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 한국전쟁 65주년에 붙이는 글

▲ 이병길 목사

한반도에서 우리는 준비하지 않은 전쟁을 치름으로써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또한 승리는 많은 비용을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패배할 때 치러야 할 비용보다는 훨씬 저렴할 것이다.’

여성 최초의 퓰리처상(the Pulitzer Prize, 1951) 수상작War in Korea(1951)의 저자 마거리트 히긴스(Marguerite Higgins, 1920-1966)의 말이다. 저자는 내일을 볼모잡힌 한국전쟁 기간이던 1951, 당시 서른 한 살의 나이로 그의 책을 들고 미국 전역을 다니면서 강연을 통하여 대한민국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을 미국 시민들에게 우리는 한국을 도와야 합니다.’라고 애타게 호소했다. 그의 책은 아쉽게도 저자가 세상을 떠난 지 40여년이 지난 20093월 코러스에서자유를 위한 투쟁이라는 제목으로 겨우 번역 출판되었다.

한국전쟁은 미국이 치룬 가장 큰 제2차 세계대전과 가장 길었던 베트남전쟁 사이에서 미국인들에게 거의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일지 모른다. 미국에서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안타까운 것은 한국인들에게서 한국전쟁은 어쩌면 잊혀지고 있는 전쟁일지 모른다. 전쟁 중 621,479명의 한국 젊은이들의 희생은 조국을 위한 당위적 명분이었다고 치더라도 미군을 비롯한 154,881명의 유엔군의 희생은 우리에게 남겨진 빚이다. 유엔군 사령관을 역임한 클라크 장군(M. W. Clark, 1896-1984)은 그의 책From the Danube To the Yalu(1954, 1988)에서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들의 평균 나이는 18~26세라고 했던가. 마거리트 히긴스는 그들의 희생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마거리트 히긴스

홍콩태생 아일랜드 계 미국인: 마거리트 히긴스는 미국인 여성 종군기자, 1950년대 가장 유명한 저널리스트 작가다. 드레스 대신 군복이 더 잘 어울린 여성, 그는 192093일 영국 조차지(租借地) 홍콩에서 선박회사에 근무하던 아일랜드계의 아버지 로렌스 히긴스(Lawrence Higgins)와 프랑스 여성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196613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마흔 다섯 살의 나이로 삶을 마쳤다. 히긴스는 출생 배경 덕분에 중국어와 프랑스어 및 영어에 능통했다. 부모와 함께 홍콩에서 캘리포니아 주 오클랜드로 이사한 히긴스는 미국의 명문 여자 사립고등학교 안나 헤드 스쿨(Anna Head School for girls, Berkeley, CA.1887)을 졸업했다.

1965년 히긴스는 베트남 여행 중 리슈마니어증이라는 풍토병에 걸려 치료 중 사망했다. 히긴스는 언론인으로서는 드물게 미국을 위해 싸우다 희생된 전사자들이 잠든 버지니아 알링턴 군 알링턴국립묘지(Arlington National Cemetery)에 안장되었다(2-4705-B).

혼인과 자녀: 히긴스는 19427, 하버드대학 철학과 강사 스탠리 무어(Stanley Moore)와 혼인, 딸 로렌스 다니엘 히긴스(Lawrence Daniel Higgins)와 마거리트 드 고다드 히긴스(Marguerite de Godard Higgins)를 낳고 1948년에 이혼했다. 1952107일 당시 베를린 주둔 미 공군 정보국장 중령 윌리엄 홀(William Evans Hall, 1907-1984; 중장예편)과 열세 살 연상의 나이를 극복하고 재혼, 생후 5일 만에 요절한 샤론리(Sharon Lee), 로렌스 오히긴스(Lawrence O'Higgins), 린다 마거리트(Linda Marguerite)를 낳았다. 히긴스는 가정 대신 전쟁터를 지킨 탓이었을까 혼인 생활이 순탄치 않았다.

뉴욕 헤럴드 트리뷴 기자: 마거리트 히긴스는 미국 서부의 명문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B.A, 1941)과 동부의 명문 컬럼비아 언론대학원(M.D)을 거쳐 1942뉴욕 헤럴드 트리뷴(the New York Herald Tribune) 지 기자(1942-1944)가 되어, 독일 특파원(1944-1947)으로 시작하여 베를린 지국장(1947- 1950), 도쿄 지국장 겸 특파원(1950-1951), 트리뷴 스테프(1951-1958), 워싱턴 통신원(1958- 1963), 뉴스데이(Newsday, 1963-1965)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마거리트 히긴스의 저작: War In Korea: The Report Of A Woman Combat Correspondent, 1951; Jessie Benton Fremont: California Pioneer, 2008;News Is A Singular Thing, 1955;Our Vietnam Nightmare, 1965

 

눈으로 직접 목격한 한국전쟁

히긴스는 제2차 세계대전 취재와 베트남전쟁 종군기자, 특히 한국전쟁에서 그의 눈부신 활약은 전 세계로 하여금 한국전쟁을 주목시키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마흔 다섯 살에 그의 삶을 달리할 때까지 미국 시민들에게 총애를 한 몸에 지녔던 여류 언론인이다. 히긴스가 종군기자로서 명성을 떨친 것은 19454월 말,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노르망디(Normandie) 상륙작전 직후 연합군과 함께 지프차를 타고, 종군기자로서는 처음 독일 다하우(Dachau)의 나치 수용소를 취재 폭로하면서다. 히긴스의 마흔 다섯 살의 짧은 생애 중 그의 열정을 쏟아 부어 명성을 빛냈던 시기는 바로 한국전쟁 종군 기자로 활동할 때였다.

