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아래서 부활을 살아가는 교회”

이 논문은 4월 30일 기독교회관에 열린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제29차 열린대회마당에서 발표된 이홍정 목사(예장통합총회 사무총장)의 논문이다. -편집자 주-

선교적 교회(missional congregation)의 정체성

▲ 이홍정 목사 예장통합총회 사무총장

21세기, 생명의 세기에 생명의 구원과 해방을 위해 복무하도록 부름 받은 교회는, 십자가 아래에서 수난 당하는 모성성과 부활의 생명력으로 충만한 선교적 교회로 거듭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사는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 있는 자신을 새롭게 자각하고, 하나님께 귀의하도록 초대하는 고향과 같은 교회로, ‘하늘이 만나는 경계선에 서서, "이미""아직" 사이의 창조적 긴장을 유지하며, "지금 여기," 길 위의 순례자로, 역사내재적 종말론적 정체성을 강화해야 합니다.

선교적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온전한 일치를 이루기 위해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통전하는 성례전적 친교를 심화하며, 자신의 울타리를 넘어서 하나님의 선물인 일치의 충만함으로 나아가는 교회입니다. 서로 다른 역사적 문화적 상황 속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지역교회들은, 십자가와 부활의 은총의 사건이 가져온 값비싼 친교에 참여하는 에큐메니칼 헌신을 위해, 창조적이고 책임적이며 상호비판적인 상관성 앞에 자신들을 개방해야 합니다. 지역적 상황을 지구적 현실에 연결시키려는 노력과 함께 지구적 현실이 지역적 상황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비판적으로 수용하려는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모든 지역의 현실 속에서 공동의 증언을 위한 선교와 복음전도의 사명을 상호지원하고, 인간과 자연의 고난에 봉사하기 위한 생명디아코니아 사역에 참여해야 합니다.

선교적 교회는 생명과 소망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증언하는 구도적 공동체로서, 십자가 아래서 부활의 능력으로 순례적이며 동시에 순교적인 케노시스(자기 비움)의 선교를 지향합니다. 선교는 구도적 순례의 여정 속에 구현되는 교회공동체의 전인적인 자기정체성의 표현입니다. 선교는 구도의 길 위에 선 순례자의 삶처럼, 십자가 아래 절망과 죽임의 자리에서, 소금처럼 빛처럼 향기처럼 바람처럼, 부활의 생명력으로 생명과 소망의 하나님을 증언하는 사랑과 진리의 실천이요, 의와 화평의 입맞춤이며, 치유와 화해의 과정입니다. 이것은 자기 비움에 근거한 상호의존성을 토대로 자발적 가난과 단순한 삶과 수난 당하는 사랑을 실천하는 순교적 증언을 포함합니다.

오늘 이 같은 선교적 교회의 정체성이 2015년이 지닌 다차원적인 역사적 의미의 망 속에 어떤 내용을 가지고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가를 궁구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과제입니다.

 

2015 역사적 좌표에 대한 선교상황적 인식

II-(1) “분단 70

2015년은 세계사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우리 민족은 종전의 결과로 일제식민주의체제로부터는 해방되었으나, 당시 미국과 소련 양국의 냉전적 헤게모니 갈등 가운데 위도 38도선에서 기하학적으로 국토가 분단되고, 남과 북이 각각 미국과 구 소련의 군정체제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해방 3년기라는 격동의 역사 속에서 통일국가를 이루기 위한 몸부림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좌절되었고, 남과 북에 서로 다른 냉전이데올로기를 국시로 하는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한국전쟁 3년은 분단구조를 고착화하였고, 우리 민족은 분단체제의 사슬에 묶인 채 냉전의 사회학을 형성하며, 분단이 가져온 총체적 소외현상을 내재화해 왔습니다. 비록 좌절된 해방 3년기이였지만 그 시기를 분단 70안에 분류하는 것은 하나된 민족공동체 건설을 위한 민족의 자주적 노력에 대한 의미 있는 평가는 아닙니다. 따라서 지난 70년은 미완의 해방 70이요, 분단의 극복 없이 온전한 해방은 없다는 민족사적 교훈을 체득한 70년입니다.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분단은 사회학적 원죄로 민족공동체의 생명을 절망의 한계상황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기독교선교의 관점에서 볼 때, 분단 극복은 민족공동체의 온전하고 총체적인 생명성의 회복, 즉 샬롬을 성취하기 위한 필수적 과제입니다. 이 과정은 분단의 상처를 간직한 채 상호적대적 관계를 심화시켜 가고 있는 민족공동체를, 그리스도 안에서 치유되고 화해된 생명공동체로 변화시키기 위한 정의와 평화의 순례의 과정을 요청합니다. 따라서 민족복음화의 과제와 민족의 평화통일의 과제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상호 불가분리의 관계 속에서 서로를 완성해 나갑니다.

한반도에 분단체제가 고착화 되어가는 과정을 따라, 한국교회의 지형도는 극적으로 그 모양을 새롭게 변모시켜왔습니다. 북한의 교회들이 기독교의 반공주의와 북한사회주의체제의 반기독교정책에 의해 대거 월남하면서, 북한에 교회공백상태가 생겨났고, 지금은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이 다른 차원에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에 반해 월남한 기독교인들은 생존을 위한 투쟁과 신앙적 열심을 결합하면서 생래적 반공주의에 기초한 교회공동체를 형성하였고, 이는 남한 교회의 성장과정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남한의 교회는 대부분 자본주의 성장과 그 궤를 같이하며, 반공을 국시로 하는 국가체제안보와 친미동맹을 기조로 하는 대외정책을 지지하는, 사회정치적 영향력을 지닌 종교사회결사체로 발전되었습니다. 민족공동체의 치유와 화해, 평화통일이라는 선교실천적 관점에서 볼 때, 남한의 교회는 그 자체 안에 냉전의식에 기초한 분단구조를 첨예하게 내재화하고 있는 제약을 가지고 있습니다.

