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언(序言)

▲ 김명구 박사

한국 기독교는 특별히 건국과정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그것은 이승만이나 김구김규식이 기독교 건국론을 주장했고건국의 주역들 중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상해임시정부에서의 활동했으며YMCA을 중심으로 했던 흥업구락부나 서북지역을 근간으로 했던 흥사단 등의 계보와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이들은 나름의 기독교 사상 아래 민족운동이나 정치활동을 해왔던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는 모두 친미적이었고자유민주주의와 반공을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이념으로 내세웠다기독교인로 정치의 일선에 있던 인물들은 교회가 설정한 방향과 다르지 않게 행동하였다.곧 영미식 민주주의와 반공을 건국의 목표로 설정한 것이다물론 영미식 민주주의곧 자유민주주의의 개념에 대한 이해는 개인이나 계보별로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반공과 더불어 자유와 기회균등,개성을 존중하는곧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는 이들의 일치된 목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사회 일각에서기독교회나 그에 속한 정치 그룹들이 친미적 성향을 지적하면서이들 그룹들이 일방적으로 군정의 노선에 따랐다고 비판하고 있다그렇지만 교회나 교회에 속한 이들은 정치적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을 추종하거나 미국의 정책에 순응해서 민주주의나 반공을 목표로 하지는 않았다특별히 기독교 일각에서는 이미 개화시대부터 민주주의를 갈망했으며기독교가 민주주의 국가를 이룰 수 있게 한다고 믿고 있었다. 또한 교회뿐만 아니라 YMCA나 흥사단과 같은 기독교사회단체들배재학당이화학당경신학교숭실학당 등 미션스쿨에서도 자유 민권사상만민평등사상서구식 자유민주주의의 가치관 등 가르치고 있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공산주의를 경험한 이후, 한국 기독교는 공산주의에 대한 깊은 혐오감을 갖고 있었다반공의식은 그때부터 생성된 것이다따라서 한국 기독교가 미국을 지지하고 적극적으로 협조했던 것은미국의 정책이나 이념이 자신들이 이미 확보하고 있던 것들과 일치한다고 믿었고 미국이 기독교회를 존중했기 때문이다기독교계가 미군정혹은 미국 정부의 가치관을 일방적으로 따르지 않았음은 기독교회나 교인들이 갖고 있던 경제관을 보면 알 수 있다이들은 미국식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던 것이다.

이 소고는 기독교의 건국이념이 무엇인지 밝히는 것이다여기에서는 기독교 건국론을 주장하였던 이승만이나 김구김규식에 대한 것은 지양하고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지고 민족운동을 했던 기독교 내부의 민족주의계곧 기독교 민족운동의 양대 세력 중 하나로 이승만을 지지했던 YMCA계와 계보적 대척(對蹠집단이었던 흥사단 혹은 수양동우회계의 건국이념을 다루려고 한다또한 기독교회의 대표적 인물로 광복 직후 정치 활동 경험이 있었고 건국이념을 직접 언급한 한경직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한국 기독교회의 건국 사상이 밝혀지면 그것이 향후 대한민국 정치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도 짐작하게 되리라 믿는다.

 

2. 한국 기독교의 민주주의 발현

2.1 임시정부 시절의 기독교

1919년 4월 13일에 공식 출범한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임시 의정원을 구성하였고 적지 않은 의제와 의안을 토의하고 통과시켰다여기에서 1919년 4월 11일에 제정된전체 10조로 구성된,임시헌장을 조완구의 동의와 조소앙의 재청으로 가결시켰다.

임시헌장의 사전심사는 신익희이광수조소앙이 맡았다임시헌장은 1918년에 조소앙의 무오독립선언서를 기초의 일부로 하였다. 이 임시헌장을 무오독립선언서와 감리교의 이규갑 목사가 이승만의 대리인으로 있던 한성정부의 약법(漢城政府約法)과 내용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 임시헌장과 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 한성(漢城)정부약법의 비교

 

대한민국임시헌장(1919. 4. 11)

 

무오독립선언서(1918. 11?)

한성정부약법(1919년 4)

신인일치(神人一致)로 중외협응(中外協應)하야 한성(漢城)에 기의(起義) (임시헌장 선포문)

천의을 대양(對揚)하며 인심을 순응(順應)천인(天人)합응(合應)의 순수한 동기로

 

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1조 국체ㄴㆍㄴ 민주제를 체용ㅎㆍㅁ

2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차()를 통치함

 

2조 정체(政體)는 대의제를 체용ㅎㆍㅁ

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귀천 급(빈부의 계급(階級)이 무()하고 일절 평등함

동권(同權동부(同富)로 일절 동포에 시()하야 남녀빈부를 제()하며 무현무수(無賢無壽)로 지우노유(智愚老幼)에 균하야

3조 국시(國是)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ㅎㆍ고

4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신교.언론.저작.출판.결사.집회.신서(信書).주소.이전.신체 급(소유의 자유를 향유(享有)

 

 

5조 대한민국의 인민으로 공민자격이 유()한 자는 피선거 급(피선거권이 유()

 

 

6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교육납세급(병역의 의무가 유함

 

5조 조선국민은 좌의 의무가 유함

납세병역

7조 대한민국은 신()의 의사에 의하야 건국한 정신을 세계에 발휘하며 진()하야 인류의 문화급(평화에 책헌(責獻)하기 위하야 국제연맹에 가입함

사해인류(四海人類)를 할지니()하야 국제불의를 감독하고(단군 대황조께서 상제(上帝)에 좌우하사

3조 국시ㄴㆍㄴ 세계평화의 행운을 증진케 ㅎㆍㅁ

8조 대한민국은 구(황실을 우대함

 

