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날씨와 바람의 영향으로 체감 온도가 내려가면서 실로의 황폐한 돌무더기는 더 차갑게 느껴졌습니다. 영상의 잔재가 내 머릿속에 감돌았는데, 불레셋에 의해서 짓밟히고 불 타버리는 성막의 마지막 장면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형식적인 종교로 전락해 버린 이스라엘을 향한 가장 큰 심판은 성막의 파괴와 법궤를 빼앗긴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를 향한 역사의 메시지를 들으면서 과연 우리의 모습은 어떠할까를 고민하였습니다.

차가운 날씨였지만 한식 도시락을 공원 탁자에서 실로의 마지막을 생각하면서 먹었습니다. 멀리서 사무엘이 다가오는 듯한 환영을 잠시 바라보면서 실로를 떠나 세겜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세겜은 사마리아 지역의 중심 도시로서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밧담 아람에서 돌아온 야곱은 이곳에 단을 쌓고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고 이름으로 부른 곳이며, 디나 사건으로 이곳에 우상들을 묻어 버리고 떠나서 벧엘로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을 팔아 버렸던 곳이기도 하고, 후에 요셉의 해골을 묻은 곳이기도 합니다. 여호수아는 이곳에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모우고 고별사를 하면서 나와 나의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다는 유명한 말를 했던 곳입니다. 그리고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기드온의 70명의 자식들을 사살한 곳이기도 합니다. 후에 여로보암이 북쪽 이스라엘을 세우고 세겜에 수도를 새롭게 건축하였습니다.

그리고 세겜은 유명한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을 좌우로 놓고 형성되어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세겜에 있는 아스카라 지역은 예수님이 찾아 가셨던 수가성 우물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바로 야곱의 우물이라고 말하는 그 우물이 남아 있는 그리스정교 교회당을 방문하였습니다.

비잔틴 시대의 교회당이 무너지고 그 위에 다시 그리스 정교회가 건축한 교회당입니다.

지하에 우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그리스 정교의 주교가 그곳에서 우리를 반겼습니다. 본래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는 곳인데 우리가 그곳에서 파는 물건들을 사주자 허용해 주셨습니다.

주교님은 연세가 많으신 분으로 매우 자상하시고 유모가 있는 분이셨습니다. 계속해서 작은 병에 우물을 부어 상품으로 만들고 계셨습니다.

주교님은 이미 교회당 곁에 자기 묻힐 관을 마련해 놓으셨다고 하면서 이곳에 있는 자신의 사명의 중대함을 인식하고 계셨습니다. 조국을 떠나 이곳에서 일평생을 바치고 있는 그 분이 존경스러워 보였습니다.

아쉬움이 아직도 남는 것은 그 우물물을 한번 마시지 못하고 그냥 돌아온 것입니다. 믿음으로 마시면 될 것을 행여 물 때문에 배탈이 날 것을 염려하여 바라다 보기만하고 떠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 우물곁에 계셨던 주님을 묵상하면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내게 주신 주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렸습니다. 야곱이 팠던 그 우물이 몇 천 년이 지나도록 계속해서 솟아오르는 샘이라는 것을 보면서 매우 상징적인 메시지를 던져 주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뿐더러 이제는 내게도 영원한 생명수가 흘러넘쳐서 다른 사람의 갈증을 해결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교회당을 나오면서 수가성 여인이 달려갔을 주위를 돌아보았습니다. 지금은 빼곡하게 집이 들어서서 그 당시에 배경과는 달라졌지만 그래도 메시야가 오셨습니다.” 라는 메아리는 아직도 남아 있었습니다.

나는 그 생생한 복음의 소리를 가슴에 녹음하면서 그 여인의 얼굴을 영상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교회당에서 멀지 않는 곳에 세겜의 중요한 유적지인 텔 발레타를 방문하였습니다.

   
   
   
 

이 유적지에 서서 보면 왼쪽으로는 에발 산이 있고 오른편으로는 그리심 산이 있습니다.

요세프스에 의하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군대의 반은 그리심 산에 반은 에발 산에 배치시켜서 세겜을 공격하여 점령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고별사를 하면서 믿음을 맹세했던 언약의 돌비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 주위로 제단의 유적들과 24개의 거주지 층이 발굴되어 있었습니다.

언약의 돌비 앞에 서서 귀를 기울여 다시 한 번 돌들이 소리 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나와 나의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노라여호수아의 비장하고 확신의 찬 소리가 내 심장을 두드렸습니다그리고 돌처럼 분명하게 내 심장에 새겼습니다.

밤이 다가 오지만 그리심 산에 올랐습니다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해야 할 일들을 예언으로 말씀하시면서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제단을 쌓고 율법을 돌에 기록한 후에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 가서 축복과 저주의 율법을 선포하라.” 라고 했습니다.