70 여 년에 걸친 분단의 세월 동안 민족공동체의 치유와 화해, 평화통일은 남북한교회 모두의 일관된 핵심선교과제였고 기도제목이었습니다. 남한의 교회들의 강단에서 매주 전해지는 설교와 기도 속에는, 북한교회재건과 복음화에 대한 기도와 통일에 대한 염원이 담겨있습니다. 남한교회의 북한선교에 대한 논의는 국가이데올로기와 체제수호라는 권력의 장벽을 넘어서지 못한 채, 소위 멸공북진통일이나 자본주의체제로의 흡수통일의 범주에 속하는 묵시론적역사 전개의 담론을 내포한 것으로, 그 담론자체가 화해의 복음정신과 평화신학에 반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북한교회의 상황 역시 급속도로 열악해지면서, 북한정부가 공식적으로 허락한 조선그리스도교연맹과 소수의 가정교회 외에는 여전히 지하교회에 대한 미확인 정보들이 비극적인 소식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북한 기독교의 이 같은 실상은 중국교회나 동독교회의 역사적 경험과 완연히 다른 것으로, 민족공동체의 치유와 화해, 평화통일의 길을 열어가는 과정에 있어야 할 교회의 순기능적 역할을 구조적으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묵시론적상황 전개에도 불구하고, 분단이라는 악의 구조의 한복판에서 솟아나고 있는 민족공동체의 치유와 화해, 평화통일에 관한 희망은, 오늘 남북한의 교회들을 향해 민족공동체의 치유와 화해, 평화통일이 하나님의 선교사건이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하나님의 구원행동임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남북한의 교회가 민족생명공동체를 정의와 평화의 길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기 위해, 어떻게 자기 자신들을 치유와 화해의 복음의 빛에서 성찰하며, 평화를 만드는 교회로 갱신시켜 나가야 하는 지를 교회의 선교과제로 부여하고 있습니다.

II-(2) “선교 130

2015년이 지니는 또 다른 역사적 의미는 초기 미국 선교사, 장로교의 언더우드와 감리교의 아펜셀러의 내한 130주년을 맞는 해라는 사실입니다. 개항기라는 역사의 진화과정 속에서 형성된 지정학적 역학관계들이 민족사의 전개과정과 첨예하게 얽혀가는 시점에 조선 땅에 발을 내디딘 선교사들은, 전환기의 동북아시아의 상황에 깊은 연관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시대적 제약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1885년을 기점으로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민족사의 전개과정에 영향력을 미치는 한 축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은, 선교사들을 파송한 본국의 외교정책과 지정학적 자리와 당대의 신학사상조류와 깊은 상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교사들 안에 형성된 영향사”(effective-history)는 당시 한반도를 관통하는 여타의 영향사들과 지평융합”(fusion of horizons)을 이루며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서구 열강의 팽창주의가 국기를 앞세우고 선교사들이 그 뒤를 따르는 서구선교의 위대한 세기”(1815-1914)의 선교상황은, 오늘 우리에게 ()식민주의적”(post-colonial) 관점에서 초기선교사들의 사역을 재해석할 필요가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1885년을 한국선교의 기원으로 이해하고 이를 선교 130으로 인식하는 선교사중심사관은, 우리 민족 역사 속에 전개되어온 하나님의 선교의 역사를 당대의 서구기독교선교운동의 틀 안에 가두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다중적인 하나님의 선교의 보편적 지평은 차치하더라도, 아펜젤러와 함께 공식선교사로 최초 입국한 선교사 언더우드가 평양을 거쳐 황해도 소래교회를 방문하였을 때, 그는 우리는 이 땅에 씨를 뿌리러 온 것이 아니라, 이미 뿌려진 씨의 열매를 추수하러 왔다고 자신의 소감을 밝혔습니다. 그는 선교사로 미지의 땅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이 아닙니다.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의 영향 아래 만주에서 세례를 받은 의주청년들, 이응찬, 이성하, 백홍준, 김진기, 특별히 존 로스와 함께 성경번역에 참여하고, 1883516, 한국 최초로 자생적으로 세워진 소래교회를 설립한 서상륜 등이 전한 복음의 열매가 이미 존재하는 땅에 발을 내디딘 것입니다.

그 후 언더우드 선교사가 소래교회 예배당 건축을 위한 건축자금을 미국에 가서 모금하여 지원하겠다고 나섰을 때, 서상륜과 소래교회 교인들은 우리가 우리 예배당을 세우는데 외국인의 원조를 받는 것은 본의에도 어긋나며, 후세에 전하는 데도 떳떳하지 못합니다라고 정중히 거절하였고, 언더우드는 그 뜻을 존중하여 미국에서 가져온 석유램프 5개만을 소래교회에 기증하였습니다. 1887927일 언더우드에 의하여 서울에 설립된 최초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 창립에 참여한 14명의 최초 교인들도 서상륜과 백홍준이 전도한 교인들입니다. 이후 서상륜은 새문안교회 조사로 언더우드 선교사의 동역자가 되었고, 선교 초기에 권서인으로 전국을 다니며 복음사역에 헌신하였습니다. 한국교회 선교역사에 초석을 놓은 선구자 서상륜이 192576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한국교회는 그가 비록 평신도였지만 그의 장례를 장로교 총회장으로 거행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한국교회의 선교역사를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 하는 것은, 단순히 연대기적 역사이해의 수준이 아니라, 우리의 세계관과 신학이 반영된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선교의 관점에서, 이 땅의 하나님의 백성들과 개척선교사들의 선교적 지평융합을 당대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통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오늘 세계를 향해 선교사를 파송하는 한국교회를 바르게 인도하는 방편이 될 것입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셀러 내한 130주년을 탈()식민주의적으로 성찰하고, 여전히 계몽주의시대의 선교 패러다임에 몰입되어 있는 한국교회의 국내외 선교를 상호비판적으로 분석하면서, 한국교회의 선교양태를 근본적으로 재고하는(“Rethinking Mission”)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2015 한국교회의 선교과제 (1) Post-2015 과정 - 민족공동체의 치유와 화해, 평화통일운동 10(2016-2025)

