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 탈레반 무장세력에 납치됐던 19명이 귀국한 2일 석방 인질들을 만난 분당 샘물교회 박은조 담임목사는 "인질 중 일부가
개종(改宗) 등을 거부하다 탈레반에 심한 구타를 당하는
등 현지에서의 고충이 생각보다 심했다"고 말했다.
박 목사는 이날 오후 석방 인질들이 입원해있는 경기도 안양시 샘안양병원을 찾아 예배를 집도한 뒤 "인질들이 억류돼있는 동안 개종서약서를
작성하라고 강요하는 등 인질들을 이슬람교로 개종하려는 탈레반들의 시도가 계속됐다고 한다"며 "그러나 아무도 개종하지 않고 끝까지 버텼다"고
말했다.
박 목사는 이어 "개종을 거부하는 과정에서 제창희 송병우 씨 등은 심하게 구타를 당해 얼굴 등이 크게 붓는 등 온몸에 큰 상처를 입었으며
흉기를 들이대며 살해 위협도 수차례 가했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그는 특히 "제창희 송병우씨는 일부 인질 여성들이 성폭행 위협에 놓였을 때 자신의 안위를 아랑곳 않고 끝까지 저항하며 그들의 시도를
막았다"고 말하고 "배형규 목사와 심성민 씨가 살해된 것도 개종 강요와 폭력에 굴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전해들었다"고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그는 "그동안 현지 상황을 전해들으며 많이 걱정했는데 직접 만나보니 모두 건강에는 큰 이상이 없어 안도했다"며 "그동안 도움을 준 많은
분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덧붙였다.
박 목사는 이날 오후 4시 30분경 인질들이 입원해있는 샘안양병원 전인치유병동에서 비공개로 예배를 집도한 뒤 6시 15분경 돌아갔다.
박 목사는 아프간에서 납치됐던 선교봉사단이 소속된 샘물교회의 담임목사로 피랍 사태 45일만에 한국으로 돌아온 단원들을 이날 처음 만나 피랍
당시 상황을 전해들었다.
디지털뉴스팀
서명화씨, 억류생활 중에도 독실한 신앙생활
피랍에서 석방까지의 억류생활
피랍에서 석방까지의
억류생활
[쿠키 지구촌] 억류 42일만에 모두 풀려난 한국인 피랍자 19명중 기자회견에 나선 유경식(55)
서명화(29·여)씨는 31일 수도 카불의 세레나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국민들에게 사과와 동시에 감사를 드린다며 긴박했던 피랍 순간과 참담한
인질 생활을 털어놨다. 이들이 밝힌 내용을 상황별로 재구성했다.
◇피랍=7월 19일 아프가니스탄 북부 마자리 샤리프를
떠나 칸다하르로 가던중이었다. 밤엔 위험하지만 낮에 안전하다고 해 안전할 때 가려고 밤늦게 출발했다. 카불에 아침에 도착해서 한국식당에서 아침을
먹었다. 아침먹고 버스 운전사가 수술을 받는다고 해 사람이 바뀌었다.
가즈니주를 지나면서 운전사가 현지인 2명을 태웠다. “왜
모르는 사람을 태우느냐”고 했더니 “가면서 내려주면 된다”며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두 사람이 탄 뒤 20∼30분이 지나자 총소리가 났다. 앞에
앉아있던 사람이 총을 겨누면서 정지 수신호를 했는데 운전사가 무시하니까 발포한 것이다. 운전사가 차를 멈췄고, 정지하니 차를 옆으로 빼라며
바퀴에 한발을 쐈다. 무장한 2명이 차 안으로 올라와 올라와 운전사를 때린 거 같고 전부 내리라고 했다. 고 배형규 목사는
실신했다.
납치범들은 나(유경식씨)와 제창희씨를 오토바이에 태워 10분 정도 질주했다. 어떤 마을에 가니 높은 곳, 나무 밑에
뚱뚱한 보스가 앉아있었다. 옆에 기관총을 거치해놓고 있었는데 “올라가서 홍차를 마시라”고 했다. 그러면서 어디서 왔는지, 뭐하는 사람인지,
의사냐고 물었다. 의사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또 무슬림이냐고 물었는데 아니라고 답했다.
우리는 현지어인 다리어를 모르고 그 사람들이
영어를 겨우 하는 상태였다. 앉아있는데 회당 안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거기서 몸과 소지품을 수색했다. 다리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정부의 사복 경찰인데 알카에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임시로 잡고 있다고 말했다. 돌려줄테니 걱정 말라면서 노트북
1대, 카메라, 캠코더, 휴대전화 등을 가방 2개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갈 때 돌려주겠다면서 열쇠를 채웠다.
