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구 목사

저는 지난 수년간 늘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살면서도 한편으로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송구스러운 마음을 금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치도록 보냄을 받았으나 저의 부덕으로 본의는 아닐지라도 여러 사람에게 근심을 끼치고 논란거리가 된 것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동안 저는 고려학원의 부도 문제가 해결되고 관선이사체제가 물러가는 날이 도래하면 교회의 지도자들이 여유 있는 마음으로 그간의 사태를 정리하며 생겨난 오해들을 풀 수 있는 날이 올 것을 기대하며 기도해 왔습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금년 총회에 다시 본인에 대한 터무니없는 공격이 계속되는 것을 보며 적법하거나 적절해 보이지는 않지만, ‘총회’에서 제명된 저로서는 자신의 입장을 밝힐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이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는 상황이라 오늘 이렇게 해명서라는 이름의 사신(私信)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제57회 총회에 ‘특정인사’는 부산노회의 이름을 빌어 또다시 본인의 이름을 거명하며 징계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하였고, 그 청원서에 본인이 2003년에 쓴 학위 논문에 대한 변증서의 일부분을 교묘하게 멋대로 발췌하고서는 본인의 성경관에 문제가 있다는 황당무계한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아무리 총회에 제안된 안건이라고 하더라도 본인이 시인하거나 확정되지 않은 사항에 대하여 특정인의 이름을 공연히 공개적으로 거명하는 것은 당사자의 명예를 심대하게 훼손하는 행위로 위법적 요소를 띄고 있는 만큼 향후 총회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해 주셨으면 하는 요청을 드리면서, 문맥의 무시, 문장의 고의적 탈락, 중복, 다른 문맥의 글 억지 조합 등을 통해 남의 신학을 마음대로 왜곡하고 있는 상황을 묵과할 수 없어 차제에 그의 주장이 얼마나 사실과 거리가 있는지를 밝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그가 왜 이런 유치한 일을 벌이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부산노회만을 통하여 올라왔지만 북부산노회, 서울노회가 동일한 청원을 하고 있는 것은 너무나 뻔 한 술수를 보여줍니다. 세 노회씩이나 문제를 삼으니 굉장한 일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전법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전부터 항상 이 세 노회를 이용했고 세 노회에는 특정인의 신학 동기생이 각각 주요 인물로 포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세 사람이 총회를 흔들고 있는 셈입니다. 총회가 그렇게 쉽게 조작이 가능한 조직이라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모 인사가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 본인의 글을 포함한 부분을 그대로 전재합니다. 문제 삼고 있는 ‘성경의 영감과 계시’ 문제를 다룬 저의 글은 본인의 학위 논문에 대한 변증의 글 가운데서 발견됩니다. 전체 내용을 다시 한 번 옮겨보는 것이 좋을 듯싶기는 하나 너무 길어질 것 같아 글의 일부만 싣고, 그가 지적한 15가지 지문이 포함되어 있는 곳에 밑줄을 그어 표시하고 ‘올림으로 표시된 번호’를 달고, 그의 무분별하고 파괴적인 각각의 주장에 대한 반박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연속적으로 기록된 상태를 유지하면서 지적한 부분에 대하여 표를 만들어 해설내용을 담고자 합니다. 따라서 바른 이해를 위하여 <2. 논문 이해를 위한 전제> 내용 전체를 처음부터 읽어주시고 <해설> 부분은 더 꼼꼼하게 읽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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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2. 논문이해를 위한 전제

앞서 잠깐 언급한대로 논문을 번역하고 평가하면서, 필자가 성경의 역사성을 믿지 않는 것처럼 오해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성경 해석 방법론인 비평학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비평학이란 무엇인가?1)

사실 비평이란 용어는 단순히 성경연구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일반 문학연구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던 방법이 성경연구에 도입되었을 뿐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웹스터 사전은 비평을 일컬어 “문학적 자료들의 - 특히 성경의 - 기원, 본문, 구성, 특성, 역사 등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시도”2)라고 정의한다. 결국 이것은 주어진 문학작품에 대하여 맹목적인 찬사나 비판을 가하기보다는 그 특성을 정확하게 분석하여 바르게 평가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임을 알 수 있다. 가치가 없는 작품에 멋대로 극찬을 보내거나 귀중한 작품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우를 범치 않도록 하기 위한 방편으로 비평의 방법이 문학의 작품이해에 사용되었다. 이러한 일반 문학연구에 사용되는 비평의 방법을 성경에 적용한 것이 성경 비평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비평작업은 처음부터 성경을 파괴할 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개혁주의 신학적 입장을 충실히 견지하고 있다고 인정되는 개혁신학대학원대학의 구약교수인 손석태 마저 이제는 ‘성서 비평학에 대한 폭넓은 지식 없이는 신학이나 성서주석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성서 비평은 신학작업 그 자체가 되었고 보편화되었다’는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3) 그러나 결과론적이지만 결국 현재까지의 비평학은 몇몇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고는 성경의 기록이 사람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절대적 이성주의와 결합하면서 자유주의 신학의 도구로, 성경의 계시성과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파괴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만 인상이 짙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비평학에 대하여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본다는 느낌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손석태 교수의 평가대로 오늘날 성경해석 작업에 나서려는 자는 누구나 성경 비평학에 대한 폭넓은 지식 없이는 제대로 해석이나 주석 작업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비평학은 막연히 두려워하거나 경원시 할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대화가 가능하고 대화해야 하는, 성경의 바른 해석을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과정의 하나일 뿐이다.

 

1) 비평적 용어의 사용에 대한 오해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필자의 논문이 비평주의자들이 사용하는 몇 몇 용어들을 설명 없이 사용하고 있어 불필요한 오해를 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오해는 우선 논문이 써진 현장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필자의 논문은 복음주의와 비평주의가 공존하며 상호 학문적 토론을 지속하고 있는 영국에서 써졌다. 따라서 비평적 용어들의 용법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만약 이 논문이 아직 비평학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한국의 보수주의 학교에서 만들어졌다면 본인이 사용한 용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였을 것이다. 이 말은 필자가 비평학에 대한 입장을 바꾼다는 말이 아니라 채택된 용어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지를 오해되지 않도록 정확하게 규정하였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tradition, saga, story, narrative, oracle, episode 등의 용어를 사용한 것을 두고 마치 성경의 역사성이나 영감성을 부정하는 증거가 되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현재의 학문적 흐름에 무지하거나, 아니면 무시하는 과잉반응이다. 이러한 오해는 정경형성 과정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작업이 함께 이루어져야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우선 여기서 몇 가지 용어에 대한 설명을 붙여보고자 한다.

