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한국사는 해방이 된 1945815일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물론 815일은 일본이 항복하고 연합국이 승리한 날이다. 하지만 9월 초까지 조선 땅에는 여전히 총독부가 있었고, 아직 남한지역에 진주할 미군이 도착하지 않았다. 일본이 정식으로 항복문서에 서명한 것은 92일 이었고 미군이 서울에 도착한 것은 98일 이었다. 815일부터 미군이 진주하는 98일까지의 23일 동안 그 급박한 과도기에 한반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이미 해방되었으나 아직 세워지지 못한 대한민국이 겪은 23일의 과도기 동안 남한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대한민국 건국이념의 모티브가 될 수 있다. 이런 의미를 지닌 해방정국 23일 동안의 역사를 미시적으로 분석한 연구가 있어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다.

▲ 영익기념강좌에 나선 발표자와 토론자, 좌로부터 사회자 박문수 교수, 1발표자 박명수 교수, 논평자 김명구 교수, 2발표자 허명섭 교수, 논평자 이은선 교수

지난 41일 서울 신학대학교 우석 기념관 강당에서 제 19회 영익기념강좌가 해방 70주년과 한국 기독교라는 주제로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에 의해 개최되었다. 논문 발표에 앞서 이사야서58:11-12의 본문으로 김영호목사(논산교회)가 설교하고, 유석성 서울신대 총장의 축사 후, 영익기념관을 세우고 매년 기념강좌를 열 수 있게 지원한 민현경권사(고 김영익 집사의 처)의 인사와 설교자의 축도로 예배를 마치고, 연이어 기독교역사연구소장 박명수 교수의 해방정국의 건국 논쟁: 인민공화국인가? 민주공화국인가?”라는 제목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 발표하는 박명수 교수

해방정국의 건국논쟁: 인민공화국인가? 민주광화국인가? /박명수 교수

박명수 교수는 위에서 언급한 23일 동안의 해방정국 기간에 한반도에 어떤 세력이 존재했으며, 주도세력은 누구였으며, 이런 건국운동이 대한민국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이 논문에서 밝히고 있다. 그 핵심 내용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두 가지 흐름의 독립운동: 일제 강점기부터 우리 사회에는 두 가지 흐름의 독립운동이 있었다. 하나는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이며, 다른 하나는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이었다. 이런 현상은 해방정국 23일 동안에 민족 세력과 공산 세력으로 양분되어 나타난다.

민족 세력: 주로 미국과 일본에서 교육받은 그룹으로 서구식 민주주의를 지향했고, 이 중심에는 송진우가 있었다.

공산 세력: 소련의 영향을 받은 그룹으로 남한을 노동자와 농민이 주동이 되고 여기에 지식인과 소자본가가 참여하는, 소위 인민정권을 창출하려 했다. 이 중심에는 여운형이 있었다건국준비위원회(건준)이 시작되는 처음부터 송진우와 여운형은 갈등을 빚고 있었다.

여운형은 조선 민족이 자주자위적으로 주권확립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조선 총독부로부터 부분적 치안권을 받아 경찰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식량 배급에 대한 권한과 방송 신문 등을 장악했다. 반면, 송진우는 한국의 독립이 연합군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음을 인식했다. 여운형이 국내외 혁명단체를 총망라하는 민족전선을 바탕으로 독립정부를 세울 것을 주장한 반면, 송진우는 국제 사회의 현실을 감안하여 중경 임시정부와 연합군을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운형은 노동자 농민이 주체가 되는 사회주의를 꿈꾼 반면 송진우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염두에 두었다.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좌익세력은 분명한 국가 건설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그에 따른 구체적인 전략과 전술로서 인민위원회, 과도정부, 민족통일전선,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 선취론등을 내세웠다.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 선취론이란 공산주의 세력이 헤게모니를 잡을 수 있도록 분명한 안전장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교수에 의하면 공산세력이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 사용한 중요한 정책 가운데 하나가 친일파 청산이다. 친일파 문제는 해방이후 한국사회의 가장 어려운 문제이다. 어떤 형태로든 일제 말 타협하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해방 후 남로당 2인자였던 이승엽 조차도 일제 말 인천에서 조합서기로 활동하던 사람이다. 친일파 청산은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를 선취하기 위해서 매우 편리한 도구였다. 이러한 분명한 비전과 목표 전략 전술 덕분에 좌익세력은 해방정국 초기를 주도하는 듯이 보였다.

건국준비위원회의 강세: 여운형을 중심으로 해방된 다음날 전격적으로 발표하고 방송을 통해 이를 알렸다. 이는 무척 큰 힘을 발휘했다. 그리고 소련이 진주한다는 소문이 기름을 부었다. 이 나라는 공산주의 국가가 되는 것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일 정도였다. 소문은 소련군이 서울역에 도착했다는 것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여기다가 해방직후 감옥에 있었던 정치범들이 석방되어 좌익에 커다란 힘이 되었다.

건국준비위원회의 약세: 그러나 일본으로부터 위임받은 강력한 힘과 전략 그리고 친일파 청산이라는 명분까지 가지고 있었던 공산주의세력 주도의 건국준비위원회가 일주일이 지난 831일 대부분의 간부들이 사표를 제출하고 초기 멤버들이 떠나가며 급격히 약화되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두 주일도 채 안 되는 상황 가운데서 건준은 약화되었는가?

