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64주년, 그 아픔을 상기하면서

▲ 이병길 목사

미군이 처음 ‘6주에서 8주면전쟁을 끝낼 것이라고 예측했던 한국전쟁은 31개월 2일 간의 혈전으로 이어졌다. 전쟁 초기 국군과 유엔군은 열흘 동안 낙동강방어선까지 네 차례에 걸쳐 후퇴를 거듭했다. 북한 집단은 철저하게 준비한 전쟁이었지만 대한민국은 준비 없이 당한 것이다.

서울을 빼앗기고, 수원(水原)과 오산(烏山), 평택(平澤), 천안(天安), 전의(全義)를 내어주고, 조치원(鳥致院)으로 밀려 금강(錦江)에서 대전(大田)까지, 다시 영동(永同)에서 낙동강(洛東江)까지 북한군 제1군 군단장 김웅(金雄) 휘하의 이권무(李權武) 소장이 이끄는 제4사단에게 고스란히 당한 것이다.

73일 북한군이 한강을 넘든 바로 그날, 윌리엄 딘(William Frish Dean, 1899-1981) 소장은 미 제8군 사령관 워커(Harris Walton Walker, 1889-1950) 장군이 하달한 720일까지 대전을 사수하라는 작전 명령을 받고 대전 비행장에 도착했다. 작전명령에는 718일 미 제1기병사단(1st Cavalry Division)이 포항으로 상륙하여 충북 영동에서 저지선을 구축할 예정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작전명령 대로라면 딘 소장의 임무는 다음 명령이 하달 될 때까지 6일 간 대전을 지키면 되었다. 딘 소장은 군인으로서 지휘관으로서 상급 지휘부의 명령을 충실하게 준수했다. 그러나 딘 소장은 임무 수행 중 북한군 포위망에 걸려 탈출 중 체포되어 북한에서 3년간 포로 생활을 해야 했다. 그래서 딘 소장은 ‘6일을 얻고 3년을 잃은 영웅이라고 표현된다.

 

그랜드뷰 농장에 걸려온 긴급 전화

1950624(미국), 헤리 S. 트루먼(Harry S. Truman, 1884-1972) 33대 대통령은 워싱턴 D.C에서 약1,500킬로미터 떨어진 미주리 주 그랜드뷰(Grandview) 농장에서 가족들과 함께 주말을 즐기고 있었다. 그날 밤 10, 저녁 식사 후 서재실에서 가족들과 담소하던 때 전화기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딘 애치슨(Dean G. Acheson, 1893-1971) 국무장관이 건 전화, 대통령이 수화기를 들자 서울의 주한미국 대사 존 무초(John J. Muccio, 1900-1989)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한국에서 전쟁이 터졌다는 내용이었다. 국무장관 애치슨은 전쟁 소식을 듣자마자 유엔 사무총장 트뤼그베 할브단 리(Trygve Halvdan Lie, 1896-1988)에게 사람을 보내 알리고,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애치슨은 대통령이 주말 휴가를 취소하고 워싱턴으로 복귀하려고 하자 그러면 전국을 전쟁 공포로 몰아넣기 쉽다는 이유로 만류했다. 애치슨의 판단은 옳았고, 이런 민첩한 정치가가 있었기 때문에 한국전쟁이 신속하게 반전을 꽤할 수 있었으리라.

이튿날 트루먼 대통령은 황급히 워싱턴으로 복귀했고, 그날 저녁 대통령은 워싱턴 영빈관 블레어 하우스(Blair House)에서 백악관, 국방부 고위 관리들을 초청하여 만찬을 가졌다. 만찬 후 긴급 현안인 한국전쟁과 관련된 회의에서는 애치슨 국무장관의 세 가지 제안, 즉 극동 주재 미군 총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에게 한국전쟁 지원 위임, 미 공군의 주한 교민 철수와 북한군 폭격, 미 제7함대의 타이완 해협으로 급파 해 중국의 타이완 침공을 저지하는 내용이었다.

한편 중국 베이징의 고대 황제 서재실 퐁쩌위앤(豊澤園)에서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그날 정원을 거닐면서 대륙의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마침 호위병이 급하게 다가와 전해 준 내용은 바로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 총리의 전화였다. 마오쩌둥이 이미 짐작했던 대로 한국전쟁에 관한 소식이었다. 이렇게 미국과 중국에서 한국전쟁 소식이 신속하게 전달되었다.

1950625일 새벽 한반도 38도선 일대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갑자기 군사분계선 서쪽 끝에서 주황색 신호탄 발사와 동시에 300여 킬로미터의 분계선을 따라 어둠을 가르는 불빛이 거의 한 시간 만에 동부 해안까지 이르렀다. 한국전쟁 시작을 말한다. 이 상황은 중국 논픽션 작가, 현재 중국 무경부대정치부(武警部隊政治部) 주임 왕수쩡(王樹增)이 천착(穿鑿)한국전쟁의 묘사다. 왕수쩡은 새벽 5, 38선에서 수천 문의 화포가 불을 뿜었다.’고 묘사 했는데, 이는 북한의 준비된 남침이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왕수쩡은 한국전쟁을 아버지 세대가 겪은 특별한 사명과 의의를 가진 역사인 동시에, 중국에게는 역사상 소홀히 할 수 없는 중대한 과거라고, 그 의미의 비중을 강조했다.

