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그림자, 종교재판 2

심문관의 활동은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고, 1242년에는 프랑스 투르에 가까운 아비뇽에서 심문관이 습격을 받은 일도 있었다. 14세기 초에는 카르카손에서 베르나르 데실리우스가 주동한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단으로 정죄된 경우 처벌은 다양했다. 나름대로의 준칙이 있었기 때문에 전부 화형에 처한 것은 아니었다. 기도, 금식, 자선행위, 순례, 채찍질은 가벼운 경우였고, 재산몰수, 투옥, 처형은 보다 무거운 형벌에 속했다. 14세기에 베르나르 기(Bernard Guie)가 저술한 <심문관 필휴(必携)>는 심문절차, 형벌의 종류 등 당시 사정을 헤아리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종교재판 혹은 이단 심문 제도는 프랑스에서 가장 먼저 나타났고, 이탈리아, 독일에서도 일어났으며 북 유럽의 경우는 제한적으로 일어났다. 프랑스의 경우, 앞에서 언급한 인노센티우스 3세는 남부 프랑스의 이단들을 제재한다는 명목으로 십자군을 제창하여 프랑스 전역을 장악하고 알비조파를 진멸하였고 이단을 탄압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주교들과 지방 군주들은 자신의 권력에 반대하는 이들을 이단으로 몰아 처벌하는 등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이단 심문과 처벌권을 위임받은 세속 군주들은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정치적 야욕을 드러냈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템플기사단 사건’(Knight of Temple)이었다. 템플기사단이란 십자군 원정 당시인 1118년 8명의 프랑스 기사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성지순례자 보호를 위한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였다. 1128년 교황으로부터 수도회로서 공식적인 승인을 받았다. 이 수도단은 부와 명예를 얻으며 급속도로 성장해 갔으나 프랑스 왕 필립 4세는 왕권 신장을 꾀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템플기사단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즉 1307년부터 6년 동안 이단심문 형식으로 종교재판을 실시하여 템플기사단에 배교, 우상숭배 혐의를 씌웠다. 1307년 10월 프랑스 전지역의 3,000여 곳에서 기사단원을 체포하여 재산을 몰수하고, 가혹한 고문 끝에 자백(?)을 받아 냈다.

즉 이들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비밀집회에서 짐승과 같이 분장하고 쌍둥이를 산 제물로 바치며, 단원의 시체를 화장하고 제의행위로 그 제 가루를 마신다는 것이 자백이었다. 템플기사단의 재산 탈취도 이들을 박해한 주요 원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당시 교황 클레멘스 5세는 필립왕의 월권행위에 항의하여 별도로 사건을 조사하고, 1312년 빈 공의회의 자문을 얻어 이 기사단의 폐지와 요하네스기사수도회로 재산 이관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국왕측은 이에 불만을 품고 1314년 템플기사단의 단장 자크 드 몰레는 기둥에 묶여 화형에 처하였다. 약 9천을 헤아리던 단원 전체가 처형됨으로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다. 그러나 이 때 탄압을 피해 살아남은 조직원이 오늘날의 프리메이슨의 모태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나 독일 보다는 후기에 종교재판이 시작되지만 가장 맹위를 떨친 나라는 에스파냐 곧 스페인이었다. 스페인에서는 이슬람교도를 추방하고 유대교도와 이슬람교도로서 기독교로 개종한 이들을 처벌할 특별제도를 요청하였다. 그래서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 1414-1484)는 1478년 스페인종교재판소를 허가하였다. 이로서 이단 심문인 종교재판이 스페인에서 보다 조직적으로 제도화되었다.

1481년 초 세비야에 종교재판소가 설치되었는데, 그 해에 298명이 산채로 화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1483년 스페인 정부는 교황을 설득하여 카스타야의 종교재판소장의 지명권을 얻어내고, 같은 해 아라곤, 발렌시아, 카날루냐의 종교재판소 지명권을 획득했다. 교황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심문관 임명권을 국왕이 장악하게 되자 종교재판소는 완전히 왕국 통치기구의 일환이 되었다. 이것은 종교재판이 정치적인 목적에서 이용되게 한 요인이 된다. 스페인의 세비야에서 활동한 종교재판관들은 너무나도 가혹하여 교황 식스투스 4세가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토르크마다의 토마스(Thomas de Torquemada, 1420-1498)는 식스투스 4세에 의해 종교재판소장으로 임명되었는데, 그는 도미니크파 수도사였다. 그는 임종 때까지 18년간 종교재판소장으로 있으면서 97,322명의 재산을 몰수 하거나 투옥시켰고, 10,222명을 산채로 불태워 죽였다고 한다. 말하자면 그는 10만 건을 심리하여 화형대의 연기가 끊이지 않게 하였다는 악명을 남기고 있다. 초기의 주요 희생자는 유대교도, 엄밀하게는 위장개종(僞裝改宗)한 유대인들이었다. 스페인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간헐적인 핍박이 일자 유대인들은 안전의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특히 1391년 유대인에 대한 약탈과 학살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고, 카스티야에서 약 5만 명의 유대인이 살해당했다.

이런 위협에 직면한 유대인들은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들을 가리켜 ‘개종한 유대인들’ 곧 콘베르소스(conversos)라고 불렀다. 이들 가운데 형식적으로는 가톨릭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유대교도로 남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교회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콘베르소스들에 대해서 탄압을 시작했고, 이들을 위장 개종자라 하여 대대적인 이단심문을 시작하여 재판에 회부하였다. 대체적으로 이들은 부유했으므로 이들이 누리는 권력이나 부에 대한 증오심이 게재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유대인들의 재산을 탐한 것이 종교재판의 숨은 동기였다는 주장이 전혀 무근한 것은 아니다.

스페인에서의 종겨재판은 유대인이나 콘베르소스 뿐만이 아니라 나중에는 풍기사범 일반에까지 그 대상이 확대되었다. 스페인에서 총 희생자 수는 알 수 없으나, 전체 14지구 법정 중에서 톨레도 지구의 경우 첫 번째 절정기였던 1485년에 처벌자가 약 750명, 두 번째 절정기인 1650년에 약 250명, 18세기 이후는 매년 평균 50명 정도가 희생되었다. 나폴레옹 지배기에 한때 중단되었으나 정식 폐지된 것은 1834년이었다.

이때까지 스페인에서 종교재판이란 이름으로 희생된 수는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존 폭스에 의하면 산채로 불에 태워 죽임을 당한 자가 31,912명, 토굴 속에 투옥된 사람이 291,450명에 달했다고 한다. 토르크마다의 토마스가 종교재판장으로 있는 15년 동안 화형을 당한 유대인들만 8만명에 달한다는 주장도 있다. 다소 과장된 것이라고 보더라도 그 희생자는 엄청난 것이었다. 이것은 종교개혁으로 신구교간의 대립이 일기 이전의 상황이라는 점이다.

16세기의 종교재판소는 개신교도들을 처단하기 위한 목적에서 설치되는데, 교황 파울로스 3세는 1542년 로마에 종교재판소를 설치했다. 이 기관은 완전히 독립적인 기구로서 주교들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웠다. 이 이후 유럽, 특히 스페인 프랑스에서 자행된 종교재판은 이 전 시대보다 덜하지 않았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광란과 살인은 중세의 아픈 역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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