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는 양적으로 크게 성장한 교회이다. 이런 성장과 더불어 한국 교회는 안팎으로 많은 도전과 시련을 당하였다. 한국 교회 초기나 일제 치하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고, 그 이후에도 한국 교회 안에는 많은 이단들이 준동하였다. 특히 교회 성장 일변도로 치닫던 1980년대 이후, 한국 교회 안에는 수많은 교회 성장론과 목회 방법론이 도입되어 실행되어 왔다. 그중에서도 빈야드 운동과 같은 은사 운동은 한국 교회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1) 이런 운동으로 인한 혼란과 오해를 바로잡기 위하여 본 연구 보고서는 성경적인 은사 이해를 출발점으로 삼아 이런 유의 운동의 문제점을 살펴보고 그에 대처하는 방안을 강구해 보려 한다.


1. 성령의 은사


은사(恩賜)란 헬라어로 ‘카리스마’인데, 신약 성경에서 아주 넓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 단어는 방언이나 예언, 병 고치는 것 등과 같은 특별한 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사도 바울은 심지어 결혼하지 아니하고 독신으로 지내는 것도 은사라고 말하며 결혼하는 것도 은사라도 말한다(고전 7:7). 그러므로 신약 성경에서 ‘은사’라고 하는 말은 초자연적인 것이나 가시적인 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일상적인 재능과 우리가 처한 특수한 형편과 처지도 다 은사라고 부르고 있다. 위로부터 오는 모든 좋은 것이 다 은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17절에서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라고 한다.


또한 신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좋은 것들을 ‘은사’라고 부르고 있다. 교회 안에서 말하는 은사는 대개 이런 의미의 은사이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구속의 은혜와 영생도 은사라고 말한다(롬 5:15,16, 6:23). 로마서 12장, 고린도전서 12장에서는 교인들이 서로 섬기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 가는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받은 능력 또는 자질을 은사로 부르고 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은혜는 성도의 삶에서 다양한 은사로 나타난다.

신자인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는 각각 다르며(롬 12:6), 은사와 직임과 역사는 여러 가지이다(고전 12:4-6). 모든 신자들은 한 몸의 지체들이나, 직분과 은사는 각각 다르다(롬 12:4,6; 고전 12:11). 그리고 은사들의 목적은 교회를 세우는 데에 있다(고전 12:7, 14:4,5,17; 엡 4:12-16).


은사를 받은 성도는 덕을 세우는 목적으로 모든 은사를 활용해야 한다(고전 14:26). 은사를 받은 성도는 그 은사를 자기 영광과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따라 은사를 사용해야 한다(고전 12:31-13:13). 사랑은 덕을 세우기 때문이다(고전 8:1, 16:14). 사랑은 은사 활용의 대원리이며 목적이며 동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의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교회 전체를 위해 은사를 사용해야 한다.


바울이 언급하는 은사들을 보면, 예언, 섬김, 가르침, 권위(勸慰), 구제, 다스림, 긍휼 베품(롬 12:6-8)과,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침, 능력 행함, 예언, 영 분별, 방언, 방언 통역(고전 12:8-10)과,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엡 4:11) 등이 있다. 또 손 대접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도 은사이다(벧전 4:9-11). 이 목록에는 너무나 평범하여서 은사로 불리기에는  좀 모자라다고 느낄 만큼 뚜렷한 인상을 남기지 않는 것들도 있고, 방언이나 신유(神癒)처럼 이목을 집중시키는 은사들도 있다.


그런데 교회가 은사들을 무시하거나 소멸한다는 비판을 종종 듣는데, 이것은 대개 열광적으로 나타나는 은사들이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신약 교회 자체가 하나님의 은사들로 가득 차 있고 하나님의 은혜로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소치일 것이다.


