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그림자, 종교재판(1)

중세 시대의 폭력과 잔혹성, 무자비함, 교회의 타락, 혹은 비이성주의를 보여주는 또 한 가지 예가 교회에 의해 자행된 종교재판이었다. 갈릴레이 갈릴레오에 대한 종교재판(1633)이나 잔 다르크의 종교재판은 우리에게 익숙한 교회의 폭력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렇다면 중세시대 종교제판의 실상은 어떠했을까?

2004년 6월 교황청은 약 800쪽에 달하는 중세종교재판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이 보고서에서 중세종교재판이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극악무도하거나 수만 명의 사람들을 화형에 처했다는 점 등은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지사로 6년간 종교재판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한 이탈리아의 역사학자 아고스티노 보로메오는 “잔혹하게 사람을 산채로 화형시켰다는 종교재판 기록을 조사한 결과 사실은 그렇게 잔인한 형벌을 받은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고 주장하여 로마 가톨릭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했다.

그는 이단 심문이 가장 심했던 스페인의 경우에도 이단으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은 12만 5천건 가운데서 사형을 당한 이는 1.8%에 불과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보고서가 로마 교황청에 의해 주도되었고, 공적인 사죄를 위한 목적에서 작성되었으므로 가톨릭의 견해를 반영하는 것으로 기존의 주장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설사 스페인의 경우 처형된 사람은 1.8%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12만5천 건의 이단 심문, 곧 종교재판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시대가 얼마나 살벌한 시대였음을 감지할 수 있다.

중세교회는 이단, 연금술, 마법, 주술 같은 행위를 금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명목으로 종교재판소를 설치하게 되는데, 이단이라고 할 때 11, 12세기이탈리아 북부나 프랑스 남부에서 유행하던 카다리(Cathari)파는 커다란 위협으로 간주했다. 마니교나 영지주의와 비슷한 금욕주의적 분파인 카다리파는 아르메니아 혹은 발칸반도에서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불가리아에서는 보고밀파, 프랑스에서는 알비조파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들이 서유럽으로 확산되어가자 가톨릭교회는 위협을 느끼고 이들을 억압하기 위해 세속적인 권위와 처벌과 함께 종교재판을 통해 이단으로 정죄하여 탄압하게 된 것이다. 프랑스 리용의 상인이었던 발데스(Valdes)에 의해 시작된 발도파는 건실한 복음주의적인 집단이었다. 그러나 이들 또한 가톨릭의 위협으로 간주되어 교회에 의해 처절할 정도의 탄압을 받게 된다.

종교재판(Inquisitio)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것은 123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y IX, 1170?-1241) 때였는데, 카타리파(알비파)에 대한 십자군의 원정과정에서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전부터 교회는 물리적 탄압을 위해 권력을 행사했다. 1163년의 투르공의회에서 교황 알렉산더 3세는 세속 군주들에게 이단을 박해하고 투옥하고 재산을 몰수 하도록 촉구한 바 있고, 주교들에게 이단을 색출하도록 지시했다. 그는 이단을 고소한 사람에 의존하는 심문(trial) 대신 재판관이 주도권을 가지고 이단혐의자를 심문하는 방법(inquest)을 권장하기도 했다. 1179년에 소집된 라테란 공의회에서 교황 알렉산더 3세는 여러 군주들을 초청하여 범법자들을 수감할 수 있는 권한과 그들의 재산을 압수할 수 있는 특별한 권한을 부여하였다.

1184년 교황 루치우스 3세(Lucius III, 1181-1185)는 황제 프레드리히 바르바로사(Frederick Barbarossa)와 결탁하여 이전보다 가혹한 칙령을 내렸다. 즉 이단자들이 교회에 의해 파문을 당하면 세속 정부에 넘겨져 그 응분의 처벌(animadversio debita)을 받게 했다. 그 응분의 처벌이란 국외추방, 가옥파고기, 공민권 박탈, 재산 몰수 등을 포함했다. 1224년에는 그레고리 9세와 황제 프레데리히 2세는 공동으로 롬바르디아의 이단들을 처단하기 위해 법령(De haereticis)을 반포했는데, 이 법에 의하면 세속당국은 주교로부터 인도된 이단자를 감금하거나 처형하도록 했다.

