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직(Keswick)운동의 영성(I)


▲ 김영한 박사 /기독교학술원장/샬롬나비대표/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목차-

I. 케직운동의 시작역사적 기원

II. 케직사경회

III. 케직운동의 영성

 

머리말

오늘날 한국교회는 초창기의 거룩성과 사회적 신뢰성을 상실하고 있다기독교 본래의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이를 위하여 하나의 대안이 1907년의 평양 대각성운동의 신앙으로 되돌아가야 한다한국교회 초창기의 영성은 큰 틀에서 청교도 영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이 청교도영성은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1875년 성공회 목사 하트포드-베터스비(T.D. Hartford-Battersby)가 시무한 성 요한 교회에서 개최한 이래 오늘날까지 140년 동안 지속되고 있는 케직사경회와 연결될 수 있다케직사경회는 성공회 목사로서 강해설교자 이반 홉킨스(Evan Henry Hopkins)가 첫 사경회의 주강사로 초빙되어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성공회주교요 캠브리지 대학의 리들리 홀(Ridley Hall)의 학장 핸들리 모울(Handley Moule)은 1884년 9월 스코틀랜드에서 열린 케직사경회에 참석하여 에반 홉킨스의 설교를 듣고 자기 안에 있는 죄들을 직면하고 예수를 완벽한 구속자로 받아들이고 케직운동의 가르침을 신학적으로 정리하였다저명한 영국 성공회 성직자 프레벤다리 웹-펩로(the Rev. Prebendary. Webb-peploe)도 케직 운동의 가르침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케직운동은 미국의 복음주의 성결운동에도 영향을 끼쳐 미국 복음주의자 무디(D. L. Moody), 무디의 절친한 친구요 침례교의 대표적인 복음주의자 고던(A. J. Gordon), 예일대와 예일신학부 출신인 무디성경학교 교장 토레이(R. A. Torrey), 장로교 출신의 초교파주의자요 피어슨(A. T. Pierson)도 영향을 받았고케직 운동의 교사로 활동하였다따라서 무디의 부흥운동특히 그가 1886년부터 시작한 대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을 통하여 수많은 선교사들(맥코믹신학교 학생이었던 윌리엄 베어드와 사무엘 모펫 등)을 결심하도록 만들고 한국의 평양대부흥운동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토레이의 성령론은 한국의 초기 선교사 하디(Robert A. Hardie, 1860-1949)와 무디의 선교적 도전에 감동을 받은 맥코믹신학교 출신의 한국 선교사들에게 전수되어, 1903년의 원산부흥운동과 1907년의 평양부흥운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1910년 한국에 와서 선교활동하고 성경학교설립을 약속한 피어선(A. T. Pierson)그의 유언으로 설립된 학교가 오늘날 평택대학교의 전신 피어선성경학교)이 당시 영국에서 시작하여 미국에까지 영향을 끼쳤던 케직운동의 교사요 지도자로 활동하였다피어슨 20세기 초 케직 운동의 일환으로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선교하였고 피어선성경학교를 세웠다이 학교가 발전하여 오늘날 평택대학교가 세워졌다평택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는 피어슨의 저서들을 번역함으로써 케직운동에 대하여 역사적 기원과 그 정신에 대하여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그리고 1980년대 한국교회에도 한국복음주의 협의회를 중심으로 6년 동안(1985-2001케직사경회가 소개되고 여러 교회(할렐루야교회사랑의교회부산초량교회소망교회충현교회강변교회 등)에서 집회를 하였다이것이 한국복음주의협의회의 시작과 더불어 된 것으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KEF, Korean Evangelical Fellowship)는 케직 영성과 불가분적인 관계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1965년부터 2007년 은퇴 시까지 영국의 복음주의 지도자 존 스토트(John Stott)가 케직사경회에서 42년간 설교하였다존 스토트는 20세기 하반기에 케직사경회를 대표하는 설교자로서 주강사였다케직사경회는 지금도 청년층부터 노년층까지 매년 여름 1만여 명이 참석하고 있는 유서 깊은 부흥운동이다소망교회 담임목사 김지철은 다음같이 케직사경회를 특징지운다. “무엇보다 케직사경회는 하나님 말씀에 기초한 성결과 헌신의 삶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주 되심삶의 변화복음전도와 선교제자도연합과 일치 등 다섯 가지 목표를 천명하고 지금도 초교파적인 말씀축제를 이어가고 있다.”( 하나님의 목적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 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 입력: 2014.01.24 14:54 존 스토트의 케직사경회 설교 모은그리스도처럼」 (‘John Stott at Keswick’)).