 

9조 생명형(生命刑신체형(身體刑)(공창제를 전폐함

 

 

10조 임시정부ㄴㆍㄴ 국토회복 후 만1개년 내에 국회를 소집함

 

6조 본 약법은 정식국회를 소집ㅎㆍ야 헌법을 반포(頒布)ㅎㆍ기ㅺㅏ지 차()를 적용ㅎㆍㅁ

민족평등.국가평등 급(인류평등의 대의를 전전함 (정강1)

민족평등을 전구(全球)에 보시(普施)할지니평균천하의 공도(公道)로 진행할지니대동평화를 선전할지니

 

도표에 나와 있듯이 대한민국 임시헌장 뿐만 아니라 이승만이 주도하고 있던 한성정부는 뚜렷이 민주주의를 정체(政體)로 내걸고 있고자유와 평등의 민권사상을 표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관심있게 보아야 할 것은상해임시정부가 제1조로 내세우고 있는 민주공화제의 명칭이 한성정부의 민주제와 함께헌정제정에 있어 주도적 역할을 했던 조소앙의 기존 인식에서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이것은 신해혁명 후에 제정되고 있던 중국의 수많은 헌법 문서들 가운데서도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독창적인 명칭이다.

감리교 목사인 이규갑이 대행하고 있던 한성정부의 약법 1조가 국체ㄴㆍㄴ 민주제를 체용ㅎㆍㅁ인 것을 보면적어도 한국 기독교계 내부에서 민주주의라는 표현과 그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불교와 천도교기독교 등 각 종교를 두루 편력한 바 있던 이광수는 이미 1917년에 다음과 같이 피력한 바 있다.

개성의 자각()는 개인의식의 자각이외다원래 야소교는 개인적이외다.

(중 략)

유교도덕은 개인의식을 몰각(沒却)케 합니다이 개인의식의 몰각(沒却)이 사상의 발달을 저해함이 다외(多外)하외다그러나 야소교는 각 개인이 기도와 사색으로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찾음으로 각 개인의 영생을 얻을 수 있다 합니다그럼으로 각 개인의 표준은 각 개인의 영혼이외다각인은 각각 개성을 구비한 영혼을 가진다함이 실로 개인의식의 근저외다()윤리의 중심인 개성이라는 사상과 신(정치사상의 중심인 민주주의라는 사상은 실로 야소교리(耶蘇敎理)와 자연과학의 양원에서 발한 일류(一流)외다.

조소앙과 신익희와 함께 임시헌장 제정에 참여했던 이광수는 한국에서의 개인주의와 민주주의’ 사상이 기독교로부터 나왔다고 진술하고 있다따라서 이 임시정부의 헌장 제1곧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은 이광수의 주장에 의해 기술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민주주의에 대한 개념이 기독교로 인한 것임을 간접적으로 증명해 주는 것이다중경정부에 이르기까지 5번이나 개정을 했지만 제1조는 계속 유지가 되었고 해방 후에도 대한민국 헌법 제1조로 계속되고 있다.

한편한국 기독교회는 한국의 근대교육을 선점하였다. 1885년 광혜원을 시작으로 설립된 미션스쿨과 개교회에서 운영하는 남녀학교 등이 그것이다. 1909년에 이미 장로교가 719교에 학생수가17,231명이었고감리교가 200교에 학생수가 6,423명에 이르고 있다. 특별히 기독교회는 이 근대교육을 통해 하나님 아래에서 누구나 수평적 관계라는 인간평등 의식을 가르쳤다타인에 대한 존엄성을 강조했고 개인을 향한 복음의 약속된 가치 강조개인의 평화 누릴 권리와 존중의식을 함께 가르쳤다. 그리고 그것을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의식으로 각인시켰다이렇게 민주주의 인식을 확보한 임시의정원의 기독교계 인사들은 특별히 개인의 자유와 평등부분을 각별히 강조했고, 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제를 채택하는 데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2.2 해방 직후의 기독교계

해방이 되었을 때미군은 한국에 대해 무지에 가까운 상태로 입국했다일본과 한국의 차이도 제대로 구별하지도 못할 정도여서 9월 20일경까지 한국의 치안을 일본 경찰에게 위임해야 했다그런데 미군정은 1945년 9월 11일에 일본 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를 파면하고 17일에는 국장급에 미군들을 임명했다그리고 10월 15일에는 김성수를 위원장으로 하여 조만식여운형송진우전용순 목사김동원 목사이용설 세브란스 의전 교수오영수김용무 변호사강병순윤기익 목사를 미군정장관 고문으로 위촉했다그리고 군정장관 비서장과 민정장관 보좌관에 이교선을 임명하였고 윤보선을 비롯하여 이매리양주삼 목사 등을 중앙행정기관의 고문김광현 목사정기원김정기 등을 지방행정기관의 고문에 임명하였다조만식과 김동원을 제외하고 모두 기호 민족주의계로 분류되는 인물들이었다또 정일형을 비롯해 이묘묵이용설길원봉오천석 등 다수의 서북계를 실무진으로 채용하였다.

