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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길 목사

1980, 90년대 미국 남부(Southeast) 교회들에게 복음성가 열풍을 몰고 온 캐시드럴스(The Cathedrals Quartet, 1963-1999)는 유명한 남성 중창단 그룹이다. 글렌 페인(Glen Payne, 1926-1999), 조지 욘스(George Younce, 1930-2005), 어니 하스(Ernie Haas, b.1964), 로저 베넷(Roger Bennett, 1959-2007), 그리고 스콧 파울러(Scott Fowler, b.966) 등 다섯 사람으로 구성된 이 그룹은 1999복음성가 명예의 전당’(Gospel Music Hall of Fame)에 등록되리만큼 당시 가장 대중적 인기 정상에 올라 있었다.

필자는 이미 세상을 떠난 조지 욘스를 참 좋아한다. 조지 욘스는 보통 전설적인 베이스 성악가 조지 욘스’(Legendary bass singer George Younce)라 불린다. 조지의 발성은 심금을 울리는, 우렁차면서도 감미로운 음폭의 저음 베이스 성악가다. 조지는 말년에 암 투병 중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까지도 복음성가를 부를 만큼 열정이 대단했다. 필자가 조지 욘스의 복음 성가에 매료된 것은 아이라 스탠필 (Ira Forest Stanphil, 1914-1993) 목사가 1950년에 작사·작곡한 나는 누가 내일을 주관하시는지 안다’(I know Who holds Tomorrow) 라는 제목의 복음성가 때문이다.

미국 남부의 복음성가는 전통적인 유럽풍의 퓨리탄 복음성가와는 달리, 흑인 영가와 재즈-(Jazz-Rock)이 융합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인 것 같다. 1950년대 이후 일부 미국 남부 교회들은 전통적인 예배 방식과 유럽풍의 고전적 찬송가 틀에서 벗어나 남부 특유의 율동적인 복음성가 애창 기류에 서서히 자리 매김 했던 것으로 전해 지고 있다.

원래 원주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남부가 스페인, 프랑스, 영국의 식민지배 시대를 거치면서, 서부 아프리카 흑인노예 유입과 이민자들로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되었고, 1865노예제도 폐지후에는 흑인들이 그들만의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찾아 미시시피 강의 지류인 오하이오 강(Ohio River) 북쪽 일대에 정착했다. 그 후 1925년까지, 이른바 흑인 르네상스시대로 불리는 60년 간 흑인들은 복음성가를 통하여 흑인들의 정체성과 결속을 다져 마침내 1925~1985년까지 60년 간 블랙파워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남부 교회의 복음성가는 정서적으로 흑인들의 애환의 역사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한국 교회의 애창 복음 성가의 하나인 내일 일은 난 몰라요는 아이라 스탠필 목사의 I know Who holds Tomorrow를 안이숙(安利淑, 1908-1997) 선생이 의역(意譯), 1980년 초 당시 최귀(강승구 목사)라 가수를 통하여 한국 교회에 널리 보급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가사의 내용이 비관적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가사를 찬찬히 뜯어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이 글은 일생동안 600여곡을 만든 아이라 스탠필 목사가 작사 작곡한 I know Who holds Tomorrow의 그 배경과 노랫말에 녹아있는 가사를 다시 음미하면서 독자들과 함께 위로와 소망을 공유하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 노래는 수많은 영혼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었던 것으로 안다. 그러나 정작 아이라 스탠필 목사는 이 노래를 만들기까지 고난의 늪을 헤매야 했다. 그래서 그것이 알고싶기도 했다.

뉴멕시코 출신: 아이라 스탠필은 1914214, 지리적으로 사우스 웨스트로 구분되는 뉴멕시코 주 벨뷰(Bellview)에서 앤드류 스탠필(Andrew C. Stanphil, 1892-1979)과 플로라 엥글러 스탠필(Flora Magdelinda ‘Maggie' Engler Stanphil, 1894-1990) 사이에서 태어났다. 스탠필은 19931230일 미국 중부 캔자스 주 오버랜드 파크에서 80세의 생일을 두 달 앞둔, 79세 때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곳 존슨 추모공원에 묻혔다.