한국전쟁 개전 1년 전, 19495월 어느 날, 중국의 마오쩌둥은 중국 허베이 성(河北省) 베이핑(北平) 시산(西山) 산 별장에서 김일성(金日成, 1912-1994)의 특사와 비밀리에 만났다. 그 자리에서 마오쩌둥은 김일성 특사에게 한반도에서 무슨 일이 발생하면 북한을 지원할 것을 약속한다.

한국전쟁 닷새 전, 1950620일 존 포스터 덜레스(Jon Foster Dulles, 1888-1959) 트루먼 대통령 특사는 대한민국 제2대 국회 개회 참석차 내한(19), 다음 날 자연스럽게 38선 시찰에 나섰다. 덜레스의 38선 시찰이 북한이 그들의 준비된 남침(南侵)을 은폐하려는 빌미가 될 줄은 아무도 몰았을 것이다. 북한은 지금까지 한국전쟁이 남한의 북침(北侵)을 주장하고 있다.

북한은 덜레스 특사가 전방시찰에 앞서 대한민국 국회에서 한 연설 내용을 들어서 대한민국의 북침을 논리적 증거로 인용하고 있다. ‘(생략)한국이 인류의 자유라는 위대하고 창조적인 움직임 가운데 계속해서 효과적으로 제 역할을 해준다면 영원히 고립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한 내용에 대한 중국 일각의 견해 역시 북한의 억지 논리에 동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이다.


극동사령부 맥아더 사령관

한국전쟁 이튿날 미국 백악관은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서울에 접근하고 있는 상황에서 타이완(臺灣)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취한 조치가 바로 타이완 해협 봉쇄였다. 중국은 미국의 타이완 해협 무장 봉쇄에 대하여 즉각 반발하였다. 한반도가 전화(戰火)에 휩싸인 가운데 미국과 중국은 타이완을 두고 싸우고 있었다.

1957627일 새벽 4, 이승만(李承晩, 1875-1965) 전 대통령은 변장한 채 서울역에서 3등 열차를 타고 서울을 빠져나갔다. 주한 미국 대사 무초도 몰랐다. 바로 그날 일본 도쿄 다이이치(第一, だいいち) 건물에 자리한 미국 극동사령부(FECOM, Far East Command, 1947.1.1-1957.7.1)긴급 전보한 통이 날아들었다. 내용은 미국 정부가 맥아더에게 해군과 공군력을 동원하여 한국군을 지원하는 허가였다. 사령관 맥아더는 이미 70세 고령의 나이에 제1, 2차 세계대전에 이어서, 한국전쟁을 피해갈 수 없었던 세 번째의 전쟁을 맞게 된 것이다. 맥아더 장군이 극동사령부 사령관에 취임한지 약 삼년 만에 다시 화약 냄새를 맡아야 했다.

 

한강방어선 시찰

워싱턴으로부터 긴급전보를 받은 이틀 후 1950629일 아침 6시 경, 맥아더 장군의 엔진 네 개의 전용기 C-54 스카이매스터(Skymaster) ‘바탄’(Battaan)기가 도쿄의 공군기지를 이륙했다. 비행 기상 조건은 최악이었다. 조종간은 안소니 스토리(Antony F. Storey, 1904-1979) 중령이 잡았다. 스토리 중령은 1945~1951년까지 바탄기 조종사를 지냈으며, 1967년에 대령으로 예편했다. 바탄 전용기는 악천후를 뚫고 현해탄을 건너 그날 오전 11시경 수원 비행장에 안착했다. 맥아더의 바탄기 항로는 바로 미군 선발대의 항로가 되었다. 비행장은 북한군의 야크기 폭격으로 긴장감이 감돌았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영접을 받은 맥아더는 수행원 열다섯 명을 대동하고 극동군 사령부 전방지휘소(1950.6.28 설치) 소장 처치(John Huston Church, 1892-1953) 준장의 안내로 한강방어선 시찰에 나섰다.

서울은 북한군에게 불타고 있었다. 한국군의 한강방어선은 철통같았다. 20여 분간 시찰을 마친 맥아더 장군은 미군 지상군의 적극적 지원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당일 오후 6시 전용기로 다시 도쿄로 돌아가는 맥아더 장군은 바탄호 기내에서 미국 정부에 보고할 미군의 지원 요청을 정리했다. 맥아더는 동승한 뉴욕 헤럴드 트리뷴도쿄 특파원 여성 종군기자 마거리트 히긴스(Marguerite Higgins, 1920-1966))에게 미군 2개 사단만 준다면 나는 한국을 지킬 수 있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김동호 예비역 공군 소장은 맥아더 장군이 1950629일부터 1951411일 유엔군 사령관직을 사임할 때까지 전용기 바탄호와 함께 18회에 걸쳐 한국전선을 돌아보면서 유엔군을 독려했다고 한다. ‘별은 전쟁이 있어 빛난단는 말이 기억난다. 맥아더 장군의 한강방어선 시찰은 한국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지도자가 자신의 책임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윌리엄 딘 소장의 지연작전 임무

1950630, 한강방어선 시찰 다음 날 맥아더 장군은 워싱턴의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극동군 미 육군 지상군 작전권을 부여받음으로써 명실공히 육··공군에 대한 작전 지휘권을 관장하게 되었다. 한강방어선 시찰에서 한국지원 계획 정리를 마친 맥아더의 노련한 과거 전투 경험은 작전 추진에 한층 탄력을 붙였다.