1946년 12월부터 8월에 이르기까지 군정청에 임명된 군정 각 부처의 초대 한국인 국장 13명 가운데 7명이 기독교인이며이들 전원이 미국 유학출신자들이었다초대 차장 9명중에는 4명이 기독교 신자였고 1명의 천주교 신자가 포함되어 있다초대 처장 6명중 2명이 미국유학을 마친 기독교인이었다또한 1946년 12월 7일 발표된 입법의원 90명중 21(23%)이 기독교 민족운동 내부에서 활동하던 기독교인이었다해방 당시 기독교인의 인구 대비 비율이 남북한 합해 2% 이하였음을 감안하면 초기 건국이념을 정할 때에 기독교계의 영향력이 적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건준을 탈퇴하고 한민당에 입당한 김준현은 민주주의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어 좌익계열에서는 공산주의적 독재를 의미하게 되나민주주의를 세계에서 널리 쓰이는 의미로 해석하고 상용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자유를 기초로 하는 것이라고 하여 영미식 민주주의만이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주장했다해방 직후영미식 민주주의에 대해 제대로 이해했던 정당이나 정파는 이승만을 추종하였던 한민당과 도산 안창호의 후예인 흥사단계가 유일했다.

1945년 9월 6일의 한민당 발기인 총회에서 서구식 민주주의 정체(政體)의 실현과 정착을 기대를 표출하였는데, 미군정 당국도 한민당을 교양 있고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정당이라 여겼다. “영어에 능통하고 민주정치이론에 밝은 인사들로 보았고동아일보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기독교인들이고 YMCA계들이어서 이들을 신뢰했다곧 송진우(宋鎭禹), 김성수(金性洙), 서상일(徐相日),장택상(張澤相등의 동아일보계와 YMCA계의 결사조직인 흥업구락부계인 구자옥(具滋玉), 유억겸(兪億兼), 김준연(金俊淵), 허정(許政), 백관수(白寬洙), 김도연(金度演) 등과 YMCA계의 또 다른 비밀 결사조직인 청구구락부 출신의 장택상(張澤相), 장덕수(張德秀)여기에 기호계 민족주의 계보였던 김병로(金炳魯), 원세훈(元世勳등이 한민당 창당을 주도했다. 동아일보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기독교 민족주의 계보아래 있던 인물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민족운동에 가담했던 인물들로 서로 절친했고 계층적 이해관계가 잘 들어맞았다.대부분 해외유학을 했던 지식군들로 근대 서구사회를 경험했던 인물들도 많았다. 기독교 사상이 투철했고특히 공산주의가 민주주의를 훼손시키는 이데올로기라는 데에 인식을 같이하고 있었다. 서구 문명에 매우 긍정적이었고 근대적 인권관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국제 감각과 세계성의 인식이 확고했다. 1920년부터 이들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기반한 입헌정체를 구상하고 있었다.

한민당 정강의 실질적 입안자인 장덕수는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 창간호를 통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입각한 국민의 정치 참여와 의회정치에 기반한 입헌정체의 실현을 역설한 바 있다. 그는 사유재산제를 근간으로 하는 신도덕사회 건설을 외쳤는데 민주주의가 바로 그런 사회이고, “인류생활의 일대 원리이며 인격에 고유한 권리라고 주장하였다.

9월 8일의 한민당 발기인 대회에서는 여운형과 박헌영의 인공(人共)타도와 중경의 임정(臨政)지지를 선언하였다그리고 여기에서 대중 본위의 민주주의 제도에 기초한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가 수립과 전 국민의 자유로운 안전 보장’ 등을 선언하였다그리고 입헌정체와 정당정치의회민주주의 등 영미식 자유민주주의 노선을 분명히 하였다.

한편흥사단계 지식인들은 연합국의 승리를 독재와 전체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로 규정하였다. 이들에게 있어 일본의 전체주의적 제도법규나 획일적 집단동작의 청산은 자유민주주의의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조건이었고 생소했던 서구식 의회제도와 정당정치에 대한 교육과 계몽은 당시 흥사단 활동의 주요 목적이었다.

민주주의의 기본 요건으로 언론출판집회결사 등 행동의 자유를 중요시 여겼고 개성의 발휘와 서로 다른 개성이 조화하는 것이 민주사회 발전의 생명력이라고 보았다. 그렇지만 자유와 방종을 엄격히 구분하며 책임을 강조했다. 여기에 민주정치의 안전망으로 입법사법행정의 삼권분립에 기초한 상호 견제와 균형을 제안했다여기에 다당제에 기초한 대의정치를 강조했고 민주주의의 발전이 정당의 건전한 발전에 달려 있음을 주장했다.

1946년 9월 28일에 흥사단은 제1차 국내대회를 열고 모든 방법으로 민주주의에 기초한 정치훈련을 적극 실천할 것을 행동강령의 하나로 채택했다. 자유주의 원리에 입한 민주국가의 건설이라는 대원칙에 의견을 같이 한 것이다그리고 개인에 대한 우위를 내세우고의회주의와 정당정치에 입각해 견제와 균형을 기조로 하는 민주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미국 유학 유경험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해 친숙하였고이러한 인식에 따라 미군정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미군정에 참여한 흥사단계 중 기독교 신학교나 미션스쿨 출신 일부의 군정청에서의 직위와 주요 학력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성명

군정청 직위

출신지

학력

정일형

인사행정처장중앙물가행정처장

평남

광성고보연희전문드루대 박사

장리욱

국립 서울대 총장

평남

숭실중콜럼비아대

조병옥

경무부장

충남

공주 영명숭실중콜럼비아대 석사

오천석

문교부 차장부장

평남

배재학당아오야마학원콜럼비아대 박사

오정수

상무부장

평남

경신학교, M.I.T.

