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음'을 추구하는 허황된 교회의 모습들

아들을 잃어버리고 아파하는 한 아버지의 안타까운 절규를 들었다. 그에게는 하나님도 그리고 아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기념관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아들을 잃어버린 고통에 교회는 무엇으로 위로를 줄 수 있을까? 나아가 교회는 세상의 고통에 대해서 어떤 위로와 소망을 공급할 수 있을까?

1. 아직은 더 맞아야 할 때...
납치당한 형제 자매들이 돌아오면서 고 심성민 형제의 부친의 탄식으로부터 시작된 이 사태의 후폭풍이 심상치 않다. 본격적인 평가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단기 선교의 정체가 무엇인가? 그리고 파송 교회인 샘물교회에 대한 온갖 정보들이 검증되고 있다.

담임목사의 말 한마디 설교가 분석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리고 나아가 한국교회가 존재해온 방식과 사역을 해온 방식 전반에 대한 평가 작업이 진행된다. 짧은 댓글의 촌철살인의 한마디로부터 긴 분석의 글까지.

교회는 무엇인가 당당하지 못한 모습으로 맞고 있다. 아들의 죽음 앞에 슬퍼하는 부친에 대한 예의와 더불어 함께 분노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존중이 있지만 이를 넘어서서 교회는 뭔가 스스로를 설명하지 못하고 변호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분노하고 평가하는 세상에 대해서 교회가 하나님과 부활과 그리고 기념관을 제시하지만 그들이 위로되지 않는다. 아직은 우리가 더 맞아야 할 때인가보다.

2. 한국교회와 샘물교회는 분리되지 않는다.
샘물교회 단기 선교팀은 원하지 않아도 한국교회 전체가 되어 버렸다. 그것은 교회의 본질이기도 하다. 모든 교회는 한 교회이기 때문이다. 비록 교파가 다르고 신앙전통이 달라도 말이다. 주님의 교회로서 샘물교회는 한국교회이다. 따라서 샘물교회의 단기 선교팀을 통해 세상이 한국교회에게 돌을 던지고 싶어한다.

한국교회를 향해서 던지는 돌이지 샘물교회는 아니다라는 말은 의미가 없다. 우리는 모두 한 배를 탔기에 그런 이해가 샘물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위로가 되지 않아야 한다. 샘물교회가 건강한 교회로서 서려는 노력을 알고 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해서 설 때 우리는 모두 한 교회일 뿐이다. 이 과정을 수용해 내고 함께 맞고 아파할 때만이 한국교회 전체의 구체적 소망들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한 교회의 건강함이 전체 교회의 건강함을 담보하지 않는다. 결국은 우리의 연약이고 나의 아픔이다. 너희 행실이 세상에 소금과 빛으로 세상에 위로가 되지 못하는 현실에서도 우리는 한 배를 딴 것이다.

3. 부흥 100주년을 위한 집회와 기도들
한국교회는 이 납치 사건이 있기 직전까지 1907년의 부흥이 다시 일어나기를 소망하고 기도하고 회집해왔다. 수많은 기도와 설교 그리고 집회들과 찬송과 학문적 논의들의 핵심은 언제나 회개였다. 부흥은 회개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무엇을 회개할 것인가에 대한 내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집회 때마다 기도회 때마다 회개가 되었고 진심으로 진행이 되었다. 기도는 약속을 소망하는 믿음의 행위이기 때문에 반드시 응답이 존재한다.

한국교회는 진심으로 부흥을 갈망하고 노래했고 소망했다. 이제 그 응답이 두 명의 순교자를 낳은 납치 사건이라고 받으면 어떤 결과가 될까? 왜 이렇게 해석이 되는가?

부흥을 위한 기도는 우리의 회개를 빼놓을 수 없음은 자명하다. 그런데 이 납치 사건을 통해서 한국교회는 철저하게 한국 사회 속에서 무엇을 회개할 지를 극명하게 도전 받고 있다. 즉 한국 사회를 위로하지 못하는 역사적 기독교가 되고 있다는 현실이다.

가난한 서민들에게 살아 볼 용기와 희망을 준 조용기 목사와 같은 분의 메시지와 한국 전제 정치 현실에서 억압당하는 자들에게 위로를 제시한 하나님의 공의 지향적 교회의 메시지들이 그 역할을 한 장을 넘긴 현실 속에서 한국 교회는 이제 세상을 위로해 내지 못하고 있다. 너무 자신의 울타리 속에서 자신의 관심만을 몰두한 결과이다. 성장만이 모든 것을 말하는 현실이 준 결과들이다.

아들을 잃어버리고 슬픔을 당한 자가 교회를 보면서 위로가 되지 않고 분노를 더욱 느끼는 현실을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 이러한 분노를 공감되게 만든 한국교회의 현실을 회개해야 할 것이다. 복음을 알지 못하는 이들, 부활을 믿지 않는 이들,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이란 말은 의미가 없다. 교회의 존재와 섬김의 모습이 그렇지 못한 현실을 아파하고 돌이켜야 한다.

4. 우리는 세상을 위로하는 존재와 섬김을 하고 있는가?
많음을 지향하는 현실의 교회적 가치는 복음적 가치로서 합당한 것인가? 복음은 잃어버림이고 낮아짐이고 손해 보는 것이고 섬기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예배당 건축과 관련해서 불법을 저지르지 않는 경우가 드물 정도다. 조금 더 넓은 장소를 확보하기 위해서 불편을 감수하기 보다는 불법을 감수해왔다.