a. 전통, 전승이라는 말로 번역되는 tradition이나 필자 논문의 번역진이 전설로 번역한 saga4)라는 용어를 양식비평학자들이 먼저 사용한 것은 사실이다. 양식비평의 방법은 정경이 기록되기 전에 구전(口傳, oral tradition)의 단계가 있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1)우리 가운데 누가 성경이 기록되기 이전에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에 대한 전통이 전달되는 단계가 있었음을 부정할 수 있는가?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내용을 담아야 할 복음서가 오히려 대표적인 사도 바울의 서신들보다 늦게 기록되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구전되어 온 예수님의 교훈과 생애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알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바울이 예수님의 교훈과 생애에 관하여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할 것인가? 그런 증거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 뿐만 아니다. (3)사도행전 20장 35절은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이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으로 인용한 부분은 복음서에서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바울이 구두로 전해들은 것일 수밖에 없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이 대부분 시어(詩語)로 되어 있는 것은 책을 읽을 수 없는 고대 사회에서 말씀을 기억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은 기록된 성경의 내용이 기록되거나 되기 이전에 어떤 형태로든지 전승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창세기에 기록된 사건들은 어떻게 모세 시대에 전달된 것인가? (4b)창세기의 기록들은 계시를 받은 모세만 알고 있던 사건들이었을까?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창세기의 사건들은 모세 시대 이전에 이미 오래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으로 거듭거듭 이야기되고 있던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4a와 연결하여 설명) 전통과 전승이라는 용어를 비평학자들이 사용하였다하여 우리가 사용하지 못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기도, 자비, 은혜 천당 등이 불교나 타종교에서 사용되던 용어였다는 이유로 우리가 사용할 수 없다고 하면 뭐라고 말할 것인가?

역시 양식비평학적 용어인 Narrative는 이제 누구나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전문술어가 되었다. 이전에 번역자들이 이 용어를 설화(說話)로 번역하는 바람에 마치 전설처럼 들리기도 하였지만 설화는 문자 그대로 ‘말, 말씀’이라는 의미일 뿐이다. 보통 이야기체로 번역되는 이 용어는 역사서의 양식을 지칭하는 말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요즈음은 이런 기록 양식을 본 따 ‘이야기체 설교’라는 설교방법까지 소개되는 상황이다. 양식비평학자들이 사용하였다고 하여 특정 용어의 사용조차 무조건 배제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이론(異論)을 제기할 수 있다.

다시 Saga라는 용어에 대하여 조금 더 말해보자. Saga는 필자 논문의 번역진들처럼 한 것처럼 일반적인 의미의 ‘전설’로 번역되기보다는5) 본래 ‘이야기’라는 뜻으로 주로 무용담, 영웅담이라는 문학적 기법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는 것이다. 구약역사 학자로 그의 입장을 전부 받아들이는 데는 문제가 있지만 성경의 역사를 고고학적 증거를 찾아 입증하려는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존 브라이트는 구약기록의 내용적 한계를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모든 문학은 그것에 해당되는 유형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이것은 성경의 문학에도 그래도 적용된다. 그러므로 족장설화 patriarchal narrative는 그 자체의 성격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 우선 그 설화(說話)들은 육경전체에 걸쳐 이스라엘의 기원에 얽힌 일들을 성스러운 전승 속에서 기억된 대로 기록할 뿐 아니라 그런 일들을 통하여 자기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구속행위들을 예시하고자 한 하나의 장엄한 신학적 역사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단점이 아니다! 사실 그 설화에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영원한 타당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신앙의 역사가 아니라면 그 역사는 거의 우리의 관심을 끌 수 없을 것이다....역사가는 한갓 인간에 지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편에서 역사를 서술할 수 없다........

그 뿐 아니라, 전승들을 날라 온(전달해온-필자 주) 구전(口傳)의 장구한 흐름과 그 전승들의 양식도 고찰되어야 한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 내용의 본질적인 사실성(史實性, essential historicity)을 의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영웅시, 서사시와 산문적 민담(民譚, prose saga)은 모두 역사를 서술하는 양식이다.....분명히 오경의 신학을 위해서는 그것들이(영웅시, 민담등)이 우리의 현학적인 역사서술 방식들이 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나은 양식들이었다6).

필자가 ‘요셉이야기’를 두고 story, narrative, tradition, saga등 여러 가지 용어를 사용한 것은 문장의 기법을 분석하는 방법이 다양함을 말한 것일 뿐, 그것의 역사성을 부정한다는 것은 평자의 아주 잘못된 상상의 산물일 뿐이다.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기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성격의 글이 생겨나는 것 역시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역사적 사건을 편지형식으로 기록할 수도 있고 (epistle), 리포트로 report, 역사적 서술로 historical narrative, 사건의 핵심인물 중심의 영웅담으로 saga, 드보라의 노래(삿5:)처럼 시로 poetry, 요셉 이야기 (창37-50) 가운데 끼워 넣은 다말 이야기처럼 단편적 삽화 형식으로 episode 기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용어를 사용하면 무조건 역사성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예사롭게 펼치는 신득일과 박종칠의 용기는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글의 문학적 성격을 구명하여 해석에 도움을 얻고자 하는 노력을 비평주의적이라며 무조건 거부하는 것을 정상적인 사고로 보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개혁주의자들이 경원시하는 비평학이라는 것이 어디까지나 실험적인 해석의 한 가지 방법일 뿐이라는 점이다. 비평학자들 누구도 현재의 비평학을 완전한 것으로 보는 사람이 없다. 비평학자 서로 간에 서로의 이론을 비판하는 경우도 예사롭게 만날 수 있다. 비평적 용어를 사용한 것을 두고 마치 거기에 모든 무게를 둔 것처럼 일방적으로 몰아가려는 것은 평자 자신의 학문적 지식이나, 양식, 그리고 양심을 속이는 일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2) 정경 형성의 과정에 대한 오해

필자의 논문에서 엉뚱한 결론을 추출하는 또 다른 이유는 정경 형성의 과정에 관한 오해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박종칠은 필자의 논문을 평가하면서 전혀 근거와 타당성이 없는 주장을 다섯 가지 늘어놓고 있다. 그는 필자가 a. 성경 본문의 역사성을 부인하고, b. 성경의 영감성과 계시성을 부인하며, c. 신명기서를 모세의 저작으로 보지 않고 후대 편집으로 보고, d. 비평가들의 편집설을 믿으며, e.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행위에 따라 결정되어지고, 구원은 행위에 의해 조건 되어진다고 한다는 등의, 스스로도 믿기 어려운, 있을 수 없는 주장을 인터넷에 유포해가며 거침없이 늘어놓고 있다. 때문에 그는 필자가 그렇게 변질된, 혹은 곡필한 이유는 심사위원 교수들을 만족시키기 위하여서라는 제법 그럴 듯한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 필자에게 제시해 주기도(!) 한다. 다음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사실 대꾸할 가치조차 없고 시간 낭비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지만 앞으로 다시 유사한 사건이 반복되지 않도록 예방하고, 교단 내에서 그의 잘못된 주장만 듣고 필자에 대한 작은 오해라도 완전히 해소시키는 것이 건강한 개혁주의 교회를 건설하는 데 유익할 것으로 여겨져 성실하게 논의에 임하고자 한다. 위의 모든 오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정경 형성의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는 한 때 구약을 가르쳤지만 제대로 이 문제에 관하여 사색해보지 못한 느낌을 주고 있다.

