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을 마녀로 규정하는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마녀로 규정된 자는 어떤 재판절차를 거쳐 화형에 처해졌을까? 좀 과장해서 말하면 마녀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어느 사회이든 존경의 대상이 있는가 하면 두려움의 대상이 있기 마련인데, 역병이 발생하거나 천재지변을 겪거나 사회적 위기를 경험하게 되면 그 누군가를 의심하게 된다. 이런 가운데 마녀에 대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서 신통한 방법으로 치유를 행하거나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던가, 아니면 공동체에서 쫓겨난 여성들은 의심의 대상이 된다.

사회적 위기는 희생양을 필요로 했고, 마녀는 만들어지게 된다. 마녀를 발견하는 또 다른 방식은 ‘마녀 감별사’의 판단이다. 특히 15세기부터 17세기 까지 프랑스에는 마녀 감별사가 마녀를 추적했는데, 이들은 쉴 새 없이 돌아다니며 마녀의 눈동자에 있는 악마의 표시를 가려냈다. 이들이 “저 여자가 마녀다”고 하면 그 누구도 반기를 들 수 없는 권위를 행사했고, 감별사의 날카로운 시선에 걸려든 재수 없는 여인은 관헌에 끌려가 마녀용의자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일반적으로 마녀는 시체를 유기하거나 재산을 훔치거나 남의 몸에 상처를 내는 자. 숨겨진 것을 찾기 위해 마법을 행사하는 자, 정당치 않는 사랑을 유도 하는 자, 악마와 내통하거나 악마를 즐겁게 하거나 악마에게 고용된 자 등으로 규정하지만 이 규정은 큰 의미가 없다.

마녀로 추정되어 체포된 자에게 가장 먼저 취하는 조치는 신체를 조사하여 ‘악마의 마크’를 찾아내는 일이다. 옷이나 체모는 물론 엉덩이나 음부까지 철저한 조사를 한다. 피의자가 순순히 자백하는 일은 거의 없었으므로 악마가 침묵을 지키라고 건내 준 ‘묵비의 약’이 있는지도 철저히 조사한다. 옷을 전부 벗겨 머리카락은 물론 다른 털까지 깎고 신체를 샅샅이 조사한다. 바늘이나 칼끝으로 신체 부위를 찔렀을 때 통증을 느끼지 못하거나 피가 나오지 않는 경우는 악마의 마크로 단정한다. 그래서 사마귀, 점, 물집, 혹은 오래된 흉터자국이 악마의 흔적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악마의 마크가 발견되지 않는 경우에는 물 재판에 회부된다. 마녀는 악마와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세례의 물을 거부한다고 보았으므로 순수한 물은 어떠한 마녀도 거부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여성의 팔과 다리를 함께 묶어 물속에 던진다. 그 사람이 물 위에 뜨면 자동적으로 유죄가 인정된다. 반대로 물속에 가라앉았을 때는 무죄로 인정될 수 있지만 그녀를 끌어올렸을 때는 대개의 경우 이미 죽어 있었다.

마녀 피의자가 자백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으므로 고문이 자행되었다. 고문은 스스로 마녀임을 자백케 하거나 동료 곧 공범자를 색출하려는 목적이었다. 고무의 종류는 다양했다. 부라이언 이니스의 <고문의 역사>를 보면 이 당시의 고문이 얼마나 잔혹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육체를 부수는 일 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학살을 포함했다.

물먹이기, 발바닥, 겨드랑, 뺨, 성기에 기름을 발라 불로 태우기, 손톱 벗기기, 사지 찢기, 불에 달군 막대기로 황문관통하기, 끓는 물에 집어넣기, 인두로 지지기, 오금 자르기 등 고문도 다양했다. 이런 고문에서 해방되는 길은 거짓 자백이었고, 결국 부서지는 육체를 이기지 못해 죽음으로 안식을 구했다.

‘마녀사냥’이라는 현실과 <마녀의 망치>의 출간 이후 서양에서는 소위 ‘악마학’의 발전을 가져왔다. 프랑스의 법학자이자 경제학자이며 인문주의자이기도 했던 장 보댕(Jean Bodin)은 <마녀와 법률>(The Witches and the Law, 1580)을 출판했는데, 이 책은 판을 거듭했고, 4개 국어로 번역되기도 했다. 이 책에서 마녀상을 이렇게 묘사했다. 즉 신을 부정하거나 모독하고, 그 대신 악마를 숭상하며 무고한 아기 등을 죽여 악마에게 희생 제물로 바치는 등 반 교회적 행위를 일삼고, 음란하고 잔인한 일을 자행한다. 마녀의 입신식에서는 악마의 엉덩이에 키스하는 ‘치욕의 키스’(osculum infame)을 하기도 한다.

정치인이자 법률가였던 니콜라스 레미(Nicholas Remy)의 <마녀의 증거>가 그 뒤를 이었다. 재판관이었던 앙리 보게의 <마술사의 불길한 행동에 관한 논문>, 피에르 드 랑크르도의 <나쁜 천사와 악령의 악행 일람>등은 악마학의 발전 단계를 보여준다. 이런 악마학은 절대주의를 확립하는데 기여했다는 이케가미 슌이치(池上俊一)의 지적은 적절하다. 이단의 근절을 위해서는 절대권력의 행사가 불가피 했고, 악마학은 이를 뒷받침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주장이다.

마지막 한 가지. 이런 광기의 마녀사냥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프랑스 독일 영국, 스페인 등지에서 행해진 이런 여성학대는 16, 17세기가 가장 심각한 시기였다. 그 때는 종교개혁기이자 종교 전쟁기였고, 르네상스의 꽃이 피는 과학 혁명기였다. 마녀사냥은 중세교회와 교황, 신부, 수도사 그리고 그 시대의 권력자들만이 아니라 개신교회도 책임을 공유하고 있다.

루터나 칼빈도 그 시대 엘리트들이 합세하여 악령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들이 복음의 대적임을 주장하였는데, 이런 현실에서 마녀를 만들어 낸 이유가 무엇일까? 비교적 설득력 있는 주장은 사회적 불관용(intolerance)의 발현이라는 점이다. 동시에 16-7세기는 사회적 변동의 시기였고 다수의 이데올로기가 서로 충돌했는데, 그 충돌의 희생양이 마녀라는 주장이다. 사회적 불안, 기존 질서의 붕괴, 가난한 자와 부한 자들 간의 증오, 재앙의 발생에서 그 책임을 돌릴 속죄양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마녀사냥이라는 광기로 나타난 것이다.

이런 주장과 함께 중세의 마녀사냥은 가부장적 종교사회에서 여성을 의도적으로 차별화하려는 이반전략이라는 주장도 있다. 달리 말하면 여성억압의 일환이라는 주장인데, 이것은 후대의 주장으로서 당사 상황을 고려볼 때는 설득력이 약하다. 어떤 해석을 하던 중세의 잔혹했던 마녀사냥은 인간의 무지, 분노, 광기, 종교적 편견, 교조적 편견이 어울려진 역사의 아픔이었다. 인간의 역사는 한(恨)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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