이대위

노동부장

평북

신성중북경대콜럼비아대 석사

이용설

보건후생부장

평남

숭실중세브란스의전노스웨스턴대

오익은

중앙식량행정처 차장

평북

신성중양정고보듀크대

박창준

중앙물가행정처 총무국장

평북

신성중숭실전문미네소타주립대 석사

우태호

공보부 차장

평남

숭실중오글틉대 석사

한병선

중앙물가행정처

평북

대성중미국유학

황희찬

운수부 차장

평북

신성중뉴욕대 석사

이묘묵

하지중장 비서겸 통역관

평북

광성고보연희전문,

보스턴대 박사

최능진

경무부 수사국장

평남

숭실중남경 금릉대 중학부스프링필드대

안맥결

경무부 공안국 여자경찰과 간부

평남

숭의여중

양한나

서울여자경찰서장

경남

동래 일신여학교이화여전

박영호

공보부 총무국장

평남

광성고보남경 진수학교

황애덕

문교부 성인교육과장

평남

이화여전도쿄여의전콜럼비아대 석사

전영택

문교부 편수관

평남

대성중아오야마학원퍼시픽신학교

황인식

충남도지사

충남

공주 영명학교숭실중콜럼비아대

윤하영

충북도지사

평북

평양신학교프린스턴 신학교

백영엽

강원도청 인사행정처장

평북

의주 양실중남경 금륭신학교

하경덕

과도입법의원

전북

전주 신흥숭실중하버드대 박사

 

위 도표에서 알 수 있듯이 미션스쿨 출신인 이들은 대부분 미국유학 경험자들이었다. 영어 구사력이 뛰어났고 기독교인들이어서 미군정과 친밀할 수밖에 없었다.

특별히 김훈오천석이대위한승인조병옥 등은 미군이 남한에 진주하기 이전인 1945년 9월 4일경에 한미협회를 발족하였고, 9월 27일에는 하지중장을 찾아가 환영 메시지를 전달한 바 있었다그리고 이묘묵백낙준오천석 등은 영자신문 코리아타임스를 발간하였다. 흥사단계와 미군정이 친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국으로서도 미국식 민주주의에 깊은 이해를 갖고 있는 이들의 활용 가치가 높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들 한민당이나 흥사단계는 한국이 미국이나 영국과 같은자유민주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자주독립국가의 수립을 기대했다자유민주주의 의식이 이들의 건국이념이 된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한편신의주에서 활동하다 월남하여 영락교회를 세운 목사 한경직은 새 나라의 정신적인 기초는 반드시 기독교가 되어야 되겠다고 주장한다. “진정한 민주주의의 핵심은 (1) 개인인격의 중심사상, (2) 개인의 자유사상, (3) 만인의 평등사상인데 이 사상의 근본은 신구약 성경이며, “민주주의의 꽃은 민주주의의 밭에서만” 아름답게 필수 있기 때문에 새 한국은 반드시 기독교가 그 정신적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에게 있어 기독교는 민주주의 연원이었다.

당시 한경직은 맥아더(Douglas MacArthur)가 일본점령정책의 목표를 민주주의와 기독교를 가져다주는 것이라 본 것에 크게 고무되어 있었다실제로 맥아더는 일본이 물질적인 행정 지도만이 아니라 영적 지도력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자신의 일본점령정책의 목표는 일본에 민주주의와 기독교를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기독교가 한국 민주주의의 기원 혹은 발원지라는 한경직의 의식은 기독교계의 역사성 아래 있었다그리고 그러한 인식은 군정 사령관 하지와도 상통할 수 있었다군정 후기하지(John Reed Hodge)는 미군의 임무를 기독교 선교사와 비교하면서 자신들의 사명이 한국에 독립된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이를 위해서 기독교와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인식을 전제로 할 때미군정과 기독교계는 자유민주주의를 건국이념으로 내세우는데 서로 긴밀할 수밖에 없었다.

 

3. 반공주의의 발현

1959대한민국 공보실은 리승만 대통령 각하의 정치이념은 철저한 자유민주주의이며이에 반하는 어떠한 독재주의나 침략주의도 이를 용인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홍보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독재주의나 침략주의는 모두 공산주의를 의미하는 것이다당시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을 몸서 체험과 시범을 통해 자유민주주의의 이론을 사상 체계화 해 우리 민족에게 민족의 진로를 명시한 인물로 묘사했다여기에서 말하는 민족의 진로는 반공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민족국가의 완성이었다.

그러나 당시 민주당이나 지성계는 북한 공산주의와 마찬가지로 이승만의 권위주의 통치도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보았다민주당 의원 신도성은 이승만 박사가 사용하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는공산주주의자들이 스스로 민주주의를 참칭하는데 대하여 개념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쓰이는 것 같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였고서울대 헌법학 교수 한태연은 한국의 민주주의는 가부장적 성격으로 위기에 처해졌다며 이승만을 비판하고 나섰다.

반공주의와 자유민주주의기독교 사상의 기반아래 있던 민주당의 일각과 사상계의 시각은 이승만이 반공적 입장에서만 자유민주주의를 이해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그런데 이러한 비판은 기독교계를 비롯한 한국 보수정치의 중심에서 반공의 개념이 자유민주주의의 실현보다 우선되고 있음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해방 직후신간회 참여 경험을 가지고 있던 기독교 내부의 민족주의계는 거의 모두 강력한 반공주의자들로 변신하여 있었다한국 기독교회에서도 공산주의는 기피의 대상이었다그런데 이들이 공산주의를 혐오하게 된 것은 역사적 경험 때문이었다한국 기독교계에서 반공이 민주주의의 실현보다 앞섰던 것도 공산주의를 겪고 부터였다.