 

a. 역사와 전통, 영감과 계시의 문제

앞서 언급했지만 정경에 속한 책들이 완전한 한 권의 책으로 나타나지 않은 것은 물론, 심지어 기록으로부터 시작된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 기록된 모든 사건들이나 출애굽기 가운데 모세의 출생에 관한 사건 등은 모세 자신이 전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모세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와 유사한 기사들을 고대 근동의 기록들에서 찾을 수 있다는 주장은 차치하고, 우리가 여기서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오경을 모세의 저작이라고 하는 것’과 ‘그가 이전의 자료들을 사용하였다’는 것을 모순된 것으로 간주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 자료가 구전이건 기록이건 어떤 것이든 간에 모세는, 시내산 언약과 같이 직접 계시를 받은 것도 있지만, 진공상태나 환상 중에서 기록한 것이 아니라 많은 부분을 이미 존재하던 자료를 사용하여 기록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물론 이러한 주장을 소위 JEDP 설과 같이 기껏 주전 11세기 정도에서 기원을 찾는 문서설과 동일한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필자는 모세의 기록에는 어떤 방식이든 인간적인 전통의 전달과정이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이 성경기록 과정에 있어서 전승된 자료 사용여부를 언급하게 되면 마치 성경의 역사성이나 영감성을 인정하지 않거나 계시성을 부인하는 것처럼 오해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성경의 영감 문제를 직접 언급한 유일한 구절이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편지에서 나타난다(딤후3:16). (2)디모데 서신을 포함하여 모든 서신에서 바울은 자신이 개인적으로 쓰고 있음을 나타내거나 아니면 디모데와의 공동서신 형식을 취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혹은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등 서신의 내용이 자신의 부탁이요 권고라는 사실을 전혀 숨기지 않는다. 그의 서신 어디에도 하나님이 직접 자신에게 계시하셨다고 말하는 곳은 없다. 고전 7장 25절에서는 심지어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고하노니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바울은 여기서 결혼 문제에 대하여 철저하게 자신의 개인적인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바울의 기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무슨 연유로 그렇게 하는가?

우리는 일찍 구약에서 이와 같은 현상을 경험하였다. 구약의 시편과 지혜문서는 오경이나 예언서와는 그 격을 달리한다. (12)시편이나 지혜서 그 어디에도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시인(공동체)의 찬송이나 탄식을 기록하거나 욥기, 전도서, 잠언, 아가서에는 주인공 자신이 깨달은 삶의 지혜가 들려지고 있을 뿐이다. 에스더 서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아 마지막까지 정경성을 의심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책들은 논쟁을 거치면서도 결국은 정경에 포함되어 우리에게 전달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로 이루어진 신앙공동체는 공동체에 속한 개인이나 집단의 찬양과 탄식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여 정경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4)영감과 계시를 초자연적인 성격으로만 국한해서는 성경의 많은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13a)하나님은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구약의 역사서에서 보여주듯 일반적인 역사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개혁주의 영감론이 기계적 영감론이 아니라 유기적 영감론의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은 인간저자가 가진 자질과 특성을 충분히 사용한다는 것을 말한다. 성경의 저자들은 매우 다양한 문학적 기법들을 사용하고 있음을 금방 알 수 있다7). 판넨베르크가 말하는 것처럼 초자연적인 계시를 부정하고 전적으로 역사를 계시의 수단으로 보는 ‘역사로서의 계시’만 주장한다면 곤란하겠지만8), (13b)성경은 철저하게 역사의 흐름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 있음에 유의하여 (7)영감에 관하여 지나치게 환상적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필자가 성경의 역사성을 부인한다거나 영감이나 계시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식의 주장은 필자의 목사로서, 아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밟아버리는 짓거리로, 억지논리에 근거한, 참으로 터무니없는 무지하고 악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과 에돔 등에 관한 기사를 아모스와 비교 분석하여 아모스 이전에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사건이 있었고 그것을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존재근거로 사용하고 있음을 밝혀, 아모스와 같은 주전 8세기 선지자들에게 아브라함 언약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R.Clements와 같은 비평주의 학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려하는 필자의 시도를 마치 필자가 아브라함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것처럼 몰아 가는 것은 무지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면 비양심적이거나 악한 의도를 가진 행위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b. 정경의 저자에 대한 오해

여기서 필자가 한가지 더 분명히 해 두고 싶은 것이 있다. 성경학자는 필연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책의 저자나 저작과정을 다루어야 한다. 이런 작업을 할 때 개혁신학자라면 반드시 성경의 제1 저자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전제한다. 따라서 (6)성경의 계시성이나 영감성의 문제는 학자의 신학적 전제에 속하는 것으로써 그 진정성 여부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필자를 포함하여 다수의 성경신학자들이 성경의 본문을 해석하려 하면서 저자나 저작시기, 문학적 방법 등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다고 하여 성경의 영감성을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정경의 영감과 계시성은 본문 연구의 전제(前提)에 속하는 것이다. 필자의 논문을 읽은 평자들이 아모스 예언의 기원 문제를 다루면서 전통, 전승은 자주 언급하는 반면 하나님의 계시라는 점은 제대로 적시하지 않음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한다. 그들의 의도는 충분히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앞서 지적한 성경학자가 행하는 일의 범위를 착각한 데서 비롯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범주착각의 오류를 범하는 셈이다.

아모스 예언의 기원 문제를 다룰 때 필자는 인간 아모스가 자기시대 이전의 역사와 전혀 상관없는 백지 상태에서 예언하거나 성경을 기록한 것이 아님을 전제하고 있으며, 따라서 아모스는 예언자로서 이전의 전통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을 밟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그 바탕 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았음을 주목하는 것이다. 아모스가 말씀을 받을 때에 어떤 선(先)지식을 갖고 있었겠는가를 살피는 것이 성경의 저자에 대하여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일의 전부이다. 계시는 저자와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문제인 만큼 만약 계시만을 예언의 근원으로 다룬다면, 저자나 시대, 문학적 기법 등이 주석가들의 관심이 될 수 없고 될 필요도 없는 셈이다. 아니, 주석가들은 단지 쓰여진 글자 그대로 문장의 뜻을 파악하는 일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지게 되는 셈이다.