 

I. 케직운동의 시작역사적 기원

1870년대 초반에 이르러 영국의 복음주의가 퇴조하였다산업혁명의 여파로 생활수준의 향상되자 중상류층의 관심은 교회로부터 여가활동으로 변화하고 있었다영국교회는 이신론(deism)의 합리주의(合理主義)와 고()교회(high church)의 의식주의(儀式主義)의 쌍둥이 적에 의해 위협을 받았다자유주의자들은 스포츠나 오락을 지원함으로써 시대적 조류에 적응하였으나 교회와 사회의 구별을 허물어뜨렸다복음주의자 스펄전(Charles H. Spurgeon, 1834-1892)은 세속주의에 대한 철저한 저항은 구체적인 결실을 맺지 못하고 논쟁만 일으켰다이때에 일어난 복음주의 운동이 중상류층 신자들 가운데 크게 확산된 더 높은 영성’(the higher spirituality)을 추구하고자 하는 운동이었다. 18세기 초중반기에 일어난 웨슬리나 휫필드의 부흥운동은 주로 광부와 근로자들 중심의 대중들의 운동이었는 데 반하여, 19세기 후반에 일어난 케직운동은 중상류층을 지지층으로 하여 더 높은 차원의 영성을 추구하면서 일어났다성공회 신학자 이반 홉킨스는 케직운동의 첫 초빙 주강사요 지도자로서 그가 편집하여 출간하였던 월간지 신앙의 삶(Life of Faith)을 통하여 영국교계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케직운동의 교사였던 미국 선교사 피어선(Arthur T. Pierson)은 소책자 케직운동(The Keswick Movement)에서 다음 같이 쓰고 있다. “1873년 영국에서 한 운동이 시작되었다이후로부터 지금까지 그 운동은 개울이 끊임없이 넓어지고 점점 깊어지며 더욱 세차게 흐르는 강과 같은 것이었다... 미국인 복음 전도자 로버트 퍼어설 스미스(Robert Pearsall Smith)와 그의 아내 한나 스미스(Hannah Withall Smith)는 둘 모두 거룩한 삶(holy life)에 관한 책과 소책자를 쓰는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들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 운동의 발단에 관여하였다.”(Arthur T. Pierson, The Keswick Movement, 신현수 역케직운동생명의 말씀사, 2001, 17.). 로버트 퍼어설 스미스영국 성공회 신학자 이반 홉킨스영국성공회 전문신학자요 캠브리지 대 교수 핸들리 모울(Handley C. G. Moule), 마이어(F. B. Meyer) 그리고 앤드루 머레이(Andrew Murray, 18281917)와 같은 케직운동의 지도자들은 1870년대 이후 영국인의 영적 삶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특히 머레이는 화란 개혁교회(Dutch Reformed Church) 출신의 남아프리카 선교사로서 독일 뫼틀링엔(Möttlingen)의 루터교 축사(逐邪목회자 요한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Johann Christoph Blumhardt)의 영향을 받아 현대적 의미에서의 오순절주의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감리교도의 성결론에 열려 있었으며그의 저서들은 오순절주의를 세우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1873년 영국 런던 YMCA의 정오기도 시간에 모인 여러 소집회에서 평신도 전도자인 스미스 부부가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죄를 바로 물리쳐야 하는 의무와 특권에 관하여 증언하였다이 모임에서 청중들은 지속적이며 분명하며 즉각적인 하나님의 복을 경험하는 사건들이 일어났다그리고 이러한 사건들에 대하여 지체하지 않고 입술뿐만 아니라 삶으로 확신에 찬 간증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 작은 규모의 집회들이 점점 많은 참석자들로 붐비게 되었고 점차 넓은 장소에서 더 큰 모임을 가지게 되었다.”(Arthur T. Pierson, The Keswick Movement, 케직운동, 20.). 그리하여1874년에 동역자들이 새롭게 자신을 헌신하기 위한 마일드메이(Mildmay) 집회하노버(Hanover)광장 집회 등 같은 2일 또는 3일 동안의 특별집회들이 있었다마일드메이 집회는 성공회 목사 윌리엄 페너화더(William Pennefather)가 1856년 이후 처음에는 바네트(Barnet), 그리고 1864년 런던 북쪽 마일드메이(Mildamy) 공원에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개인적 성결을 주제로 해서 매년 개최한 성결운동 집회였다이 모임에는 그 시대의 복음주의 지도자들의 설교를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어 1869년에는 천 명이 운집하였다이러한 특별 집회는 맨처스터(Manchester), 노팅엄(Nottingham), 레스터(Leicester), 그리고 유럽 대륙과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Dublin)에서도 열렸다이러한 집회에서의 특징은 오늘날 와그너(Peter Wagner)를 중심하여 신비로운 체험을 위주로 일어나는 신사도운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을 소망하고 이러한 소망을 실천하는 열망이 넘치는 운동이었다 

