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신학 100주년 기념 진리와 자유포럼에서 박영신(연세대 명예교수) 박사는 2005 한국사회와 기독교 정신이라는 주제의 발표를 통해 우리 사회의 짜임새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초원의 정신과 저항의 삶을 제시하였다. 과연 초월의 정신과 저항의 삶은 공존할 수 있는가?

▲ 박영신 박사가 "2005 한국사회와 기독교 정신"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2005 한국사회와 기독교 정신/박영신 박사

한국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사회의 짜임새를 크게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가족주의(유사가족주의)와 경제주의이다.

가족주의: 모든 것을 가족단위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지향성이다. 이는 아주 오래된 역사를 가진다. 조선이 세워진 후 나라가 유교화 되면서부터이다. 조상제사는 그 중심에 있었고 삶의 관심은 온전히 가족관계를 잘 지키고 강화하는데 있었다.

유교는 원래 의 사상에서 시작하는데 조상제사라는 굴레가 씌어져 굴대문명‘(수레바퀴를 이어주는 대)의 하나였던 유교의 본래 정신은 기력을 잃었다. 조선이 오히려 유교의 종주국이었던 중국보다 더 가족관계를 중심에 두었다는 것은 최부(崔溥 14534-1505)의 표해록에 잘 나타난다.

이런 지향성은 몇 세기에 걸쳐 일어난 사회 변동의 흐름속에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그 근본의 틀은 변하지 않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기업은 서양의 것과 비슷한 틀을 가지고 있지만 그 기업의 구성원은 여전히 가족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기업조직이 합리스러운 체제를 만들어갈 것이라는 막스 베버의 생각은 우리 사회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혈연에 터한 가족중심의 의식은 공공에 대한 관심의 문을 닫고 사사로움에 대한 관심에 몰두하고 공공의 문제도 사사롭게 접근한다.

이런 가족주의의 그 틀과 생각이 의외로 유연하다는 것이다. 다복다남도 수용했고 아들딸 가리지 말고 하나만 낳자 에도 동의했다. 심지어는 아이를 더 낳자는 정책도 받아들인다.

경제주의: 가족주의 중심에는 물질주의가 있다. 물질이 삶의 목표가 되었다. 우리 국민은 경제성장교의 교도가 되었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 논지가 한국에서는 우리 식, 유교적인 가족주의 경제주의로 발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한국식 자본주의이다. 한국적 가족주의 자본주의는 개방성과 객관성에 터한 서양식의 합리스런 경제체제가 아니었다. 이는 친분 자본주의이다.

 

초월의 정신이 필요하다.

유교적 가족중심의 자본주의 경제가 기독교로 인하여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가족(친족)의 고착성을 뚫고 나갈 뿐 아니라 도시 구속성을 허물어뜨리고는 모든 구획과 지역을 넘어 그 모든 것 위에서 다스리는 존재였다. 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가족 중심의 의식 세계나 도시 중심의 의식세계 할 것 없이 모두 무너뜨릴 수 있었다.

어떤 칸막이도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였으며 모두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종교의례상으로 모두가 평등하였다. 기독교는 친족이 가진 종교의 중요성을 파괴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를 초월의 정신이라 할 것이다.

▲ 진리와 자유포럼이 진행되고 있다.

초월의 정신이 곧 저항의 삶이다.

가족을 넘어 우주적 하나를 지향하는 것은 초월의 정신이다. 그 초월의 정신은 저항의 삶으로부터 일어나오는 것이다. 독재에 항거하는 반체제 운동은 오히려 곁가지에 불과하다. 우리가 저항해야 하는 것은 가족본위의 유교적 자본주의이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가족주의의 틀을 깨고자 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런 저항정신은 실종되고 현실에 부화하고 있다. 기독교는 그런 능력을 키우지 못했다. 현존 사회에서 성공의 사닥다리를 올라가는 것이 최선이고 유일한 선택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만일 이 땅의 기독교가, 오늘날의 교회가 현실 체제의 흐름을 비판하기는커녕 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있다면, 그리고 현실 체제를 답습하고 추종하는 굴종의 타성과 노예근성에 저항하기는커녕 체제 순종과 수종을 강화하고 있다면 이것은 초월신앙에 대한 배반이고 기독교 정신에 대한 배신이다.

체제에 빌붙어 성공(?)한 체제의 사람들에게 저항의 사람은 엉뚱하다 못해 괴팍스런 자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불편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돌림 당할 수 있다. 외로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며 저항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 그가 진정 품위있는 믿음의 사람이고 택함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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