1925년 이후부터 조직적 기반을 확보했다고 생각했던 한국 사회주의자들은 기독교를 배척하고 집요하게 공격하기 시작했다공산주의 단체 중 하나인 한양청년연맹은 기독교회의 조선주일학교 전국대회를 방해하며 노골적 반감을 드러냈다이들은 한국 기독교가 일본과 연계가 되어있다며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다그리고 이후로 교회에 위해를 가했다.

다음 해에는 사회주의 청년 단체인 청총이 크리스마스를 반기독데이로 제정하는 등 갈등을 야기 시켰다이후 사회주의자들은 기독교가 가상적 대상을 설정하고 그에 대한 존숭과 찬미의 신념으로 설립되는 것이고 자본주의 사회를 변호하고 구가하는 한 고정적 제도”, “자본주의의 호위병으로서 자본주의 사회자체와 운명을 같이 한다고 비난하였다그리고 계급의 정복민중의 마취가 이 종교에 말미암지 아니한 것이 업고”, “이민족의 지배가 이 종교에 말미암지 아니한 것이 업다고 노골적으로 맹비난하였다. 또한 제국주의의 옹호자이고 노동 계급의 발흥을 막는 방어자이며 정신적 마취를 가져오는 아편장시(阿片場市)”라는 비판도 하였다.

천주교에 대해서도카톨릭이 세 가지 표상곧 미신’, ‘제국주의’, ‘파시즘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하였으며가톨릭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리려는 당랑거철(螳螂拒轍), 독점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그룹개인주의로 영혼만 알고 육신을 아주 모르는 종교물질경시의 아편을 민중에서 철포(撤庖)함으로써 민중을 지배한다고 비판하였다.

YMCA계와 동아일보계가 주도의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시작할 때공산사회주의자들은 대학보다는 차라리 대중교육의 보편화에 힘쓰라며 타도를 외쳤다. 또한 전조선청년당대회(全朝鮮靑年黨大會)에서도 민족해방보다 계급 해방이 우선 과제라며 난동을 부렸다. 동아일보계가 주도했던 김윤식의 사회장과 연정회를 방해하거나 반대했고기타의 민족운동들도 방해했다.

1926년 6월 10순종의 장례식을 기해 일어난 610 만세운동 때에는 민족해방이 곧 계급해방이고 정치해방이 곧 경제해방이요, “제국주의는 곧 자본주의라며 민족자본가들이 포진하고 있던 민족주의계를 공격했다. 1930년대에도 항일 빨치산 활동을 하던 한인 공산주의자들은 순회 전도하던 목사들을 붙잡아 산채로 박피(剝皮)하거나 얼음물에 동사(凍死)시키고 익사시켰다. 물론 공산주의자들도 신간회 운동에 참여했지만 이는 코민테른이 민족혁명당의 건설을 위해 민족주의 단체와의 통합을 그 과제로 주었기 때문이다곧 코민테른 전략의 일환으로 신간회에 참여했을 뿐이다.

초기에 사회주의에 대해 긍정적 시각을 갖고 있던 YMCA의 지식인들도 사회주의가 극단에 빠졌으며사상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남의 것을 억지로 빼앗아 나누어 가진다며 이를 비판하고 나섰다.곧 사회주의가 반민족적이고 반기독교적이라는 것이었다.

사회복음주의자로 1930년대 장로교 농촌운동을 주도하였던 목사 배민수도 공산주의의 타도를 이 운동의 핵심으로 삼았다또한 1932감리교와 장로교로 구성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도 일체의 유물교육유물사상계급적 투쟁혁명수단에 의한 사회개조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한국의 모든 기독교계가 공산주의에 등을 돌렸던 것이다.

이렇게 역사적 경험과 그 전통으로 인해한국 기독교계나 민족운동에 깊이 관여했던 기독교계 인물들은 공산주의에 대해 냉소적일 수밖에 없었다따라서 기독교 민족운동의 계보아래 있었던 인물들이 공산주의자들이 참여했던 건준이나 박헌영(朴憲永등이 주도한 인민공화국을 거부했던 것은 당연했다또한 공산주의자들과의 합작을 꾀하였던 여운형을 외면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한국 기독교회가 철저한 반공의 입장을 취한 것도 공산치하를 보다 선명히 경험했기 때문이다신의주에서 활동하다 월남한 목사 한경직은 서울에 영락교회를 세웠다. 그렇지만 그는 개교회의 담임자에만 머물렀던 것이 아니었다그는 월남한 기독교회들의 실질적 지도자였고 반공적인 한국 기독교회의 선도자였다.

월남하기 직전인 1948년 9월 28기독교사회민주당의 주도자였던 한경직은 소련과 공산주의자들이 자치위원회와 언론을 장악했다며 공산주의의 행태를 고발하는 편지를 미군정에 보냈다월남한 후에는 설교를 통해공산주의가 무도덕하고공산주의자들이 이중인격을 가지라(거짓말 하라)”, “다른 계급은 모조리 숙청하라(강털 강도를 감행하라)”, “무자비한 투쟁을 하라(테러살인방화무엇이나 좋다)”고 선동한다며 북한지역에서 겪은 일들을 알렸다. 그에게 공산주의에 대한 문제는 반드시 막아야 할 신념이었고뚜렷한 반공 의식은 자신이 생존하며 겪어온 경험이었다.