이러한 성결운동에 미국의 무디(D. L. Moody)와 그의 동료 생키(Sankey)가 영국으로 초청되어 부흥설교를 통하여 영향을 끼쳤다무디와 생키는 1873년 6월과 1875년 8월 사이에 영국 전역에서 복음 메시지를 전달하였다무디는 윌리엄 페니화더의 초청을 받아 마일더메이에서 설교하였다.아일랜드 부흥집회 후에 1874년 3월부터 7월까지 영국에서의 부흥집회를 위하여 미국에서 런던에 도착한 무디와 생키는 브라이턴 집회에 참석하여 설교했으며 이들의 성결운동에 의하여 감동을 받았다. 

1874년 옥스퍼드의 사경회에서 한 성직자가 다음같이 선언하였다. “나는 나의 사역에서 커다란 부족함을 느꼈기 때문에 여기에 왔다대중들이 왔다가 갔지만거의 결과는 없었다나는 모든 것이 옳다고 믿을 수 없었으며나의 형제들의 일부가 소유한 영적 힘의 비밀을 알기 위하여 왔다.”(Mr. Grane from Shanklin, Meeting.. at Oxford, 210). 케직운동의 전신인 옥스퍼드 집회에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났다옥스퍼드 집회의 참석자들은 예배에서 능력의 비밀을 발견했다피어슨은 다음같이 피력한다. “이러한 집회가 있는 곳이면 그 어디든지보다 깊은 죄와 필요에 대한 의식보다 풍성한 복의 기대기도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감이 있었고아마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성향이 새롭고 놀랍게 변화되었다는 것이다.”(Arthur T. Pierson, The Keswick Movement,케직운동, 20.). 이것은 보다 높은 영적 삶을 추구하는 성결운동이었다. “이것은 마음의 영이 새로워지는 것곧 성질을 다스리는 것이다이것은 실제적으로 죄의 마지막 본거지나 그리스도를 위한 믿음의 삶을 살기 위하여서 반드시 확보해야한 하는 것이다.” 새로운 진리를 찾는 것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삶을 찾는 일,” “죄와 결핍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 필요한 그리스도 안에서 갖게된 승리케 하는 힘을 새롭게 경험하는 운동”(Arthur T. Pierson, The Keswick Movement, 케직운동, 20-21)이 시작되었다죄는 지성의 눈을 가리고떨쳐버릴 수 없는 습관의 줄에 얽어매며그 희생자들을 우상과 미신의 맷돌에 잘게 갈리게하여 마귀를 즐겁게 한다.

그러나 이들 케직운동의 선구자들은 신자들과 사역자들이 죄와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실망하는 데서 벗어나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고기도의 호흡을 할 수 있으며그분의 강한 능력을 받을 수 있는” 승리의 삶을 추구하였다영국과 그 밖의 나라에서 열린 여러 집회들을 통하여 이들은 이러한 승리의 삶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모든 것을 더욱더 풍성히 경험하였다이들은이전에 알지 못했던 죄에 대한 승리마음의 순수함하나님과의 화목과 하나님의 평안 그리고 섬김의 능력 등을 체험하게 되었다.”(Arthur T. Pierson, The Keswick Movement, 케직운동, 22.). 수백명의 신자들이 이러한 집회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려야할 권리를 요구하게 되었다. 

