은 하갈이 신분(), 민족(애), 성별(여성)의 삼중고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이겨내었다는 점에서 크게 칭찬하고 있다.

그러나 억울하게 피해를 당한 하갈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이견이 조금씩 존재한다. 왕대일 교수는 민중이 당한 억울함을 끌어내고 강자의 횡포를 고발한 사람이다. 그래서 갈등과 대립이라는 상극을 넘어서 더불어 사는 삶, 즉 상생의 실천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여성신학자인 트리볼은 같은 여성으로 임신하지 못하는 사라의 고통을 외면하였다. 그러나 기득권자(아브라함과 사라)들로부터 고통을 받았으며 결국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트리빌은 하나님이 사라의 학대를 승인하고 압제자의 편을 든 폭력적인 하나님이라고 비난했다.

억울한 피해자라는 것만 강조한다고 해서 갈등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강자의 횡포와 부당한 압제를 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 시켜주면 줄수록 분노하게 되고 좌절하게 된다. 삶의 의지를 꺾고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따라서 하갈 역시 자신을 괴롭힌 여주인을 비난하기 전에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존재인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이 보다 능동적으로 삶을 사는 길일 것이다.

▲ 조남혜 교수의 발표가 진행되고 있다.

갈등

갈등의 불씨: 하갈이 사라와 갈등을 갖게 된 것은 사라가 여종 하갈을 대리모로 하여 자식을 얻고자 함에 있었다. 이는 그 당시 사회적으로 용납된 관습이었다. 그것은 종을 자신의 소유로 인식했던 의식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도 물건이나 소유물로 되어서는 안 되며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준다.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엄성과 가치를 가진다. 그러나 당세엔 그렇게 인식되던 시절이기에 아무런 죄의식 없이 그랬고 하갈은 임신을 하였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갈등의 본격화: 하갈이 임신을 하자 돌변했다. 임신하지 못하는 주인을 오히려 경멸하였다. 이제는 오히려 사라가 피해자가 되어 버린다. 상대방의 약점을 잡고 멸시하는 태도는 옳지 못한 것이다. 그러자 그것을 참아내지 못한 사라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학대를 시작한 것이다. 멸시를 학대로 갚는 것이다. 멸시를 주었더니 학대로 되돌아 온 것이다.

아브라함의 제안: 사라의 항의를 받은 아브라함은 당신의 눈에 좋을데로 하라고 제안한다. 이 아브라함의 제안은 누구에게 유리할까? 베스트만은 사라의 편을 들었다고 말한다. 웬함은 사라의 편을 들어 주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하갈을 보호하려는 고단수의 수법이라고 하고 트리볼은 하갈을 전혀 염주에 두지 않은 잘못된 제안이라 비난했다. 아브라함의 제안은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하갈이 도망치는 사태로 비화된다. 결국 아무도 승자가 없고 모두가 상처받았을 뿐이다.

▲ 주제발표가 진행되고 있다.

해결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이 등장한다. 이는 모든 문제해결의 답은 하나님께 있음을 말하여 준다.

시각의 전환 필요: 하나님과 하갈이 만난 곳은 광야에 있는 샘물 곁이었다. 이처럼 하나님과 하갈이 만났지만 서로가 지향하는 관점은 정반대로 달랐다. 즉 하갈은 죽으려고 광야로 들어왔고 하나님은 하갈을 살리려고 그를 만나 주셨다. 하갈의 시각은 죽음을 향하여 있었지만 하나님의 시각은 생명을 향하여 있었다. 하갈이 죽음에서 돌아서려면 그걸 바라보던 시각이 바뀌어 하나님의 시각으로 전환하여야 했다.

하나님의 질문: 하나님은 사라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셨다. 중요한 질문이다. 사라와 하갈을 동시에 부르심은 서로가 같은 인격체라는 사실을 알려줌이요, 그렇지만 사라의 여종이라는 신분을 명확히 하였다. 모든 사람은 자기 신분에 맞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은 하갈의 고변을 들은 다음 네 주인에게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고 명령하셨다. 복종하다는 단어는 학대하다라는 단어의 어근을 사용한 말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받던학대와 동일어이다. 이는 학대하던 여주인의 태도가 바뀌었을 것이라는 기대를 꺾으시는 말씀이다. 학대를 피하여 도망나와 죽으려던 하갈이 그런 엄청난 고통을 감수하고 다시 여주인에게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나님의 위로: 그것은 하나님의 위로의 약속에 있었다.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는 말씀이었다. 하갈이 돌아갈 수 있도록 용기를 주었던 것과 모진 학대를 감내하면서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이 위로의 약속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자기 뱃속의 아이가 그의 재산의 전부였고 그 아이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그의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시각을 바꾼 사건이었다.

 

결론

하갈이 여종이라는 신분상의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항상 피해자의 입장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약자가 강자를 괴롭힐 수 있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둔하지 말지어다.“(23:3)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탈북 여성들이 처해있는 열악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자칫하면 피해의식에 사로잡혀서 원망과 분노에 휩싸일 위험성이 있다. 그러나 남을 원망하는 것으로 갈등의 상황이 해결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가는 주체는 자신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근본적인 방법을 강구하여야 할 것이다. 죄성에 근거한 잘못된 시각을 버리지 않는 한, 갈등과 고통이 악순환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문제의 답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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