도쿄지국장 겸 특파원: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자뉴욕 헤럴드 트리뷴은 중국어에 능통한 히긴스를 일본 도쿄 지국장 겸 특파원에 임명하여 중국의 상황을 기획 취재하기로 했다. 19505월 말, 히긴스가 도쿄에 부임한 지 약 한 달이 지날 무렵,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1950625일 새벽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미국으로 하여금 공산주의의 힘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한 엄중한 사건이었다. 한국전쟁은 히긴스에게 동북아시아 최후의 비공산주의 전초기지인 한국이 무너지고 있다는 절박감과 대한민국은 세계인들을 잠에서 깨우는 일종의 국제적인 자명종 시계의 역할을 한다는 느낌을 갖게 했다. 히긴스는 한국전쟁 시작 후 이틀만인 27일 일본 도쿄에서 미군 수송기를 타고 김포공항에 착륙했다. 미군 수송기는 서울 주재 미국 시민을 일본으로 철수시키기 위해 특별히 편성된 것이었다.

김포공항은 북한군이 쏜 박격포 포탄과 소련제 야크(Yak)기의 폭격으로 활주로가 어지럽혀져 있었다. 히긴스는 다른 신문사 기자들 세 명과 함께 여성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포연(砲煙)을 헤집고 서울 시내에 잠입하는 용기를 보였다. 미 고문단 사무실에서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세운 히긴스는 다음 날 한강교가 폭파되는 충격적인 장면과 29일 서울이 북한군에게 함락된 사실을 긴급 타전했다. 히긴스는 미 고문단과 함께 급조된 뗏목을 이용하여 겨우 한강을 건넜다. 그리고 임시수도 수원을 향해 쫓기듯 걸었다.

유일한 여성 종군기자: 히긴스는 한국전쟁을 취재한 270명의 외신 종군기자 중 유일한 여성 종군기자다. 히긴스가 미군에서 여성의 전선 취재 금기를 깨고 유일한 여성 종군기자로서 전선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D. MacArthur, 1880-1964) 장군의 배려 때문이었다. 히긴스는 한반도에서 공산주의 침략을 막아내야만 전체주의 정권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저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히긴스는 30세 때 한국전쟁판에 뛰어 들어 온 몸으로 부딪히는 취재활동을 통하여 전 세계인들에게 공산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기자로 알려지고 있다. 때는 미국 정치계에서 이른바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이었던 매카시즘’(McCarthyism)에 대한 적색공포’(Red Scare)가 전국을 휩쓸고 있을 때였다.

오산 죽미령전투: 히긴스는 국군이 파죽지세로 남쪽으로 계속 밀리는 불길한 전세를 지켜보면서, 오산(烏山)에서 죽미령전투(竹美嶺, 1950.7.5)를 직접 취재했다. 죽미령전투는 일본에서 긴급 공수된 찰스 스미스(Charles Smith) 휘하의 제24보병사단 예하부대 연대장 스티븐슨(Richard Stevenson)의 제21연대 제1대대 선발대 540명과 북한군 간의 한국전쟁 시작 후 첫 교전이었다. 여섯 시간의 전투는 미군 181명의 사상자를 낸 미군의 참패였다. 중국의 넌-픽션(Non-fiction) 작가 왕수쩡(王樹增)한국전쟁에서 2차 세계대전에서 얻은 미군의 불패신화는 오산이라는 극동 지구의 한 구석에서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고 꼬집었다. 히긴스는 죽미령전투에서 북한군의 총을 맞고 희생된 미군의 한국전쟁 첫 전사자를 당시 19세의 바주카포 사수 섀드릭(Kenneth R. Shadrick, 1931.8.4-1950.7.5) 일병이라고 했다. 그는 미 제24보병사단 제34연대 소속이었다.

현장에서 이를 직접 취재한 히긴스는 신속하게 타전했다. 섀드릭 일병은 바주카포로 북한군 T-34 탱크를 향해 조준하는 순간 가슴에 북한군 저격수가 쏜 총탄을 맞고 현장에서 절명했다. 히긴스는 이 장면을 지켜보면서 기사를 썼다. 그러나 히긴스의 죽미령전투 기사는 순식간에 미군 지휘관들의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켰다. 미군의 참패 사실을 지나치게 노출시켰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당시 주한 미 제8군 사령관 월튼 워커(Walton Walker, 1889-1950) 장군은 히긴스의 기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전선에서는 여성용 화장실이 마련되지 않아 불편할 테니일본으로 철수할 것을 에둘러 추방 압력을 가했다. 우여곡절 끝에 히긴스의 추방은 맥아더 장군의 배려로 수습되었다.