맥아더는 도쿄에서 제8군 사령관 월턴 워커(Walton H. Walker, 1889-1950) 중장에게 제24보병사단을 즉각 한국전쟁에 투입할 것을 명령했다. 워커 중장이 제24보병사단 사단장 윌리엄 딘(William F. Dean, 1899-1981) 소장에게 하달한 구체적인 작전 명령의 핵심은 북한군의 남하에 대한 특수임무(Task Force Smith), 지연작전’(fight a delaying action)이었다. 24보병사단은 당시 제2차 세계대전 종식 후 일본 점령군으로서 규슈 야마구치 현(九州山口縣) 캠프우드(Camp Wood)에 주둔하고 있었다.

195071일 새벽 3, 미 제24보병사단 제21연대 제1대대 대대장 스미스(Charles Bradford Smith, 1916-200, 1965년 준장으로 예편) 중령은 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의 작전 지시에 따라 선발대 540명을 C-54 수송기 6대에 편승시켰다. 병사들에게는 전투식량 C-레이션(rations) 이틀 분, 탄약 120라운드(rounds)가 지급되었다. 병사들의 평균연령은 20, 부대원 중 전투경험 자는 전체의 1/6, 대부분 기초 훈련을 겨우 마친 상태였다. 악천후 속에서 부산 수영비행장에 간신히 착륙한 미군은 바로 열차편으로 72일 아침 대전에 도착했다. 병사들은 전투 장비를 정비할 겨를도 없이 북한군의 남하 저지선을 구축했다. 이것이 한국전쟁에서 미군과 북한군의 첫 교전인 오산 죽미령전투(1950.7.5)가 시작된 배경이다. 전투는 미군의 참패였다. 바로 그날 대전 사령부에서 제24사단 윌리엄 딘 소장이 사단장 인수인계를 한고 있었다.

 

윌리엄 딘 소장의 프로필

딘 소장은 189981일 미국 일리노이 주 클린턴 카운티의 작은 도시 칼라일(Carlyle)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마쳤다. 아버지 찰스 딘(Charles Watts Dean)은 치과 의사였으며 어머니 엘리자벳 프리시(Elizabeth Frishe Dean)는 독일계 여성이었다. 윌리엄 딘에게는 데이비드라는 남동생과 레오나르드 베루라는 누이동생이 있었다. 딘은 밀드레드 던(Mildred Dern)과 혼인하여 딸 매저리 딘 윌리엄스(Marjorie Dean Williams, 육군 대위 로버트 윌리엄과 혼인), 아들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출신 윌리엄 딘 2(Maj. William F. Dean, Jr)을 두었다. 아들은 후에 주한 미군에 근무한 적이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딘은 육군사관학교(the US Military Academy)에 지원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1차 세계대전 때는 미 육군 입대를 시도했으나 부모의 동의가 없고,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그 후 1921년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 시절에 예비장교훈련단’(ROTC, Reserve Officer Training Corps)에 지원하여 훌륭한 보병 장교 꿈을 키웠다. 훈련단 과정을 마친 딘은 1923108, 그가 그렇게도 꿈꿔왔던 미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되었다.

육군 장교 경력: 미 육군 보병 장교에 임관된 딘의 첫 배속 부대는 당시 유타 주 포트 더글러스(Fort Douglas, Utah)에 주둔하고 있던 제38보병사단이었다. 딘은 그곳 사단에서 초급 장교 생활을 시작으로 1955년 소장으로 예편할 때까지 34(1921-1955) 간 미 육군 지휘관으로서 모범을 보였다. 유타 주에서 3년 간 초급장교 경력을 쌓은 딘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제44사단 지휘관으로 참전했으며, 그 후 제7사단, 그리고 한국전쟁 때는 제24보병사단의 지휘봉을 잡았다.

1941년 이른바 대동아전쟁이라는 태평양전쟁(1941.12.7-1945.9.2) 당시 딘 소장은 극동사령부에 배속되어 활동했으며, 광복 후 재한미육군사령부군정청’(USAMGIK,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에 파견되었다가 군정장관(1947.10.30- 1948.8.15)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는 미 제24사단장으로서 오산 죽미령(竹美嶺) 전투를 시작으로 대전전투에서 지연작전을 수행하던 중 북한군에게 포위되어 산속을 헤매다가 지역 주민에 의하여 북한군에게 넘겨져 32개월간 북한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귀환했다.

미국의회 최고 훈장: 딘 장군은 195119, 대전전투(1950.7.20,21)의 전과가 인정되어 미국 의회가 미군에게 수여하는 최고훈장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당시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추서되었다. 훈장은 딘 소장의 아내 밀드레드 딘, 아들 윌리엄 딘 2, 딸 메저리 딘이 참석한 가운데 수여되었다. 때는 딘 장군이 북한 평양 부근에서 포로 생활 하던 중이었다.

지옥보다 더 혹독한 전쟁으로 묘사되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들 중에는 영웅들도 많이 배출되었다. 미국Military Times에 의하면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들 중 명예훈장을 받은 미군은 모두 137, 그 중 19세의 미 해병 제1사단 찰스 G. 아브렐(Charles Gene Abrell, 1931-1951)하사를 시작으로 마지막 훈장을 받은 병사는 당시 22세의 미 육군 로버트 H. (Robert H. Young), 로버트 영은 1950109일 개성 지구에서 전사했다. 딘 소장은 용맹한 미군에게 수여하는 두 번째 최고훈장 수훈 십자상’(DSC), 근무 성적 우수 미군에게 수여하는 수훈 복무훈장’(DSM), 탁월한 업무능력을 발휘한 미군에게 수여하는 레지옹 오브 메리트’(Legion of Merit), 전장에서 특별한 공훈을 세운 미군에게 수여하는 동성훈장’(Bronze Star) 등을 받았다. 이를 미루어 볼 때 딘 장군은 모범적인 미군 장교였음을 짐작케 한다.