나의 편리함을 위해서 세상을 무시하면서 산다는 말이다. 이런 존재 방식이 세상을 위로해 내지 못하는 것이다. 더 넓은 장소, 더 많은 성도 지향적인 교회가 만들어내는 결과들을 직시하지 못하는가?

많다는 것은 힘을 만들어낸다. 이것을 잘 말해주는 말씀이 바로 신17장에 소개되는 왕에 대한 본문이다. 신 17:14-20절은 이스라엘에 들어설 이상적 왕에 대해서 소개한다. 먼저 이스라엘에서 왕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임과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이어야 한다. 언약 백성이어야 한다.

그리고 소개하는 것이 16-17절에서 왕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일 세가지를 제시한다.
첫째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고 말을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 것이니. 둘째는 아내를 많이 두어서 그 마음이 미혹되게 말 것이, 셋째는 은금을 자기를 위하여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이상의 세 가지의 금기 사항에 공통된 단어는 '많이'라는 단어이다. 세상과 세상의 군왕은 세가지를 많이 확보할 수록 좋은 통치자가 된다. 말은 국방력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내는 왕정시대에 외교력을 의미한다. 은금은 경제력을 의미한다. 국방, 외교, 그리고 경제는 가장 중요한 국가 존재의 축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가장 중요해 보이는 세상적 가치를 추구하지 않아야 할 부정적 대상으로 간주한다. 전혀 없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고 '많이' 두지 말아야 한다.

많다는 것은 힘을 생산해 낸다. 이 힘은 세상적 힘이다. 이것을 본문 자체가 증명한다. 말을 많이 두는 것은 애굽으로 가게 만든다. 애굽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자리로서 떠나온 삶의 자리이다. 애굽은 당시 세계의 패자이다. 세상에서의 강함을 떠나서 나왔는데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가도록 만든다.

아내를 많이 두는 것은 마음을 미혹하게 한다. 이것은 북왕국 이스라엘 역사에서 아합 왕의 정략적 결혼이 만들어낸 파국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아합이 시돈 여인 이세벨은 아내로 맞음으로 바알이 여호와 종교를 대신하는 자리에 있게 된다. 세상 나라의 번성함에 대한 동경으로의 유혹이 보이는 신 바알의 물신에게로 이끌었다.

은금을 자기를 위하여 많이 쌓지 말라고 한다. '자기를 위하여'라는 표현은 제2계명과 깊이 관련된다.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고. 은금이 자기 지향적 가치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은금을 가진 사람의 특별함으로 이끈다. 돈이 만들어내는 사회가 어떤 것인지를 보면 안다.

이상에서 보듯이 '많은' 것은 세상적 나라와 그 권세와 힘을 생산하고 의지하게 한다. 이것이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모습에서 지양해야 할 요소이다.

'많음'을 동경하는 교회로 돌려보자. 숫자의 많음으로부터 시작해서 돈의 많음과 드러나는 화려함과 모이는 구성원의 높음을 지향하는 오늘의 교회적 가치는 세상을 위로할 구조를 지니고 있지 못하다.

오늘 교회적 가치는 세상적 가치와 다르지 않기에 경멸의 대상이 될 뿐이다.  모든 성도들이 듣기를 원하는 좋은 설교자들이 왜 많음을 지향하는 교회를 만들어 내는가? 여기에 무엇을 반성하고 회개해야 하는가? 누구를 위해서 목회를 하는가?

이스라엘의 왕이 지향해야 할 길을 바르게 걸어간 분이 있는데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왕이셨다. 그는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기 위해서 들레지 않고 떠들지 않고 목소리가 길거리에 들리지 않도록 조용히 오셔서 쇠하지 않고 낙담하지 않고 끝까지 섬김의 길을 가셨다.

그가 이 땅에 삼 년의 시간을 머무시기 위해서 하늘에서 오셨을때 처음 만나신 사람들은 법정에서 인정되지 않는 목자들이었고, 공생애 시간 동안 그가 보내신 세월은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과 창기와 세리들이었다. 인생에 보탬이 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허비의 시간 같아 보인다.

많음이나 높음이나 화려함이 아니라 작음이고 낮음이고 머리 둘 곳이 없는 자리였다. 여기서 예루살렘을 넘어서 유다와 사마리아의 해묵은 남북의 갈등을 치료해내고 온 세상을 위로하는 복음의 능력이 시작되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존재하는 모습과 섬기는 모습이 무엇인가? 부흥을 원하는 교회가 어떤 것을 회개하여야 하는가? 세상을 위로해 내지 못한 우리의 존재하는 형태들을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요란한 섬김과 사려 깊지 못한 삶의 방식들을 반성해야 한다.

시청에서 허구한 날 모여서 떠들어내는 요란한 교회적 형태들을 회개해야 한다. 세상이 감동받고 위로 받고 소망을 발견할 수 있는 복음을 복음답게 드러내지 못한 교회로 이끌어가는 목사들과 직분자들이 회개해야 한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다.

세상을 끌어 않고 위로하기 위해서 죽음의 길을 가신 우리 주님의 길을 교회가 존재하는 방식에서 그리고 섬김의 방식에서 드러내는 기회가 되길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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