낙동강방어선전투: 낙동강방어선전투(1950.8.4~9.15)가 한창이던 817, 고 김성은(1924-2007) 중령(당시)은 한국 해병 제1사단을 이끌고 경남 통영상륙작전을 성공, 통영과 거제도를 북한군 제7사단으로부터 탈환하는 획기적인 전과를 올렸다. 물론 한국 해병 역사상 단독 첫 상륙작전이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히긴스는 한국 해병의 놀라운 전과와 그 용맹을 한국 해병은 귀신마저 잡을 정도’(They might capture even the Devil)라는 기사를 뽑았다. 이 기사에서 귀신 잡는 해병’(Ghost-catching Marines)이 한국 해병의 별칭이 되었다고 한다. 어쨌던 히긴스는 낙동강전투에서 한국군의 용맹을 보았다. 전쟁 초기 외신 종군기자들과 미군들에게 일부 한국군은 몹시 불쾌한 감정의 대상이었다. 일부 한국군은 미군 지프차들과 트럭을 개인 소유처럼 사유화 했고, 미군이 전진하는 도로를 따라 후퇴하면서 진로를 방해했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그 때나 재금이나 우리는 왜 공사(公私)를 잘 분간하지 못하는 것일까?

인천상륙작전 평화의 종소리: 인천 상륙작전에 대한 맥아더 장군의 보좌진들은 불가(不可) 견해를 밝혔다. 전사가들은 인천상류작전을 맥아더의 도박(賭博)이라고 평한다. 그러나 맥아더는 적()들도 자신의 보좌진 처럼 생각할 것이라는 그 허점을 이용하여 작전을 감행했다. 맥아더가 미 합동참모부의 상륙작전 연기를 무시하고 속전을 단행한 것은 북한을 돕는 중국 인민지원군’(CPVA, Chinese People's Volunteer Army, 일종의 위장명칭; 정규군 명칭은 중국 인민해방군, PLA, People's Liberation Army, 1927; 이하는 지원군으로 표기) 개입 이전에 한국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유엔의 승인을 받아냄으로써 한반도에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날 수 없게 한다는 전략적 목적이 있었다. 그 때쯤 남한에는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의 막강한 화력이 집중되어 있었다. 특히 해군과 공군력은 막강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중국 지원군은 미동(微動)을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한국전쟁에서 풀지 못한 종군기자들의 의문이 되었지만, 그 의문은 유엔군의 북진공세 후퇴에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히긴스는 미 해군 함정에 여성 승선 금기 전통을 깨고 가까스로 여성 기자의 취재 권익을 찾는데 성공했다. 260척의 함정이 동원된 작전은 48시간의 대형 함포사격 후 상륙이 시작되었다. 히긴스는 미 해병의 상륙정(LCVP)을 함께 타고 북한군의 포탄이 빗발치는 인천항 부두에 상륙했다. 불타는 인천시 가두에는 공산치하에 있었던 시민들이 나와 유엔군을 맞았고, 바로 그 때 상륙작전 완료를 알리는 교회당 종소리가 누군가에 의하여 울렸다. 

전쟁을 끝내기 위한 북진공세: 인천상륙작전에 이어서 서울을 탈환한 맥아더는, 1950101일 국군에 이어서 109일 미 제8, 그리고 11일에는 유엔군의 38도선 돌파와 함께 북한지역으로의 진격을 각각 명령했다. 유엔군의 북진은 물론 유엔 총회 결의안(1950.10.7)에 근거한 것이었다. 맥아더는 사전에 북한 김일성(1912-1994)의 항복과 유엔 결의안 준수를 촉구했다. 김일성은 단연 거부했다. 유엔군이 한반도의 분단선을 넘어서 북진에 총공세를 펴기 시작한 사흘 후 그제서야 중국 지원군이 압록강을 건넜다. 치밀하게 세운 작전이었다. 맥아더 장군의 북진 공세는 인천상륙작전 보다 더 무모한 도박이었다. 북진은 서둘러서 전쟁을 끝내기 위한’(‘end the war' offensive) 작전이었다.

그러나 청천강(淸川江)까지 북진했던 미 제8군 전초부대가 중국 지원군에게 가로막히자 맥아더의 전쟁을 끝내기 위한북진 공세에 빨간불이 켜졌다. 중국 지원군은 서부 전선의 주력부대 미 제8군과 동부전선 원산에 상륙한 미 육군 제10군단과 해병 제1사단이 개마고원의 장진호 내륙 길을 따라 북한의 임시수도 강계(江界) 점령을 향해 북진하는 미군 병력을 분리시키는 작전을 폈다. 중국 지원군의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이로써 맥아더의 북진작전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는 북진작전에 대한 책임을 맥아더에게 물었다. 히긴스는 맥아더를 정치와 여론의 희생양이라고 표현했다. 인천상륙작전에서 군의 천재로 호평을 받았던 맥아더는 일순간에 무능한 인물로 전락했다. 히긴스는 미국 일부 언론의 변화무상함을 꼬집으면서도 맥아더에 대하여 그는 자신의 전설이 쳐놓은 덫에 걸렸다.’고 혹평했다. 히긴스는 계속해서 맥아더의 보좌관들이 만들어놓은 신화적 존재 맥아더가 군사적 실수를 하자, 온 세상이 충격을 받고 화가 치밀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신화를 허물었다. 세계는 그를 보통 사람으로 보았다면 용서했겠지만, 신화적인 인물로 생각했었기 때문에 용서할 수 없었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히긴스는 맥아더에 대하여 그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사람들조차도 맥아더로부터 역사에 남을 위대한 지휘관이라는 명성을 배앗을 수는 없을 것이라는 자신의 소견을 밝히기도 했다.