한국 교회는 세계 교회사에서 유래 없는 성장을 이루었다. 하지만 이와 더불어 여러 가지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중의 하나는 열광적인 은사들과 성령 세례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이른바 ‘성령 운동’과 그중에서도 특히 빈야드 운동과 그와 유사한 운동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2. 성령의 은사와 성령 세례


한동안 성령 운동의 제3의 물결이 한국 교회를 강타하였고, 지금도 그 여파를 느낄 수 있다. 이 운동의 모체는 윔버(John Wimber, 1934-1997)가 시작한 ‘능력 종교’(Power Religion)이다. 불신 가정에서 태어나 록 그룹에서 키보드를 연주하던 윔버는 1963년에 회심하여 1970년부터 퀘이커 교회(Yorba Linda, California)의 목회자로 사역하기 시작하였다. 1974년에는 풀러 전도 및 교회 성장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는 오순절 운동과 은사 운동을 하는 교회들이 성장하는 것을 발견하고, 표적(表蹟)과 기사(奇事)에 대해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때부터 성경에 대한 관심보다는 현상에 대한 관심이 그의 사상과 사역을 주도한다. 1977년에 그는 빈야드교회를 개척하였다.2)


윔버는 표적과 기사를 수반하지 않으면 복음은 무력하다는 입장에서 ‘능력 전도’와 ‘능력 치유’를 추구한다. 그는 자신이 저술한 책에다 ‘능력’을 넣기 좋아한다(Power Evangelism, Power Healing, Power Points, Power Encounter). 그가 말하는 능력은 성령의 구체적 은사, 곧 치유와 축사(逐邪)와 예언 등을 말한다. 그는 전통적인 전도 방법을 거부하지는 않지만 능력 전도와는 비견할 바가 아니라고 말한다.3) 전통적 오순절 운동에서 방언을 필수적 은사로 여겼던 것과는 달리 윔버는 방언을 많은 은사들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교회 개척에 모든 사역의 초점을 둔 것 자체는 문제 삼을 것이 없다. 미국 풀러 전도 및 교회 성장 연구소의 와그너(C. Peter Wagner)는 윔버의 이런 특징을 들어 ‘제3의 물결’이라 명명하였다.4)

윔버와 동역자로 사역하였으나 1995년에 결별한 존 아노트(John Arnott)의 ‘토론토 축복’(Toronto Blessing)도 주목을 받았다. 1988년에 토론토 공항 빈야드교회를 개척한 아노트는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나타나는 성령의 마지막 위대한 역사”를 펼치려고 전 세계를 두루 여행하고 있다.5)


빈야드 운동은 근본적으로 성령 운동에 의한 복음 전파와 교회 성장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이들은 방법론적으로 교회의 수적 성장을 겨냥한다. 즉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표적과 기사는 지금도 계속 일어나며, 이를 동반하는 복음 전파의 능력을 강조한다. 이들은 설교보다는 표적과 기사를 강조하고, 이것을 체험한 자들이 행하는 감정적인 표현이나 간증을 중시한다.6)


이들은 예수님이 행한 표적과 기사를 능력 대결로 본다. 특별히 아노트는 예배와 집회에서 나타나는 통곡, 파안대소(破顔大笑), 경련과 쓰러짐의 현상, 그리고 각양 동물 소리 등을 능력 대결의 증거라고 말한다. 그는 이런 체험들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며 성경적인 근거를 제시하려고 한다.


피터 와그너는 치유 방법론을 개발하여 훈련시킨다.7) 그는 1997년 오순절 운동, 은사 운동뿐만 아니라 빈야드 운동을 주도하는 교회들의 세계적인 연합을 촉구하며 자신이 ‘신(新)사도적 개혁 운동’(New Apostolic Reformation Movement)으로 정의한 새로운 교회 운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와그너는 1998년 미국 콜로라도 주 스프링스에 본부를 둔 ‘와그너 리더십 연구소’(Wagner Leadership Institute)를 설립하고, 한국에도 지부를 두고 있다.8)


