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제1차 한국교회 순교자 추모예배가 한국중앙교회에서 한국교회순교자기념사업회 주최로 지난 630일에 있었다. 순교자기념사업회 이사장 임석순목사(한국중앙교회)의 인도로 드려진 추모예배에서 순교자기념사업회 부이사장인 정주채목사(향상교회 은퇴, 코람데오닷컴 대표)가 기도하고 요21:18-23을 본문으로 순교자 기념사업회 이사 고훈목사(안산제일교회)순교신앙이란 제목으로 설교했다. 순교자 유재현목사의 외손녀사위 찬양사역자 천관웅목사가 특별찬양을 드렸다. 설교 후에 민경배교수, 이상규교수, 박명수교수가 순교자들이 지녔던 화해와 평화의 정신을 기리며라는 주제로 발제강연을 했다. 각 발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주기철의 화해와 화합정신” / 민경배 교수(백석대 석좌교수)

▲ 민경배 교수

주기철의 신앙은 참대 같았고 엄격하고,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철저한 하나님 신앙이었다. 강력한 저항정신과 순교자의 칼 날 같은 신앙이 특징이었다. 근본에 충실한 표준 신앙의 산 실체였다. 그런데 주기철의 인간성은 그의 강고한 순교신앙의 철저와는 병행할 정도로 친화적이었다.

그 첫째 국면이 서북교회와의 계속적인 접속과 융합이다. 그는 경남 웅천 출신인데 계속 서북교회와의 연계를 당연한 것으로 알고 지낸다. 그의 생시 한국교회는 서북-비서북의 대결이 아주 첨예하여 신사참배 문제가 아니었다면 남북 총회로 갈라서고 더 나아가서 분열에 이르리만큼 혹독하였다. 당시 한국교회 50만 교인 중 35만이 장로교인이고 그 4/5가 평안남도에 밀집되어 있었다. 경남 출신 주기철은 평북 정주의 오산중학교에 진학한다. 그리고는 1925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19회로 졸업하고는 부산 초량교회와 마산의 문창교회를 거쳐 한국 장로교의 상징인 평양의 산정현교회를 담임하게 된다. 한국교회 서북-비서북의 구도를 구조적으로 녹아내리게 한 일련의 지속적인 보폭이 눈에 뜨인다.

그가 평양 감옥에서 마지막으로 오정모 여사를 만났을 때 기록상으로 마지막 한 말은 나 누가 따뜻한 숭늉 한 사발 가져다주었으면 하오라고 전한다. 그는 칼 날 같은 신앙의 소유자다. 그러나 반면 그렇게도 소박한 인간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대결과 갈등을 넘어선 거대한 전 방위 신앙의 구도를 본다. 확고한 순교자적 신앙에 다사한 인간성, 그런 것이 한국교회의 유산일세라 실제 보이고 떠난 주기철의 흔적, 그것은 오래 오래 우리들 한국교회의 드높음 깃발로 휘날리고 있어야 할 것이다.

 

손양원 목사와 화해” / 이상규 교수(고신대 역사학)

▲ 이상규 교수

손양원목사(1902-1950)에게는 죄의 심각성에 대한 확신이 있었고, 따라서 그는 회개를 강조하고 자신의 일상에서 이를 실행하였다. 죄의 심각성에 대한 깊은 의식이 있었기에 죄와 비참에 대한 감각 없이는 참된 믿음이 있을 수 없었다고 보았고, 인간의 죄가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고 인식했다. 손양원 자신은 죄와 죄책의 지배하에 있음을 끊임없이 인식하고 있었다.

손양원 목사에게 있어서 죄는 모든 문제의 근원이었고, 한국교회의 쇄신은 죄의 청산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철저한 회개와 자숙을 강조했다. 이런 인식은 두 가지 현실, 첫째는 신사참배 강요와 타협에서, 둘째는 해방 후 대립과 분열에서 파악했다. 그가 회개를 강조했다는 점은 영적 순결을 중시했음을 할 수 있다. 그가 신사참배를 거부한 것도 순결한 신부와 같은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확신에서였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었다. 그래서 그는 죄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이 강했으며, 회개치 않음이 모든 화의 원인이라고 이해했다. 민족의 어려움, 해방 후의 혼란, 6.25 전쟁도 죄의 원인이며, 회개하지 않는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책벌로 이해한 것이다.

전쟁이 발발한 후 서울에 있던 목사들이 피신목적으로 남하하였을 때 이 소식을 들은 손양원은 이렇게 외쳤다. “아 큰일 났다. 이 민족의 죄 값으로 하나님께서 채찍을 드셨는데, 수도 서울에서 죄에 대한 회개를 외치고 복음을 전하다가 제물이 되어야 할 선지자들이 모두 도망쳐서 밑으로 내려 왔으니 어떻게 하겠느냐? 누가 그들에게 회개를 외치겠는가?” 이런 점들을 고려해 볼 때, 회개는 손양원의 삶과 신앙여정, 신앙정신과 영성을 읽는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다.

손양원 목사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용서를 실천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용서하심을 시위해 주었다. 여순사건에서 동인과 동신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을 양자로 삼아 두 아들이 순교냐 아니냐는 논쟁과는 상관없이 용서를 실천한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손양원은 다른 이들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사랑을 실천했고, 이런 점에서 안용준은 손양원을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존칭했다. 손양원 목사는 비록 화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으나 화해의 이중적 측면, 곧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의 화해를 시도하고, 용서를 통해 사람과의 화해를 추구한 인물임을 할 수 있다.