분단체제의 구조적 모순과 깊은 연관성 속에서 성장해온 남한의 교회가 민족공동체의 치유와 화해, 평화통일을 자신들의 선교의 과제로 수행하려고 할 때 직면하는 가장 큰 어려움은, 교회 안에 깊이 내재된 냉전의식입니다. 반공신학의 기조 위에서 북한선교를 이해하는 교회들은 암묵적으로 북한체제의 전복을 전제로 한 북한교회의 회복과 재건을 선교의 목표로 세우고 있고, 평화신학에 기초하여 북한선교를 이해하는 교회들은 남북 간에 형성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남북교류의 활성화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므로 평화체제를 정착시키는 것을 선교의 우선 목표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는 조선그리스도연맹을 북한정부의 어용종교단체로 규정하고, 지하교회의 실체를 인정하고 이들과 접촉하면서, 북한의 인권실태를 고발하고 개선을 촉구하며 탈북자를 돕는 난민선교에 적극 참여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후자의 경우는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을 상대로 남북교회의 교류와 사회봉사선교의 실천을 구상하는 동시에, 평화통일을 위한 지정학적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국제적 연대를 강화하는 선교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전자는 후자를 종북세력으로 규정하고, 후자는 전자를 한반도에 전쟁을 야기 시키는 극우반공세력으로 폄훼합니다. 면책 특권이 보장되는 국회의원이 국회에서 행한 대한민국의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어야 합니다.”는 발언이 문제가 되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는 사태가 생길 정도로 냉전의 한 축이 강화되어 있는 남한의 정치 상황에서, 후자의 길을 따르는 것은 모든 면에서 위험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냉전적 정치상황에서 1988229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발표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선언”(88선언문), 정권의 독자적 판단 영역에 묶여있던 통일관련 제반 논의들을 민간차원으로 확대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소위 민()이 참여하는 통일운동의 물꼬를 트며, 한국교회가 지닌 북한선교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므로, 평화와 통일을 교회의 선교의 과제로 수용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은 평화의 복음이요, 예수그리스도께서 평화의 왕으로 오셔서 분단과 갈등, 대립과 분열을 사랑과 용서로 하나 되게 하신 것은, 분단구조를 해소하고 평화와 화해로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도록 선포하신 것입니다. 평화통일과 북한선교는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선교요, 남북한 교회가 평화의 사도로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은 시대적 사명입니다.

민족공동체를 치유와 화해, 평화통일의 길로 이끌기 위해 한국교회의 내부개혁은 필수적 선교과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념과 정치를 앞세워 냉전논리에 편승하였고, 민족분단과 고통을 외면하고 용서와 화해의 정신으로 살아오지 못했습니다. 평화의 사도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채, 지역 간, 계층 간 갈등 속에 화해와 협력을 실천하지 못했고, 특정 이데올로기에 의한 통일을 외치고, 경쟁적 대결논리로써 대립하고, 때로는 침묵하며 분단을 고착시킨 죄를 범하였습니다. 민족공동체의 평화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분단체제 속에서 상존하는 전쟁의 위협을 받으며 살아가게 된 것은 평화통일을 위한 한국교회의 헌신의 부족과 동포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와 이기심 때문이었습니다. 경제난으로 고통 받는 북한동포를 돕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의무요, 책임이며, 당위임에도 불구하고, 시혜적인 태도로 임할 때가 많았습니다. 한반도 분단을 주도했던 강대국들의 그리스도인들도 비록 그들의 죄책은 고백하였으나, 그들의 죄책고백이 믿음의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하여 아직도 분단의 비극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우리의 죄책고백이 과거에 대한 후회에 그치지 않고 통일의 미래를 향한 구체적인 헌신의 결단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평화가 이 땅에 임하도록 용서와 화해의 복음을 실천하므로 평화통일을 이루고 민족복음화와 함께 민족공동체를 온전히 회복하는 일은 신앙의 문제입니다. 최근 신 냉전구도로 치닫는 한반도 주변의 지정학적 정세 변화는 남한의 정권교체, 북한 김정은 세습체제 등장 및 핵무기의 지정학적 전략화, 동북아 주요 국가들의 지도자 교체, 일본의 우경화 및 군사화, 중국의 북한에 대한 경제적 군사적 팽창주의와 미국과의 대결구도, 한반도에서의 미국의 정치적 영향력 및 군사력 강화 등을 포함한 매우 복잡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남한사회 내부의 갈등 정황은 보수와 진보 이데올로기 대결구도의 심화, 지역간 계층간 세대간 이해관계 충돌과 갈등의 구조화, 경제적 양극화의 구조화, 청년세대의 절망, 고령화와 출산율 저하로 인한 한국사회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우려의 급증, 국가체제에 대한 불안 등을 포함하여, 부정적 역학관계의 확대 심화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이런 국내외 상황 속에서 한국사회의 제반 갈등과 분열의 요소들이 교회 내에 집약적으로 표출되면서, 한국교회의 분열 상황이 구조화되고 지역교회들의 내부 갈등이 급증하며, 한국교회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는 급감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교회의 성장 저하와 지속가능성의 약화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더욱이 한국교회 내에 북한에 대한 보편적 사랑과 적대 이데올로기가 공존하는 냉전적 상황에서, 치유와 화해의 생명공동체로서의 신학적 실천적 잠재력이 약화되는 등 한국교회는 교회 내적으로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맞이한 2015년의 역사적 의미를 생각하며, 한국교회가 민족공동체를 치유와 화해, 평화통일의 길로 인도하는 교회가 되기 위한 내적 갱신과 선교적 실천을 위해, <Post-2015, 민족공동체의 치유와 화해, 평화통일을 위한 10(2016-2025) 과정>을 수립할 것을 제안합니다. 분단은 치유와 화해를 통해 정의와 평화를 만드시는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사람들의 현존이 함께 하는 상황입니다. 이 같은 신학적 인식은 한반도가 평화의 진원지요, 한반도의 각성된 교회와 민중들이, 동북아와 세계평화를 위한 인식론적 특권을 지닌, 하나님의 치유와 화해 사역의 도구라는 선교적 인식을 가능하게 합니다. 북한선교는 민족복음화와 더불어 그 과정 속에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의 과제를 내포하는 본질적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반도 평화통일의 과정 속에 복음화의 노력이 내포되고, 복음화의 과정 속에 평화통일을 위한 발걸음이 진행됩니다. <민족공동체의 치유와 화해, 평화통일을 위한 10년 과정>은 민족공동체의 치유와 화해, 평화통일을 위한 동북아시아와 전 지구적 차원의 생명망짜기를 통해 전개되어야 합니다. 한반도의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고 화해하는 과정에서 정의와 평화를 세우므로 민족생명공동체를 새롭게 하는 과제는, 2015년 이후의 지정학적 선교상황에서 민족공동체의 생존을 위해 결정적으로 중요한 선교입니다.