1. 브로드랜드(Broadlands) 집회케직운동의 원형이 된 집회: 1874년 7월 17일부터 23일까지 영국 캠브리지의 브로드랜드 공원에서 6일에 걸쳐 수백명이 참석하는 모임이 열렸다집회는 아침 7시에 시작하여 밤 11시에 끝났다일정은 식사 시간이 지체될 정도로 열정적으로 조용한 명상과 성경공부와 비공식적인 담화연설기도와 여성집회전체집회 등으로 이어졌다각 집회 중간에 작은 그룹들이 공원의 숲과 물가를 거닐거나 모여서 한 일상대화는 영적 주제가 차지했다참석자들은 다음같이 증언하였다이들은 이 집회 시간을 일상적인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연구에서 벗어나 며칠간 조용히 명상과 기도를 할 수 있는 시간으로 받았으며이 모임을 통하여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항복하는 것주님과 끊임없이 교제하는 것나날이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능력을 물리치는 것 등과 같은 영적 삶”(Arthur T. Pierson, The Keswick Movement,케직운동, 23.)을 추구하였다그리고 이러한 차원 높은 영적 삶이 어떻게 가능하며이에 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 증거하는지를 알고자” 하였다. 

1) 숨겨진 죄를 버리는 작업: 참가자들은 이 집회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에 이르려는 길을 찾고자 했다그 길은 적극적이기 보다는 소극적인 길이었다먼저 알고 있는 죄를 버리고자 했다피어슨은 브로드랜드 집회의 영적 전개를 다음같이 서술한다. “먼저 알고 있는 죄를 버렸다눈이 열려서 죄와 무엇이 죄인 지를 더욱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악이 새롭게 분별되었고그 흉악성과 추함이 확실히 보여졌다.”(Arthur T. Pierson, The Keswick Movement, 케직운동, 24.). “의심의 여지가 있는 탐닉,” “믿음으로 하지 않은 것“(롬 14:23)까지도 죄로 인정하고 버리게 되었다자신의 숨어 있는 죄를 밝히는 탐조등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하나님 말씀을 묵살하고 설교로 듣게 되었을 때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를 가로 막는 어떤 장애물로 밝혀지고어떤 우상도 드러나며또한 자신에 관하여 그리고 성령의 강력한 제한 시켰던 모든 것이 바르게 드러나게 되었다. 

2)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결단: 브로드랜드 집회에서 강조점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자의 거룩한 삶이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이라면 누구든지 그의 실재 상태가 가능한 한 그의 법적 신분에 상응하도록 진지하게 추구해야 마땅하다는 것그리고 높고 거룩한 부름에 합당한 거룩한 행실이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러난 죄를 책하고 끊는 것뿐만 아니라 은밀한 죄를 분명히 밝히고 드러내 놓으며고백하고 버렸다.” 예전에는 죄에 대해 둔감했으나 이제 영적 감수성이 예민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정당화되거나 혹은 적어도 가볍게 다루었던 것들을 이제 적극적으로 죄된 것아라고 판단하는가 하면기껏해야 의심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만 여겼던 것을 이제 의심의 여지없이 죄되고 해로운 것으로 보게되었다.”(Arthur T. Pierson, The Keswick Movement, 케직운동, 25).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탐조등으로 인하여 무의시적 유보들곧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다스림을 받지 않은 영역을 밝히 드러내고 보다 철저한 자기 항복의 길이 마련되었다.” 참가자들은 하나님의 의로운 책망과 징계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수한 거룩을 열망했으며 자신들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 알게되고 하나님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 “거룩한 분으로서 알게되었다 

그리하여 이 집회에서 은혜와 복을 체험한 자들에 의하여 이 집회의 좋은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 “하나님과 보다 친밀하게 되는 삶의 비결에 관하여 묻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이 집회에 한번도 참석하지 못한 수백명의 사람들이 죄와 결핍을 새롭게 의식하여 하나님을 깊이 갈망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초대받은 사람에게만 아니라 참석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사람들에게 더 큰 규모의 집회가 열리게 되었다그리고 풍성한 자원하는 헌금이 들어 왔다. “그 엿새 동안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이 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흘러넘쳤다아직까지 살아 있는 사람들은 그때가 그들이 이제까지 경험한 가장 엄숙하고 기쁨에 찬 그리스도와의 교제기간이었다.”( Arthur T. Pierson, The Keswick Movement, 케직운동, 23.) 

2. 옥스퍼드 연합집회(Oxford Convention): 이전의 어떤 집회보다 높은 수준의 집회: 그리하여 브로드랜드 집회에 참석하였던 아더 블랙우드 경(Sir Arthur Blackwood)이 다음 집회를 방학기간에 옥스퍼드에 열자고 제안하였다그리고 1874년 8월 토마스 베아우챔프 경(Sir Thomas Beauchamp)은 40명의 성직자들을 그의 시골 저택이 있는 랭글리 파크( Langley Park)로 초청하여5일 동안 집회를 하였다이 8월 8일에 옥스퍼드 집회의 세부사항이 마련되었다. 