그러다가 교황 그레고리 9세는 1231년 공식적으로 종교재판소를 설치했다. 이것은 카다리파나 발도파와 같은 소위 이단의 출현에 대한 대응책이었다. 종교재판을 의미하는 ‘탐문,’ ‘수사’라는 의미의 Inquisitio 는 ‘조사하다’는 의미의 라틴어 inquiro에서 온 말인데, 영어의 Inquisition 도 이 라틴어에서 기원했다. 그레고리 9세의 칙령에 의해 제도적으로 확립된 종교재판은 교황 직속의 특설 비상 법정으로서, 주교의 통제를 받지 않으며 오히려 주교와 세속적 권력은 무조건 이에 협력해야 했다는 점에서 위협적이었다. 이제는 고소를 기다리지 않고 심문을 개시하며, 자백 또는 두 사람의 증언으로 유죄 판결을 할 수 있었으므로 증인은 피고와 대결할 필요가 없었다.

고문이 공인되고 밀고(密告)가 권장되었다. 이단에 대한 체포와 심문을 교회가 관장했고, 그 주된 책임은 교황이 임명한 종교재판관에게 부여하였다. 이 종교재판을 주도했던 집단이 도미니크 수도회였다. 물론 프란체스코수도회도 무관하지는 않지만 도미니크스도회는 이 종교재판과 고문법의 개발로 악명을 얻게 되었다.

보통 심문관은 2명이 1조가 되어 이단혐의가 있는 지방을 순회하였다. 성직자들과 주민을 집회에 소집하고 이단적인 견해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스스로 자백하도록 2중에서 6중에 이르는 소위 ‘은혜의 기간’을 부여했다. 이 기간 동안 자신의 죄를 고백한 이들에게는 가벼운 형벌로 주어졌다. 그러나 그 기간이 지나고 나면 종교재판관은 이단혐의자들을 색출하고 조사하게 된다. 이단혐의가 있는 이들은 심문법정에 소환되었다. 교황 이노센티우스 3세는 성속 양영역을 지배했던 교황으로서 소위 전권(Plenitudo Potestatis)을 행사했는데, 그는 제4차 십자군 원정(1202-1204)을 주도하고 알비조파와 발도파를 박멸하기 위한 비밀종교재판소를 설치하기도 했다.

교황 이노센티우스 4세(1243-1254)는 1252년 “박멸에 관하여”라는 교서를 내려 자백을 위해 고문의 사용을 허락하였다. 고문은 중세 교회에 의해 개발되었다. 이 당시 일반적인 고문으로는 집게로 손톱 혹은 발톱을 뽑아내거나, 남여성기를 불로 지지거나, 송곳을 박은 큰 롤러에 사람을 굴러가게 하거나 고문기구로 손마디나 발가락을 뭉개거나, 옷을 벗긴 뒤 밧줄로 묶어 도르래를 사용하여 공중에 매 달았다가 감자기 떨어뜨려 신체나 관절을 상하게 하는 등의 방법이었다. 귀나 입에 끓는 납을 붓거나 살점에 튀도록 채찍을 가하거나 눈을 빼는 일도 있었다. 고문당한 사람을 쇠사슬로 묶어 두어 해충의 먹이로 죽어가게 하기도 했다.

고문에도 불구하고 자백하지 않는 경우, 두 사람의 증언이 있고, 이 증언을 반박하지 못하면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이는 마치 일제 강점기인 1910년 12월 3일 조선총독부가 제령(制令) 제10호로 발표한 ‘범죄즉결법’과 유사했다. 범죄 즉결법은 피의자의 진술과 경찰서장의 인증만으로 처형까지 시킬 수 있는 법령이었다. 범죄자의 자백은 고문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고, 경찰서장의 인증은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중세 가톨릭의 교의가 성경적이고 합당한가를 떠나서 당시 가톨릭의 입장에서 볼 때 실제 이단이 없지 않았지만 많은 경우 이단으로 추정되고 이단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자신의 결백을 끈기 있게 주장하려면 완고한 이단으로 정죄될 위험 또한 크다는 점을 감수해야했다. 이런 경우 처벌은 사형이었다. 따라서 곤경에서 벗어나는 최선책은 이단이라고 고백하는 경우였다. 완고한 이단으로 정죄된 경우 세속당국에 넘겨져 화형에 처해졌다. 그것은 교회는 공식적으로 피 흘리는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위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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