히긴스는 개인적으로 맥아더를 존경했고, 한국전쟁 초기 수원 비행장에서 처음 맥아더를 만나서 몇 차례 인터뷰를 했으며, 맥아더의 전용기 바탄’(Bataan) 기에 동승해서 도쿄를 오가기도 했다.

중국 지원군 30개 사단에게 미군이 택할 수 있었던 상황은 후퇴뿐이었다. 히긴스는 맥아더가 희생양이 된 상황에서도 미국의 국익과 동맹국 대한민국의 희망을 놓치지 않으려는 건전한 노력을 보였다. 대책 없는 폭로성 언론과는 다른 면모를 보였다. ‘북한으로부터 유엔의 후퇴는 우리 미국 역사를 반전시킨 중요한 사건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우리는 싸우면서 후퇴함으로써 미군의 역사에 영웅적인 이야기를 하나 더 보태주었다.’ 히긴스가 말한 그 영웅적인 이야기 하나는 바로 장진호전투(長津湖, The Battle of Chosin Reservoir)에서 보인 미 해병 제1사단의 용맹을 가리킨다.

 

장진호전투에서 히긴스가 발견한 희망과 감동

장진호전투(1950. 11. 26-12. 11)는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모스크바전투, 스탈린그라드전투와 함께 3대 동계(冬季) 전투로 손꼽히며, 한국전쟁 중 최악의 10대 전투 중 하나이기도 하다. 히긴스는 미 해병대 창설(USMC, 1775) 이래 가장 치열했던 장진호전투는 미 해병 제1사단을 미 제10군단에 편입시켜 보병 지휘관의 통제를 받게 한 것이 결정적 실수였다고 지적했다. 이 실수는 맥아더의 무모한 북진 작전에 비롯되었기 때문이라는 평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제한된 전투 병력을 동부와 서부전선으로 분산시킨 실수, 다른 하나는 중국지원군 개입에 대한 과소평가 실수, 무엇보다 원산 상륙작전을 위해 인천과 부산에서 한반도를 반 바퀴를 도는 바닷길 병력 수송에서 허비한 시간이 결국 중국 지원군에게 방어 시간을 충분히 벌어준 것이 작전상 실패였다는 지적이 우세하다.

히긴스는 장진호전투에서 미군과 생사를 함께 하면서 광적인 취재활동을 폈다. 그래서 히긴스는 전쟁터의 불나비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히긴스는 장진호전투를 최악의 군사적인 상황에서 전투병들로 하여금 최선을 다하도록 고무시킬 수 있는 방법을 보여준 상징적인 전과였다.’고 분석했다. 군인에게 후퇴는 최악의 불명예스러운 일이었지만 히긴스는 그 불명예를 이성적이고도 절제된 판단과 정제된 언어구사를 통하여 미국 국익에 우선하는 보도를 함으로써 미국시민들에게 안정감과 미군의 고무적인 전과라는 희망을 안겨줄 수 있었다. 이런 보도 방식은 일부 한국 언론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여겨진다.

영웅적인 미 해병이야기: 2012525, 하와이를 이륙한 공군 C-130 수송기 한 대가 성남공항 활주로에 안착했다. 한국전쟁 전사자 12구의 유해가 62년 만에 봉환된 것이다. 전사자들은 미 제10군단 제7보병사단 제31연대 전투단에 배속되었던 약800명의 한국인 카투사 중 일부라고 했다. 미 제7보병사단은 인천상륙작전, 장진호전투에서 미 해병 제1사단의 측방을 방호하기 위해 편재된 부대다. 봉환된 국군 유해는 장진호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장진호는 북한 자강도(慈江道) 강계(江界) 남쪽 174킬로미터, 흥남(興南) 동북쪽 125킬로미터 거리, 해발 1,180미터의 계곡에 위치한 인공 저수지다. 장진호전투는 바로 장진호 저수지를 통과하려던 미 해병 제1사단과 중국 지원군 간에 사활을 건 전투였다. 개마고원으로 잇는 험준한 산악 도로는 해발 1,129미터의 급경사길 이었다. 이는 당시 미 제10군단으로 참전했던 로이 E. 애플맨(Roy Edgar Appleman, 1904-1993) 중령이 쓴East of Chosin(1987)의 내용이다.

특히 히긴스는 장진호 전투에서 미 해병 제1사단이 중국 지원군과 6:1의 병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중국 지원군 12만 명의 포위망을 뚫고, 장진호에서 흥남(興南) 부두까지 철수하는 미 해병의 용맹을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알렸다.