옥스퍼드 연합집회는 오랜 전통을 자랑하고 배타적이고 교권적인 분위기를 가진 대학도시에서 주로 교파를 초월하여 영국과 전 유럽에서 20-30명의 대표단격인 목회자들이 모여서 평신도들과 같이 기도와 찬양성경공부와 대담을 가졌다이 모임에서 오로지 하나의 목적만 가졌다. “하나님을 더욱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 형태의 개인 경건을 바라보고 조화롭게 연합을 이루었다.” 새벽기도회에 천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였고 성직자나 평신도들이 같은 죄와 필요들을 고백하고같은 복들을 달라고 기도하며복을 받는 똑같은 경험들을 증거하였다.”(Arthur T. Pierson, The Keswick Movement, 케직운동, 28). 피어슨은 옥스퍼드 집회는 이전에 있었던 다른 집회들미국의 만하임(Mannheim), 바인랜드(Vineland) 라운드 래이크(Round Lake), 어버린(Oberlin)에서 있었던 집회뿐만 아니라 바네트(Barnet), 마일드메이(Mildmay), 퍼드(Perth)등지에서 있었던 집회보다 더 높은 수위에 이르렀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 집회에서 성공회 목사 하포드-배터스비(Cannon Harford-Battersby)는 믿음의 안식”(rest of faith)을 얻었고다른 참가자들도 믿음의 안식을 얻기를 열망하는 것에 동감하여 케직사경회를 갖자고 제안하였다옥스퍼드 연합집회는 그 자체 스스로 불어나는 강이 되어 케직사경회의 원천이 되었고영국의 많은 지역과 해외의 여러 집회가 열리도록 하는 원천이 되었다옥스퍼드 집회에 이어 이보다 규모가 적은 집회들이 스트라우드(Stroud)에서 그룸(T. Croome)의 주관 아래 개최되었다스트라우드 집회에 이어 챌턴험(Cheltenham)과 브라이턴 집회가 개최되었다. 

3. 브라이턴 집회(Brighton Convention): 새로운 생명부여의 집회:  1875년 5월 29일부터 6월 7일까지 10일 동안 브라이톤 파빌리온(Pavilion)에서 개최되었다피어슨은 세속주의가 주의 뜰에까지 침범해 들어온 상황을 다음같이 피력한다. “형식주의가 예배를 타락시켰고이기주의가 영성을 마비시켰으며냉담함이 선교 사역을 위협하고 있었다영적 쇠퇴의 징후가 너무나 분명하고 경악할만한 것이어서 믿음이 돈독한 사람들은 어떤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절망의 상태에서 하나님이 간섭해 주셔야 한다는 것을 느끼고기도하는 것에 몰두하게 되었다.”(Arthur T. Pierson, The Keswick Movement, 케직운동, 31.). 참가자들은 성찬식을 거행하면서 영적 준수를 개최하였다. 

브라이턴 집회의 참가자들이 연합기도에서 성령의 능력을 추구하는 것은 두가지 방향이었다하나는 영혼의 거룩성 증대다른 하나는 섬김의 능력을 힘입는 것이었다피어슨은 다음같이 영적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다하나님은 이 집회에서 기도와 탄원의 영을 부어주셨다.”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이 더욱 진지하고집요하며기대하고 있는 것이 되자어떤 새로운 영적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 냉랭하고인습적이며형식에 의해 훼방과 장애를 받으며배타적이고 남에게 너그럽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드러나게 새로운 생명을 얻고 사랑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순수와 평안과 능력을 보다 풍부하게 경험하기에 이르렀다.”(Arthur T. Pierson, The Keswick Movement, 케직운동, 32.). 이 집회에서 8천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성경을 연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열렬하게 구하였다천국이 땅에 임하는 은혜가 있었다피어슨은 성령의 충만한 임재의 역사에 관하여 다음같이 증언한다. “성령의 임재와 능력이 두러지게 나타났다어두움뿐만 아니라 빛을 느낄 수’ 있었다.성령은 빛으로 비추었을 뿐만 아니라 불과 같이 태웠다성령은 바람처럼 불어와 그곳에 모인 무리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아직까지 살아 있는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이 집회들은 일종의 하나님 임재의 영광으로 둘러싸여 있다.”(Arthur T. Pierson, The Keswick Movement, 케직운동, 31). 브라이턴 집회는 새로운 오순절 사건곧 전혀 말로 나타낼 수 없는 새 영이 부여되는 영적 계절이었다.