당시 북한지역에서 소련은 기독교인들의 반탁운동을 기화로 체포와 투옥시베리아로의 유배를 감행하였는데대전 YMCA 총무를 역임했던 김영필(金永弼)의 어린 동생 김영봉(金永鳳)이 그런 이유로 시베리아로 끌려갔다또한 공산정권은 부락마다 농민조합을 만들어 적기가(赤旗歌)를 가르치고 기독교회를 정면에서 공격했다여기에 항의한 기독교 청년들이 조선민주당의 신탁통치 반대장대현교회에서 31절 기념예배 독자강행신의주 학생사건, 기독교청년들의 강양욱 목사 사택 폭탄투척 사건 등으로 저항했다그러나 결국 공산당을 반대하는 적지 않은 수의 기독교인들은 교회를 버리고 월남해야 했다.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이 남한의 단독선거를 위한 여론을 조사할 때한국 기독교를 대표해서 자문에 응했던 한경직은 총선거문제에서 소련이 보이코트 한다고 할지라도 월남동포가 약 350만 명으로 추산되며월남 동포는 비교적 지식층과 정치적 역량이 있는 자들인 만큼 이들을 이북 대표로 하여 총선거를 해도 당연하며이로써 수립되는 정부를 단정이라고 함은 부당하며즉 통일정부 수립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북한 공산정권을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것이다.

한경직은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공산주의를 유물론에 입각하여 종교를 지배자의 권력을 유지하고민중의 혁명의지를 약화시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민중의 아편으로 보았다.또한 공산주의가 종교를 부정하고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종교를 왜곡하고 결국 이 땅의 기독교를 박멸하려고 한다고 보았다. 신앙인이요 목회자였던 그에게 있어서 공산주의는 삼천리강산을 삼키려는 괴물이요영적 적대 세력인 묵시록에 있는 붉은 용이었다. 기독교를 말살시키려는 사탄의 세력이었고 배격하고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다.

목회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공산주의자들을 영적 실체로 인식하고 있었던 인물 중 하나가 조병옥이었다. 미군정 경무국장으로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을 여과 없이 발휘했던 그는 흥사단계의 일원이었다.

조병옥은 1946년의 대구 폭동을 예를 들며공산주의자들을 향해 사탄과 같은 존재라고 맹비난하였다법과 질서를 존중하지 않고사리와 판단력이 박약한 청소년층과 천진무지한 노동자 농민을 선동과 모략을 동원하여 파괴와 살상을 일삼는다는 비판도 하였다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일당독재와 계급독재로 민주주의 말살하고 국민들을 지배하고 있다는 주장도 하였다민주주의 세계의 건설을 위해 공산주의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되고공산주의와 어떠한 타협이나 합작이 있을 수 없다고 피력했다. 건준과 인공을 타도하고 공산주의자와 대결하는 것이 한민당의 목표라는 주장도 서슴지 않았다.1927년의 신간회 운동의 주역 중 한 사람이었던 그의 인식이 바뀐 것이다.

감리교 목사로 감리교 중앙신학교 등에서 교수와 학장을 역임한 바 있던 정일형도 폭력혁명과 계급투쟁을 주장하는 공산주의에 대해 날선 비판을 하였고군정청 문교부장 오천석 또한 공산주의가 파시즘과 같은 전체주의라며 반공을 강조했다. 군정장관 행정고문이었던 김동원은 반공 자유주의의 입장에서 이를 무기와 수단으로 하여 북한을 통일시켜야 하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흥사단 내부에 안창호의 대공주의(大公主義)를 초계급적 민족민주주의로 해석하여 좌우합작을 주장하는 소리도 있었지만이는 소수에 불과했고 흥산단계의 주류는 반공을 최우선의 가치로 내세웠다기독교계 내부의 민족주의계 후예들은 반공을 건국의 근간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4. 경제 정의에 대한 문제

해방 직후신의주 제이교회 목사 한경직은 신의주 제일교회의 윤하영 목사 등과 기독교사회민주당을 만들었다원래는 기독교민주당이라고 불렀는데 "북한 인민의 전적인 포섭을 위해서기독교사회민주당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전략의 차원만은 아니었다실제로 한경직의 경제사상에는 사회민주주의적인 요소가 있다토지를 일본의 대지주에게서 환수해서 소작농에게 맡겨야 하지만 기업은 개인이 하는 것 보다는 국가가 직접 운영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월남한 직후한경직은 강력한 반공이념을 확립하고 구제와 구호활동에만 치중했지만 그의 정치사상이나 경제사상이 변했던 것은 아니었다그것은 그가 주장했던 기독교 건국론에서 알 수 있다한경직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인권 평등사상의 원천이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그것은 바로 성경입니다성경이 가는 곳마다 인간의 죄와 무지와 정치적 사회적 모든 구속에서 해방되었습니다남존여비의 사상이 타파되었으며 만인 평등의 사상이 사회에 오게 되었습니다이렇게 성경은 민주주의의 기본이 되었습니다전에 토마스 헉슬리의 말과 같이 성경은 가난한 자와 피압박자의 대헌장입니다인간은 성경 없이 살 수 없는 것입니다성경은 자유의 대헌장인 것입니다그 뿐이 아닙니다성경은 박애와 자선사업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한경직이 주장하는 성서중심의 기독교 건국이념에는 당시의 민족적 당면과제였던 가난 극복도 들어 있었다그에게 있어 사회의 모든 영역은 하나님의 영역에 속해 있었고 그래서 적극적 참여를 주장하였다.