히긴스는 장진호전투에서 미 해병의 철수를 영웅적인 해병 이야기, 뒤로 전진하다’(The Epic Marine ‘Advance to the Rear’)라고 묘사하면서, 장진호전투를 미국 혁명전쟁(1777-1778)의 결전지 벨리포지’(Valley Forge, Pennsylvania), 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의 타라와 전투(The Battle of Tarawa, 1943. 11.20-11.23)에서 미군과 일본군의 격전에 비교했다. 미 해병은 목표물을 점령할 때까지 전투를 중단한 적이 없었다.’ 태평양전쟁 최후 전투였던 일본 이오지마(硫黃島, Iwo Jima) 상륙작전(1945.2.19-1945.3.26) 때 미 해병은 8번 공격 끝에 마침 이오지마 섬 고지에 성조기를 꽂을 수 있었고, 이를 기념해 미 해병은 팔각모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뒤로 전진한다.’는 말은 당시 미 해병 제5연대장 레이먼드 머레이(Raymond Merray, 1913-2004) 중령이 철수 브리핑에서 한 말이다. ‘우리에게 후퇴란 없다. 이는 다른 방향으로 공격하는 것이다. 우리의 앞길 보다는 우리가 향할 바다 쪽의 뒷길에 더 많은 중공군들이 우리의 진로를 막고 있다. 우리는 이곳을 벗어날 것이다. 이의가 있는 장교는 불구를 만들어서라도 후송시킬 것이다. 누구든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머레이 연대장은 미 해병 역사상 최초의 철수작전브리핑을 이렇게 마쳤다.

개마고원 산악지대의 기온은 영하 20~35, 시베리아 칼바람이 뼛속까지 스며드는 동토(凍土)에서 5,000명의 동상자와 8천여 명의 유엔군 인명 피해, 4만여 명의 중국 지원군 인명피해를 가져왔다. 전사한 미 해병들은 군목이 시편23:1절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성경 구절을 읽는 가운데 이역만리에서 쓸쓸히 묻히기도 했다.

중국 지원군은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의 작전에 따라 쏭쓰룬(宋時輪, 1907-1991)의 제9병단이 동부전선에서 알몬드(Edward Malory 'Ned' Almond, 1892-1979) 장군의 제10군단을 공격했다. 쏭쓰룬은 맥아더의 작전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미군이 장진호에 도착하기 약1개월 전, 장진호 능선에 이른바 자루 포위망을 구축하고 매복한 상태였다. 미군은 중국 지원군의 매복을 모른 채 계곡 깊숙이 자루 포위망으로 빨려 들어갔다가 독안에 쥐가 된 상황이 되었다. 중국 지원군은 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장진호 협곡에 갇힌 미군을 공격했다. 장진호에서 흥남부두까지 125킬로미터, 8마일(13km)의 포위망을 뚫는데 이틀이 걸렸다고 하니 얼마나 힘겨운 철수였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1950124일 베이징 라디오 방송은 전 세계를 향해 미 해병 제1사단의 전멸은 시간문제일 뿐이다라는 위협적인 전파를 쏘았다. 그러나 미 해병은 지옥의 계곡(Hellfire Valley)을 돌파하여 흥남철수 작전을 성공시켰다. 전사가들은 이를 기적이라고 표현한다. 역시 미 해병의 승리였다.

히긴스가 소개한 데이비드 던컨: 미국 군사 사가(史家) 패트릭 오도넬(Patrick K. O'Donnel, 1969)은 아홉 권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유명하다. 오도넬이 2011년에 또 한 번 세상을 들썩이게 한 그의 명작Give Me Tomorrow, 이 책은 장진호전투에 참전한 미 해병 제1사단의 전설적인 용맹과 희생정신을 담은 대서사시적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책 제명(題名)은 데이비드 더글러스 던컨(David Doglas Duncan, 1916) 종군 사진기자가 장진호 전장에서 미 해병 제1사단에 배속된 한 병사와 인터뷰한 내용이다. 표지에는 인터뷰한 해병 병사의 사진이 클로즈업되어 있다. 병사의 사진은 한국전쟁에서 장진호전투를 상징할만한 초상(肖像)이다.

당시 던컨은 한 시대를 풍미한 시사 화보잡지라이프지 종군 특파원으로서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들의 삶과 죽음을 그의 독일산 라이카’(Leika) 카메라에 담았다. 던컨은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사진작가로 평가 받기도 한다. 한국전쟁과 관련된 감동적인 사진들 대부분은 던컨의 작품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던컨은 한국전쟁 사흘 만에 일본에서 미군 수송기를 타고 날아와 부산 방어전투(1950.9.18), 낙동강 전투, 함경남도 장진호전투 등에 종군하여 생생한 전쟁 기록을 남겼다. 그의 사진들 가운데는 한국전쟁이 얼마나 잔인했던가를 확인할 수 있는 장면들이 많다. 대표적인 사진들 중에는 한강교 폭파장면, 낙동강 전투에서 미 해병 대위 프랜시스 팬턴(Marine Capt. Francis 'IKe' Fenton, 1921-1998)이 북한군의 치열한 반격 중에 탄약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망연자실한 모습, 22세의 미 해병 레오나드 헤이워스(USMC. CPL. Leonard Edward Haywoeth, 1928.2.3-1950.9.24) 상병이 중대에 탄약이 소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 흘리는 장면 등은 두고두고 기억할만한 사진들이다. 헤이워스 상병은 자신의 얼굴이라이프지에 게재된 것을 확인한 다음 날 머리에 북한군 저격병이 쏜 총에 맞아 전사했다.