이 명령을 여호수아가 그대로 실행했다고 여호수아 830-35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포로 귀환 후에 성전을 다시 지을 때에 사마리아 인들은 그리심 산에다 성전을 따로 짓고 이곳이 신앙의 정통성을 가진 곳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수가성 여인도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는 것이 옳습니까? 여기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는 것이 옳습니까? 아주 난해한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심 산에 오르면서 사마리아인들의 거주지를 지나치면서 유월절에 양 잡는 장소를 눈 여겨 보았습니다. 높은 산 위에서 세겜의 야경을 내려다보면서 우리는 뜨겁게 기도하고 내려왔습니다.

세겜을 떠나기 전에 세겜의 아주 유명하다는 크나페를 먹으러 들렀습니다.

아주 달콤하고 맛이 있었지만 당뇨에 시달리는 나로서는 맛만 보고 많이는 먹지 못했습니다.

여행을 할 때마다 나에게는 당뇨와의 싸움이 매우 힘들게 계속됩니다. 대부분의 현지 음식이 당에는 좋지 않기 때문에 항상 절제해야 하는데, 소식을 하고 야채만 먹으면 기운이 없어서 여행하기가 매우 힘이 듭니다.

그래서 적당히 먹고 남다르게 많이 움직여서 운동으로 조정을 해야 합니다그런 나의 모습을 보면서 성도들은 청춘 같이 다니신다고 속 모르는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남이 모르는 비밀이 있습니다. 그 비밀은 숨겨야 하는 것도 있고 그냥 숨겨지는 비밀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타나는 현상만 가지고 함부로 비판하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밤길을 따라 우리는 드디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였습니다.

비록 호산나 소리를 들으면서 입성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거룩한 성이라는 노래 정도는 들으면서 감격스럽게 입성해야 하는데 모두들 피곤에 지쳐서 눈을 감고 들어와야 했습니다. 구시가지 가까운 곳에 숙소가 있었지만 밤이 되어서 방향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행에 마지막 밤을 보내는 숙소라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생겼습니다일정이 어느 사이에 벌써 끝났구나! 내일 예루살렘 순방을 마치면 공항으로 가서 귀국한다고 하니 마지막 밤의 마무리가 많아진 것 같았습니다.

짐도 정리하고 글도 정리하고 사진도 정리하고 내일 예루살렘도 다시 정리해야 했습니다. 사진을 찍어야 하기 때문에 나는 미리 준비하고 머리에 입력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음 날 새벽에 일어나 아내와 함께 주위를 산책하며 돌아보았습니다. 전철이 있는 도로위에서 새벽을 깨우는 많은 노동자들과 출근하는 회사원들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이 우리를 보는 눈이 범상치가 않았습니다.

낮에는 많은 이방인들이 거리마다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그렇게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었는데 이른 새벽에 웬 동양인들이 카메라를 메고 사진을 찍고 있으니 그리 곱게 보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노동자들은 대부분 팔레스타인들로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차 한 대가 오면 몇 사람을 태우고 가고 다시 기다리고 하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의 포도원 품꾼 비유가 생각났습니다. 저 사람들 중에는 그냥 돌아가야 하는 자도 있을까? 가난에 찌들린 모습들을 보면서 한 하늘 밑에 살면서 민족이 다르다는 것 때문에 저런 어려움을 겪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가난은 어떻게 보면 현실적인 문제인데 부자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오늘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 순례를 시작하는 아침 하늘이 맑아 오는 것을 보면서 오늘은 밝은 예루살렘을 보겠구나 하는 기대감에 부풀었습니다. 그 동안 예루살렘을 방문할 때마다 비가 오든지 눈이 와서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때와는 달리 오늘 순례의 순서는 감람산 정상에서 시작하였습니다감람산은 기드론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예루살렘 구 도시에 동쪽에 위치해 있는 유대산지에 속하는 산입니다. 감람산이라고 말하는 것은 올리브 나무가 많다는 것에서 유래했습니다. 이곳은 성경에서 우리 주님의 사역과 말씀에 자주 등장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벳바게를 거쳐서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고 최후의 만찬을 마치신 후에 감람산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기도를 하셨으며 때로는 이곳에서 가르치시고 쉬시고 붙들리시고 승천하신 뜻 깊은 장소입니다.

예루살렘은 주님의 심장과 같은 곳으로 나의 심장이 주님과 함께 동행해야할 곳입니다. 곳곳에 주님의 흔적과 눈물과 아픔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배신당하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심문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곳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감람산에 서서 예루살렘을 바라보면 그 주님의 걸음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마지막 날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일정이 매우 뜻 깊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내 마음과 눈과 귀를 열어 주님을 뜨겁게 만나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주님과 함께 고난당하고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한 모습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결단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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