 

II. 케직사경회

1. 1회 케직사경회

18757월 케직사경회(Keswick Convention)"성경적 성결의 증진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모임으로서 호수지방의 휴양도시 케직에서 역사적으로 열렸다. 옥스퍼드 집회에서 크게 은혜를 받고 안식하는 신앙”(resting faith)을 경험한 캐논(Canon, 주교(主敎)) 배터스비(Thomas Dundas Hartford Battersby)가 이 브라이턴 집회에서 케직사경회를 계획하였고, 다음해 18757월에 그가 시무하는 케직 성 요한 교회의 목사관의 아름다운 뜰에서 작은 규모의 집회로 열렸다. 배터스비가 이 집회를 계획했을 때 그의 계획이 영구적이고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고 그저 브로드랜드 공원의 소유가 그의 저택 부지에 수백명을 초청했을 때와 비숫하게 생각했다. 이 사경회는 비공식적으로 소집되고 배터스비가 주관하였고 집회운영은 성령이 교회를 주관한다는 견고한 원칙과 이에 반하지 않는 다른 것들에 대하여는 융통성을 발휘하는 것이었다.(Arthur T. Pierson, The Keswick Movement, 케직운동, 38.).

1회 케직사경회에서 배터스비는 다음 같은 내면적으로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인 신자를 지향한다고 피력하였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말을 매우 유창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분명하게 신성한 삶의 비밀에 이르게 하는 사람, 기꺼이 자기를 전적으로 부인하고 자신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게 하는 사람, 우리에게 성실하고 우리를 저버리지 않을 사람, 그러나 우리의 죄를,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평강을 전적으로 누리고 거룩의 성장을 이루는 데 있어서 방해하는 것들을 매우 명확하게 밝힐 사람이다.”(“Keswick Convention, 1879,” 7, S. W. Patridge & Co.; Arthur T. Pierson, The Keswick Movement, 케직운동, 35.)

 

2. 케직의 목적과 정신

피어선은 케직사경회의 목적을 다음같이 밝힌다. “첫번째 목적이란 개인 성결의 증진이다.” 성결 증진을 위하여 첫째로 해야할 일은 주님 앞에 자신을 낮추어 조용히 그를 바라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귀기울이고, 그분이 무엇을 명령하든지 순종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Keswick Convention, 1879,” 7, S. W. Patridge & Co.) 둘째는 성화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더욱 풍성히 실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성령의 내주, 하나님의 사랑, 마음과 몸이 하늘에 계신 신랑과 완전히 연합을 이루는 것이다.(“Keswick Convention, 1879,” 8, S. W. Patridge & Co.; Arthur T. Pierson, The Keswick Movement, 케직운동, 36.). 케직운동은 실천적 성결의 증진”(the promotion of practical holiness)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두 하나”(All One in Christ Jesus)를 추구한다. 미국 아즈베리신학대학원 번디(David D. Bundy)는 다음같이 케직운동의 목적을 소개한다. “복음적 신자들이 개인적 거룩한 삶을 추구하기 위해 보이는 매년 한 주 동안 교리적 교회적 차이들은 최소화된다. 고전적 신학 범주에서 이들은 함께 개인적 사람 안에 있는 죄의 욕망과 경향을 제어함으로써 획득된 점진적 성화(progressive sanctification)를 추구한다.”(David Bundy, Keswick: A Bibliographic Introduction to the Higher Life Movements. First Frutis Press, Wilmore, Kentucky, 2-2012, 12. ) 케직운동은 교단적이거나 전통적 구조가 없으며 성령 안에서 더 높은 영성의 삶을 추구하기 원하는 개인들의 모임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당시 영국에서 1856년 이후 (1857년 제외하곤) 1870년대 지속적으로 연례집회를 가졌던 성결 운동이었던 마일드메이 서클(Mildmay Circle)의 영향을 받았다. 데이비드 베빙톤은 마일드메이 집회에 대하여 다음같이 평가한다. “마일드메이는 영국 성공회 안에 있는 복음주의 당파의 한 부분을 그 세기 중엽에 일반적으로 완영받는 것 이상으로 더 높은 영적 열망으로 이끌었다.”(David Bebbington, 영국의 복음주의 1730-1980, 250.). 그러면서도 케직 사경회는 신앙에 의한 성결을 강조한 점에서 개혁주의적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고 특징지을 수 있다.