데이비드 던컨은 현재 그가 태어난 미국 미주리 주 캔자스 시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애리조나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던컨은 전공과는 다른 사진작가로 유명해졌다. 하와이 진주만(Attack on Pearl Harbor, 1941.12.7) 사건 후 미 해병대에 입대한 던컨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뉴기니의 부건빌전투(Bougainvill Campaign, 1943-1945), 오키나와전투(The Battle of Okinawa, 1945), 터키, 동유럽, 아프리카, 중동,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등 전 세계의 전쟁 마당과 분쟁 지역에서 어김없이 그의 라이카 카메라를 작동시켰다. 던컨은 그의 많은 참혹한 전쟁 사진을 모아This is War!(1951)를 비롯한 여러 권의 사진첩을 출판하기도 했다.

패트릭 오도넬의Give Me Tomorrow표지 사진의 부상당한 미 해병 병사 얼굴에 얼어붙은 핏자국이 눈길을 끈다. 병사는 동상(凍傷)에 뭉그러진 손으로 전투식량 씨레이션'(the C-ration)의 얼음덩이 콩 통조림을 손에 들고 있다. 병사는 눈의 초점을 잃은 채 아예 표정이 굳은 모습이다. 내일을 보장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으리라. 모든 것은 절망이었다. 적의 포위망보다 더 무섭고 전율을 느끼게 한 것은 20대의 젊은 병사들에게 내일을 기대할만한 상황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장진호전투의 극한 상황을 보여준다.

지옥의 계곡에서 한 가지 희망 내일’: 내일이 보장되지 않은 피비린내나는 영하의 계곡 장진호 전장은 모든 것이 불확실했다. 오로지 확실한 것은 파멸과 절망, 죽음뿐이었다. 낯선 젊은이들이 그 지옥의 계곡에 버림받기란 너무도 억울한 상황이었다. 얼음덩이 C-레이션을 총열에 붙여 사격 열로 녹이는데 한 시간이 걸릴 만큼 추위는 혹독했다. 차량 엔진도 얼었고, 박격포도 얼었고, 카빈총도 노리쇠가 작동되지 않았다. 병사들은 동상으로 손가락과 발가락이 뭉개져 군화에 엉겨 붙었다. 병사들은 서로 대화가 안 될 정도로 추위에 안면 근육이 굳어버렸다.

던컨은 중국 지원군의 박격 포탄이 언제 날아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포위된 미군 진지를 휘젓고 다니면서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그 때 던컨의 카메라 앵글에 잡힌 해병 병사는 긴 파카(parka)로 몸을 칭칭 동여 메고 전투모 위에 파카 후드를 눌러 쓴 채 넋을 놓고 있었다. 희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동자는 초점이 풀려있었다. 그래도 내일을 기다리며 살아야겠기에 C-레이션의 얼음덩이 콩을 씹고 있었다. 그 절망어린 해병의 모습에 앵글을 맞춘 던컨은 잔인하리만큼 직업적인 인터뷰를 시도했다.

귀관은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가?’ 이 어처구니없는 기자의 질문에 병사는 아예 할 말을 잊었다. 기자는 심술 맞으리 만큼 다시 병사에게 말을 건넸다. ‘내가 만약 전능한 하나님이어서 귀관이 원하는 것을 해줄 수 있다면, 귀관은 무엇을 원하겠는가?’ (What would you want if you could have any wish?) 해병은 기자에게 애써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듯 말을 뱉었다.

Give Me Tomorrow!

해병은 한 가닥 실낱같은 희망의 끈이라도 잡으려는 듯 C-레이션 콩 조림에 엉겨 붙은 얼음을 잘라냈다. ‘내일을 달라고 한 이 한 마디 말을 곱씹어본다. 병사는 전쟁을 끝내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홈 바이 크리스마스’(Home by Christmas)를 즐기는 것이 소원이었다. 병사의 내일은 고향과 가족을 만나는 것이었으리라. 이 소원을 병사는 이루었을까? 병사는 삶과 죽음의 경계 지대에서 한 가지 소원 그 내일을 바랐던 것이다. 이 땅의 수많은 젊은 이들에게 지금 당장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할까?

미 해병들은 미처 매장하지 못한 동료의 시신과 전쟁 장비를 흥남 철수 수송선에 싣고 피난민과 함께 남쪽으로 항해했다. 미 해병의 확고한명성이 훼손된 것은 아니다. 히긴스는 미 해병의 장진호전투에서 보인 용맹을 이렇게 소개했다. 미 해병의 전멸을 호언장담했던 중국은 6:1의 우세한 병력을 가지고도 미 해병의 돌파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미군과 유엔군의 영광의 승리였다. 아니 대한민국의 승리였다. 한국전쟁은 더 이상 잊혀진 전쟁아닌 영예로운 전쟁으로 재 평가되는 이유는 침략당한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를 누리며 역동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이리라.

