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연구원 느헤미야 특강이 622일에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세미나실에서 있었다. 지형은 목사(말씀삶공동체 성락성결교회 담임목사)가 독일의 경건주의자 스페너(Spener)에 대해서 강의했다.

▲ 특강을 하는 지형은 목사

경건주의는 개혁운동 /지형은 목사

특히 경건주의는 제2의 경건주의였다고 주장했다. 이 용어는 경건주의가 일어 날 때 일반적으로 쓰였던 용어였다. 이렇게 강의를 하면 사람들이 많은 질문을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과 다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경건주의는 정통신학의 흐름에서 묻히고 잊혔던 부분이다.

경건주의는 종교개혁이라는 말보다는 개혁이라는 용어로 설명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개혁이란 종교분야에 국한 된 개혁이 아니라 전 사회적 개혁이기 때문이다. 중세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진리도 하나, 교회도 하나, 국가들도 오늘날의 개념과는 다르게 하나의 영역으로 이해되었다. 중세를 지나 근대에 이르면서 계몽주의 영향으로 개별적인 국가 개념이 등장하지 그 이전에는 크게 하나의 개념이었다. 그러므로 경건주의가 발흥한 시대의 개혁이란 사실 전 사회적 개혁이라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경건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 경건주의에 대한 통상적인 선입관을 깨는 것이 중요하다. 경건주의 1페이지...

 

경건주이 시대 구분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이후 1555년에는 로마교와 루터파가 종교평화 협정을 맺는다. 1618년에서 164830년 전쟁이 끝나는 해 로마교 루터파 개혁파가 싸우지 않기로 협정을 맺는다. 1555년에 개신교 정통주의가 시작되었다면 1600년경부터 경건주의가 발생한다.

청교도 운동이 독일 경건주의에 영향을 끼친다.

경건주의 배경과 발생: 1555년 평화 협정을 맺은 이후 개신교 정통주의는 칼로 싸우는 대신 교리로 싸운다. 따라서 정통주의란 1517년 발생한 종교개혁이 신학화하고 정착화된 것이다. 종교 개혁자들의 손자 세대가 되는 1600년 경의 사람들은 할아버지들의 종교개혁의 정신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종교개혁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지 라고 질문하며 인간정신이 변화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인간 정신의 큰 흐름은 경건주의와 계몽주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진영은 비슷한 정신이 아니라 매우 다른 경향을 띠었고 1700년 대에 날카로운 토론과 갈등을 일으켰다.

리츨(Albrecht Ritschl)은 카톨릭의 신비주의가 경건주의 뿌리라고 보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리츨은 경건주의에 대해서 매우 일방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바르트는 경건주의를 인본주의의 한 흐름이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바르트는 전반적 개혁에서 떠나 개인의 경건에만 집중했던 경건주의를 비판한 것이다. 리츨과 바르트는 상반하는 신학적 입장에 서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경건주의를 비판함으로 경건주의는 오해를 받고 묻혀지고 말았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와서 경건주의에 대한 새로운 연구와 평가들이 나오기 시작해서 1964년 독일어권을 중심으로 교계와 학계가 참여하여 경건주의 연구가 크게 진전되었다.

 

경건주의의 태동과 출발: 새로운 경건성의 개척자 아른트(Johann Arndt, 1555-1621)는 종교개혁 이후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경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경건주의 창시자 스페너(Philipp Jakob Spener, 1635-1705)는 교리도 중요하지만 삶의 변화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강조점을 바꾸었다. 따라서 정통주의적 신앙유형에서 교리와 신학이 강조되었다면 경건주의는 체험과 경험이 강조되었다. 교리와 신학을 완전히 배제하고 체험과 경험을 강조하는 것은 신비주의라 할 수 있다.

16708월 초 스페너가 목회했던 프랑크프르트의 바퓌써 교회에서 경건 모임’(Collegium pietatis)이 시작되었다. 경건모임은 말하자면 소그룹 성경공부 모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 지식을 얻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말씀에 따라 삶이 변하여 철저하게 그리스도인 답게 되는 것이 목적이었으니 말씀 묵상모임이라고 할 수 있다. 경건 모임은 경건주의의 대명사가 되었다. 기독교 역사에서 비제도적인 소그룹 모임이 제도권 교회 안에서 처음으로 정착된 것이 바로 여기다.

종교개혁 이후에도 일반인들이 교리문답서를 읽을 지언정 성경을 직접 읽는 일은 드물었다. 경건주의 시대에 와서야 평신도들이 성경을 직접 읽는 일들이 본격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큐티운동의 시발점이 바로 경건주의자 진젠도르프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또한 현대 찬송가의 기본 틀이 경건주의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 1663-1727)는 스페너가 시작한 경건주의 운동을 거대한 시스템으로 만든 자이다. 프랑케는 할레(Halle)에서 경건주의를 크게 일으켰다.

▲ 지형은 목사의 특강이 진행되고 있다.

경건주의가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 경건주의 운동은 사고의 틀의 구조가 바뀌던 시대에 기독교를 계승한 운동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시대가 바뀌고 사고의 틀이 바뀌고 있는 시대이기에 경건주의 운동의 교훈을 받을 필욕 있다. 경건주의의 핵심은 바로 교인이 바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인의 삶속에 강력하게 작동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도 참으로 진지하게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교회사적으로 경건주의 운동을 직접 한국교회에 적용할 수는 없다. 그 시대의 경건주의 운동이 어떠했음을 밝히고 오늘날의 상황을 고려해서 적용해야 한다. 그 시대적 상황 속에서 경건주의는 정신사가 변화는 그 상황 속에서 즉 근대정신의 상황 속에서 기독교 정신을 이어나가게 한 운동이다. 새롭게 태어난 계몽주의라는 근대성의 상황 속에서 기독교 정신을 이어가게 한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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