이 문제가 논란이 되는 것은 대부분의 비평주의자들이 아모스가 남쪽 유다 지역 출신이고, 모세 이후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입국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리적으로 세겜을 비롯하여 주로 북쪽지역에 정착하였으므로, 모세 언약의 전통은 북쪽에서 보존되고 전수되었으므로 아모스는 북쪽의 전통은 알 수 없고 다만 예루살렘에서 보존된 다윗과 관련된 역사적 전통만 물려받았을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는 데서 비롯된다. 아모스 당시 기록된 정경이 일반에 유포되었을 가능성이 극히 희박함을 감안할 때, 아모스는 결국 신앙공동체의 예배를 통하여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전통을 몸에 익혀갔을 것임이 분명하고 따라서 다윗-솔로몬 왕국에 내리신 은혜의 약속이 주를 이루었을 예루살렘 예배는 다윗 언약에 집중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상당히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필자는 이러한 상황에서 아모스가 다윗 언약이 아니라 모세 언약과, 나아가 아브라함 선택 신학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음을 밝혀 예언이 단순히 지역에 국한된 사상으로 전달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평자로서 어떻게 아모스 예언의 윤리적 기초를 다루는 논문을 읽고서 필자가 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지 않고, 구약의 역사적 사건을 허구라고 주장한다는 등의 신앙의 근본문제를 부정하는, 자칫 타인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는 주장을 거침없이 할 수 있는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① 정경의 저자 문제를 확실히 이해하기 위하여 정경의 저작과정에 관하여 보다 분명한 경우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가령 누가복음의 경우를 보자. 누가는 복음서를 기록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 (눅1:1-4)

누가는 여기서 우리에게 정경 기록에 관한 몇 가지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1) 복음서는 말씀의 목격자이자 일군 된 자들이 전하여 준 (전승된) 그대로의 역사를 기술하려 한 사람들에 의하여 기록되었다. 기록이전에 구두전승이 있었음을 잘 드러낸다.

(2) 복음의 역사에 대하여 기록하려 한 사람들이 많았다. ‘붓을 든’ 모든 사람의 글이 정경화 되었다고 말하기 어렵고 그들이 모두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붓을 들었다는 증거는 없다.

(3) (8)누가복음은 철저하게 누가의 의지에 의하여 기록되었다. 누가는 스스로 모든 일의 근원부터 자세히 살폈다고 말하고 있다. 본문 어디에도 성령의 지시나 감동으로 기록했다는 증거가 없다.

(4) 누가복음은 데오빌로라는 고위관리가 전해들은 복음의 내용을 확실하게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다. 철저하게 (9)개인적인 용도로 쓰여지도록 기록된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주저함 없이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 어디에도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특별한 계시로 쓰여졌다는 증거는 없다. (10)흔히 정경의 기록을 매우 신적이고 신비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그래야만 정경성을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누가의 기록을 통하여 우리는 정경이 철저하게 인간적인 관심과 필요를 위하여 기록되었음을 보여준다. (11)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록들이 정경의 자리에 들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기록의 필요를 스스로 느낀 그 사람들을 사용하여 반드시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을 전달하고 계시고 있다.

② 여기서 구약이 정경의 집성방법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부분을 살펴보자. 잠언 25장은 구약정경의 구성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말해준다.

"이것도 솔로몬의 잠언이요 유다 왕 히스기야의 신하들의 편집한 것이니라"(잠25:1)

잠언서는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 받은 말씀이라’라고 예언의 근거를 분명히 하고 있는 예언서들과는 달리 시작부터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는 말로 솔로몬이 자신의 언어로 말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거기다 위의 본문에서 보는 대로 잠언 25장부터는 솔로몬의 잠언인데 솔로몬 이후 2세기 이상 지난 다음의 왕인 히스기야 시대에 그의 신하들이 편집한 것이라고 말한다. 잠언서의 편집이 완성되는 데는 최소 200년 이상의 세월이 필요했다.

시편 150편이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되는 데는 그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우선 시대적으로 90편 모세의 기도로부터 126, 137편과 같이 포로시대를 회상하는 시편까지 포함되어 있다. 무려 천 년의 세월이 한 권의 책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시편이 한 권으로 완성되는 데는 긴 시간이 소요되었음을 보여 준다. 시편이 매우 의도적으로 5권으로 나누어져 있는 점은 편집자의 존재를 보게 한다. 시 72편이 ‘아멘 아멘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필하다’로 끝마치고 있는 것은 그 곳에서 시편의 1차 편집이 끝난 것을 시사한다. 120- 135편까지에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가 한 곳에 모여 있고 역시 포로시대를 회상하는 시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 부분이 성전이 훼파 된 포로 후기에야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윗시대 이전부터 모여지기 시작한 시편이 포로후기에 이르러서야 완성을 보고 있다는 것은 정경의 형성이 긴 세월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말해 준다. 이러한 정경 형성의 과정에서 우리는 다른 정경의 완성과정을 추론할 수 있게 된다. (14)성경의 계시성을 순식간에, 신비스러운 과정으로, 인간 저자의 개인적 능력이나 자질을 배제하거나,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라는 일반적 이해를 성경자체는 사실상 거부하고 있는 셈이다.

 

3) 성경의 역사성에 대한 오해

필자는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에게 선지자 칭호가 적용되었지만(창20:7) 아모스 이후의 문서선지자 시대의 선지자와는 다른 중보자적 역할을 보이고 있음에 주목하여 모세, 미리암, 아브라함에게 적용한 선지자라는 용어는 느슨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를 두고 박종칠은 필자가 이스라엘 초기 전승에 선지자 직분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진화론적 발상을 보인 증거라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위의 주장을 두고 ‘모세의 선지직이 후대의 것이 되어 버리면 예수님이나 바울이 오경을 인용하면서 모세의 기록이라 한 것이나 이 말을 믿는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는 선동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러한 그의 단정적 행위를 보면 그가 얼마나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가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모세, 아브라함에게 적용된 선지자란 용어는 후대의 의미가 다르다고 한 것이 어떻게 초기 전승에 선지자직이 없다고 한 것이 되는가? 그런 지적이 어떻게 모세의 선지직을 후대로 만드는 것인가? 그것과 오경의 모세 저작설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필자가 선지자라는 용어가 사용된 예를 살피며 의미상의 차이가 있다는 지적을 두고 역사성의 부정이니, 오경 저작설의 부정을 주장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를 선명하게 드러나게 한다.