한경직의 이러한 이상은 그가 1946년 10월에 영락교회의 베다니학생회가 개최한 특별 기독학생 부흥회에서도 드러난다당시 강사는 한경직을 위시하여 김재준배민수고황경 이었다그리고 부흥회의 주제는 사상계도였다그는 여기에서 각 학교 내의 기독학생회 조직을 만들고 우익 학생들과의 유기적 관계를 맺고 합세하여 건설 학생연맹을 결성하는 것을 기대했다.

그런데 한경직이 초대한 강사들은 장로교 내의 보수계열이 아니었다특히 배민수와 베다니 학생회의 고문이었던 박학전은 사회복음주의자들로 1930년대의 장로교 농촌운동의 주역이었다일제하부터 이들은 강력한 반공과 함께 경제적 나눔을 강조했다이들에게 있어 극복해야 할 적대적 사회악은 유물주의 적마(赤魔)”와 함께 황금만능의 이기주의”, 곧 공산주의와 이기적 자본주의였다. 이들은 소련 공산주의의 이념을 거부했지만 자본주의의 모순도 경계하며 경제적 배분정의가 실현되기를 소망했다그것이 이들이 생각했던 예수의 경제관이었다.

1945년 9월 8일에 열린 한민당 발기인 대회에서는 여운형과 박헌영의 인공(人共)타도와 중경의 임정(臨政)지지를 선언하였다그리고 여기에서 대중 본위의 민주주의 제도에 기초한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가 수립과 전 국민의 자유로운 안전 보장’ 등을 선언하였다자유민주주의적 노선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런데 이 날 채택된 한민당의 5대 강령 중 세 번째 강령은 미국 자본주의 것이 아니었다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셋째 강령은근로계급의 복리를 증진할 사회정책의 실시다민주주의는 경제에도 적용되지 않으면 안 된다. 부자익부(富者益富)하여 빈자익빈(貧者益貧)하며 부자는 정권을 농락하여 자기 계급의 이익만을 추구하기에 여념이 없는 자본주의 경제제도는 시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그러므로 토지는 농민에게 균분해 주어야 하며 대기업은 국유 혹은 국영으로 하며 근로계급에는 생활의 안정과 경제적 균점의 기회를 부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교육보건의 기회균등은 이것을 실행치 않으면 안 된다.

한민당의 정치와 경제 이념곧 자유민주주의 관()과 경제정의 이념을 정립한 인물은 장덕수였다.그는 1920년 8월에 미국의 의원들이 방한(訪韓)했을 때미국이 민주주의의 모범이며 한국을 도와 독립과 민주주의 체제를 실현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더욱이 13년간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했고대학원 기간 동안 영국에서 체류하며 영국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연구했다미국과 영국사회영미의 민주주의와 그 정치 구조에 대해 장덕수만큼 파악하고 있던 인물도 드물었다.

에머슨(R. W. Emerson)의 기독교 사상에 심취했던 장덕수는 인간의 덕성과 완전성인간 의지의 자유이에 수반한 인간의 도덕적 책임을 역설하며 기독교의 본질은 내세를 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현세에서의 선()을 실현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 바 있었다.

민주주의가 기독교로부터 비롯된다고 믿었던 장덕수는 민주주의가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며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보았다그리고 사람들의 요구 사항이 서로 조화를 이루면 충분히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곧 모든 국민을 위해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보장할 확실한 권리 체계라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아래 장덕수는 매우 이례적으로 사회주의적 경제정책을 한민당의 목적으로 삼게 하였다따라서 근로 대중의 복리 증진을 기함과 토지를 농민에게 균분해야 하는 문제는 보수정치의 근본이념이요 가치가 되었다.

한민당은 독점자본을 제압하여 근로 대중의 생활 안정을 도모해야 민주주의를 이룩할 수 있다고 보았다그리고 진정한 의미에 경제적 민주주의는 그 정책에 있어서 사회주의의 계획경제와 일치된 점 없지 않다고 설명하였다. 자본주의제도의 허점곧 빈익빈부익부의 현상을 초래하는 폐단을 인정한 것이다.

한민당은 원칙상 사유재산제도를 인정하나 대기업은 국가경영으로 하여 대자본의 절제를 기하고 토지는 대토지 소유를 금지하여 자작농 정도로 할 것을 주장했다. 이를 구체화한 정책으로 중공주의’(重工主義), ‘중요 산업의 국영 또는 통제관리’, ‘토지제도의 합리적 재편성을 내걸었다.

그때 한민당에서는 소작권 설정에 의한 국유제를 주장했다소작료를 1/3로 제한하면 이익이 발생하지 않아 지주들이 농지를 시장에 내놓게 되고 자연스럽게 땅값이 내려가게 된다는 시장경제원리를 생각했다그 내려간 땅값을 국가에서 유상으로 매입한 후농민에게 유상으로 분배하겠다는 발상이었다. “농민은 대금으로 하여서 일정한 기간에 일정한 수량을 납입하여 소득권을 취득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 토지의 사유제를 표명했다이에 그치지 않고 지주에게서도 산업 자본가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어 그들이 자연스럽게 상공업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주장을 폈다토지 매수 대금을 현금으로 지급하지 않고 공장 또는 공업 자재 등으로 환산해 주어 자연스럽게 산업화를 유도하겠다는 방안이었다. 지주계층이 민족자본을 이루었고 한국에서는 유일하게 방직공업 등근대식 경영을 해 본 경험자들이 많이 포진해 있었기 때문이다.

