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쉐마교육학회 하계 학술논문 발표회가 지난 6일 서울 염창동에 위치한 쉐마교육연구원에서 열렸다. 박창조 목사의 인도로 드려진 1부 예배에서 신11:18-21을 본문으로 안병만 목사(열방교회)말씀 전수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안목사는 설교를 통해서 쉐마교육의 핵심은 말씀 전수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성도들과 특히 다음 세대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전수되기 힘든 오늘날 쉐마교육은 마른 땅의 단비와 같은 역할을 해왔다고 밝혔다. 안목사는 130년 전에 선교사들에 의해서 전수된 하나님의 말씀을 다음 세대에 전수하기 위한 막중한 사명이 우리에게 있음을 쉐마교육을 통해 발견하게 됐다고 회상하며 쉐마교육은 교회성장을 위한 프로그램이라기보다는 목회의 본질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며 주님이 주신 다음세대를 위한 소망이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 쉐마학회장에 연임된 김진섭 교수

예배 후에 제2부 학회 논문 발표의 첫 번째 시간 공통주제 발제로 현용수 박사(쉐마교육연구원 원장)용서와 기억의 신학”, 김진섭 부총장(백석대학교)쉐마교육이 말하는 구약의 성령님”, 이미란 교수(한영신학대학교)효 덕목을 기초한 누리과정 인성교육의 실제와 적용방안이라는 제목으로 각각 발표했다. 또한 논문 발표 후에 김진섭 교수의 인도로 쉐마학회 총회가 있었다. 정기총회결과 김진섭 박사가 학회장을 연임하게 되었다. 다음은 발제들 가운데 현박사의 강의를 간략하게 소개한다.

▲ 현용수 박사가 발표하고 있다.

용서와 기억의 신학 / 현용수 박사

이미 용서한 것을 기억하고 살아야 하는가? 아니면 잊어버리고 살아야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방의 죄를 용서하고, 용서 받은 입장에서 다시 그 죄를 기억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한 번 용서하고 용서받은 죄는 피차 잊어야 진정한 용서가 되고 화합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망각을 미덕이라고 칭찬하기도 한다. 성경적인 근거는 하나님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이후에는 다시는 기억하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라고 한다(43:25; 31:34; 8:12, 10:7). 하나님도 성도의 죄를 용서한 이후에는 그 죄를 기억하시지 않는 분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처럼 자신에게 죄를 지은 자의 죄를 용서한 이후에는 다시 그 죄를 기억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과연 맞는가?

하나님은 신9:7에서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케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고 하셨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 후에도 수천 년을 걸쳐 여러 번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의 과거 죄를 상기시키셨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78:38; 9:16-18). 이러한 형태의 메시지는 신약시대에 스데반이 유대인에게 한 설교에서도 나타난다(7:39-41). 이것은 무엇을 뜻하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여러 번 용서하셨지만, 즉 도말하셨지만, 그 사건들을 결코 잊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78:38).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야 하는 성도들도 하나님처럼 상대방의 죄를 용서한 이후에 그 용서한 사건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낱낱이 기록해 놓은 책 이 바로 성경이며 이스라엘의 역사책이기도 하다. 이것은 바로 인간에게 역사의 기록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역사의 기록은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오늘을 다시 생각하고 평가하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즉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오늘의 잘못을 발견하고 그것을 고치어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함이다. 역사에는 잘한 일보다는 잘못한 일이 더 많기 때문에 현재나 미래에는 그런 잘못을 되풀이 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용서하나 죄는 기억치 않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틀린 것인가? 아니다. 틀리지 않았다. 다만 그 해석이 잘 못된 것이다. 하나님이 기억치 않겠다는 말씀은 한 번 용서하셨다면 다음에 그 죄에 대해서는 다시 묻지 않으시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 죄에 대한 법적 징벌은 면제(exemption)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함 받았으면, 과거의 어둡고 무거운 죄에 얽매어 힘겹게 자책하며 살지 말고, 죄의 종의 멍에에서 해방된 자유인의 모습으로 미래를 긍정적으로 살라는 뜻이다(5:1).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성도는 자신이 하나님에게 죄를 지은 사실과 하나님으로부터 탕감 받은, 즉 구원 받은 은혜의 빚은 평생 동안 기억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겸손하게 평생토록 보답하며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자신의 죄를 잊으셨다고 생각하여 자신도 자신의 과거의 죄를 잊고 죄를 사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도 잊어버린다면,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에게 악을 행하기 쉽다.

예수님께서도 죄를 용서받은 여자가 감사의 표현으로 눈물로 주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아주고, 발에 입을 맞추어 주고, 비싼 향유를 부은 것을 칭찬하신 사건(7:44-46)과 예수님이 말씀하신 빚 주는 사람빚진 자의 비유(18:23-35; 7:41-43)도 같은 맥락에서 하신 말씀이다. 따라서 모두에게 과거의 사건을 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리고 용서함을 받은 자가 보답으로 표현하는 사랑은 용서를 받은 크기에 비례해야 한다.

이런 원리를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 그리고 부모와 자녀 사이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다. 성도는 과거의 죄와 죄를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만큼 비례하여 감사하고, 겸손해져서, 은혜에 보답하고 하나님과 가까워져 성숙한 성도가 되며, 하나님 아버지에게 효자가 된다. 반면, 성도는 과거의 죄와 죄를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는 것만큼 비례하여 감사가 없어지고, 교만해져서, 은혜에 대한 보답도 없고, 하나님과 멀어져 타락하는 성도가 된다. 이런 성도는 미성숙하며 하나님 아버지에게 불효자가 된다.

▲ 단체사진

그리고 자녀는 과거의 죄와 죄를 용서해주신 부모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만큼 비례하여 은혜에 감사하고, 겸손해져서, 은혜에 보답하며, 부모와 가까워져 효자가 된다. 반면, 자녀는 과거의 죄와 죄를 용서해주신 부모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만큼 감사가 없어지고, 교만해져서, 보답도 안하고, 부모를 떠나 타락하여 불효자가 된다.

또한 이런 원리는 일반적인 인간관계에서도 적용할 수 있다. 이렇게 갑과 을이 용서해준 사건과 용서받은 사건을 기억할 때 둘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름답고 따뜻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당사자 사이에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다. 이런 용서와 기억의 신학이 잘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용서와 화해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사회에 정의가 사라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 결과 양심에 화인 받은 악한 자들의 횡포가 늘어나 선량한 성도들이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은혜만 너무 강조한 나머지 은혜와 율법의 조화가 깨진 결과였다.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