스탠필은 태생지 뉴멕시코에서 1,400 여 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미국 중부의 미주리 주 칠리코시(Chillicothe) 초등학교를 졸업, 1932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칠리코시 대학에서 공부했다. 한 때는 캔자스 주 코피빌(Coffeyville, Kansas)에서 젊은 날을 보내기도 했다. 스탠필은 복음성가를 통하여 기독교 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인정되어 인디애나 주 침례회의 하일스앤더슨(HAC, Hyles-Anderson)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혼인생활: 1939423, 스탠필은 미주리 주 플레트 리버의 케네트 H. 로손 목사(Rev. Kennett Harry Lawson, 1901-1960, Lucy M. Lawson, 1904-1974)의 넷 자녀 중 장녀, 피아니스트인 젤마 로손(Zelma Lawson Stanphil Cowan, 1923-1951)과 혼인하여 아들 레이먼드(Raymond)를 얻었다. 두 사람은 1936년 미주리 주 스프링필드에서 처음 만나 혼인, 그러나 두 사람의 혼인 생활은 1948107일 이혼으로써 끝났다. 스탠필은 195167일 그의 첫 아내가 교통사고로 죽은 후 글로리아 할로웨이(Gloria Holloway)와 재혼, 쥬디(Judy)와 캐시(Cathy) 두 딸을 두었다.

하나님의 성회 목사: 스탠필은 1939429, 그의 나이 25세 때 미국 남부 하나님의 성회미주리노회에서 목사가 되었다. 천부적인 음악 재능을 타고난 스탠필은 20세기 중반 미국 남부에서 복음성가 작곡가, 가수 등 음악 분야에 탁월한 재능을 보이면서 일약 명성을 얻었다. 스탠필은 생래적 재능뿐만 아니라 가정적으로 음악을 좋아하는 부모의 후천적 영향도 크게 받았다. 10세 때 이미 피아노와 오르간, 우쿠레레(ukulele)를 비롯한 다양한 악기를 다룰 수 있었다. 12세 때 스탠필은 자신의 진로를 결정짓는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고, 자원하여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 헌신했으며, 17세 때부터 각종 교회 행사에 참여하여 그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목회와 복음성가 활동: 스탠필은 17세에 처음으로 복음성가를 만들어 세상에 내어놓으면서, 미국을 비롯한 캐나다 등 40여 개국 순회공연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스탠필은 22세 때 교회에서 처음으로 설교를 하기도 했다.

목회활동: 그는 텍사스 주 브레켄리쯔(Breckenridge) 교회에서 음악과 청년 사역을 시작으로 캘리포니아의 오클라호마, 오렌지, 1940년대에는 베이커스필드(Bakersfield), 1949년에는 텍사스 포트워스(Fort Worth), 1956년에는 플로리다 레이크워스(Lake Worth), 1962년 팬실베니아 주의 랜캐스터(Lancaster) 등지에서 교회 봉사와 복음성가 활동을 했다.

 

대표적인 작품

-Follow me, 1953

-He Washed My Eyes With Tears

-I Know Who Holds Tomorrow, 1950

-Massion Over The Hilltop

-Room At The Cross

-Suppertime, 1950

-Thirty Pieces Of Silver

-Unworty


복음성가 명예: 
1981년 스탠필은 복음성가 명예의 전당’(GMA, Gospel Music Hall of Fame, 1997), 그리고 2001년에는 남부 복음성가 명예의 전당’(SGMA, Southern Gospel Music Hall of Fame)에 각각 등록되었다. 이 명예는 음악을 하는 사람에게는 화려한 꿈이기도 했다.

자서전: 1983년에는 그의 자서전 This Side of Heaven이라는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고난에서 생산된 작품: 스탠필의 고난은 혼인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그의 아내 젤마 로손은 호세아의 아내 고멜처럼 집밖으로 나돌았다. 스탠필은 세 번이나 아내의 변화를 참아 기다렸으나 결국 스탠필은 아내에게 이혼을 당했다. 젤마 로손은 남편 스탠필의 용서와 이해를 뿌리치고 아들을 데리고 아예 집을 나가버린 것이다. 스탠필은 오랫동안 남편으로서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을 견디며 살아야 했다. 세상의 인심이 그렇듯, 사람들은 남의 사정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구름 잡듯 입방아를 찧어대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스탠필은 내색하지 않고 목회와 복음성가 사역에 더욱 매진했다.