(新)사도 운동은 빈야드 운동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사도들과 초대 교회에 일어났던 성령의 역사가 오늘날에도 그대로 재현될 수 있다고 믿는 운동이다. 따라서 이적, 신유, 귀신 축출, 죽은 자를 살리는 일 등 초자연적인 것과 초대 교회에 번성했던 방언, 예언, 통역 등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이 오늘날에도 계속된다고 믿는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신사도 운동은 에베소서 4장 11절에 근거한 소위 ‘교회의 5대 직분 체제’ 즉, ‘사도’, ‘선지자(예언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가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 올바로 자리 잡아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원래 계획하신 대로 교회가 세워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즉, 신사도 운동가들은 오늘날에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메시지를 받아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예언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또한 이들은 특별한 집회로 성령의 은사를 전수(impartation)할 수 있고, 과거와 같이 맹목적인 회개로 인한 죄의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기름 부으심 앞에서 통회와 자복으로 본질적인 회개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하고 있다.9)


최근에 한국 교회 일각에서 ‘금이빨’ 변화 사건이 관심을 끌고 있다. 유대인 출신의 브라질 사람 모아실 페레이라(Moacir Pereira) 목사가 이런 금니 변화와 다른 형태의 신유적 사건의 주역이다. 이들에 의하면, 썩은 이빨이 기도로 금니로 변하고 짧은 팔이 길어진다. 키가 작은 사람은 커지고 짧은 다리가 길어진다. 손바닥에 물권을 상징하는 금가루와 기름이 흐른다. 귀가 안 들려 고생하던 어린이의 귀가 열린다. 그 자리에서 살이 빠져서 입고 있던 옷이 흘러내린다. 심지어 얼굴 윤곽이 바뀌어 성형 수술을 한 듯한 효과가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또 알파코스를 관장하는 알파 코리아의 여러 집회에서도 금니 사건이 일어난다고 한다.


금니 변화는 1970년대 남미에서 처음 시작되어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까지 건너갔다. 1990년대 초반 토론토 공항 교회 담임 목사인 존 아노트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집회에 갔다가 이것을 보고 본국의 집회에 적극적으로 도입한 것이 미국과 캐나다의 빈야드교회들에 확산되었다. 빈야드교회가 알파코스와 협력 사역을 시작함으로금니 변화는 영국의 은사주의 교회들에서 실시되었다. 금니 변화는 얼마간 지속되었으나, 1990년 초반 이후로는 이에 대한 보도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 금니 변화가 한국에서는 알파코스를 도입한 이후, 2000년대 초반부터 급작스럽게 교계에 화제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였다. 알파코스나 알파코스의 내용 중 금니 변화와 빈야드적 쓰러짐의 현상 모두가 외국에서 도입된 것이다.


빈야드 운동이나 신사도 개혁 운동은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로부터 지지 세력을 규합한다. 토론토와 애너하임 현지 집회에 참여한 상당히 많은 보수적 경향의 목회자들을 통하여 이 운동은 한국 교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 후자는 한국에 지부를 두고 있다. 금니 운동은 부흥회의 형태로 한국 교회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이들의 공통점은 성령의 나타나심을 무엇보다도 치유 두고 있다는 점이다.


3. 방언과 치유


금세기의 성령 운동은 방언과 치유를 중생이나 성령 세례의 표적으로 앞세운다. ‘고전적’ 성령 운동은 성령 세례와 방언을, 빈야드 및 이와 유사한 운동은 치유를 포함한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모든 은사들이 지금도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1) 성령 세례와 방언


이들은 성령 세례의 특징으로는 성결, 하나님과의 직접 교통의 체험, 증거의 능력, 성령으로 기도함, 일반 신자와 구분되는 고상한 체험, 기쁨, (마약) 중독에서의 해방 등을 든다. 사도행전 2장 등은 모든 성도들이 이어받을 수 있는 본보기이다. 성령 세례는 그리스도를 믿을 때 받는 것이 아니므로, 성령 세례를 특별히 간구해야 한다.10)


성령 세례를 주장하는 이들은 성령의 모든 은사들이 지금도 교회 안에서 나타나야 한다고 보면서, 은사들 가운데서 특히 방언을 성령 세례의 가시적 증거로 제시한다. 사도행전 2장과 19장을 그 예라고 말한다. 초기 오순절주의자들은 방언을 생면부지의 언어로 보았으며,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언어 기관을 사용하는 성령의 자기 현시로 이해했다. 이것이 후기에 가면 인간의 영이 발하는 방언을 뜻하게 되었다. 더러는 성령 세례 시에 나타나는 단회적인 현상으로 보기도 하고, 더러는 지속적인 은사로도 본다. 어떤 이들은 방언의 표적의 의미를 상대화하기도 한다. 더러는 방언을 배울 수 있다고도 한다.