 

대전전투의 영웅윌리엄 딘 소장

대전전투(1950.7.14-7.21)에 투입된 미 제24보병사단의 주요 작전 임무는 북한군의 남하를 최대한 저지하는 지연작전이었다. 그러나 금강(錦江)방어선이 무너지면서 대전(大田) 역시 흔들리고 있었다. 미 제24사단은 죽미령과 전의, 조치원에서 계속 밀려 결국 금강방어선 마저 무너지는 사태에서 병력과 장비 손실의 큰 타격을 입었다. 이처럼 전세가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는 상황을 파악한 워커 장군은 718일 대전의 제24사단장 딘 소장을 찾아 20일 까지 지연작전이행을 거듭 독려했다.

 

금강방어선 붕궤와 대전함락

그러나 720일 북한군 T-34 탱크 캐터필러 굉음은 대전시를 진동시켰다. 미군의 대전 방어망이 뚫린 것이다. 미 제24사단 예하부대 지휘체계 통신망은 두절되었고, 부대 간의 작전협조 수행이 불능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2개 사단이면 한국전쟁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 호언장담(豪言壯談) 했던 맥아더 장군의 오만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노병’(Old Soldiers) 맥아더는 한국전쟁이 심상찮게 전개되고 있는 상황을 간파하고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4개 사단 증원을 다시 요청했다. 트루먼에게 미 지상군 증원은 정치적 압박이 아닐 수 없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소련에 대한 적대감이 강했다. 소련의 동구권 공산주의 팽창을 주목한 트루먼은 유럽을 비롯한 아시아권에서 공산주의를 견제하기 위해 19473월에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발표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트루먼의 대외정책 우선은 유럽에 집중되어 있었다. 맥아더의 증원 요청은 트루먼에게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미국의 현실은 녹녹치 않았다.

왕수쩡(王樹增) 소장의한국전쟁에 의하면, 한국전쟁 당시 미 육군의 총병력은 약591,000, 10개 작전 사단이었다. 그중 36만 명은 미국 본토 방위를 맡고 있었고, 서독에 8만 명, 오스트리아 9,500, 이탈리아 7,800, 알래스카 7,500, 남미 카리브 지역에 12,200명이 각각 배치돼 있었으며, 태평양 지역에는 고작 7,000명에 불과했다. 유럽에 약10만 명의 병력이 배치된 것을 고려하면 광대한 극동지역의 101,000명 병력은 상대적으로 열세였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전쟁에 미군 증원은 쉽지 않았다.

미 제24사단은 병력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대전을 둘러싼 금강을 비롯한 자연 지형지물을 최대한 활용하여 지연작전에 임했으나 작전 지역이 지나치게 넓은데다가 일본 점령지에서 수송해 온 재고품 무기는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급기야 캘리포니아에서 긴급 공수한 신형 무기들은 병사들이 다루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719일 밤 김일성의 제3차 작전에 의한 북한군의 일사불란한 공세는 제24사단 작전 기능을 거의 마비시키고 말았다. 미군 병사들은 북한군의 공세에 신형 무기를 버리고 허둥댔고, 심지어 딘 소장이 바주카포로 T-34 탱크에 맞서야 했다(720).

예하부대와 통신이 두절된 딘 소장은 지프차로 이동하다가 길을 잃고 본대를 이탈, 북한군 후방에 낙오되고 말았다. 미군 증원 군이 도착할 때까지 딘 소장은 최선을 다하여 지연작전을 펼쳤다. 그의 충실한 임무 수행이 아니었다면 낙동강 방어선을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딘 소장을 밀착 취재한 마거리트 히긴스 종군기자는 그는 내가 아는 한, 가장 친절하고 훌륭한 군인 중 한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그보다 앞서 713일 워커 중장은 대구에 미 8군 사령부를 설치했다. 이것은 폐색이 짙은 한국전쟁을 역전시키겠다는 미군의 강한 의지 표명이기도 했다. 미군은 계속 증강되었다. 710일 미 제25사단은 부산, 18일에는 제1기병사단이 포항에 속속 상륙했다. 이로써 오만했던 맥아더는 어쩌면 그의 일생에 마지막이었을 한국전쟁에서 사라질’(fade away) 준비를 했을지 모른다.

 

한국전쟁에서 미 군종장교들의 활동

한국전쟁사는 미군 군종장교)들의 한국을 위해 정의로운 활동을 한 것에 대하여 비중 있게 다루지 않고 있다. 한국전쟁 3(1950.6.25~1953.7.27) 간 미군의 참전 연인원 150만 여 명 중 54,260명 전사(전투 중 전사 33,643, 전쟁과 관련 사망 20,617), 유엔군과 미군을 포함하여 628,000명이 희생되었다(자료에 따라 다소 차이). 그 중 미군 군종장교들은 한국전쟁 초기 김일성의 한반도 적화통일’(赤化統一) 3차 공세, 즉 대전전투 때 많은 희생을 당했으며, 그 후 중국 지원군 개입으로 인한 인명 피해가 많았다. 한국전쟁은 총이나 칼을 휴대하지 않은 군종장교들의 희생을 강요했다.