스탠필은 그의 나이 50세 즈음 텍사스 주에 있는 한 교회로 옮겼다. 그곳에서 스탠필은 재혼의 기회를 포기하고 목회에만 전념했다. 재혼을 결심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자기를 버리고 집나간 아내 젤마 로손이 언젠가 돌아올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젤마 로손이 교통 사고로 죽은 후 평소에 그를 따르던 글로리아 할로웨이와 재혼하게 되었다.

내일의 주관자: 1950년 어느 날, 스탠필은 운전 중에 마음이 한없는 번민과 고통에 싸였었다. 1949년부터 스탠필은 첫 아내에게 이혼을 당한 후 아들의 양육권마저 빼앗긴 상태에서 삶의 무게를 가장 심하게 느낄 때였다.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황에서 그 때 떠 오른 착상이 바로 누가 내일을 주관하시는 지 안다라는 생각이었다. 당시 스탠필은 한날의 괴로움”(6:34)을 감당하기에도 힘겨웠다. 그 때 스탠필이 쓴 가사가 바로 I Know Who Holds Tomorrow.’, 이 가사에 곡을 붙여 만든 것이 한글 번역의 내일 일은 난 몰라요라는 복음 성가다. 영어 가사에 중문을 첨부했다.

I Know Who Holds Tomorrow 我知誰掌管明天

누가 내일을 주관하는지 알아요

I don't know about tomorrow; 我不知明日將如何,

내일에 대하여 난 몰라요

I just live from day to day. 每時刻安然度過;

다만 하루하루 살아요

I don't borrow from it's sunshine, 我不求明天的陽光

내일의 햇빛을 빌려서 살지는 않아요

For it's skies may turn to grey. 因明天或轉陰暗

내일의 하늘이 회색으로 변할 수 있으니까요

I don't worry o'er the future, 我不為將來而憂慮

나는 장래를 위해 염려하지 않아요

For I know what Jesus said. 因我知主所應許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알기 때문이죠

And today I'll walk beside Him, 今天我必與主同行

오늘 난 예수님과 함께 걷는답니다.

For He knows What is ahead. 祂深知前途光景

예수님이 앞길을 알고계시니까요.

 

[Refrain 副歌]

Many things about Tomorrow, 許多事明天將臨到

내일에 대한 많은 일들을

I don't seem to understand; 許多事難以明瞭

나는 헤아릴 수 없을 듯하지만

But I know Who holds Tomorrow, 但我知主掌管明天

누가 내일을 주관하시는지 알아요

And I know Who holds my hand. 祂必要領我向前

나는 그 분이 내 손 붙잡아 주실 것을 알아요.

 

노랫말의 배경: 스탠필은 순탄치 않은 혼인생활을 통하여 신앙의 깊은 세계를 발견했던 것 같다. 그가 지은 복음 성가의 가사는 마태복음 6:25~34절의 내용에 배경을 두고 있다. 이 내용은 마태복음6:24절의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는 말씀이 전제되어야 그 정확한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스탠필은 고난과 시련 가운데서도 그의 인생의 주인은 오로지 한 분뿐이신 하나님이었다. 그러기에 이혼 당한 처지에서도 스탠필은 굳이 재혼을 고려하지 않고 아내가 돌아올 것을 기대한 것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 실천적 태도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왜냐하면 내일의 태양을 빌려서 오늘을 살지 않는이유가 바로 내일의 태양이 먹구름 속에 감추어질 수있기 때문이었으리라. 인간은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알 수 없기”(27:1)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내일은 시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영역에 속한다(cf.12:19,20; 21:30)

사람은 매일 만나는 인생의 수많은 일들을 사람의 머리로는 다 이해할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가운데 우리를 놓치지 않으신다는 믿음이다. 그래서 이 복음성가는 내일 일은 난 몰라요’(I don't know about tomorrow) 보다 알지 못하는 내일을 누가 주관하고’(But I know who holds tomorrow) 계시는지에 대한 인식적 확신이 강조되고 있다고 여겨진다.