◇초기
억류상황=전체를 집합시키더니 일렬로 세워놓고 담벼락 앞에서 기관총으로 위협했다. 서너명이 위협하고 한사람이 비디오 카메라로 찍었다.
우리는 거의 패닉 상태였다. 그러더니 자신들이 알카에다라면서 그제서야 신분을 드러내며 돌변하기 시작했다. “너희들 잘못하면 (총쏘는 시늉을
하면서) 이렇게 한다”고 위협했다.
감금한 곳은 반지하에 짐승 우리처럼 창문이 없고 환기통이 하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진척이
없었다. 출입문이 반쯤 열리길래 인질범을 이렇게 교환하나보다, 방치하고 사라졌나보다 싶었다. 나가보니 가축을 키우는 농가였는데 할머니 1명이
앉아있었다. 마을 아래로 내려가 구조요청해야겠다 싶었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 어려워하고 있는데 갑자기 농부가 낫을 들고 쫓아오면서 들어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황급히 들어갔다. 주민들이 감시한 데도 있었고 아닌데도 있었다. 위에는 탈레반이 있었는데 밑에는 농가가 있었다. 밤에는
탈레반이 감시했다.
◇이후 억류상황=우리는 민가를 주로 돌아다니면서 12번을 옮겼다. 주로 야간에 달이 없을 때
오토바이를 통해 움직였다. 헤드라이트를 끄고 불빛 신호를 주면서 이동했다. 도보로 이동한 적도 몇번 있다. 초창기에는 한꺼번에 이동했는데 경운기
짐칸에 짐짝처럼 태우고 비포장도로를 지나 달빛없는 곳으로 데려갔다.
6일쯤 지난 뒤 분산됐다. 4박 5일만에 분산되기 시작했다.
처음에 11명이 나눠지고 12명은 그 다음에 6명으로 나뉘고 다시 3∼4명으로 나뉘어졌다. 석방 때까지는 진행상황을 정확히 몰랐다. 우리를
감금했던 집 주인이 한국인 여성 2명이 아파서 돌아간다며 라디오 뉴스를 보란 듯이 선심 쓰듯 들려줬다. 중국에서 하는 영어방송인데 1분동안
들었다.
23명 중 2명이 살해된 사실을 뉴스로 들었다. 가슴이 철렁했지만 내색을 못했다. 다른 사람들이 충격을 받을까봐 속으로만
알고 있었다. 자리를 옮기면서 탈레반이 2명 있을 때 23명 다 안전하냐고 물어봤다. 자기들끼리 얘기하는데 얼핏 느낌으로 다 살아있는 척하라는
것처럼 말하는 느낌이 들었다. 희생자가 누군지는 몰랐고 혹시 젊은 사람들 가운데 반항을 하다가 탈주한 것으로 오해해 사살하지 않았을까
걱정했다.
◇고 심성민씨 살해 당시=무작위로 데리고 나간 것이다. 본보기로 한 것 아닌가 생각한다. 11명을 4명과
7명으로 분리하더니 7명을 둘로 분리했다. 남자를 한명씩 끼우는것으로 유도했다. 12명이 있었던 쪽은 6명, 4명, 2명으로 나뉘어졌는데 이중
4명 그룹에서 심씨가 나갔다. 고세훈, 심성민씨 중 고씨를 뚫어지게 보다가 고개를 돌리더니 “너”라고 지명했고 여자 3명을 무조건 끌고 나가라고
그랬다. 두건을 씌워서 그 뒤로는 모른다.
현지 사람들의 말을 일행이 엿듣고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처음에는 “23명 모두
무사하다”, “23대 23으로 인질교환한다”고 하더니 나중엔 한국군 철수하면 보내준다고 변덕을 부렸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면서 인질교환하자며 감금하고, 협상이 되나보다하면 눈을 가린 적이 부지기수였다. 역정보를 흘려서 이용한 경우도 많았다. 공개된 육성통화는 다른
팀에서 그 사람들이 안면이 있는 사람에게 노출한 것 같다. 아프다고 해야 구출해준다고 탈레반이 말을 시켰다. 안하면 안되게끔 시키는 것
같았다.
◇억류 당시 생활=저는 갑상선 수술로 하루에 호르몬제 2알을 먹어야 했다. 납치 후 하루 2알을 1알로
줄였지만 1주일이 지나자 떨어졌다. 손짓 발짓으로 부탁을 했다. 하루 2알씩 먹어야 된다고 구해달라고했다. 그들은 알았다고 하면서도 없어서
안된다고 했다. 한국과 협상하면서는 얘기를 해달라고 몇번 부탁했다. 이들은 “우리는 얘기를 하는게 아니라 무전기로 주고받는다”며 “여기는
아프간이지 한국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나중에 보니 한국에서 약을 3번이나 보냈는데 결국 오지 않았다.