세계교회협의회 제 10차 부산 총회의 주제,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에 나타난 생명과 정의와 평화는 상호불가분리의 융합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구속하시고 섭리하시는 생명세계를 지탱하는 두 축은 하나님의 의와 화평, 즉 정의와 평화입니다. 정의 없는 평화는 거짓 평화이며, 평화를 이루어내지 못하는 정의는 보복적 폭력의 악순환을 초래합니다. 정의와 평화를 서로 입맞추게 하는 과정이 치유와 화해의 과정이요, 지속적인 치유와 화해의 과정만이 생명을 얻고 풍성하게 하는 복음화를 위한 정의와 평화의 통전과 상호공존을 가능하게 합니다. 치유와 화해의 과정에서 진리가 정의와 평화의 길을 인도하며 치유되고 화해된 생명의 원천이 됩니다. 그러므로 치유와 화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과 해방의 영성이며 동시에 전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본질인 치유와 화해의 복음은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들 사이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를 치유하고 화해하는 복음의 온전성” (Wholeness)총체성”(Totality)을 증언합니다. 이것은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한 치유와 화해의 과정이 영적 수직적 차원, 사회적 수평적 차원, 생태적 우주적 치원을 포괄하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한반도의 평화통일이 지니는 총체적 선교과제를 제시합니다.

이 같은 선교신학적 인식은 상처입고 부서진 채 신음하는 한반도의 생명망을 치유하고 화해하게 하는 방법론으로 민족공동체의 치유와 화해, 평화통일을 위한 생명망짜기운동이라는 유기적 생태적 영성과 전략을 제시합니다. 생명망짜기는 상처를 극복하고 치유되고 화해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치유와 화해의 과정에서 체득한 인식론적 특권을 가지고, 상처 입은 치유자, 화해자가 되어 상처입고 고통 당하는 생명세계 속에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치유와 화해의 선교과정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공동체인 교회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치유되고 화해된 생명공동체이므로,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고 화해된 민족생명공동체로 변화되는 과정에 우선적으로 세계교회와 연대하는 일은 당연한 일입니다. 세계 각 지역에 흩어진 지역교회들이 지역적, 대륙적, 지구적 차원에서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한 치유와 화해의 생명망을 함께 짜갈 수 있다면, 교회는 동북아와 세계의 평화를 선도하는 치유하고 화해하는 생명공동체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역사의 길을 선도하게 될 것입니다.