첫째, 소련군 진주설을 대체하는 미군 진주설 때문에 약화되었다. 박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1945816일 서울 휘문 중학교에 모여서 회의를 하고 있던 공산당원들은 갑자가 서울역에 소련군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 여운형의 연설까지 중단하면서 까지 소련군을 환영하기 위해 서울역으로 나갔다. 그러나 소련군은 오지 않았다. 이런 일들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이와 같은 거짓말로 정국을 주도하려 했던 공산세력의 계획은 미군 진주설로 약화되었다. 미군 진주설은 98일 실현되었고 그 과정 속에서 해방정국의 상황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둘째, 건준을 지원했던 총독부의 입장이 바뀌고 있었다. 총독부가 건국준비위원회에게 치안유지를 맡겼지만 치안은 유지되지 않고 일본인의 재산이 강탈당하는 일들이 생기자 총독부는 건준에게 주었던 권한들을 거두어들이기 시작했다. 또한 연합군에게 정권을 인계하기 까지 총독부가 다시 치안을 담당한다고 발표하였다.

셋째, 해방 후 한국사회를 이끌어 가는 유지계층의 등장이다. 유지계층은 반관반민이라는 특별한 계층으로서 지역사회의 여론을 주도하며 한편으로 관과 대중을 연결해 주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819일 서울에서 모인 유지들의 총대연합회는 정치 이념을 초월할 것을 강조하고, 차분하게 시국을 맞이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런 유지들의 활동이 건준을 약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박헌영의 등장으로 인한 공산당 내부의 파벌 싸움과 외부에서 불어 닥치는 건준 개편론과 맞물려서 건준은 약화되었다. 해방 직후 건준의 조직은 재건파 공산당(박헌영계열), 사회주의(여운영계열), 원로 공산주의 계열(정백, 조동호)과 안재홍 계열(온건 민족주의자)의 연합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박헌영의 소위 청류”, “탁류론으로 공산당 내부가 분열되었고 마침내 94일 안재홍, 정백, 조동호, 권태석등 초기 건준의 모든 중요한 인물들은 다 추방내지 탈퇴하였고, 급진 공산주의 세력과 여운영 직계만 남게 되었다. 일시적으로 급진파 공산주의가 승리한 것처럼 보였지만 이런 온건 세력의 추방은 원래 소수였던 좌익 그룹을 더욱 소수로 만들었고, 결국에 가서는 남한 사회의 주류로 등장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민족주의 진영의 강세: 이렇게 약화된 좌파 주도의 건국준비위원회에 반해 송진우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 진영은 더욱 풍성해 졌다.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재건파 공산주의의 횡포에 환멸을 느낀 원로 공산주의 그룹과 온건파였던 안재홍이 민족주의 노선으로 선회하였다. 그렇다면 송진우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진영의 국가건설 구상에 대해서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송진우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새로운 나라는 민주주의 국가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송진우를 비롯한 많은 민족주의자들은 1910년대 일본 유학을 경험하였는데 그 당시 그곳에서는 소위 신자유주의가 유행하였다. 송진우와 조만식을 비롯한 대부분의 민족주의자들은 소위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핵심을 이루는 신자유주의적 정치사상을 가졌다. 이런 민주주의 이념은 1920년대 후반 공산주의와의 심각한 논쟁을 거치면서 민족주의 진영의 포기할 수 없는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송진우를 비롯한 대부분의 민족주의자들은 이 같은 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과 깊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점에서 한국은 해방 후 민주주의적인 독립국가가 되기 위해서 연합군과 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믿은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송진우는 새로운 정권은 연합군으로부터 인수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둘째, 송진우는 이런 국가를 세우기 위해서는 우선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를 환영하여 과도정부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임시정부는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민주공화국을 지향하는 정통성 있는 조선의 독립단체였다. 사실 송진우는 3/1운동의 배후 주역인 48인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기독교에 도움을 받아 3/1운동을 성사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임시정부는 오래 동안 좌익과 우익의 사이에서 갈등했지만 한 번도 민주주의 원칙을 버린 적이 없는 단체였다. 이승만, 김구로 이어지는 임시정부는 공산주의와 싸웠고, 항상 주도권은 우익이 가지고 있었다.

셋째, 송진우는 임시정부가 한국에서 정부로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국민대회를 거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송진우는 임시정부가 대다수의 한국인들에 의해서 많은 지지를 받고 있지만 한국 본토와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기관이었기에 대다수의 한국인을 대표할 수 없다고 평가하는 미국의 일관된 원칙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송진우는 새로운 정부는 민족 대다수의 의사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를 위해 국민대회의 소집을 주장했다.

▲ 이 강좌는 고 김영익 집사(장충단교회)가 설립기금을 내어 세워졌다. 맨 앞줄에 그의 부인 민현경 권사와 그의 아들이 참석하였다.

미군정 시작: 마침내 미국이 98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미군은 형식적으로는 미군정외에는 어떤 정부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여 임시정부도 인민공화국도 부정하였다. 어느 정부가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미국의 이해와 합치될 수 있을까 고민하며 내린 미국의 결론은 임시정부였다. 그래서 미국은 이승만과 김구의 귀국을 서둘렀고 이들을 통해 한국을 민주주의 국가로 만들려고 했다.

비록 미국은 임시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현재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우리나라가 삼일운동과 임시정부의 정신을 계승한다고 못 박고 있다. 만일 우리가 대한민국의 헌법정신에 따라서 역사를 기술한다면 우리는 해방 직후 송진우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자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송진우를 중심한 민족주의자들의 임시정부 봉대로부터 출발한다고 말할 수 있다.(다음엔 대한민국 건국에 미친 한국종교를 살펴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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