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일 서울신학대학교 우석기념관 강당에서 있었던 제19회 영익 기념강좌에서 허명섭 박사가 대한민국 건국과 종교종교 세력의 건국운동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두 번째 논문을 발표했다 

논평을 맡은 안양대학교의 이은선 교수는 이 논문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2015년은 해방을 맞이한 지 70년 되는 뜻 깊은 해이다해방을 맞이한 지 70년이 지났지만 우리나라는 아직도 남북통일을 이루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나라의 건국에 대해서도 국내 학계의 동향도 엇갈리고 국민여론이 일치되지 못하는 아픔을 겪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대한민국의 건국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나라의 미래를 위해 매우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 허명섭 박사가 발표하고 있다.

대한민국 건국과 종교종교 세력의 건국운동을 중심으로 /허명섭 박사

미군정에서 정부수립까지: 허박사에 의하면 해방공간의 건국운동은 우파와 좌파그리고 좌우합작의 중도파의 세 흐름이 있었다해방직후 좌파가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와 조선인민공화국(이하 인공)등을 조직하며 주도권을 선점하자 우리파는 김성수와 송진우 등을 중심으로 한민당을 결성했다미군이 진주한 후에 전개된 군정과정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되었다일제식민통치기구 유지고문관제와 양국장제반탁과정에서 민주의원구성, 46년 12월의 입법의원구성, 47년 2월 안재홍의 민정장관임명, 47년 6월 군정부를 남조선과도정부로 변경하여 군정의 한국인화 정책이 결실을 맺었다미군정은 초기에 우파를 일방적으로 지원했다. 46년 중반 이후 좌우합작지원, 47년 10월 이후 우파지원으로 정책을 진행하였다이때부터 이승만은 남한단독정부 수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나 김구를 중심으로 한 단정단선반대세력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그러나 이승만은 이러한 반대세력의 저항을 극복하고 유엔의 후원아래 1948년 8월 15일에 정부를 수립하였다.

좌익과 우익 그리고 종교: 이러한 건국과정에 한국의 대표적인 종교 기독교대종교천주교불교,유교 그리고 천도교가 참여했다해방정국의 주도권을 선점한 것은 좌익세력들이었다좌익세력은 건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 조선공산당조선인민공화국(이하 인공인민위원회 등을 조직하여 초기 해방정국을 주도했다이러한 좌파 주도권에 제동을 걸었던 종교인들은 북한에서 공산주의를 직접 체험하고 월남한 기독교인들과 천주교인들이었다해방 공간의 종교들 가운데 천주교의 우파적 성향은 특별했다천주교 전체가 일방적인 우파 지향이었다그리고 천주교는 이남에서 미국에 대해 가장 우호적인 사회집단을 구성했다당시 서울 교구장이었던 노기남 주교는 사실상 한국 천주교를 대표하며천주교 신자였던 초대 군정장관 아놀드(A. V. Arnold)소장과 관계를 통해 미군정 고위층과 튼튼한 연결고리를 만들었다.

이러한 천주교와 미군정간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미군정청은 남로당 기관지를 발행하던 조선정판사’ 자리를 반공에 앞장서는 가톨릭에게 불하해 주었다그 자리에 경향신문이 세워졌고 천주교가 취약한 교세에 비해 과도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토대가 되었다.

천주교와 미군정의 관계가 이토록 긴밀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정 당국의 고위직으로 충원된 천주교 신자는 거의 없었다. 11명의 한국인 행정고문에도 포함되지 못했고군정청 각 부처에 임명된 초대 한국인 국장부장차장 중에는 한 명의 천주교 신자만 포함되었을 뿐이다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던 것일까노기남 주교가 가톨릭에 인물이 없음을 깊이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정도로 당시의 천주교회는 새로운 정치 시대에 대응할만한 인물이 없었다.

이에 반해 미군정 행정고문 11명 중에 6(55%), 군정의 초대 한국인 국장 13명 중 7(54%)이 기독교 신자였다입법의원 90명 중 21초대 제헌의원 190명 중 38명이 개신교 신자였다입법의원90명 중 21초대 제헌의원 190명 중 38명이 개신교 신자였다당시 남한의 개신교인 숫자가 한국인의 0.52%(10)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이런 현상은 얼핏 보기에 매우 기형적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그러나 이런 현상은 새로운 시대와 더불어 호흡할 수 있는 적응력과 준비된 인적 자원이 그만큼 풍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정치적 관계는 천주교가 우세했지만 인물을 잘 준비한 기독교가 해방정국의 주도권을 갖게 된 것이다단순논리로 말하자면 천주교인 중에 영어가 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국교회는 대한민국 건국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대한민국 건국의 이념적 기초를 제공하였고공산주의에 대항하여 자유민주주의의 도입과 수호에 앞장섰으며민족사적 정통성의 골조에 해당하는 3.1운동 정신의 계승과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미군정과의 관계와 더불어 한국교회가 변화된 시대의 요청에 응할 수 있는 적응력과 자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방 정국에서 대종교는 고도로 정치화된 종교였고 정치종교(political religion)였다따라서 대종교 인사들의 정치 참여는 당연했다미군정의 민정장관 안재홍이후 대한민국 초대 정부의 부통령 이시영국무총리 및 국방부장관 이범석문교부장관 안호상감찰위원회 정인보 등은 대표적인 대종교 인사들이었다이런 대종교의 영향아래 단군 전 건립운동단군적의 성역화개천절의 국경일 및 공휴일 지정전국체전 성화의 마니산 체화홍익인간의 교육이념단군기원 연호의 사용 등이 이루어졌다그러나 종교로서의 대종교는 이후 발전하지 못했다이범석을 비롯한 대종교 인사들 다수가 한국 정치 중심 무대에 있다가 정쟁 파동과 실패 그리고 숙청 등으로 사라져갔다이 과정에서 대종교는 쇠퇴했고 대종교의 지나친 정치적 행보는 대중들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종교적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 강좌가 진행되고 있다.

종교 내 좌익허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불교와 유교 그리고 천도교에는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좌익 세력이 있었다이들 중에는 있는 상당수가 전문적인 학문 훈련을 통해 이론과 논리로 무장되어 있었다따라서 이들 종교계는 상대적으로 자유민주주의 국가건설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다유교와 천도교의 일부 우파들은 김구의 건국노선을 집중적으로 지원했으나 이승만의 건국노선에 대해서 대립각을 세우는 경우가 많았다한편 불교는 내부갈등이 심했다기득권을 갖고 있던 대처승 중심의 중앙 총무원측과 여기에 맞서 친일불교를 척결하려는 비구승 중심의 총본원측이 대립하였다.여기에 이념 논쟁도 가세했다총무원측은 총본원측을 좌파라 공격하였고미군정은 비구승들을 좌파로 인식하고 체포하기도 했다그 와중에 일부는 좌파 인사들은 월북하여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기독교는 가장 중요한 대한민국 건국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이는 자유민주주의,반공사유재산권 보장종교의 자유 등과 같은 대한민국 건국의 성격을 고려할 때 매우 특별했다고 하겠다허박사의 결론에 의하면 기독교가 건국의 핵심 세력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미군정과의 관계 때문이라기보다는 새 시대에 적합한 역량을 가진 풍부한 인적 자원 때문이라는 것이다.

해방 70년을 맞이한 한국교회는 지금 어떤 모습 인가? 70년 전 0.52%의 기독교인들이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으로 봉사했다오늘날 20%의 기독교인들은 대한민국의 미래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숫자가 문제가 아니다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인물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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