<민족공동체의 치유와 화해, 평화통일을 위한 10> 과정은 민족공동체를 해체시키는 사회학적 원죄인 분단으로 인한 민족공동체의 상처를 치유하고, 화해와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한 교회의 과제 설정과 역할 수행을 목표로 합니다. 이는 한국교회 전체가 냉전의식을 극복하고 전 교회적 연대를 통해 스스로를 갱신하며 참여해야 할 중대한 과제로, 2015년에는 다음의 내용들을 실천하며 Post-2015 과정을 준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66(현충일)부터 815(광복절)까지 70일 기간을 민족공동체의 치유와 화해, 평화통일을 위한 특별기도기간으로 선포하고 국제기도운동을 전개한다. (2) 한민족 디아스포라를 포함하여 남과 북에서 700만이 참여하는 민족공동체의 치유와 화해, 평화통일을 위한 편지쓰기운동을 전개한다. (3) 6.25 민족공동체의 치유와 화해기도회를 개최하고 남북한 정부와 당사국에 평화협정체결을 촉구한다. (4) 8.15 종전 70주년 미완의 해방 70년 평화통일기도회를 개최하고 동북아시아에 평화사절단을 파견한다. (5) 분단으로 인한 남북한 및 해외 이산가족들의 치유와 화해의 영성 캠프를 실시한다. (6) 민족공동체의 치유와 화해, 평화통일을 위한 지역 및 기관 단위의 기도운동을 확산하고, 교회 내 평화교육과 북한이해교육을 실시한다. (7) 북한 주민들의 기본 필요를 지원하고 사회 문화적 종교적 차원의 남북민간교류를 활성화하므로 사회 심리적 통합에 기여한다. (8) 세계기독교회협의회의 <정의와 평화의 순례> 과정을 통해 한반도의 생명정의평화를 위한 국제적 연대를 결성해 나간다. (9) Post-2015 과정을 위하여 동북아시아 에큐메니칼 평화포럼을 구성하고, 288선언을 발표하므로, 2도잔소과정을 출범한다. (10) 한국과 세계기독교 안에 있는 평화통일 관련 연구소와 기관들을 모아 네트워크를 만들고, 기독교통일정책과 전략수립을 위해 조직적으로 활용한다.

 

2015 한국교회의 선교과제(2): 선교재고(“Rethinking Mission”) - 에큐메니칼하게 지속 가능한 지역교회와 지역사회성장의 통전

선교 130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다양한 방면에서 전개되는 한국교회의 국내외 선교를 재고하도록 요청합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지속 가능한 지역교회성장을 위한 생존의 사슬엮기를 요청 받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성장과정에서 교단과 선교회를 중심으로 동시다발로 일방적으로 확대된 세계선교 역시 이미 그 지속가능성에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사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은 세 가지 해석학적 실천적 차원, 복음의 ()발견, 복음의 삶, 복음의 확산의 순환을 삶 속에 내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심층적 상호연관성을 지닌 지속 가능한 지역교회성장의 순환의 삼박자로, 개 교회중심의 양적 성장을 위한 전략과 방법과 프로그램에 집착해 왔던 이제까지의 교회성장론의 패러다임을, 복음이 지닌 생명력과 생태적 운동성, 총체성과 온전성이라는 신앙의 존재론적 양태로 변화시킬 것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볼 때, 교회성장은 시대적 상황과의 깊은 상관성 속에서 진행됩니다. 시대적 상황의 변화에 따른 교회의 복음적 사회적 응답이 교회성장환경을 만들어내고, 이것이 성장의 기회와 함께 한계도 노출시킵니다. 1960년 대 이후 분단 상황 속에서 남한사회의 자본주의가 도시화, 산업화, 민주화의 과정을 겪어 나갈 때, 기복적 영성에 뿌리내린 번영과 안전의 신학이 교회성장을 주도했습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한국사회에 물질적 부가 축적되고 절차적 민주주의가 확립되면서, 세속화, 다원화, 지구화가 개인과 시민사회의 발전에 미치는 영향력이 확대되었고, 급기야 한국교회는 성장의 한계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세속화된 시민의식과 문화가치체계가 시민종교 혹은 대체종교의 역할을 감당하기 시작하면서 20세기 방식의 한국교회의 성장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성장환경에 드리워진 가장 어두운 그림자는, 바로 한국교회의 존재양태가 소금처럼, 빛처럼, 꽃의 향기처럼, 바람처럼, 선전선동을 넘어서는 복음의 존재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지 못하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임마누엘 성육신사건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는 바른 길이 케노시스”(자기비움), 교회공동체의 존재론적 양태가 바로 케노시스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첫 형상화인 빈 무덤, 영원한 생명력은 자기 비움의 과정을 관통한 텅 빈 충만을 통해서 비로소 증거된다는 의미를 역사적으로 형상화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지속 가능한 성장을 재고하며 다음 세대, 청년세대, 장년세대, 노년세대에 따른 세대별 성장전략과 정책을 개발하고, 지도자영성훈련을 더하여 균형성장과 동반성장, 그러므로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이는 교회 내외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교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증가와 한국사회의 인구학적 변화가 가져오는 한국교회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성장의 심박동이 멈추고 이를 인지하지도 못한 채 뇌사상태로 빠져가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 행하는 심폐소생술에 해당하는 응급행위입니다. 성공적인 소생을 위한 생존의 사슬은 심폐활동정지 상태를 조속히 인지하고 구조를 요청하는 한편, 인공호흡과 인공순환 등의 기본심폐소생술을 실시하고, 심방(심실)세동을 정상조율로 되돌리는 제세동 등의 전문심폐소생술을 실시하는 것인데, 이런 일련의 행위들이 사슬처럼 신속하고 정확하게 서로 연결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같은 생존의 사슬엮기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속에서 케노시스의 영성이 펼쳐내는 생명살림의 예술입니다.