케직사경회의 설교자들의 영적 태도에 대하여 배터스비는 다음같이 말한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의 입술이 희생제단에서 오는 성령의 불로 단련되고 순화되어서, 말하는 사람은 그들이 아니고 그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영이시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케직의 목적과 정신들은 인간의 웅변에 불과한 것에 매달리는 것을 조심스럽고 주의 깊게 피하는 것,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경험하고 얻기 위해 끊임없이 그분을 기다리는 것,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철저히 낮추려는 간절한 소원 등이 명백히 드러나는 것이다.”(Arthur T. Pierson, The Keswick Movement, 케직운동, 36.).

피어선은 그리하여 케직사경회는 처음부터 사도적 특성이 분명히 드러났다고 말한다.

사도적 성격이란 성령을 신적 선생이요, 모든 회집의 운영자로 높임으로써 시작되었으며, 그 결과, 기도가 모든 성공과 복의 중대한 조건이요, 연설을 하거나 듣는 일을 준비하는 비결이요, 말씀의 씨가 뿌려진 뒤에 싹이 나고 열매가 맺히는 비결로 강조되었다. 또한 사람의 가르침은 그 적합성이나 권위 모두 최고의 교사에게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그분과 조화를 이루는 영적 상태가 현저하게 요구되었다.”(Arthur T. Pierson, The Keswick Movement, 케직운동, 36-7.). 케직사경회에서 교회의 부흥과 성결운동을 중심으로 연합운동을 하면서 웨슬리적인 부드러운 알미니안주의와 정통개혁주의적인 부드러운 칼빈주의는 이러한 연합운동을 위한 협력에 있어서 교리적 장벽을 넘어섰다.(David Bebbington, 영국의 복음주의 1730-1980, 253). 강경한 알미니안주의(hard arminianism)는 자유주의(liberalism)로 나아가고, 강경한 개혁주의(hard calvinism)는 과격 칼빈주의(hyper-calvinism)로 나아가나 성경적이고 복음과 성결운동은 부드러운 사고 안에서 서로 연합하게 되었다.

 

3. 케직 사경회의 진행 방식

  초기 케직 사경회에는 공식적인 기구를 통하여서는 물론 개인적인 연락관계를 통하여 자발적으로 모였다. 참여자들과 지도자들이 세계도처에서 독자적으로 왔으며, 세속적인 방법으로 불러모아지지 않았다. 케직은 전도대회가 아니고 사경회, 즉 말씀을 연구하는 모임이었다. 참가자들은 매우 조심스럽게 성서를 공부하였고 이전의 집회들의 성과를 분석하였다. 사경회에는 성경학원생들과 기독교 사역자들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초기 케직 사경회의 핵심인물들이었다. 초기 사경회에서 가장 핵심적인 방법은 설교였다. 설교자들은 단순하면서도 명료하게 복음과 성결을 가르쳤다. 케직사경회는 잡지 발간 등의 여타의 방법들도 수용하였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은 구술(口述)에 의한 가르침이었다.

  피어선은 케직사경회의 진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간주되고 시행된 방식을 다음의 여섯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성령이 모든 집회의 사회자와 최고 운영자시다. 모든 집회를 성령의 인도 혹은 주도아래 위탁한다. 둘째,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린다. 서로간에 축복을 받고 나누기 위해 가장 필수적인 것으로서의 기도 안에서 하나님을 기다림이다. 셋째, 사람경배를 피한다선생들은 그들의 재능이 아니라 받은 은혜와 말씀을 해석하는 능력으로 평가된다. 넷째, 세속적 매력과 후원으로부터 독립된다. 숫자는 성공의 지표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재정은 직접 호소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내는 헌금으로 충당한다. 다섯째, 예배, 증언 그리고 교제의 사도적 단순성을 지키고 계발한다. 음악과 가르침 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은 하나님 영광과 성결한 삶을 증진시키기 위한 것에 종속한다. 여섯째, 신자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다. 케직 강단은 성령의 영감, 그리스도의 신성, 성육신, 구속 및 부활, 성령으로 중생, 미래 나라의 상급 등 중요한 기본 사항에 대한 신자들의 일치라는 기반에 세워져 있다.“(Arthur T. Pierson, The Keswick Movement, 케직운동, 77.).

  케직의 모임에서는 예배나 성경공부 등에서 주로 회중 전체가 찬양을 했다. 독창은 거의 없었다. 찬양은 말씀을 표현한 것들이었다. 그들은 성령의 임재에 대한 확신을 위해 기도 안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렸다. 또한 자발적인 헌금을 위해 케직 천막에는 나무로 만든 헌금함을 비치하였다. 케직 사경회에 참석하였던 이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통한 사도적 방법을 단순하게 받아들여 자기의 가정과 사회에서 그리고 해외로 선교사가 되어 나아갔다.