미 군종장교단(United States Army Chaplain Corps)240년의 역사를 지녔다. 1775729일에 창설된 군종장교단은 라틴어 PRO DEO ET PATRIA’, 하나님과 조국을 위하여(For God and Country)라는 모토아래 종교의식, 병사상담, 정신무장 담당을 목적으로 해 왔다. 비전투 요원 신분의 군종장교를 군화신은 목자’(shepherd in combat boots)라고도 한다.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1945년 말까지 미군에는 8,141명의 군종장교들이 생사가 엇갈리는 전장에서 병사들의 정신적 안정을 유지하는 활동을 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7년 말에는 1,100명의 군종장교만 미군들과 함께 했다. 한국전쟁 기간에는 706명의 군종장교들이 참전 미군 부대에 배속되어 병사들을 보살폈다.

 

첫 번째 전사 군종장교 허만 펠홀터: 24사단 제19보병연대 군종장교 허만 펠홀터(Herman G. Felhoelter, d.1950.7.16) 대위는 그가 배속한 제19연대가 금강방어선이 뚫리면서 발생한 전상자들을 북한군 후방 대전 두남 마을에서 자신의 안전과 죽음을 무릅쓰고 낙오된 30명의 부상병들을 돌봤다. 바로 그때 북한군 정찰병이 다가와 엎드려 기도하는 펠홀터 군종장교를 사살했다. 펜홀터는 그의 서른 한 번째 생일을 앞두고 한국 땅을 밟은 지 11일 만에 그의 젊을 마감했다. 펠홀터는 한국전쟁 중 포로된 군종장교를 포함한 13명의 전사 군종장교 중 첫 번째 전사자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전사자 군종장교 중 6명은 전쟁 첫 달에 전사했다. 정전 후 1953175명의 군종장교가 22개의 실버스타(Silver Star)를 비롯하여 218개의 훈장을 받았다(US ARMY/LIVE).

사후 펠홀터에게는 수훈 십자상’(Distinguished Service Cross)과 미국 의회가 수여하는 최고의 명예훈장이 추서되었다. 펠홀터는 전사하기 나흘 전 그의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저는 (가망 없는) 한국에서 마음이 편치는 않지만, 도움이 필요한 영혼들을 도울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합니다.’(I am not comfortable in Korea (that is impossible here) but I am happy in the thought that I can help some souls who need help.)

두 번째 전사 군종장교 바이런 리: 두 번째 전사자 군종장교는 미 제25사단 제35연대 바이런 리(Byron D. Lee), 바이런 리 군종장교는 7월 중 북한군 폭격에 전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한 포로수용소에서 전사한 군종장교 에밀 조셉 카파운: 2012411일 워싱턴 백악관 이스트룸(the East Room),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그 어느 때보다 엄숙하고도 결의에 찬 모습으로 내빈들 앞에 섰다. 한국전쟁 포로 중 북한 포로수용소에서 죽은 대위 에밀 카파운(Emil Joshep Kapaun, 1916-1951) 신부에게 미군 최고훈장 명예훈장을 추서하는 자리였다. 에밀 카파운이 전사한지 60년만이었다. 훈장은 카파운의 조카 레이 카파운(Ray Kapaun)이 대신 받았다. 캔저스 출신인 카파운 대위는 미군 군종장교단(U.S. A.C.C.) 소속 신부로서 34세 때 한국전쟁에 참전, 미 제1기병사단(1st Cavalry Division) 8기병연대 제3대대에 배속되어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부상병을 돕다가 중국 지원군에게 포로, 북한 황해도 표동(瓢洞, 삼바골) 5포로수용소에 수감 중 7개월 간 치료를 받다가, 1951523일에 죽었다. 1993년 바티칸(Vatican)은 에밀 카파운 신부에게 하나님의 종’(Servant of God)이라는 이름을 주었고 성인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또 다른 군종 장교들: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 중 평안북도 운산(雲山)과 압록강 일대에서 중국 지원군의 반격 때에는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특히 미 제1기병사단(1st Cavalry Division)의 제8기병연대(8th Cavalry R.)의 피해가 컸다. 당시 포로된 군종장교는 제19보병연대의 북침례교 목사 하이슬로프(Kenneth C. Hyslop, 19th I.R), 2보병사단의 버듀(Wayne H. Burdue, 2d Engineer Battalion, 2d I.D.), 7보병사단 제32연대의 브룬너트(Lawrence F. Brunnert, 32d I.R., 7th I.D), 그리고 다른 두 명은 제2보병사단 제38연대의 심프슨(Samuel R. Simpson, 38th I.R. 2d I.D.), 7보병사단 제31보병연대의 제임스 코너(James W. Conner, 31st I.R., 7th I.D.), 이들은 전사했다.

다른 네 명의 군종장교들은 1953년 포로 교환 때까지 그들의 신병에 관한 어떤 것도 알려지지 않았다(U. S. Army, A Chaplain Conducts Service in Korea). 칼 허드슨(Carl R. Hudson) 군종장교는 일본 점령 미군에 배속되었다가 한국전쟁 참전 미군 선발부대 제24보병사단 제21연대 스미스부대에 편성, 75일 오산에서 미군과 북한군의 첫 번째 교전인 죽미령전투에 종군 중 부대 선임하사와 함께 부상당한 병사들을 부축하여 도보로 남쪽으로 이송하기도 했다. 706명의 군종장교들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피비린내 나는 낯선 한반도 계곡과 벌판에서 피투성이 병사들을 안고 기도했다. 그들의 목숨을 담보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그 밖에 대한민국 군목제도(1951.5)에 일조를 한 미국 감리회 소속의 윌리엄 쇼(William Earl Shaw, 1890-1967, 徐偉廉)은 주한미군에서 활동하면서 한국군 군선교 활동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아들 윌리엄 헤밀턴 쇼(William Hamilton Shaw, 1922.6.5-1950.9.22)는 미 해병대 장교로서 국군 해안경비대 창설과 한국 해군·해병대 창설에 도움을 주었으며, 인천 상륙작전 후 서울 수복전투 지휘 중 서울 녹번동 전투에서 전사,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이 전사한 한국 땅에 선교사로 와서 이화여대 등에서 교수로 할동했다. ‘한국판 쉰들러로 불리는 미 공군 군종장교 러셀 브레이즈델(Rusell Blaisdell, 1910-2007)1.4후퇴 당시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한국전쟁 고아 1,000명을 미군 C-54 수송기 16대에 분승시켜 제주도로 피난시켰다.

