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펜젤러·언더우드 한국선교 130주년 기념 국제심포지엄이 정동제일교회에서 지난 531일 열렸다.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언더우드·아펜젤러 선교사의 신학생 시절 모습에 대한 연구 발표가 있어 참가자들의 주목을 끌었다.

미국 선교사인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와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두(Horace Grant Underwood)는 각각 드류신학교와 뉴브런스윅신학교에서 선교사로서 소명을 준비했다. 이 두 선교사의 신학생 시절에 대해서 살펴 보는 것은 한국선교의 배경을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다음은 하버드 신학대학에서 석 박사학위를 받고 뉴브런스윅신학교에서 30년 넘게 교수로 재직 중인 존 코클리(John W. Coakley) 교수의 발표를 요약 소개해 본다.  

▲ 존 코클리교수가 강의하고 있다.

선교의 위기

미국 해외선교운동의 출발점은 18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런데 피어선(A. T. Pierson)같은 신학자는 1880년 대에 들어 세계선교의 상황이 급격하게 변화되었다고 진단했습니다. 그 이전 보다 갑자기 전세계적으로 복음에 대해 상당히 더 개방적인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주된 이유로 서방 국가들이 조약에 의해, 다른 말로 강압에 의해 무역을 확장하게 되면서 그 이전에는 선교사들을 배척하였던 나라들이 이제는 선교사를 허용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닫혔던 선교의 문이 활짝 열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피어선에 따르면 이러한 상황이 위기가 되는 이유는 열린 문들이 곧 다시 닫힐 수도 있다는 어렴풋한 인식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직 시간이 있는 동안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위기의식으로 이 세대 내에서의 세계복음화(The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라는 구호가 만들어졌습니다. 이 구호를 따라 1894년에 천명도 안되던 선교사가 1900년에는 5400, 그리고 1915년에는 9000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드류신학교(Drew Theological Seminary) 시절의 아펜젤러

아펜젤러가 신학교에 등록했을 때 이런 세계복음화에 대한 절박감의 정신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아펜젤러는 본래 공동적 실재(a corporate reality)로서의 신앙을 강조하는 독일개혁교회 소속이었는데, 대학생이 되어 어느 부흥집회에서 개인회심을 체험하고 187921세 대학생으로 독일개혁교단을 떠나 감리교인이 되었습니다. 그 후 1882년 가을에 대학을 졸업하고 감리교 목회를 준비하기 위하여 드류신학교에 등록했습니다.

당시 드류신학교는 확고한 감리교적 뿌리를 반영하여 학문적인 일이 신학공부의 가장 중요한 것이 되도록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설교와 같은 실천적인 일이, 그리고 암묵적으로는 복음 전도설교가 중심초점이 되었습니다. 아펜젤러 재학시절의 학교요람은 모든 분야의 신학을 신중하게 가르치되 설교하는 법을 부지런히 배양시킨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신학에 있어서 교회의 필요가 최우선권을 가지며 학생들은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해도 된다고 이해되었습니다. 아펜젤러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고, 그는 신학교 마지막 학년을 마치기 전에 한국으로 떠났습니다.


뉴브런스윅신학교(New Brunswick Theological Seminary) 시절의 언더우드

언더우드에게는 아펜젤러에게서 봤던 결정적인 회심체험과 교단변경과 같은 뚜렸한 사건이 없었습니다. 언더우두는 어린시절부터 계속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언더우드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멘토 역할을 했던 윌리엄 아우구스투스 반 브란켄 마본(William Augustus Van Vranken Mabon)목사가 있었습니다. 마본 목사는 화란개혁교회 소속의 목사로 1881년 언더우드가 등록한 뉴브런스윅신학교의 교리 및 변증 신학교수가 되었습니다.

마본 목사는 근본적으로 다방면에 관심을 갖는 활동적인 목회자였습니다. 그에 관한 당시의 평가는 보기 드문 사업적 재치혹은 그의 삶은 실천적인 일들로 가득 차서 저술적인 활동에 몰두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등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본 목사는 뉴더햄에 있는 그의 교회를 통해서 13개의 교회를 분립개척했고, 교수로 활동하면서 신학교 인근에 두 개의 교회를 설립했습니다.

언더우드도 마본 교수의 영향으로 신학생 시절부터 복음 전도의 일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신학생 언더우드는 그 당시 뉴브런스윅 지부를 막 설립하고 있던 구세군에서 열정적으로 자원봉사를 했습니다. 또한 그는 신학교에서 800미터 떨어진 제일개혁교회(First Reformed Church)에서 비공식적인 부목사로 활동했습니다. 1883년에는 담임목사 없었던 폼프톤개혁교회(Pompton Reformed Church)에 설교자로 활동하며 선교헌금을 증가시키기도 했습니다.

아펜젤러가 다녔던 듀류신학교는 19세기 중엽 민주국가 미국에서 설교자들에게 대단한 성공을 거둘 수 있게 했던 서민들에게 호소하는 전통을 따랐습니다. 이 전통을 따라 신학을 마치지 않은 신학생이라 하더라도 이미 설교자로 대우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드류신학교보다 훨씬 오래된 뉴브런스윅 신학교는 유럽 기독교 전통에서 물려받은 학구적인 목회라는 오랜 전통을 보존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학을 마치지 않은 신학생들이 설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신학생 언더우드는 학구적 목회라는 신학교 전통 속에서 신학생 시절 부터 복음 전도와 설교에 열심을 내는 좀 특별한 학생이었습니다.

▲ 심포지엄이 열리고 잇다.

한국으로의 부르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188310월 코네티컷주 하트포드에서 개최된 신학교간 선교사 연맹(The Inter-Seminary Missionary Alliance)에 참석했습니다. 당시 아펜젤러는 신학교 2학년이었고, 언더우드는 3학년이었습니다. 이 모임에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해외 선교사가 되기로 결정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 이후 여러 과정을 거쳐 18841220일에 아펜젤러 선교사는 감리교선교회에 의해서 한국 선교사로 확정되었고, 188410월에 언더우드는 장로교선교위원회에 의해서 한국 선교사로 호명되었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확실히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두 선교사의 형성은 부분적으로 자신들의 성격의 실현이며, 부분적으로는 그들의 신학교에서 마주하였던 교육 전통의 산물이며, 또한 부분적으로는 선교의 위기라는 개념과 그 당시 선교정신의 결과이었습니다.

이러한 선교정신에 대한 몇몇 비판이 있지만, 그 자체의 상황 속에서 조망된다면, 19세기 말의 선교정신은 한국이든 미국이든 기독교 선교역사에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는 단지 우리의 선조로서만이 아니라, 이 시대의 세계 선교를 위한 대화 상대자 이며 협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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