다시 말하지만 필자는 논문 어디에서도 아브라함의 선택에 관련된 이야기가 역사성이 없다는 주장을 한 적이 없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박종칠은 근본적으로 곳곳에서 논문의 이해능력에 상당한 문제를 안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필자가 이따금 창세기 기사의 역사적 정확성이나 진실성에 대하여 유보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두 자료를 비교하면서 ‘어느 것이 어느 것에 의존했다는가에 대한 질문에는 관심이 없다(p.346)’라거나 ‘우리의 연구를 위해서는 이런 추정이 역사적으로 정확한지 아닌지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9)’라고 말한 것을 두고 ‘역사를 비역사로 본다’고 단정하며 비난한다. 역사성을 의심하는 자들이 많기 때문에 역사성을 입증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되는 부분을 다루면서 필자의 논지를 전개하는 데 있어서 역사성과 상관없이 필자의 주장이 성립한다는 것을 표현했을 뿐이다. 이런 기본적인 어법조차 곡해하려 드는 것은 그의 심적 태도를 짐작하게 한다. 우리의 입장에서 역사성이나 진실성을 일방적으로 말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지만 비평학자들은 정확하게 증명된 사실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본 논문에서는 인용하는 사건의 역사적 정확성이나 진실성을 입증하려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그와 상관없이 결과를 도출할 수 있음을 표현하는 것을 두고 비역사성 주장 운운하는 것은 가공할 만한 일이다. (이하 생략)

<결론>

위의 글을 통하여 필자는 고소내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같습니다.

1. 필자의 글은 성경해석 방법론에 속하는 비평학, 정경형성 과정, 정경의 저자 문제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를 해소하기 위하여 작성한 것임을 밝힙니다. 성경의 영감이나 계시문제를 본격으로 다룬 글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2. 위 글에서 필자는 구약과 신약 성경의 기록과 정경화 과정을 유기적 영감론으로 설명할 수 있음을 밝히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 저자가 지닌 신앙전통과 역사관, 경험, 지식, 문학적 자질 등을 사용하여 정경을 기록하였음을 성경의 각 책이 잘 증명하고 있음을 보이고자 하였습니다. 성경은 흔히 생각하듯 항상 특별한 사람에게 신비롭고 특별한 방법으로 계시하신 것은 아니라는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예 직접 말씀하시거나 예언자들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인간저자들을 있는 그대로 사용하셔서 말씀하시는 경우가 적지 않음을 밝힌 것을 두고 ‘인본주의’니 ‘직접계시의 부정’이라는 식으로 매도하는 것은 정경화의 기본원리를 모르는 무지의 결과거나 아니면 악의적으로 왜곡하는 것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3.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에 제한 받지 않으시며 얼마든지 하나님의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직접 계시하시거나 혹은 여러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필요한 말씀을 선포하셨음을 믿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역사를 이끌어 가심을 믿습니다. 간절히 소원하기는 우리 인생들이 짧은 인간의 논리로 성육신 하신 하나님보다 더 신비로운 모습으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제한하려하는 우를 범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4. 성경은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성경기자들이 자신들이 가진 인격과 지혜, 전통과 지식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 기록한 것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생활을 유일한 표준임을 믿고 살아온 필자로서는 남은 생애를 바로 이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평생을 바칠 것을 다짐하며 그 소망 중에 살아가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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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래 글은 다음에 소개하는 필자의 졸고에서 인용한 것이다. 비평학에 관한 개괄적인 논의는 구약 성경 해석과 비평학의 관계와 구약 해석에 있어서 영감과 계시의 문제를 다룬 필자의 졸고, ‘구약해석과 비평학’, 개혁교회의 정로, 고려신학대학원, 1999, pp.65-80,을 참고하라.

2) W.A Neilson ed., "criticism," Webster's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2nd ed. p.628.

3) R. K. Harrison, B.K.Waltke, D. Guthrie, G. D. Fee, Biblical Criticism: Historical, Literary and Textual, 오성일,오화순 공역, 도서출판 참 말, 1993, p.1. 그는 이어 이렇게 말한다: “그 동안 성서 비평에 대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견지해오던 복음주의자들도 이제 차츰 비평학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비평 방법에 대해 선별적인 태도를 가지려 한다. 그들은 모든 비평 방법이 다 성경의 영감과 무오와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어떤 비평적 접근은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를 손상하지 않으면서도 성경 진리나 복음의 비밀을 종래의 성경해석 방법보다 더욱 잘 드러내거나 전혀 새로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밀에 눈뜨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알 수 없지만 ‘전혀 새로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밀에 눈뜨게 한다’는 극단적인 발언은 비평주의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어렵게 만든다. 실제적으로 번역된 책의 내용은 지금까지 우리가 사용해 온 역사적, 문법적, 본문비평에 국한되어 있고 보편적으로 비평적 방법이라고 할 때 사용되는 방법은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는 데도 위와 같이 말한 근거가 무엇인지 짐작하기 어렵다.

4) saga는 Collins 사전에서 '1. any of several medieval prose narratives written in Iceland and recounting the exploits of a hero or a family. 2. any similar heroic narrative. 3. Informal. a series of events or a story stretching over a long period.'로 설명한다. 아이슬랜드에서 영웅이나 한 영웅적 가족의 위업을 설명하는 중세 산문으로 된 이야기체의 글이나 그와 유사한 영웅적 내러티브를 말하고, 비공식적으로는 자주 오랜 세월에 걸친 연속적인 사건이나 이야기를 가리키는 용어임을 알 수 있다. 무용담 모험담 사화(史話), 혹은 대하소설을 의미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saga는 북유럽 아이슬란드에서 수입된 언어다. 이 용어를 양식사학자들이 처음 사용한 것은 사실이다. 양식사란 성경이 기록되기 이전의 형태에 관심을 가지고 기록을 낳게 된 삶의 자리에 관심을 가지는 성경해석 방법이다. 비평학을 내용일치적으로 번역한다면 성경해석방법론이라고 해야 옳다. ‘성경비평학’은 흔히 생각하듯 성경을 비난하고 헤치는 학문이 아니라 성경을 분석적으로 읽는 방법론을 뜻하는 용어이다. 비평학은 본래 문학작품을 읽는 방법으로 사용되었고, 성경역시 다른 문학작품과 마찬가지로 글로 써졌기 때문에 동일한 방법론이 적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어느 비평학자도 현재의 비평학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비평학의 입장에 관하여서는 21세기를 앞두고 비평학이 처한 한계를 인식하고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 한신대 김이곤 교수의 글을 읽어 보라. 김이곤, “성서해석학의 위기와 새 소명”, 기독교사상, 481호(1999/1), 21-29. 그는 21세기 성경해석학 (즉 비평학)의 위기를 말하면서 그 위기 근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다.