미군에 배속된 군종장교들은 한국전쟁 중에 병사들에게는 위로의 손길을 폈고, 전쟁의 절망에 빠진 한국인들에게는 선한 이웃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미 군종장교들의 활동을 다시 한 번 기억하는 것이다.

 

돌아온 윌리엄 딘 소장

북한군의 적화통일3차 작전 대전전투 승리 여세는 1950721일 제4차 작전으로 이어졌다. 작전은 김천과 대구를 점령한 다음 신속하게 낙동강을 건너 이른바 부산작전이라는 제5차 작전에서 부산 점령 성공에 유리한 공격 조건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 최종 작전을 독려하기 위해 김일성은 전선 지휘부를 충주 이남으로 이동시키고 직접 방문, 신속한 공격을 지시했다. 이에 북한군은 729일 추풍령을 넘어 제4차 작전까지 성공, 마침내 일부 북한군이 낙동강을 건너 최후 공격 목표인 부산을 앞에 두고 마산 지역까지 접근했다. 북한군의 신속한 공격은 미군의 증원부대와 가공할 무기가 도착하기 전 작전 완료를 위한 시간과의 전투였다.

그러나 북한군은 천혜의 저지선 낙동강에서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고, 두 달 간 공격에만 의존한 작전에서 6만여 명의 병력 손실은 최후의 작전에 차질을 빚었다. 게다가 북한군 지원 주요 병참선이 길어져 보급품 조달 어려움이 더해졌고, 미군 병력은 이미 북한군의 두 배를 넘게 증강되었다. 해상은 미 함정들로 완전 봉쇄 상태인데다가 미 공군은 북한 전역의 군수 시설물을 초토화 시켰으며, 북한군의 한강 보급선에는 밤낮없이 폭탄 세례가 퍼부어졌다. 무엇보다 부산 방어권에는 세계 전사(戰史)에 그 유례가 없는 병력 밀집도인, 유엔군 5개 사단과 국군 8개 사단 병력이 집중 배치되었다. 북한군은 지금까지의 공격 작전에서 작전상 방어 작전으로의 전환이 불가피 했으며, 바로 그 때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도박사건이 일어났다. 19509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 성공....

 

1,107일 만의 꿈같은 귀환

195394, 한국전쟁에 미군 선봉 사단으로 참전해 실종되었던 제24보병 사단장 딘 소장이 정전 후 비로소 판문점에 그 모습을 보였다. 포로 된지 1,107(326) 만이었다. 딘 소장이 북한 포로수용소에 있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511218, 서방 기자로서는 처음 북한 수용소에서 오스트랄리아의 저명한 종군기자 월프레드 버체트(Wilfred Graham Burchett, 1911-1983)와의 인터뷰 기사가 발표되면서였다. 월프레드 버체트는 북한 포로수용소를 스위스의 휴양지 같다라고 할만큼 공산국가 홍보 기자로 알려지고 있다.

대전전투 후 딘 소장은 실종으로 보고되었다. 딘 소장은 정전 후 포로 교환 때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북한군 제2사단 참모장 이학구(d.1963) 대좌와 교환된 것이다.

소련 지프차로 판문점에 내린 딘 소장의 얼굴은 먼지투성이었다. 비포장 도로를 달렸기 때문이었다. 딘 소장은 박수와 갈채 속에 자유의 몸이 되었다. 딘 소장은 자유의 몸이 된 것이 꿈만 같다’(It seems like a dream)는 말을 남겼다. 다음 날 딘 소장은 미 공군기편으로 일본 도쿄로 후송되었다.

19539, 일본 도쿄 육군병원에서 가료중이던 딘 소장이 기자들 앞에 섰다. 3년간 북한 포로 생활에 지친 몸과 마음이 어느 정도 회복된 듯, 그의 모습은 초췌했지만 표정은 밝은 편이었다고 한다. 딘 소장은 기회있을 때 마다 여러분은 제가 영웅이라고 여기지 마십시오. 저는 영웅이 아닙니다. 저는 다만 일반 사병(dog-faced)에 불과합니다.’(Get it out of your heads that I'm a hero. I'm not. I'm just a dog-faced soldier)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고 한다. 딘 소장은 성공회 교인으로서 한국전쟁이 시작된 날 예배한 후 한 번도 예배할 수 없었다고 한다.