복음으로 사는 사람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케노시스를 살아내는 존재입니다. 한국교회의 지속 가능한 성장운동이 한국교회의 생명력을 소생시키는 생존의 사슬이 되기 위해서는 교회성장운동의 과정과 방법론이, 특별히 이 운동에 참여하는 교회지도자들이 케노시스적이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교회성장운동은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생존의 사슬을 엮는 생명살림의 예술로 승화될 수 있습니다. 생명체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생명운동은 일상의 삶의 호흡운동이요 신진대사운동으로, 모세혈관에 이르기까지 산소가 공급되고 피돌기가 이어지는 순환운동입니다. 이 같은 순환운동의 일상성이 가져올 수 있는 안일함과 순환을 저해하는 독점과 사유화의 유혹을 극복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를 비워내며 생존의 사슬을 엮어가는 것이 생명살림의 예술입니다. ‘텅 빈 충만을 선물로 가져오는 케노시스적 교회성장운동은 무엇일까? 케노시스적으로 교회성장운동에 참여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케노시스를 지향하는 교회성장운동은 어떤 존재론적 양태와 전략을 가지고 전개되어야 할까? 한국교회의 성장운동이 지속적으로 물어야 할 매우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케노시스를 지향하는 교회성장운동이 극복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 중에 하나는 한국교회지도자들 속에 만연된 나르시시즘입니다. 자아도취적 자기애는 인간의 부정성이 지니는 심리적 문제로, 완벽주의에 경도된 채 자만심과 우월감에 빠져 자기에게서 시작과 끝을 이루는 직선적 완결구조를 형성하려는 태도를 포함합니다. 자신의 불완전함에 대해 무지하므로 그리스도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하나님의 판단을 인정할 수 없었던 사탄의 본성은, 인간의 악한 심성과 행위의 근원이 됩니다. 나르시스적 인간은 자신의 완벽한 자아상 표출에 문제가 발생하면, 자기성찰 대신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애매한 희생양을 만들어 이를 극복하려 하는데, 이런 악순환의 과정이 반복되면서 인간의 죄악 된 문화는 번성해갑니다. 한국교회 안에 내재된 유교적 가부장적 문화는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 의존과 복종, 수평적 소통과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의 부족, 억압적 감정 절제 등을 조장하기 쉬운데, 이런 환경 속에서 교회지도자들 안에 있는 나르시시즘은 병리적 현상으로 발전되어 표출되기 쉽습니다. 가부장적 나르시스적 교회지도자들이 하나님과 교회를 명분으로 공적 영역에서 자기성취와 자기과시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과정에서, 그들의 나르시시즘을 보호하기 위한 비본질적 안전장치들이 설치되고, 구성원들은 반 지성주의에 경도된 채 복종적 참여를 강요 받습니다. 간혹 몇 몇 자수성가 형 교회지도자들의 경우,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독점과 사유화의 욕구로 인해 왕왕 자신들을 교회와 기관의 소유주로 생각하고, 주변에 유사 '친위대'를 배치하여 운영권을 독점하므로, 집단적 지성의 창출과 지도력 이양에 어려움을 자초합니다. 자기 의와 자기연민을 시계추처럼 오가며 성직자의 특권의식과 영적 권위로 자신들을 포장한 채, 구성원들을 자신들의 욕구 실현의 도구로 전락시키고, 신앙공동체 안에 돈과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는 세속화 현상을 가속화시키며, 고뇌하는 신앙인들의 이탈을 방치합니다. 한국교회의 성장둔화와 윤리적 타락과 사회적 신뢰 약화의 뒤안길에는 성령의 역사를 가로막는 교회지도자들의 나르시스적 병리현상이 함께 자리 잡고 있습니다.

나르시시즘을 양산하는 한국교회의 문화와 목회구조의 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성육신적이며 생태적인 자기 비움과 상호의존성의 영성의 빛 아래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을 개발해야 합니다. 내 안의 완결구조를 통해 내가 모든 것을 판단하고 모든 구성원들을 다스릴 수 있다는 제왕적 대상화의 망상에서 깨어나, 구성원들의 공동체적이고 상호의존적인 은사를 개발하면서 집단지혜를 발전시키는 유기적이고 공동체적인 목회의 돌봄이 필요합니다. 교회와 사회의 구성원들을 향해 일방적으로 비판하고 지도하고 가르치려는 태도와, 신앙의 이름 아래로 모든 것을 환원시키려는 미망에서 벗어나, 더불어 소통하고 공감하므로 함께 배우고 실천하며 성찰하는 모습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목회기술자가 아니라 인생이라는 순례의 여정에 친구로 동행하는 지도자, 일방적 지시와 전달보다는 낮은 자세의 경청과 수평적 대화를 통해 영적 현자로 말씀의 지혜를 나누는 지도자, 자신이 세운 목표와 결정을 중시한 나머지 기존의 다른 것들은 무효화하고 자신의 시간의 흐름과 목표에 추종할 것을 강요하는 대신에 구성원들의 삶과 사역의 자리에서 공존의 상관성을 만들고 치유와 화해의 생명 망을 짜가며 함께 춤추며 이끄는 지도자, 경력과 인맥과 덧칠한 무용담을 과시하며 그것을 권위의 근거로 삼기보다는 언제나 수줍은 첫 만남을 준비하는 아마추어의 자세로 일상을 살아가는 지도자, 성령의 역사보다 앞서서 문제해결사로 스스로를 자처하며 나서기 보다는 성령의 역사에 공동의 탐구자로 참여하는 지도자, 성급한 자기 판단을 앞세워 자기 방어적 변증과 공격적 처세로 대처하기 보다는 침묵 가운데 사과와 용서로 낮아지며 갈등의 사이에 서서 치유와 화해의 과정을 모색하므로 공동체의 진보를 이루는 포용적 지도자, 독무대를 차리고 나르시스적 원 맨 쇼를 연출하기 보다는 팀워크를 이루며 공동체를 형성해 가는 지도자 -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공동체의 전 구성원이 하나님의 정치와 선교와 목회에 참여할 것을 요청 받는 이 시대의 교회지도자들의 상식이 되어야 하며, 이것이 지속 가능한 한국교회성장을 인도하는 첩경이 될 것입니다.