한민당의 토지개혁 방안은 지주제 몰락이나 전체주의적 평등주의 실현이 목적이 아니었다농지개혁을 통해 사회경제적 공정(公正)을 이루고토지자본에 편중된 당시의 경제를 산업자본화 하려 한 것이다시장경제와 자본주의 산업화를 이루고 이것을 근거로 하여모든 국민들이 공평하게 경제적 자유를 누리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그런 이유에서 대자본대지주에 통제정책을 써서 근로계급의 생활을 보장한 것이다.

흥사단계의 경제정책도 한민당의 것과 기본적 인식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자유주의 원리에 입각해 전문경영인의 자율성을 존중하였다그 대신 노동조합을 근간으로 하는 민주적 노동정책을 주장했다미군정청 노동부장 이대위는 민주주의국가의 기간이 되는 노동자들이 인격적경제적으로 압박을 받는다면 그것은 극소수 브르주아의 독재정치를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그리고 노동자의 경제적 자주성사회적 복리정치적 훈련을 도모하려는 것이 노동정책의 목표라고 피력하였다. 노동자 보호입법을 통해 사용자의 자유에 일정하게 제한을 두어야 함도 주장했다그리고 경제 독점으로 힘없는 대중들의 도덕적 자유가 침해를 받으면 국가가 나서서 그 폐해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토지개혁 문제에 있어서도 한민당의 제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이들은 토지개혁 과정에서 농지를 매각한 지주계급의 상공업 전환에 대한 지도방책을 세워 중산계급의 안정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국 보수정치의 원류였던 한민당과 흥사단계는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며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는 자유,” “모든 국민을 위해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보장할 확실한 권리 체계를 지향했다이들의 의식에 한 사람의 전횡이나 한 계급의 독재가 허용될 수 없었고 모든 국민각 개인의 생명과 재산자유가 보장되어야 했다. 모두 기독교적 의식이요 성서적 지식의 바탕에서 비롯되었다이들의 이런 인식이 건국이념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5. 여언(餘言)

1919년 4월 11일에 가결된 임시정부의 임시헌장은 기독교가 한국의 정체곧 민주공화제를 설정하는데 결정적 공헌을 했음을 알려주고 있다임시헌장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은 중경정부에 이르기까지 5번이나 헌정을 개정했지만 계속 유지가 되었다해방 후에도 대한민국 헌법 제1조로 계속되고 있다민주공화제라는 표현은 동북아의 어느 국가의 헌법에도 나오지 않는 표현이다.이 임시헌장 제정을 주도하고 있던 조소앙의 무오독립선언서에서도 나오지 않는 표현이다그런데 이 표현이나 사상이 기독교로부터 나온 것임을 이광수는 1917년 7잡지 靑春』 9월호에자신이발표했던 야소교(耶蘇敎)의 조선(朝鮮)에 준 은혜(恩惠)”를 통해 진술한 바 있었다.

더욱이 이규갑 감리교 목사가 이끌고 있던 한성정부의 약법 1조가 국체는 민주제를 체용함인 것을 보면 분명히 민주공화제의 표현과 민주주의 사상은한국 역사에 있어서기독교적 언휘와 사상이었던 것이다.

해방 후한민당과 흥사단의 인물들은 대부분 기독교인들로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이 뚜렷했고특히 공산주의가 민주주의를 훼손시키는 이데올로기라는 데에 이의가 없었다서구를 바라보는 관점이나 근대적 인권관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국제 감각과 세계성의 인식이 확고했다이들의 이러한 의식은 기독교로부터 각인되었고 이들은 자신들의 이상과 일치한다고 보아 미군정에 적극 협조한 것이다이들의 자유민주주의관은 건국이념이 되었다.

기독교 내부에서는 공통적으로 공산주의가 교회와 교회가 내세우고 있는 민주주의 의식을 해친다고 믿었고그러한 인식하래 철저한 반공을 내세웠다그런데 그것은 유물주의 자체가 기독교에 대한 도전이었고 공산주의자들로 교회가 배격당하고 공격당했던 역사적 경험으로 인한 것이었다.

연정회나 신간회 등 일제하의 민족운동을 통해서 공산주의의 실체를 경험했던 기독교 민족주의계는특별히 해방 정국에서, ‘반공을 최우선의 가치로 내걸었다한국교회는 광복 후 북한에서의 공산정권의 만행을 목도하면서 그 반공의식을 더해갔다한경직을 비롯한 교회의 인물들은 민주주의 세계의 건설을 위해 공산주의를 타파해야 함은 물론 공산주의자들과는 어떠한 타협이나 합작이 있을 수 없다고 인식했다남다른 역사적 경험으로 인해 한국 기독교계는 반공을 건국이념으로 삼은 것이다.

한편한국 보수정치 원류의 중심에 있었던 기독교 민족주의계는 사회주의적 요소의 경제정의를 주장했다송진우가 처음 사용한 경제민주주의라는 명칭은 이들의 민주주의관의 정체를 알려준다.이들은자유주의 원리를 근간으로 했지만노동자의 경제적 자주성과 사회적 복리도 주장하였다원칙상 사유재산제도를 인정하나 대기업은 국가가 경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대자본의 전횡도 막으려 하였다그리고 대토지 소유를 금지하여 자작농 정도로 할 것을 주장했다독점적 자본을 제압하여 근로 대중의 생활 안정을 도모하려고 했던 것이다이들의 의식 속에 있는 성서적 인간관곧 신부적(神賦的인간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각주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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