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학연구원과 한국기독교사학회가 9한국 기독교의 건국이념이라는 주제로 월례세미나를 한국교회사학연구원 세미나실에서 약 40여명의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열고 김명구 박사(실행위원)한국기독교의 건국이념이라는 논문발표를 들었다.

김박사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대한민국 건국 초기에 기독교는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면서 결국 기독교인들의 민주주의 사상으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의 논문 발표를 요약해 본다.

▲ 김명구 박사가 발표하고 있다.

한국기독교의 건국이념    /김명구 박사

건국의 주역들: 이승만, 김구, 김규식은 기독교 건국론을 주장했다. 그들은 상해임시정부, YMCA, 흥사단에 참여했던 기독교인들이었다. 이들의 특징은 친미적이었고 반공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을 종합하면 영미식 민주주의, 곧 자유민주주의인데 반공과 더불어 기회균등, 개성존중, 곧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일치된 목표였다.

한국 민주주의와 임시정부의 기독교: 1919413일에 출범한 상해임시정부는 의정원을 구성하였고 적지 않는 의제와 의안을 통과 시켰다. 1919411일에 제정된 전체 10조로 구성된 임시헌장을 조완구의 동의와 조소양의 제청으로 가결시켰다. 임시헌장은 신익희, 이광수, 조소양이 사전심사를 했다. 이를 이승만의 한성정부약법과 비교해 보면 뚜렷이 민주주의를 정체로 내걸고 있고 자유와 평등의 민권사상을 표명하고 있다. 이는 당시 기독교계 내부에서 민주주의라는 표현과 그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일치한다.

불교와 천도교, 기독교 등 각종 종교를 두루 편력한 바 있는 이광수는 개성의 자가, ()는 개인의식의 자각이외다. 야소교는 개인적이외다.........(중략)......... 유교도덕은 개인의식을 몰각하게 합니다. 이 개인의식의 몰각이 사상의 발달을 저해함이 다외하외다. 그러나 야소교는 기도와 사색으로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찾음으로 각 개인의 영생을 얻을 수 있다 합니다. 그럼으로 각 개인의 표준은 각 개인의 영혼이외다.” 그는 이러한 사상으로 임시헌장 제청에 참여하였고 한국에서의 개인주의와 민주주의 사상이 기독교로부터 나왔다고 진술하고 있다.

물론 교육 또한 무시 못할 바탕이 되었다. 광혜원, 미션스쿨, 개 교회의 남녀학교 등이 민주주의를 가르쳤다. 1909년에 이미 장로교가 719개에 학생 수가 17,231명이었고, 감리교 역시 200교회에 학생수가 6,423명이었다.

▲ 월례학술발표회가 진행되고 있다.

해방직후의 기독교계: 해방직후 미군은 한국에 대해 무지였다. 920일 경까지 한국의 치안을 일본 경찰에 위임해야 했다. 그러나 이내 일본 총독을 파면하고 17일에 국장급에 미군을 임명했다. 1015일에는 김성수를 위원장으로 하여 조만식, 여운형, 송진우, 전용순, 김동원, 이용설, 오영수, 김용무, 강병순, 윤기익 등을 미군정장관 고문으로 위촉했다. 조만식과 김동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민족주의계로 분류되는 인물이었다.

또한 미군정 각 부처의 조대 한국인 국장 13명 가운데 7명이 기독교인이며, 이들 전원이 미국 유학출신자들이었다. 기독교 인구 비율이 남북한 합하여 2% 이하였음에도 초기 미군정에 참여한 인사들은 절반에 가까워 초기 건국이념을 결정할 때 기독교계의 영향력이 적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건준(건국준비위원회, 공산주의계열)을 탈퇴하고 한민당에 입당한 김준현은 민주주의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어 좌익계역에서는 공산주의적 독재를 의미하게 되나, 민주주의를 세계에서 널리 쓰이는 의미로 해석하고 사용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자유를 기초로 하는 것이라고 하여 영미식 민주주의만이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주장했다.

해방 직후, 영미식 민주주의에 대해 제대로 이해했던 정파는 이승만의 한민당과 안창호의 후예인 흥사단계가 유일했다. 민주주의의 기본 요건으로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등 행동의 자유를 중요시 여겼고 개성의 발휘와 서로 다른 개성이 조화하는 것이 민주사회 발전의 생명력이라고 보았다.

영락교회를 세운 한경직 목사는 새나라의 정신적인 기초는 반드시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정한 민주주의 핵심은 (1)개인인격의 중심사상, (2)개인의 자유사상, (3)만인의 평등 사상인데, 근본은 신구약 성경이며 민주주의 꽃은 민주주의 밭에서만 아름답게 필 수 있기 때문에 새 한국은 반드시 기독교가 그 정신적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공산주의 발현: 1959년 대한민국 공보실은 리승만 대통령 각하의 정치이념은 철저한 자유민주주의이며, 이에 반하는 어떠한 독재주의나 침략주의도 이를 용인하지 않는 것이다.”고 홍보했다. 여기서 독재주의 침략주의는 모두 공산주의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민주당이나 지성계는 북한 공산주의와 마찬가지로 이승만의 권위주의 통치도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보았다. 반공주의와 자유민주주의, 기독교 사상의 기반 아래 있던 민주당의 일각과 사상계의 시각은 이승만이 반공적 입장에서만 자유민주주의를 이해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런 비판은 반공의 개념이 자유민주주의의 실현보다 우선되고 있음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기독교계는 반공이 민주주의 실현보다 앞설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공산주의를 체험하고서 부터이다. 1925년 이후부터 한국 사회주의자들은 기독교를 배척하고 집요하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공산주의 단체 중 하나인 한양청년연맹은 기독교회의 조선주일학교 전국대회를 방해하며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냈다. 이들은 기독교가 일본과 연계가 되어 있다고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리고 위해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한경직을 비롯한 많은 기독교계 인사들은 무엇보다도 반공을 앞세우게 된 것이다.

경제 정의에 대한 문제: 한경직은 신의주 제일교회의 윤하영 목사 등과 기독교사회민주당을 만들었다. 한경직의 경제사상은 토지를 일본에게서 환수하여 소작농에게 맡겨야 하지만 기업은 개인이 하는 것보다 국가가 직접 운영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한경직은 철저한 반공을 외쳤지만 사회주의식 민주주의를 선택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 좌로부터 논찬 소요한 박사, 발표 김명구 박사, 사회 박종현 박사

이러한 김명구 박사의 주장에 소요한 박사(명지대학교 교목) ㄴㆍ논찬을 통해 한국의 건국에서 기독교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우리가 풀어가야할 과제이다. 일반사학계의 반론으로 건국의 주역들이 기독교인이라서 이들의 사상이 기독교적이라기 보다 이들이 유교적 문화와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에 유교적이다라는 주장은 기독교 사학자들이 풀어가야 할 과제라고 본다고 주장하였으며, 김명구 박사는 유교적인 문화를 가졌다고 사상이 그런 것은 아니다. 오랜 관습에 젖어 행위가 유교적인 문화로 나타날 때가 있겠지만 그들은 미국에서 유학하면서 가진 기독교적인 사상이 그들의 사상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답했다.(논문은 본문방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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