 

윌리엄 딘 2세 박종구 씨 찾아 보은의 인사

1950720일 대전이 북한군에게 함락되면서 본대와 떨어져 36일간 산속을 헤메던 윌리엄 딘 소장이 한 민가에 머물고 있었다.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방이리 박종구(朴鍾九) 씨 댁이었다. 박종구 씨는 2002년까지 여전히 그 집에서 살아왔다. 딘 소장은 대전전투에서 지연작전명령을 수행했으나 결국 대전을 지키지는 못했다. 24사단이 북한군에게 거의 와해된 상태에서 본대를 놓친 후 대덕, 금산, 진안, 무주 등지를 헤메었다. 낮에는 숨어서 자고 밤에는 별의 방향을 보고 걸었다. 어떤 날은 밤새도록 걸었는데 결국 제자리를 맴돌았다. 동남방(東南方)을 향해 걸어야 우군을 만났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 걸었던 방향은 북한군이 작전을 펴고 있는 서남방이었다. 날감자 날곡식 닥치는대로 허기를 채우다가 이질(痢疾)에 걸려 피골이 상접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헤메던 중 마침 박종구 씨를 만난 것이다. 박종구 씨는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는 산속 깊은 곳에서 생면부지의 외국인을 만나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사흘 간 살뜰히 보살펴주었다.

며칠 후 딘 소장은 지역 청년들에 의하여 북한군에게 밀고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미화 5불에 넘겨졌다고 한다. 그것은 북한군 천하에서 청년들이 취할 수 있었던 최선의 수단이었는지 모른다.

딘 소장과 박종구 씨와의 관계는 훗날 무주군청에 근무하던 신호상(申虎相) 씨의별은 잠들지 않는다(2000)는 책을 통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신호상 씨는 딘 소장이 36일 간의 행적과 박종구 씨와의 관계를 소개했다.

딘 소장은 포로된 후 대전, 서울, 평양, 강계로 후송되었다가 나중엔 평양 인근의 자유공원가까운 거리에 있는 2층 양옥집에서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의 통역은 당시 28세의 이규현(1922, 평안남도 강동군)이 맡았다고 한다. 포로 후송 중 미군의 폭격기가 작전을 펼 때는 북한군들이 딘 소장을 신속하게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는 민첩함도 보였다고 한다. 딘 소장은 가족과 같은 부대 지휘관들로부터 많은 편지를 받았다.

나는 딸로부터 69, 어머니로부터 35, 아내로부터 약30, 그리고 아들로부터 다수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딘 소장은 편지한 사람들의 신분에 관하여는 일체 함구했다고 한다. 북한군은 갖은 방법으로 회유와 협박을 가했으나 딘 소장은 사상적 동요를 일으키지 않았으며 비밀을 누설하지 않았다. 때로는 심문관들이 방송에서 트루먼 대통령을 욕하라고 윽박질렀지만 그 고비도 잘 넘겼다. 포로 당시 처음에는 도망치려고 계획을 세웠지만 이질(痢疾)에 걸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한동안은 사단장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평양 수감 생활 중 북한 심문관들이 집중적으로 물었던 질문은 미국의 한국정책, 극동지역의 미군 병력과 무기, 병력 배치 등이었다고 한다. 어떤 때는 44시간 잠을 재우지 않고 심문하면서 남한 군정시절의 역할 등을 물었다고 한다.

딘 소장은 포로 석방 후 그의 아들 윌리엄 딘 2(William Dean Jr)를 박종구 씨에게 보내 그의 고마움을 표시했다고 한다. 이 대목은 딘 소장의 인품을 고려하게 한다. 그는 평생을 무골(武骨) 인생을 살면서 파란만장한 생의 괘적(軌跡)을 남긴 가운데, 그나마 따뜻한 가슴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한국전쟁 포로 영웅윌리엄 딘 장군

한국전쟁 포로-영웅’-윌리엄 딘 장군 82세에 영면하다(Gen.William Dean Dies At 82; Hero-Prisoner In Korea War)-,The New York Times(1981.8.26)가 딘 소장의 죽음을 알리는 기사를 이렇게 뽑았다. 신문은 딘 장군이 캘리포니아 주 버클리(Berkeley)에 있는 알타 베이츠 병원(Alta Bates Hospital)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1981.8.24). 딘 소장은 1955년 퇴역 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버클리에서 조용한 여생을 보냈다.

포로에서 석방된 후 집에 돌아간 딘 소장은 자신이 북한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었던, 1951216일 트루먼 대통령이 수여한 명예훈장을 보았다. 훈장은 추서되었고, 훈장은 미국의 국익을 위해 영예롭게 전사했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한국에서 일본을 거쳐 미국에 귀국한 3개월, 딘 소장은 195312~1955111일 퇴역할 때까지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의 프레시도(Presido)에 있는 미 육군 제6야전군(6th Army) 부사령관에서 그의 마지막 병영 생활을 보냈다. 퇴역후 딘 소장은 외부 생활을 일체 끊고 여생을 보내다가,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의 프레시도 국립묘지에 그의 아내와 함께 안장되었다.

 

윌리엄 딘 소장과 관련된 서적

MG William, F. Dean,General Dean’s Story,1954

Clay Blair,The Forgotten War: America in Korea, 1950-1953, 2003

Roy E. Appelman,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1950

James F. Schnabel,Policy and Direction:The First Year, 1992

Marguerite Higgins,War in Korea: The Report of a Woman Combat Correspondent., 1951

 

마무리 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20004‘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써 발굴작업을 시작하여, 20156월 현재 한국전쟁에 희생된 전사자 321구를 발굴, 누계8,827구의 유해를 발굴하는 성과를 올렸다. 아직도 이름모를 한반도 산하(山河) 어느 곳엔가 13만여구가 남겨져있다고 한다. 그들은 대한민국을 지키다가 하나 밖에 없는 고귀한 목숨을 조국에 바쳤다. 전쟁은 생명과 재산의 희생을 강요한다. 누군가는 1,500년의 전쟁사 가운데 한국전쟁에서 희생된 군인의 피해는 7위에 해당한다고 했던가.