  케직의 강사는 특정한 교파의 교리를 내세우지 않는다. 그는 신학 학위를 가졌어야 할 필요도 없고 목사가 아니어도 가능했다. 그렇다 해도 케직이 반지성주의를 위한 것은 아니다. 세계적인 신학자들이 강사로 초빙되었고 케직의 성결교리 즉 믿음으로 구원을 받듯이 성화도 믿음으로 얻게 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이해하고 실제로 자신의 생활속에서 실증한 자로서 남에게 진리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자로 선택되었다.

  케직사경회는 대략적인 일정은 다음과 같았다. 월요일에는 죄에 대한 견해에 따른 일반적인 조사, 화요일에는 죄를 처리함, 수요일에는 그리스도의 능력 체험, 목요일에는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과 휴식, 금요일에는 봉사를 위한 성령의 능력, 토요일에는 선교, 성찬식, 교제 이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All one in Christ Jesus)(3:28)를 실감할 수 있는 7천여명을 수용하는 대형 천막 속에서 그야말로 인종, 언어, 문화, 신분의 모든 벽을 넘어 함께 떡을 뗀다. 천막은 집회가 끝나면 거두어지지만 주 안에서 함께 나누는 성도들의 교제와 주에 대한 사랑은 영원히 계속된다는 상징과 축복과 감격이 교차하는 시간이다.

 

4. 케직사경회의 파급력

1875년 제 1회 개최 이후 케직사경회는 매해 개최되었고 해를 거듭할수록 꾸준히 성장하였다. 1901-2년에는 3천 명 정도 수용가능한 두 개의 천막이 매일 사용되었다. 이외에도 비교적 넓은 서너 곳의 집회 장소들이 있어서 보다 적은 규모의 모임, 사역자, 젊은 남성, 젊은 여성 등의 모임이 이루어졌다. 케직사경회가 열리는 10일 동안 대략 1만 명의 사람들이 모이고, 이 연례모임에서는 유명도가 있는 강사들이 40-50명 정도가 모인다. 그리고 보다 넓은 의미에서 이 운동의 역사와 연결되어 있고 이 운동의 목적과 가르침을 찬성하는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모든 땅에 흩어져 있다. 케직사경회 기간에는 영국 국내 뿐 만아니라 해외에서도 많은 대표들이 마치 유대인들이 장막절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처럼 이 연례 축제에 참석하러 왔다. 이 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파급되고 알려짐에 따라 케직사경회 문헌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케직 도서관이 생겨나 신앙생활(Life of Faith) 이라는 정기 간행물이 생겨 영적 삶에 관한 케직의 가르침을 전달하게 되었다. 케직사경회는 캐나다, 인도, 미국, 남아프리카, 스코틀랜드, 독일, 프랑스, 웨스트인도제도, 동양 (머리말에서 언급한 바같이 한국 초창기교회의 부흥운동) 등에까지 파급되었다. 그리고 케직운동은 미국근본주의, 오순절주의, 미국성결운동에 기념비적인 영향을 끼쳤다.(David Bundy, Keswick: A Bibliographic Introduction to the Higher Life Movements. First Frutis Press, Wilmore, Kentucky, 2-2012, 12.).

말년의 무디는 미국에 케직 교사들을 초청하고 그 자신도 케직 강단에서 설교하였다. 무디는 1874년 초 죄의 용서만큼이나 온전한 성화에 관하여 설교하였다. 무디는 참된 기독교인은 세상과 그 재미에 대한 취미와 소망을 가지고 있지 않다. 기독교인은 세상에 대하여 못박혔으며, 세상은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못박혔다”(The Christian, 22 January 1874, p. 5.)고 역설하였다. 무디는 성화를 성결주의적 관점보다는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수용하였다. 무디는 1871이전에 알지 못했단 성령의 임재와 능력이 그의 영혼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의식적으로 체험하였다. 무디는 도덕적 투쟁의 삶을 너머섰다고 주장하는 완전성결주의를 비판하면서 죄악된 본성은 제거될 수 없다며 완전 성화를 가르치는 것을 부인하는 개혁주의 성화론에 입장에 섰다. 이는 케직 영성의 성화론의 입장과 같은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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