 

한국 최초의 순교자 로버트 토마스박명수교수(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 박명수 교수

토마스는 북한이 말하듯이 제국주의의 앞잡이로서 침략자인가? 아니면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선교사인가? 이 문제는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토마스에 대한 여러 가지 역사적 자료를 살펴보면 그의 선교관을 알 수 있다. 그는 서구 기독교 문명에 대한 분명한 우월의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것이 강제가 아닌 설득으로 전달되어 야 하며, 그 과정에서 매우 조심스러운 자기희생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부분 복음주의적인 개신교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던 선교관이며, 힘으로 선교하려는 제국주의적인 선교이해와는 다른 것이다. 토마스는 처음부터 기독교선교가 제국주의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서는 안된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186312월 초에 중국 상해에 도착한 토마스는 중국문화를 배우는 것이 선교사의 기본적인 과제라고 생각함으로 런던선교회 중국 책임자인 무어헤도(Wm. Muirhead)와 갈등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토마스는 토착문화를 무시하는 제국주의와는 관계없는 사람이다. 무어헤도와의 갈등으로 1864127일에 런던선교회를 사임한 토마스는 중국 지푸주재 세관에 통역관으로 취직하여 중국어뿐 만아니라 러시아어와 몽골어도 익히게 되었다. 통역관으로 일하면서 그는 스코틀랜드성서공회 중국책임자 윌리엄스를 만난다. 윌리엄스를 통해 지푸에 도망와있는 2명의 조선 천주교인들을 만나고 성서의 배포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게 된다.

로버트는 조선에 성서를 배포하기 위해서 세관을 사직하고 황해도 어느 곳(솔래설과 웅진설이 있음)인진 분명하지 않지만 조선에 들어와 약 2달 반 동안 평안남도와 황해도 일대를 다니면서 천주교인들을 만나 조선사정을 들으면서 조선어를 배우는 한편 성서를 반포하였다. 이는 전형적인 기독교 선교사의 모습이다. 아울러서 한국에는 여자들도 배울 수 있을 만큼 좋은 문자인 한글이 있고, 한문 성경이 아닌 한글성경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국으로 돌아와서 당시 북경선교책임자였던 에드킨스의 지도에 따라 북경 중서학원의 임시원장으로 활동하던 토마스는 자신이 지난해 서해안에서 배포한 성경이 평양에 전달되어 읽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조선에 다시 들어가 선교하기를 원한다. 그러던 중 조선에 들어갈 수 있는 방편으로 제너럴셔먼호를 만나게 된다. 토마스는 선교의 기회를 찾기 위해서 이 배를 탓고, 다른 사람들은 상업의 기회를 얻기 위해서 조선을 향했다. 그러나 이 배는 바로 조선에 척외 사상이 강력한 바로 그 시점에 조선을 향했다. 무장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였다. 여기에 역사의 복합성이 있다. 선교, 상업, 무력은 서로 배치되는 것 같으면서도 함께 진행되어 왔다.

이런 배경에서 토마스는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을 따라 평양으로 향한다. 대동강의 수량이 줄어들어 움직일 수 없었던 제너럴셔먼호는 대원군의 몰살 명령을 따라 불에 타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토마스는 박춘권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분명한 것은 토마스는 복음주의적인 선교관을 갖고 선교를 위해 조선에 왔고, 복음을 전하기위해서 죽었기 때문에 순교자라고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당시 사람들은 제너럴셔먼호를 제국주의 군사력으로 자신들을 정복하기 위해서 온 프랑스 함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너럴셔먼호는 프랑스와는 다른 정책을 추구하고 있었던 미국의 상선이었고 토마스는 영국인이었다. 따라서 북한이 제너널 셔먼호 사건을 대미 투쟁의 효시로 삼는 것은 잘못되었다.

제너럴셔먼호와 토마스선교사의 사건은 조선이 서양의 개신교와 만난 첫 번째 사건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당시 서로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문제가 많이 발생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해서 열린 교류 때문에 오늘의 기독교가 생긴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를 미화하지도 말고, 역사를 왜곡하지도 말고 사실대로 서술해야 할 것이다.

▲ 순교자 추모 예배가 드려지고 있다.

특별히 기독교를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공격하는 반 기독교적인 성향이 강한 현재에 토마스 사건을 바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살펴 본 것처럼 토마스는 원래 제국주의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서구의 무역전쟁에 끼어들었고, 희생을 당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선교도 인간의 허물과 함께 진행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잘못은 잘못대로 위대한 점은 위대한 대로 설명하는 것이 역사가의 임무라도 본다.

▲ 순교자기념사업회 단체사진

발제강의 후에 순교자기념선교회 회장 임은빈 목사(동부제일교회)가 유가족들을 비롯한 귀빈들에게 감사와 존경의 말씀을 전했고 한국중앙교회 찬양단의 봉헌찬양과 함께 봉헌하고 심원보 목사(서울제일감리교회 원로)가 봉헌기도하고 이웅삼목사(순교자기념사업회 사무총장)가 광고하고 순교자기념사업회 상임고문 김명혁목사(강변교회 원로)가 축도함으로 모든 순서를 마쳤다. 예배 후에 한국중앙교회가 제공하는 오찬과 더불어 유가족들과 참가자들을 위한 선물증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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