 

찬송가와 복음성가의 차이

한국찬송가공회는 새로운 찬송가를 편찬하면서 머리말에서 찬송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복음을 선포하는 예술이며, 곡조 있는 기도요,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최고의 선물이며 은혜이다라고 전제하고, ‘찬송은 거룩하고 신령한 예배를 위하여 만들어진 노래라고 했다. 필자의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찬송가는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는 노래라 생각된다. 찬송가에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적 요소, 찬양과 기도, 은혜에 대한 사모함이 조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찬송을 통하여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약속을 바라며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삶을 다짐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복음성가는 사람을 향하여 죄의 결과를 경고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자유와 평화와 기쁨, 그리고 천국을 약속 받도록 권면하는 노래라고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성가는 전도를 위한 음악적 메시지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복음성가는 그리스도인들의 개인적 신앙 체험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의미가 강조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D. L. 무디(D. L. Moody, 1837-1899)의 전도 집회에서 찬양을 주도했던 감리교의 아이라 생키(Ira David Sankey, 1840-1908)복음찬송가’(Gospel Hymn), 그리고 20세기 빌리 그래엄(W. F. 'Billy' Graham, 1918) 전도 집회에서 자신이 작곡(1929)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찬송가 94)를 불러 대중을 감동시킨 조지 비벌이 쉐아(George Beverly Shea, b.1909), 가끔 한국의 무디로 불리는 이성봉(李聖鳳, 100-1965) 목사의 꿈결같은 이 세상에 산다면 늘 살까등은 복음성가로써 전도 집회의 감동을 극대화시켰다.

찬송가와 복음성가의 큰 차이 가운데 하나는 찬송가 애창은 시대와 환경에 관계없이 지속된다는 점일 것이고, 이와는 달리 복음성가는 시류(時流)에 민감하다는 점일 것이다. 이를테면 18세기에 만들어졌을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오라찬송은 한국전쟁 중 교인들이 많이 불렀던 찬송가인 동시에 지금도 여전히 애창되고 있다. 무엇보다 찬송가는 복음성가와는 달리 예배송으로 공인된 것이다.

 

마무리 글

최근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Charleston, S. C.) 시에 있는 앰마누엘 감리회 아프리칸(AME, 1816) 교회당에서 성경 공부하던 교인들이 21세의 딜런 루프(Dylann Roof)가 난사한 총에 맞아 남녀 9명이 사망하는 충격적 사건이 발생했다. AME는 메릴랜드 남쪽 볼티모어 일대의 아프리칸 교회로서는 가장 규모가 크고 약200년의 오랜 역사를 지녔다. 오랜 역사만큼 자유를 위한 저항과 노예제도, 평화의 역사와 함께한 교회이기도 하다.

미국의 언론들은 사건명을 인종차별 학살이라고 했다(CNN) 사건과 관련된 언론의 뜨거운 이슈가 된 것은 바로 150년간의 역사를 가진, 미국 시민전쟁 직전 연방정부를 탈퇴한 6개 주의 남부동맹 정부(CSA, 1861-1865)를 상징했던 남부동맹기’(the confederate flag)였다. 일각에서는 인종차별을 상징하는 동맹기 사용금지를 주장하고 나섰다. 이와 관련하여 2015627()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에는 어린아이들을 포함한 남녀 수백 명이 남부동맹 기() 사용금지 보호 집회를 가지기도 했다.

지난 630일 밤에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 시에서 북쪽으로 9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윌리엄스 버그 카운티의 그릴리빌(Greeleyville) 타운에 있는 마운트 시온 AME 교회당이 화염에 휩싸였다. 민감한 인종차별 문제가 대두된 상황에서 100년의 역사를 가진 교회당의 화재 사건 역시 여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최근 일련의 사건이 발생한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는 미국에서 남부로 구분되는 바이블 벨트’(Bible Belt)가 시작되는 지역이다. ‘바이블벨트는 이른바 보수성이 강한 개신교 근본주의(Fundamentalist Christians)와 침례교, 복음주의 등이 사회활동에 있어서 그 중심을 이루는 지대를 가리키는 속칭(俗稱)이다.