(15a)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성서는 신언(神言)을 담고 있으나성서의 문학 그 자체 또는 성서의 문자 그 자체가 곤 신언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이 사실은 누구나 다 안다그러나 성서의 문자와 문학 속에 담겨 있는 그 신언이 무엇인지는 누구나 다 아는 것은 아니다그러므로 성서해석학의 과제는 성서문학 속에 담긴 신언을 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서비스 학문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신학의 스승들인 구미의 성서학이 지금까지 추구해 온 역사과학적 성서비평학들, 바료비평, 양식비평, 전승비평, 편집비평, 수사비평학 등등은 ‘신언’을 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선교적 책임감’ 없이 순수하게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분석에만 성서문학을 맡겨 두려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일종의 대단한 학문적인 자부심이 게재되어 있는데) 바로 여기서 일종 성서학의 막다른 골목이라는 것이 나타났다(!!) 한국성서학도 이 길을 그대로 답습하였다. 나는 이것을 감히 신학의 위기 또는 신앙의 위기라고 부른다. 한국의 성서신학은 이제 새 패러다임을 제시해야 할 절박한 시점에 서 있는 것이다.”김교수는 (15b)성경해석을 함에 있어 철저하게 비평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학자이지만 그가 성경의 영감성이나 계시성을 부정하는 증거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5) 전설이라고 확실하게 번역될 legend라는 용어가 있는데도 saga를 굳이 전설로 번역하고자 하는 의도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그런 식으로 독자들을 오해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자신이 없으면 필자에게 의도를 알아보는 것이 예의에 맞는 일일 것이다. Henson이 말하는 대로 구약학에서는 legend라는 용어조차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전설과는 그 의미를 달리하고 있다. 인간의 기억 속에는 남아있으나 증거가 없는 역사적 사실들 (예를 들면 노아 홍수 사건 등)은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과학적, 객관적 자료에 근거한 역사로 말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legend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6) John Bright, History of Israel, 제3판, 박문재 역, p.95f. 브라이트가 명맥하게 보여주는 대로 필자 역시 saga라는 용어를 역사 서술하는 양식 중의 하나로 간주하고 사용하였을 뿐이다. 터커 Tucker는 이미 오래 전에 궁켈이 사용한 Sage라는 단어를 초기에 영어로 번역하면서 전설( Legend)이라는 의미로 바꾼 것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Tucker, "Form Criticism of the Old Testament," IDBS, ed. Keith Crim, Abingdon Press, 1962, p.29. 같은 글에서 계속해서 터커가 인용하는 궁켈의 글에서 ‘모험담 saga’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 “역사는 공적인 사건들을 다루지만 모험담(saga)은 개인적이고 사적인 일을 다룬다. 모험담이 정치적인 사건이나 공적인 인물을 다룰 때 대중의 관심을 끄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모험담은 인간의 사건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을 말하지만 역사는 하나님을 모든 것의 최종적이며 궁극적인 원인으로 말한다.” 이형원, 구약성서비평학 입문, 139f.에서 한글번역 인용. 이미 양식비평에서도 saga는 개인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역사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평학적 용어의 사용이 마치 하나님의 역사나 말씀의 계시성을 무시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학문의 흐름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커다란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7) 김지찬, 언어의 직공이 되라, 생명의 말씀사, 1996를 참조하라.

8) Pannenberg는 그의 ‘Revelation as History'(London, 1979)에서 칼 바르트나 불트만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신학의 기초로 삼기보다는 ’아직 성취되지 않은 일시적 역사의 진행과정으로 예수의 가르침과 개인적 역사에서 속에서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총체적 실재‘를 계시로 이해하려 한다. p.ix.

8) 번역자가 채용한 ‘측정’이라는 용어보다는 estimate는 ‘추정’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합하다. ‘makes little difference'를 ’‘중요하지 않다’고 번역한 것도 잘못된 번역이다. 이런 식의 부적절한 번역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특히 전문용어의 번역은 다듬어야 할 부분이 많다. 필자의 논문, 130-13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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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설

(1) 직접 계시를 부정한 적이 없다

그는 여기서 갈1:11-12절을 증명구절로 달면서 본인이 ‘하나님의 직접계시를 부정’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가 여기서 주장하고 있는 것은 바울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 변화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애와 여러 가지 교훈에 관한 것은 직접 듣거나 경험한 사건이 아님을 지적하는 것이다. 바울이 예수님에 관하여 가진 많은 정보는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 사도들과 교회로부터 구전으로 들은 것이 많이 차지할 수밖에 없다. 바울은 갈라디아에서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내가 사람에게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사실이다. 얼핏 보면 바울이 여기서 자신이 기록하고 있는 모든 지식이 ’직접 계시‘를 통해 알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은 복음의 본질, 즉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바로 약속대로 오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계시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라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며 이것은 사람이 말해준 것이 아니라 주께서 직접 계시하여 주었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행9:20, 22).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사건은 바울을 혁명적으로 변하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었고, 갈라디아 본문이 말하고 있는 계시 사건 역시 이 다메섹 체험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 대부분의 주석가들의 견해다1). 필자가 언급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생애와 교훈에 대한 여러 가지 지식은 복음서가 기록되기 전에는 사도들을 비롯한 초대교회 성도들의 입을 통하여 얻게 되었을 것이라는 단순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직접계시 부정’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무지의 소치이거나 악의적인 왜곡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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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여기 계시의 관사가 없으므로 어느 한 사건을 지적하지 않고 복음의 경로에 대한 원리를 보인 것이나, 다메섹 도상에서 받은 계시가 그의 마음을 지배했을 것이라는 게 다수의 견해이다.” 이상근, 신약주해 갈 히브리, 34.

 

(15) 비판받는 비평학에 대한 언급을 바르트 주의로 몰아붙이는 것은 몰상식한 행동이다.

그는 무슨 연유인지 각주 4번의 글에 대한 이의를 제일 마지막에 달고 있다. 아마도 문제점이 많아 보이도록 하기 위하여 억지로 찾다가 마지막으로 덧붙이면서 생겨난 상황으로 이해된다.

1. 본인의 글 각주 4)에서 보는 대로 교묘한 인용으로 사람들의 눈을 속이려한다. 첫 문장과 둘째 문장 모두 마치 필자의 글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다. 첫 문장은 한신대학 김이곤 교수의 글이다.

2. 첫 문장을 인용하면서 글의 중간에서 문장을 끊어버려 글의 주제가 무엇인지 일부러 흐려놓고 있다. 김이곤 교수는 비평학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하는 데 실패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한국교회 진보주의 교회가 신학의 위기, 혹은 신앙의 위기를 맞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비평학자가 현재의 비평학을 비판하는 글을 인용하고 있는데 오히려 필자를 바유주의 - 바르트 주의 성경관을 갖고 있는 증거로 삼아 파괴적 주장을 펴고 있다. 참고로 필자는 아직 정식으로 바르트의 성경관을 배우거나 읽을 기회를 얻지도 못한 형편이다.