 

반공주의 저널리스트 히긴스

히긴스는 당시 반공주의적 이념이 뚜렷한 저널리스트였다. 22세 때 하버드대학 철학과 강사와 혼인했으나 마르크스 신봉자 남편과 갈라서기를 주저하지 않을 만큼 공산주의에 대한 히긴스의 소신은 확실했다.

히긴스는 나름 아시아에서 공산주의는 민족주의에 편승 발전했다는 시각을 가졌고, ‘미국은 굳은 의지로 민족적 독립과 자치를 요구하고 있는 이러한 국가들의 편에 서야 하며, 이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했다. 히긴스는 공산주의 독제 체제는 내부에서 붕괴될 가망이 없다고 전제하고, ‘히틀러 제국이 붕괴한 것은 오로지 전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이었다.’라고 평가했다. ‘히틀러 제국붕괴에 대한 히긴스의 평가가 시사 하는 것은 외부적 힘이 아니고는 공산체제를 붕괴시킬 수 없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공산주의 체제는 내부에서 자생적 저항력이 길러질 수 없기 때문에 외부의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일 게다. 히긴스는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스스로 신용을 잃기 시작했다는 견해를 가지고, 중국 공산화 과정에서 보인 공산주의자들을 더 큰 악한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런 관점에서 히긴스는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의 한국전쟁 참전에 대한 정당성이 한반도를 넘어서 아시아 대륙에서 공산주의 확장을 방어하는 것이라 보았고, 공산주의가 협박을 정치적 수단으로 삼는 반면, 민주주의는 설득방법으로 민심을 모아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그래서 국민들이 굶어 죽는 곳에서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될 수 없다. 기아는 절망을 낳고, 절망은 폭력을 낳고, 폭력은 경찰국가를 낳는다.’라고 한 히긴스의 말을 다시 생각하는 것이다.

히긴스는 한국전쟁 종군 활동에서 얻은 가장 큰 교훈을 우리는 기계로 사람을 더 이상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라고 한 말일 것이다. 말하자면 공산주의에 대한 최선의 방어는 가공할만한 무기 체계가 아니라 정신적 용기라는 것이다. 그래서 히긴스는 타이프라이터와 카메라를 메고 한국전쟁 벌판을 달리면서 미군을 비롯한 자유 우방군의 용기와 공산주의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렸을 게다.

종군기자 히긴스의 눈에 비친 미군들은 첫 석 달 동안은 한반도에서 그들이 왜 싸워야 하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러나 전쟁 속에서 미군들은 싸워 이기는 것이 최선이라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전쟁 초기에 최상의 무기를 가졌으나 무기를 효과적으로 다룰 훈련이 안 된 미군의 죽미령전투 패배와 지상군과 공군과의 공조체제 불균형으로 인한 오인 폭격도 잦았다고 한다.

혈관 속에 얼음물이 흐르는 여자히긴스의 마음을 뜨겁게 달군 것은 한국인 피난민들이었다. 북진 과정에서 북한 민가들이 파괴되었고, 마을 주민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고, 삶의 터전이 망가지는 경험을 하고도 북한 주민들은 중국 지원군을 선택하지 않고 미군을 따랐다는 사실이다. ‘나는 많은 북한 사람들이 피난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이들은 미 해병의 뒤를 따랐으며, 눈 쌓인 들판에서 웅크리고 앉아서 모진 추위를 버텨냈다. (생략)그러나 천여 명의 북한인들은 그곳에 남아서 중공군들을 대면하기 보다는 고향을 등지고 우리를 따르는 길을 택했다.’

 

맺는 말

한국전쟁을 지휘했던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전쟁 직후 황폐된 한반도에 대하여 백년 쯤 지나야 이 나라 경제가 제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했다는 말이 기억난다. 이 말은 아마도 당시 한반도가 전쟁으로 인하여 다시 일어설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망가지고 부서진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어쩌면 한국인의 민족적 우수성을 미쳐 고려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전후 대한민국은 10여 년간에 걸친 신속한 복구사업을 통해 경제활동 기반 시설을 마련할 수 있었고, 이를 토대로 1960년대 초기부터 불과 20년간 이른바 한강의 기적을 일궈낼 수 있었다. 이로써 한강의 기적은 한국전쟁 이후 아시아 금융위기까지 급속한 한국 경제성장의 상징어로 회자(脍炙)되었다.

전후 복구 사업과 더불어서, 특히 130개 외국 시민단체 NGO의 전쟁난민, 전쟁고아들에 대한 적극적 지원은 전쟁 상처 치유에 큰 도움이 되었다. 미국 일리노이즈 태생 에버렛 스완슨(Everett Swanson, 1914-1965) 목사는 1952년 주한 미군들에게 설교차 내한했다가 쓰레기 더미 속에 파묻힌 어린이의 시체를 목격하고 가슴이 아팠다. 귀국 비행기 내에서 스완슨 목사는 이 죽어가는 어린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도전적 질문을 곱씹었고, 하나님은 그에게 국제 어린이 양육재단’(Compassion International, 1952) 설립 회답을 주셨다. 이 단체를 통하여 수백만 명의 전쟁고아들이 헐벗음과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전후 복구와 경제성장은 마침 광복 43년만인 1991917일 제46차 유엔 총회에서 공식 회원국 가입을 가져왔고, 유엔 회원국이 된지 21년 만인 2006년에는 한국인 유엔 사무총장 피선과 2011 재선, 2012년 대한민국은 1996년에 이어서 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재진출, 그리고 세계은행 설립 후 첫 한국인 총재가 선임되었다.