자기 비움과 상호의존성이라는 생명망의 세계관이 붕괴되고 독점과 사유화에 기반한 신 자유주의 시장경제체제가 세계화된 시대적 경향이 한국교회의 성장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력을 극복하고 자기 비움과 상호의존성에 근거한 에큐메니칼하게 지속 가능한 지역교회성장에 대한 비전을 회복해야 합니다. 자연의 순환이 지시하는 교회생태계의 정의는 독점과 사유화가 아니라 상호의존과 나눔을 동반하는 순환이며, 이것이 교회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을 제공하는 원리입니다. 교회생태계의 지속가능성 역시 개 교회나 특정 교단이나 기관 혹은 그룹 중심의 집단적 독점과 사유화가 아니라, 자기 비움과 상호의존성이라는 생태적 원리에 근거한 더불어, 함께라는 공동체적 순환의 정의를 세울 때 가능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 한국교회는 성장의 패러다임에 대 전환을 가져오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 봉착해 있습니다.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하여 한국교회는 거룩한 세계성의 터 위에서 세상을 향한 개방성을 가지고, 세상과 성육신적 메시아적 소통을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한국교회는 지역성과 세계성의 상호작용 안에서 자신을 성장시켜나가야 합니다. “지역교회는 교회생태계의 토대로 지역교회가 지역사회와 맺는 유기적 상관성인 지역성(locality)을 지닙니다. 지역교회는 지역사회의 생명망의 하나의 중요한 구심점입니다. 전 삶의 영역에서 지역교회와 지역사회의 상관성을 강화해 나갈 때, 지역교회는 지역사회를 섬기는 성만찬적 선교공동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지역이라는 구체적인 삶의 자리와 관계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손과 발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지역교회는 지역이 세계와 맺는 유기적 상관성인 지구성(globality)의 속성을 지닙니다. 지역은 세계의 실체요, 지역교회는 세계교회의 실체입니다. 지역과 세계의 유기적 상관성을 강화시키면서 지구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고, 지역적으로 성찰하고 지구적으로 실천하는 창의적 상호참여가 요청됩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값비싼일치와 친교의 선물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게 숙고하고 있으며, 가시적 일치와 친교를 증진시키는 과정에서 선교와 봉사를 통한 공동의 증언에 진정성을 가지고 참여하고 있는지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합니다. 오늘 다양한 신앙전통들이 공존하는 기독교의 세계화 시대에 지속 가능한 성장은 지역교회가 지닌 에큐메니칼한 본성을 자각하고 이를 극대화시킬 것을 요청합니다. 교회가 지닌 에큐메니칼한 본성은 교회공동체의 일치를 지시하는 협의적 차원과 우주적 생명공동체의 일치를 지시하는 광의적 차원을 포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근거하여 교회공동체가 지닌 값비싼일치와 친교 자체가 세상을 향한 복음의 증언이 됩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공동체를 위한 기도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를 통해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안에 있는 공동체적 일치의 속성을 교회의 일치의 모델로 제시합니다.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를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주어진 일치의 선물(costly unity)을 교회공동체의 가시적 일치의 구현을 위한 신앙공동체의 친교(costly koinonia)로 심화시킬 것을 강조합니다.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를 통해 일치와 친교가 지닌 공동체적 증언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일치와 친교와 공동의 선교적 증언이라는 삼위일체적 해석학적 순환을 통해 지역교회의 지속 가능한 성장이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행동은 전 우주적 생명공동체를 포괄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공동체와 우주적 생명공동체의 일치를 이루는 치유와 화해의 청사진을 바울은 에베소서 1:10을 통해 증언합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를 통해 일치의 지평은 전 우주적 생명공동체로 확대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예비적 종말론적 우주적 일치를 증언하며, 교회의 일치가 하나님 안에 있는 인류공동체의 일치의 전거요 표징임을 지시합니다.

치유되고 화해된 생명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생명을 얻고 더욱 풍성하게 하는데 그 존재의 목표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316절의 하나님의 사랑의 구속사역의 목적은, 요한복음 1010절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적 선교의 목적과 상호보완적 관계를 형성합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치유되고 화해된 생명공동체를 지시하며,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구절은 총체적 생명자본의 풍성함을 가져오는 에큐메니칼하게 지속 가능한 지역교회성장을 상상하게 합니다.

한국교회는 지속적인 갱신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구심적 원심적 해석학적 순환 속에 위치시켜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는 메타노이아와 코이노니아와 디아코니아의 순환 속에서 구심적이며 동시에 원심적인 선교적 교회론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지역교회의 선교적 본성은 구심적이며 동시에 원심적인 운동력으로 나타나는데, 이 같은 선교적 해석학적 실천을 통해 치유와 화해의 복음을 실체화하므로 생명을 얻고 풍성하게 하는 하나님의 생명망을 복원하고 강화시켜 나갑니다. 구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과 연합되어 사랑의 친교와 일치를 이루는 생명공동체로서의 교회로 성장하면서, 동시에 원심적으로 지금 여기 역사 속에서 예전 이후의 예전,” 즉 선교와 디아코니아를 통해 치유하고 화해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생명공동체로서의 교회를 구성하므로 하나님 나라 건설에 이바지해야 합니다.