초반에는 민가에서 보호되면서
그 사람들도 못먹고 못살고 해서 적응이 안됐다. 비스킷 먹으면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달라고 손짓 발짓을 했다. 감자 2개를 절반으로 쪼개서
4명이 먹었다. 기운이 없어서 하루종일 자고 다시 자고 그랬다. 점차 적응을 하면서는 돌이 씹히는 감자도 먹을 수 있게 됐다. 우리 팀에는
단식한 사람은 없었고 초반에 잡혔을 때 빨리 구출해 달라고 금식 기도를 했었다. 사흘을 안 먹으니 그들이 보기에는 단식으로 보였을
것이다.
주로 억류된 곳은 토굴 같은 곳이었는데 절반은 비상구였다. 마당에 한사람 겨우 들어갈 토굴이 있었는데 4m 깊이였으며,
T자로 25m 길이였다. 몸집 작은 사람이 겨우 갈 정도였다. 처음엔 걸려서 못 들어갔는데 어떻게 해서 들어갈 수 있게 됐다. 잘못하면 거기
감금할 수도 있다는 식으로 위협하기도 했다. 밖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들은 그 사람들이 강도라고 했는데 그곳은 강도가 들어올 경우
유사시 이용하는 비상구라고 했다.
◇석방 직전 상황=8명 석방설, 그런 건 전혀 몰랐다. 믿을 수가 없다. 탈레반
2명이 와서 앞으로 나흘을 자면 석방된다고 했다. 그때 “정부와 5일 전쯤 통화했다. 건강에는 이상없느냐”라고 물었다. “언제 나갈수 있냐”고
했더니 며칠만 참으라고 했다.
석방됐던 29일에는 기력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자고 있는데 탈레반이 와서 석방이라며 2명 먼저
나가라고 했다. 그날 정부 대표단에서 “너하고 여자 1명하고 나와라. 여자부터 가라. 제발 나와라”고 했다. “4명 모두 나가게 해달라”고
했더니 자기들끼리 얘기하고 연락하더니 “너희 정부에서 다 보내라고 요구했다”고 말했다.
오후 4시쯤 서명화, 차혜진씨 2명을
오토바이로 접선 장소에 떨어뜨려 놓았다. 망원경으로 살펴보니 적십자차와 깃발이 눈에 띄었다.
◇현재 심경=가슴이
답답하고 몸이 아프다. 잠을 잘 못잤다. 여기 오고나서도 나쁜 소식을 확인하고 잠을 자지 못했다. 미안하고 죄송스럽다. 처음에는 23명 모두
나온 것으로 알고 있었다. 나와 보니 그게 아니었다. 고생 보다도 너무 큰 정말 물의를 일으켰다는 생각에 잠을 못 이뤘다. 중동지역 선교활동은
사실 솔직히 신앙을 하는 입장에서 그래도 목사가 되기 전에 기도도 하고 지원도 하고 싶어서 갔다. 배우기도 하고 봉사도 의미있고 해서 간
것이다.(유경식씨)
잡혀 있을 때는 몰랐는데 몸이 쑤시고 잠이 안오고 기력이 없고 설사하는 증세도 있다. 그래도 잡혀있을 때 보다는
낫다.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하다.(서명화씨) 카불=공동취재단
故 배형규 목사 장례식
아프간 탈레반에 피랍됐다 희생된 故 배형규 목사 장례식이 다음달 6일 경기 분당 샘물교회에서 교회장(葬)으로 치러진다.
배
목사의 형 신규씨(45)는 31일 기자회견을 열고 "아프간에 피랍됐던 인질 21명 모두가 석방됨에 따라 배 목사의 장례식을 다음달 6일부터
샘물교회에서 교회장으로 치르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어 신규씨는 "장례를 미뤄가며 남은 인질들이 돌아오길 기다렸던 만큼 모두 무사히
돌아올 수 있어서 감사하게 생각한다"면서도 "장례를 앞두고 마음이 무거운 것 같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평소 고인의 뜻을
따라 장례는 검소하게 치러질 것"이라며 "다음달 8일 오전 발인 뒤에 고인의 시신은 서울대 의대에 의학연구용으로 기증할 것"이라고
말했다.
샘물교회측은 박은조 담임목사를 위원장으로 한 고 배형규 목사 장례위원회를 구성했으며 교회 관계자로 구성된 7팀의
장례위원회가 장례 절차를 진행할 계획이다.
교회측은 다음달 6일 오전 10시부터 샘물교회 안에 빈소를 차리고 조문을 받을
예정이다.
탈레반에 의해 지난달 25일 살해된 배 목사의 시신은 5일 뒤 한국으로 운구됐지만 유족들은 "남은 인질들이 모두
돌아올때까지 장례식를 치르지 않겠다"며 장례 일정을 미룬 채 안양 샘병원에 유해를 안치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