국가기록원 통계에 의하면 국군 621,479(전사, 부상, 실종, 포로), 유엔군 154,881, 민간인 990,968(사망, 납치, 학살, 부상, 행불)의 소중한 인명 피해를 가져왔다. 북한군과 중국 지원군의 희생을 포함한다면 그 수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전쟁은 허용된 폭력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교회 피해(미확인이기는 하지만) 남한의 973개 교회당이 파괴되었고, 북한에서는 1,000여 개 교회당, 납치된 목회자 997, 전투중 희생된 교인 3~4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한다. 1950년 전쟁이 발발한 그 해 초 남한에는 2,000개 교회, 교인 15만 명의 교세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국전쟁이 지난 60여년 간 교회 역시 전후 복구와 더불어 많은 발전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교세는 멈칫거리기 시작했고, 200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한국 교회의 교세 둔화는 피부로 느낄 정도의 감소가 현저했다.

뉴스앤조이(2014.10.10)가 예장합동, 예장통합, 감리회, 예장고신, 예장합신 등 6개교단의 지난 10(2004-2013) 간 각 교단별 교세 변화 추이를 분석한 통계에 의하면, 고신 교단은 20041,622개 교회에서 20131,852개 교회로 늘어났으나, 교인수는 감소현상을 보였다. 2006년 말 교인수는 501,036명에 정점(頂點)을 찍고 2013년에 472,717명으로 계속 감소 현상을 보였다. 그런가 하면 목회자는 10년 전 2,475명에서 3,308명으로 증가했다. 위 통계에서 놀라운 발견은 고신 교단이 6개 교단 중 교세 감소 현상이 비교적 먼저 찾아왔다는 사실이다. 통계 숫자로만 본다면 고신 교단 역시 교인은 영양실조, 목회자는 비만이라는 말을 피해가기 어려울 것 같다.

한국 교회의 교세 감소에 대한 일부 분석자들의 교회 신뢰 추락이 하나의 원인이라는 분석 역시 설득력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교회는 남아도는 목회 인력 대책에 고민해야 할 때라고 생각된다. 예장합동의 경우 목회자는 22,216(2013), 교회 11,593, 예장통합은 목회자 17,468, 교회 8,592, 이는 한국 교회의 목회자 인력에 대한 수요와 공급이 심각한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 교회는 지난 60여년 간 전쟁의 아픔을 어루만지면서 여기까지 왔다. 이제 한국교회는 전향적으로 통일대한민국에 대비하는 인력 확충과 전문 프로그램을 폭넓게 개발해 나가야 할 때다. 78, 80년대의 교회의 외적 팽창의 명암을 분석하여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를 열어가는데 버팀목이 되어야 할것이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 총사령관은 가망없는한국전쟁을 역전시키기 위해 미국 정부에 증원군을 계속 요청했다. 그렇다고 미국 본토에 훈련된 장교들이 남아도는 것도 아니었다. 미국에서 병력 보충 역시 불확실했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미국은 본토 방어를 위한 최소한의 병력을 제외한 모든 병력을 빼내는결단을 해야했다.

미국은 준비되지 않은 전쟁을 위해 댓가를 치를 수 밖에 없었다. 미국에서 증원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남쪽으로 기울어진 전세를 돌이키는, ‘가망없는전쟁을 하는 과정에서 윌리엄 딘 소장이 그 댓가를 치러야 했다. 딘 소장에게 주어진 임무는 지연작전이었다. 지연작전은 예상 밖의 희생을 강요했다. 게다가 병력이 열세였다. 북한군에 비하여 아군은 병사 한 명이 적 열 명을 감당해야 하는 전투였다.

훗날 맥아더 장군은 우리는 712일부터 18일까지 6일간의 시간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런데 딘 소장과 그의 병사들은 우리에게 6일이라는 귀중한 시간을 벌어줬다라고 회고했다. “6은 미 제1기병사단(1st CD, 1921, 혹은 U.S. Cavalry)과 제25보병사단(25th Infantry Division, 1941)이 한국에 상륙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이었다.

미 제24사단은 한국 도착 때 16,000명의 병력과 5,000대의 차량을 보유했다. 75일 죽미령전투에서 721일 옥천전투까지 17일 간의 전투에서 무려 7,000명의 병력손실과 주요장비 60%의 손실을 입었다. 대전전투에서 제24사단은 3,933명의 병력 중 전사, 포로 1,150명의 병력 손실을 당했다. 1개 사단이 거의 와해된 상태였다. 상상을 초월한 패전이었다. 미 해병 제1사단 제7연대 제1대대 소총병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조셉 R. 오웬(Joseph R. Owen)은 그의 논픽션Colder than Hell(1996)에서 한국전쟁을 지옥보다 더 혹독한 전쟁이라는 말로 묘사했다. 미군들은 한국전쟁을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이야기라고 입을 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1개 사단의 기능을 마비시킨 사단장에게 미국 최고의 명예훈장을 수여했다. 일부 언론들은 딘 소장에게 영웅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딘 소장은 작전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했기 때문이었으리라. 물론 이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딘 소장은 군인으로서, 사령관으로서 상부의 작전 명령을 충실히 이행한 자랑스러운 이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미군의 증원부대가 방어선을 구축할 때까지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지연작전이었다. 딘 소장은 이 작전을 충실히 이행한 장군이다. 이로써 낙동강 방어선 구축이 가능했고, 김일성의 제5차 공세 부산작전을 실패로 몰아갔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국군과 유엔군은 북으로 반격의 태세를 갖춘 것이다. 

전쟁없는 통일 대한민국을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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