전 교회가 전 복음을 전 세계에 전하도록 새롭게 부름 받고 있는 한국교회는 복음의 전인성과 총체성의 증언을 위해 복음적 적용의 세 차원을 융합하는 선교적 능력을 증진시켜야 합니다. 지역교회의 생명망을 총체적으로 강화하기 위하여 영적-수직적, 사회적-수평적, 생태적-우주적 차원이 상보적으로 결합된 지역에큐메니즘을 증진시켜야 합니다. 먼저, 영적-수직적 차원의 생명망 강화를 위하여 복음에 대한 전인적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파편적이고 부분적인 복음이해로는 지속가능성의 사상적 토대를 형성할 수 없습니다. 온전한 복음에 이해를 통해 생명의 풍성함을 증진시킬 수 있습니다. 예배와 선교의 통전을 지향하며, 예전 이후의 예전인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드릴 수 있도록,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실체적 자각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세상에 대해 책임적 존재로 살아가야 합니다. 사회적-수평적 차원의 생명망 강화를 위하여 수평적 의사소통구조를 강화하고 교회와 사회의 정치 문화를 쇄신하며 평신도를 삶의 현장의 사도로 동력화시켜야 합니다. 세대 간 유기적 상관성을 강조하면서 세대적 순환의 지속가능성 강화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은 바람처럼, 꽃의 향기처럼, 소금처럼, 빛처럼 신앙공동체가 지닌 존재론적 선교영향력을 강화하고 확산시키는 것으로, 생래적으로 성문 밖에서 수난 당하시는 그리스도를 지향합니다. 생태적-우주적 차원의 생명망 강화를 위하여 교회는 먼저 생태적으로 회심한 신앙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자연의 일부로서의 생태적 상호의존성을 자각하고 이를 강화하면서 자연의 청지기로 미래의 일곱 세대를 품에 안고 성장하는 교회로, 생태적 원리에 따른 교회와 사회의 구조를 창출하고 생태적 원리에 따라 운영하는 교회사회생태학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경제적 자본논리에서 해방되어 총체적 생명자본의 성장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어느 지역의 한 교회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 지역의 다른 교회들이 함께 성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역의 교회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지역사회의 영적 사회경제적 정치적 윤리적 문화적 교육적 생태적 자본, 총체적 생명자본” (total life-capital)이 함께 성장해야 합니다. 한 지역의 교회와 사회의 동반성장이 다른 상관된 지역의 교회와 사회의 성장을 유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과정에 지역교회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루고, 지역교회의 성장을 지향하는 과정에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이루므로 에큐메니칼하게 지속 가능한 지역교회와 사회의 성장, 총체적 생명자본의 성장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선교 130”, 오늘 우리는 한국교회의 국내외 선교가 에큐메니칼하게 지속 가능한 지역교회의 성장과 지역사회의 성장을 통전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던지며 겸허하게 성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에큐메니칼하게 지속 가능한 성장이라는 관점에서 상기한 모든 차원들을 점검하면서 한국교회의 선교 전반을 성찰하고 재고하는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국내외 선교가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의 빛에서 총체적 생명자본의 성장을 가져오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한국교회가 전하는 해석된복음이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온전성과 총체성을 올바르게 증언하고 있는가라는 신학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질문은 한국교회가 예수그리스도의 온전하고 총체적인 복음을 온 삶으로 살아내는 메시아적 삶의 양식을 지닌 하나님의 백성공동체로서 존재론적 증언을 하고 있는가로 그 의미의 지평을 확산해나갑니다. “선교 130,” 국내외 선교 전반에 걸친 비판적 성찰을 통해 선교 재고(Rethinking Mission)를 실천하므로, 한국교회의 존재론적 선교를 회복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위해 죽는가?

오늘 이웃과 자연이 경험하는 가난과 질병과 억압과 절망과 죽음에 상관되지 않은 나의 부와 건강과 자유와 희망과 생명은 없습니다.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사회적 생태적 상관성을 보지 못하는 것 자체가 영적 무지요 불의이며 죄악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자발적 가난과 고통과 절망과 죽음이 왜, 어떻게, 나의 풍요와 기쁨과 희망과 생명으로 전환되는지에 대한 성만찬적 사회선교적 해석은, 오늘 199의 불평등한 세상에서 과연 한국교회가 지닌 부와 건강과 자유와 희망과 생명에 대한 신학적 실천적 진정성이 무엇인지를 되묻고 있습니다. 만물의 생명의 풍성함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과, 생명과 소망의 원천이신 하나님의 역사적 현존은 오늘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억압당하는 사람, 절망하는 사람,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의 삶과 본질적 상관성을 가지고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해방사역의 구성적 계기가 되는 이들의 존재가 치유와 화해의 생명공동체로서의 교회와, 생명과 소망의 성례전적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선교사역의 진정성을 보증하는 동시에 시험하고 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십자가 아래에서 중단 없는 자기 비움의 길을 걸으며, 부활의 능력으로 죽은 자 같으나 진리 안에서 진정으로 산 자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됩니다. 절망과 죽임의 세력이 그어놓은 모든 단절의 경계를 넘어, 생명과 소망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사랑과 진리로 증언하는 선교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절망과 죽임의 경계들이 만들어 놓은 소외와 허무의 시공들 사이를 희망의 다리로 이어가는 진리의 소통과정이요, 부서지고 깨어진 관계들을 복원하기 위해 생명망을 짜는 치유와 화해의 과정입니다.

오늘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질문은 오늘 나는 무엇을 위해 죽는가라는 질문을 통해서만 그 답을 얻을 수 있는 순례적이며 순교적인 질문입니다. 2015, “분단 70,” “선교 130이라는 역사적 의미 속에서 오늘 한국교회는 치유와 화해의 생명망을 회복하고 만물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생명살림에 대한 소망을 믿음으로 재확인하고, 그 믿음을 위해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 아래에서 부활을 살아가는 선교적 교회의 모습입니다. ()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