3. 한신대 김이곤 교수는 비평적 방법론을 사용하는 학자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가 바르트 주의자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의 논문들에서 성경의 영감을 부정하는 경우를 보지 못하였다는 필자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비평학적 방법을 성경해석에서 도입한다는 것과 영감과 계시성을 부정하는 것을 항상 동일시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를 발견하면 나는 이 주장을 얼마든지 철회할 수 있다. 다만 증거도 없이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주의를 발하고 있는 것이다.

(3) 성경의 모든 계시는 직통계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행한 ‘밀레도 강화’에서 여러 가지를 부탁하면서 이미 그들이 알고 있는 내용 중에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주님이 말씀하신 내용을 잘 기억하도록 하라고 하신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복음서가 성도들의 손에 들려지기 전에 성도들은 그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알게 되었으며, 바울은 어떻게 그 말씀을 알았다는 것인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이 귀한 주님의 말씀은 사도들이 전해 준 것으로 밖에 말할 수 없지 않는가? 복음서가 기록되기 전에 사도들의 설교를 통하여 주님의 말씀이 전달되어 기억하고 있었음을 반증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을 두고 어떻게 하나님의 직접 계시를 부정한다고 매도할 수 있는가? 예수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 들었다고 하면 직접 계시를 부정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현재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들을 수 있는가? 우리는 성경기자들을 통하여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것 아닌가? 이렇게 말하면 직접 계시를 부정하는 자인가? ‘직접계시’라는 것을 요즘 흔히 유행하는 ‘직통계시’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 신학교수를 어떻게 대화의 상대로 삼을 수 있겠는가? 이런 엉터리 주장이 21세기 신학교수에게서 제기 된다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2) 바울 같은 사도들을 통하여 주님이 말씀 하실 수는 없는 일인가?

나를 공격하는 사람은 시종일관 왜 문자주의 입장을 취하지 않느냐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본문에 기록된 문자 그대로를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바울 사도가 ‘내가 권한다’고 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러면 성경의 기록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되는 것 아닌가? 바울은 철저히 자신을 변호하며 자신의 말로 말한다. 설교자들이 설교할 때에 그렇게 하지 않는가? 모든 설교자들이 ‘바울 사도는...’, ‘사도 요한은....’, ‘아모스 선지자는...’, ‘이사야 선지자는...’ 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도대체 유기적 영감이라는 말의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의 헛된 주장이 성경중심을 말하는 ‘고신총회’의 의제로 올라서야 되겠는가? 다른 사람들이 보면 총회의 수준을 우습게보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바울의 생각과 입을 사용하여 주님의 뜻을 전하고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라고 복음서가 표현하며 인용하는 말씀이나 바울이 ‘주 예수의 말씀의 기억하여야 할찌니라’고 하는 바울의 입을 통하여 들려주신 주님의 말씀이나 동일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요 동등한 무게를 갖는 것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이 부산노회 소속 특정인 외에 누가 있겠는가? 이렇게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 악의적이 아니라고 어떻게 변명할 수 있는가?

 

(12) 이스라엘 백성의 찬양과 탄식이 주의 말씀이 되는 원리도 모르는 신학자가 있다!

고소자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위 글에 대하여 예의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 특별계시 부정. 자유주의 성경관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자기주장을 하려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설득하는 과정을 밟아야 한다. 내 말이 틀린 곳이 있는가? 시편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찬양과 탄식으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거나 탄원을 하고 있다. 지혜서에도 코헬렛이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후대의 사람들에게 권고하고 있다. 잠언이나 아가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세상의 경험과 사랑의 노래가 실려 있는 것이 사실 아닌가?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철저하게 사람의 말로 되어 있는 본문들이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찬양과 탄식, 지혜의 말을 사용하여 당신의 뜻을 나타내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얼핏 보면 인간의 언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육화된 음성을 담아 전달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런 면에서 신비롭다고 해야 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사실을 부정하면 여타 문학작품과 하등 다를 바 없고, 그렇다면 그런 작품이 담고 있는 내용이 나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나를 둘러싼 전 역사에 항상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고전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그냥 한권의 고전일 뿐, 성경과 같은 가치와 능력을 나타낼 수가 없는 일이다.

 

(4) 교묘한 편집으로 문장의 뜻을 의도적으로 왜곡하지 말라

여기서 고소자는 결정적인 실수를 하고 있다. (4)번의 주장은 여기에서 몇 단어를 따고 다시 5페이지에서 두 문장을 따서 조합을 하며 글을 비틀고 있다. 교묘하다. 나는 ‘영감과 계시를 초자연적인 것으로 국한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하지 않았다. 거짓말이다. 분명히 윗글에서 보는 대로 영감과 계시를 초자연적인 성격으로만 국한해서는 성경의 많은 부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음을 지적했다.

‘국한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과 ‘국한에서는 많은 부분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은 천양지차가 있다. 그런데도 그는 남의 글을 조작하여 뜻을 고의적으로 왜곡한다. 4b)에서 말하는 창세기의 기록에 관한 설명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창세기에 기록된 모든 사건들을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초자연적으로’ 계시를 받았다는 증거가 어디 있는가? 모세가 그동안 전해져 온 자료(기록이든 구전이든)를 통하여 사건들을 이해하고 기록했다고 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를 부정하는 말이 되는가? 오경의 모든 기록이 모세가 십계명 돌비를 받을 때와 동일한 방법으로 받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영감과 계시의 초자연적 성격은 주어진 과정이 초자연적인 성격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사용하셨으나 인간의 함계에만 머무르지 않는 초자연성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성경의 예언들을 읽을 때 예언자들이 자신들이 전한 모든 말씀을 다 이해하지 못한 경우도 있는 것을 보지 않는가? 모든 것을 이해했다면 유대인들이 구약을 읽으면서 어떻게 예수님이 메시아인줄을 알지 못할 수 있겠는가? 구스 내시는 왜 이사야의 예언을 읽으면서 그 뜻을 알지 못하겠는가? 그것이 바로 계시의 초자연성을 말하는 것이다.