한국인이 세계를 지배하는시대, 클린턴(W. J. 'Bill' Clinton, 1946) 전 미국 대통령과 오바마(B.H. Obama, 1946) 대통령의 농담이 진담인 현실을 실감한다. 2010G20 정상회의 개최, 1988년 서울 올림픽유치, 유엔 녹색기후기금(GCF) 사무국 인천 송도 유치 등은 모두 한국전쟁 70년 내에 이룬 대한민국의 성적표다. 특히 1987년부터 원조 수혜국 한국이 대외 원조국(ODA)이 되어 2012년에는 무려 159,750만 달러가 제공되었다.

이와 더불어서 광복 70주년과 한국전쟁 65주년을 맞으면서 세계를 놀라게 한 것은 한국교회의 선교활동이라 할 수 있다. 교회는 참혹한 전쟁을 통하여 사도행전 교회의 모본을 체험할 수 있었으니, 곧 기도(prayer)를 통하여 서로 하나되는(joining) 일체감과 사회참여 봉사다(service) 전쟁 시작 두 달이 지나갈 무렵 낙동강 후방의 대구와 부산을 제외한 국토의 95%가 북한군에게 점령된 백척간두(百尺竿頭) 상황에서 교회는 임시수도 부산에서 교계 인사들이 함께 모여 회개하는 기도를 했다. 기도는 전쟁의 참화 속에서 교회 재건의 비전을 갖게 했고, 남북한 교회가 하나 되는 통일과 고난에 처한 이웃을 서로 보듬는 사회봉사 체험을 나눌 수 있게 했다. 이런 사도행전 교회의 체험이 한국교회의 내적 부흥과 해외 선교에 동력이 된 것이라 생각된다.

고신교단은 광복 12, 한국전쟁 7, 교단설립(1952.9.11. 1회 총노회) 5년째 된 1957년에 김영진(1920-2001) 선교사를 중화민국 타이완에 파송했다. 고신 교단은 일제식민 시대를 저항으로 맞섰고, 한국전쟁에서 공산주의의 만행을 지켜보면서 아시아 지역의 공산화 교두보 및 중국 선교의 전초기지로써 타이완을 첫 선교지로 선택했다. 타이완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22,000여명의 중국 지원군 포로 중 중국 송환희망 포로 8,000여명을 제외한 14,227명이 자유중국을 선택, 인천항에서 타이완 북부 지롱(基隆)으로 수송되었다. 그들은 중국의 혈연적 정() 보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자유를 선택한 것이다. 필자는 선교 재임 때 지롱에 있는 반공 포로들이 생활하는 곳을 찾았던 기억이 난다.

2014년 말 현재 한국 교회가 파송한 해외선교사는 한국 외교수립 190개 국(2015)에 버금가는 170개국에 26,677(KWMA), 이들 선교사들은 한국 외교관 손길이 미치지 않는 오지까지 파고들어 한국의 국위를 선양하고 있다.

사도 바울이 드로아에서 광활한 땅마게도냐( Μακεδονα)인의 도움의 손짓을 보고 건넜던(διαβανω) 바다를 오늘도 한국 젊은이들이 매년 1,000명씩 건너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 땅에 내리신 축복이다. 세계 곳곳에서 손짓하는 마게도냐인들이 많다. 멀리는 아프리카에서, 네팔에서, ‘와서 우리를 도우라라는 소리가 들려온다. 한국교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의 손짓이 마게도냐일 것이다. 지난 70년 간 한국 교회는 멀고 험한 바다를 건넜고 메마른 사막을 가로질러 마게도냐로 달려갔다. 이 일은 여전히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 곁 가까이 있는 마게도냐를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국교회는 교회당 울타리 건너편에 있는 광활한 마게도냐역시 바다 건너편 이상의 깊은 관심을 가지고 보아야 할 때다. 모두들 삶이 힘들다고 한다. 미래를 보장받지 못한 상실감에 분노한 젊은이들의 거친 행동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힘들게 살지 않는 사람들이 어디 있을까마는 그래도 더 힘든 사람들이 마게도냐인이 아닐까싶다. 10대의 젊은이가 한밤중에 힘없는 노인에게 무차별 폭력을 휘두르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누가 이 땅의 젊은이들을 저렇게 화나게 했을까라는 자괴감을 털칠 수 없었다.

히긴스는 한국전쟁에서 처음으로 아시아 북동쪽에 위치한 대한민국 산하를 보았고, 순진하기 그지없는 백의민족을 만났다. 히긴스는 군인과 민간인의 수많은 시체를 보았고, 북한군이 저지른 참혹한 학살 현장도 목도 했다. 그래서 히긴스는 공산주의를 이겨야하고, 이기기 위해 대한민국을 도와야 한다고 외쳤다.

우리는 한국을 도와야 합니다

30대 초반의 마거리트 히긴스에게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이 마게도냐로 보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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