바이블 벨트는 미국 서부의 27%의 불신 점유율에 비하여 6%의 점유율을 보일만큼 기독교 인구가 대세를 이루는 지역이다. 일부 종파에서는 흡연을 비롯하여, 댄싱, 당구, 음주를 금기시할 뿐 아니라 성경을 손에 들지 않고 공적 예배에 참석하는 것(대부분 교회에 성경이 비치되어 있기 때문)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보수의 도덕적 위선(僞善)’ 역시 만만치 않다. 미국 전역에서 동성(同姓) 연애 반대 20개 지역이 바로 성경벨트안에 집중 분포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신앙적 보수성 이면에는 도덕적 위선점유율도 높게 나타났다. 미국 전역에서 남부가 이혼율, 살인, 미혼모, 각종 성병, 결손가정, 영아 사망, 비만율(?), 포르노 접속률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난 것은 좀 예상 밖의 현상이다. ‘보수의 위선적 함정일까?

사우스 캐롤라이나를 비롯한 오클라호마(OK), 루이지애나(LA) 10여개 주로 구분되는 남부 지역의 정서는 흑인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다. 이 지역이 바로 복음성가(Gospel Song)를 비롯한 대중음악의 흑인영가’, 재즈-(Jazz-Rock), 블루스(Bluce), 컨츄리뮤직(Country Music), 경음악(Mood Music)의 배경 지역이라는 데에 의문을 가질 사람은 없을 것이다.

17세기 서부 아프리카 흑인들이 노예 신분으로 미시시피 강 삼각주 일대에서 고난의 역사를 시작하면서 노동에 시달려 괴로울 때, 마음이 한없이 우울할 때 부른 노래가 아프리카의 블루스 음악이라고 한다. 블루스에는 아프리칸들의 한()이 맺혀있다. 아프리칸들은 청교도에게 기독교 신앙을 이어받아 그들의 정서에 맞는 복음성가를 만들어 백인들을 감동시켰다는 것은 또 다른 역사의 이해가 필요할 할 것 같기도 하다.

흑인들의 신앙적 노래가 바로 흑인영가’(Spiritual Song), 복음성가이다. 복음성가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치심을 신앙적 체험으로 승화시킨 간증적 음악이라고 이해한다면, 미국 남부의 복음성가의 특징은 격정적이거나 한이 서린 멜로디와 발성으로 삶의 체험을 표현하는 특징을 가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619년 네덜란드 윤선(輪船)20명의 아프리카 토착인이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에 상륙한 것이 미국에서 아프리카 계 미국인들의 역사 시작이다. 아프리카인들은 당시 영국 식민 지배자들의 노예가 된다. 이것을 미국 역사에서 아프리카인의 노예 잔혹사라고 말해야 할까? 그 후 1860년 대 노예 무역선이 끝날 때까지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미국 노예로 끌려온 사람들이 무려 1,200만 명에 달했다니 믿기가 어려울 정도다.

그 후 미국 남부의 아칸소, 텍사스,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앨라배마, 플로리다, 조지아,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로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이 유입되었다. 백인들은 아프리카인들을 사람취급하지 않았다. 사람대우 받지 못한 노예들은 스스로의 영혼을 위로해야 했고, 그렇게 발전한 것이 흑인영가이며 복음성가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프리칸의 서정성(抒情性)은 블루스로 그들의 삶의 애환을 표현했던 것이고, 그 애환을 신앙적으로 승화시킨 것이 복음성가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스탠필은 자신의 개인적 고뇌의 아픔을 신앙으로 승화시켜 더 밝은 소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이와 같은 남부 정서에 스탠필의 I know Who holds Tomorrow'는 인종과 문화를 초월한 공감 감동을 불러일으켰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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