 

(13a,b) 한 문장은 반드시 전체 문맥 속에서 읽어야 한다

여기서도 그는 한 문단 속에 있는 글을 둘로 나누어 자신이 왜곡시킬 수 있다고 보이는 부분만 연결시키고 있다. 13a,b는 따로 떼어내어 붙여서는 안 되고 전체 문단속에서 읽어야 한다. 신학교 시절부터 성경본문의 해석은 반드시 문맥 속에서 해석해야 한다고 들어왔으면서 가장 기본적인 해석 원칙으로 어기고 있다. 위 문단 전체를 읽어보라. 고소자는 이 부분을 두고 ‘하나님의 영감과 계시를 자연적인 성격에 제한 시킴. 자유주의 성경관’이라고 공격하고 있다. 거짓이다.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해서뿐만 아니라..’고 하고 쓰여있는데 어떻게 뻔뻔스럽게 ‘자연적인 성격에 제한시킨다’고 거짓말을 할 수 있는가? 구약의 역사서를 읽어보라. 거기 어디에 기록자들에게 초자연적으로 그 사건들을 계시하고 있다고 말하는가? 하나님께서 역사 기록자들의 지식과 경험, 문학적 소양을 사용하여 이스라엘 역사를 설명하고 계시는 것 아닌가?

 

(7) 중복을 통한 과장 행위를 멈춰라

13번b에 이미 포함된 글을 다시 따로 떼어내어 항목을 하나 더 만들고 있다. 고소자가 가진 특유의 ‘내용 없는 말 늘이기’ 전략에 따른 것이다. 성령의 역사인 ‘영감(靈感)’에 대하여 지나친 생각으로 너무 신비한 세계만 상상하면 곤란하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한 때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역사를 지나치게 신비주의적으로만 생각해 혼란을 빚은 때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6) ‘계시와 영감의 학문의 전제’라는 말을 거꾸로 곡해하면 안 된다

필자의 이 주장을 고소자는 ‘성경의 계시성과 영감성을 학문이론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 자유주의 성경관의 핵심’이라고 단언한다. 한마디로 어처구니가 없다. 어떻게 필자의 말을 정반대로 이해하고 억지 주장을 펼 수 있는가? 나는 위 본문에서 계시나 영감의 문제는 학자의 前提에 속한 것이므로 학문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어떻게 거꾸로 ‘학문이론에 불과하다’고 말했다는 거짓말을 공개적으로 할 수 있는가?

 

계시나 영감은 학문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학자의 신앙에 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연구대상이 아니고 개별 학자가 믿음으로 선택할 전제조건일 뿐이다. 그렇지 않은가? 성령이 주체적으로 행하시는 영감여부를 인간이 학문적으로 증명할 무슨 방법이 있다는 말인가?

 

(8) 유기적 영감론을 공부하라

필자는 본문이 보여주는 대로 기술하고 있다. 위 글은 필자의 주장의 전부가 아니다. 지금 필자는 누가가 주는 정보를 네 가지로 정리하여 말하였다. 1,2번을 읽고 3번을 읽으면 내용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다. 누가는 ‘전해준 내용’을, ‘여러 사람이 썼지만’, 그것에 만족할 수 없어 자신이 직접 내용을 살펴 데오빌로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기록했다는 것을 명백히 하고 있다. 문자적으로 살펴보라. 본문 그 어디에도 누가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고소자가 말하는 대로 ‘하나님의 직접 지시나 감동으로 기록됨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말인가? 누가는 결코 자기의 입으로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기록한다고 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필요한 기록을 필요한 사람을 통하여 만들어가고 계신다는 것이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그것이 바로 유기적 영감론의 핵심이다.

 

(9) 특별계시는 자연계시와 대비되는 표현으로 성경 전체를 두고 일컫는 용어이다

위 표현을 두고 고소자는 ‘하나님의 특별계시로 쓰여졌음을 부정’한다고 주장한다. 특별계시는 자연계시와 대비되는 용어로 주로 사용된다. 문자대로 특별한 형태의 계시를 지칭하려 한다면 본문이 교회를 위한 ‘특별’한 계시라는 증거를 찾을 수 있는가? 실제로 그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필자는 여기서 역시 ‘특별계시라고 하여 항상 신비스럽고 특별한 방법으로 성경이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상상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기자가 철저하게 자신의 필요에 따라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록하였으나 알고 보니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시방법이고, 하나님의 영감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 마지막에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그것이 (11)번이 말하고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10) 성육신 신학 이해를 위해 노력하라

고소자는 이 말을 ‘성경의 신적 권위 부정, 철저한 인본주의‘라고 마음대로 규정짓고 있다. 고소자가 생각하는 하나님과 필자가 믿는 하나님은 다른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신적권위를 가지신 예수님은 낮은 자리인 구유를 통해 천한 인간의 몸으로 나타나셨다. 고소자의 논리를 따르면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고 말하는 사람은 곧 예수님의 신적권위를 부정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런가? 고소자는 가장 기본적인 신학인 성육신의 신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면, 지극히 인간적인 필요를 따라 기록된 언어를 통해 친히 말씀하시고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11) 문장을 정확히 읽어라

고소자는 위 11번의 문장을 두고 ‘성경의 신적권위, 철저한 인본주의’라고 말한다. 11번은 10번의 내용을 부연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따로 떼어서 말할 것이 아니다. 역시 고소 내용을 늘이기 위한 수법이다. 과연 신적권위를 부정하고 있는가? 11번 단락의 둘째 문장의 주어와 목적어, 동사를 살펴보라. ‘하나님은(주어)....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을(목적어), 전달하고 계시고 있다(동사). 도대체 ’하나님이 스스로 느낀 사람들을 통하여 반드시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을 전달하고 계신다‘고 하는 데 어떻게 이것을 인본주의니 신적권위를 무시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신학하기 전에 국어공부를 열심히 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14) 시편이나 지혜서가 완성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고소자가 이 문장을 ‘하나님의 초자연적이며 직접적인 계시의 결과임을 부정’한다고 왜곡하고 있음을 보라. 필자는 14번의 글이 포함된 전체 문단에서 잠언 시편 등이 오랜 세월에 걸쳐 편집되었음을 입증했다. 잠언은 최소 200년 이상, 시편을 완성하는 데는 무려 천년의 세월이 소요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문제를 제기하려면 제기된 핵심 주장에 대하여 시비를 걸어야 한다. 증거를 제시하고, 마지막 결론을 내리는 표현에 대하여 아무런 입증 자료도 없이 무조건 시비를 거는 것은 학문적 접근법과는 거리가 한참 먼 일이다.

필자는 여기서 앞서 여러 번 강조한대로 ‘초자연적이고 직접적 계시‘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하도록 촉구하였다. 고소자가 말하는 직접적인 계시는 어떤 것을 말하는지 정확한 설명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성경 저자들에게 직접 나타나서만 말씀 하셨는가? 예언자들은 환상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것으로 말하지만 역사서, 시편, 지혜서 등은 예언서와는 전혀 성격을 달리하고 있음은 明若觀火하지 않은가? 시비를 위하여 시비를 거는 것은 믿음의 사람이 할 일이 아님은 물론이고 인간적이지도, 신사적이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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