방언을 비롯한 오순절의 은사관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무엇보다도 이들은 성경의 증거보다는 체험을 중시한다. “오순절 운동의 최대 특징은 어떤 구체적인 체험이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데에 있다. 체험이 오순절 운동의 발생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기 때문에, 이것이 성경 해석의 열쇠일 뿐 아니라, 그 체험이 없는 자는 대화의 상대도 되지 못한다.”11)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 강림의 의미에 대한 이해가 우리와 같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사도행전 등에 기록된 몇몇 특별 은사들은 사도 시대에 교회 설립과 설교의 확립을 위하여 필요했다고 여긴다.12) 특별 은사들은 구속 역사획기적인 진전을 알리는 증거이다. 우리가 위에서 이미 지적한 대로, 복음이 사도행전 1:8에 예언된 것과 같이 예루살렘에서 땅 끝까지 증거됨을 사도행전은 보여 준다. 특히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구원 역사의 진전을 이스라엘에게 공표하는 표적이다. 사도행전 8장에서는 사마리아 교회를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모든 족속을 포함하는 축복(창 12:3)이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사도행전 10장의 이방인 교회(고넬료 가정)에 임한 동일한 성령과 방언은 구원의 진전으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 장벽이 성령 안에서 무너졌음을 보여 준다. 19장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의 방언은 세례 요한의 남은 제자들이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었음을 가시적으로 보여 주는 시위이다. 이와 같이 하나의 교회가 되었다는 구원 역사적인 진전의 표시로 방언이나 예언이 증거로 주어졌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자들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했고(행 4:31), 마음에


기쁨이 충만했다(행 13:52). 또 방언을 말하기도 했고(행 10:46), 예언도 했다(행 19:6).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자들에 대하여는 성령 충만이라는 표현이 계속 사용되고 있다(행 6:3, 7:55). 그러나 사도행전 8장, 10장과 19장에는 성령 세례의 증거들이 나타나지만 성령 충만이라는 표현은 없다. 사도행전 이외의 서신서에서는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은 있지만(엡 5:18), 지속적으로 성령 세례를 받으라는 명령은 없다. 따라서 소위 성령 세례와 그 증거인 방언을 오늘날 우리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2) 빈야드 운동과 그와 유사한 운동들의 치유 사역


빈야드 운동에 대해서도 우리는 동일하게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이 운동이 치유를 포함하는 열정적인 은사를 사역자와 성도의 표지(標識)로 삼는 것은 이 운동이 과거의 성결 운동과 오순절 운동 및 은사 운동과 맥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의 표적과 기사들이 지금도 나타나야 한다는 이들의 주장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빈야드 운동은 오순절 운동이나 은사 운동보다는 더 전통적이며 대부분의 정통 교리들을 따른다. 예를 들자면 이들은 오순절 운동이나 은사 운동과는 달리 중생과 구별되는 성령 세례를 받아들이지 않는다.13) 비록 이런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하더라도 빈야드 운동은 오순절 운동이나 은사 운동보다 더 과격한 측면을 지닌다. 가령 이들은 치유나 사역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직접 말씀하신다고 주장하며, 예언의 은사 등을 강조한다. 이런 주장은 계시 이해의 면에서 문제를 안고 있다. 즉 이들은 표적과 기사는 직통 계시라고 주장한다. 그런데도 이들은 이런 계시나 은사가 성경을 대치하거나 동등한 권위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고 주장한다. 은사들은 성경 말씀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14) 이런 점에서 전통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이 은사에 나타나는 표적과 기사를 강조하고 체험을 중시하기 때문에 성경 말씀이 지닌 판단의 표준으로서의 권위는 항상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들이 추구하는 집회는 감정을 앞세우며, 직접 계시를 갈망하는 열광주의적 경향을 늘 수반한다. 성경이 아니라 체험이 판단의 표준으로서의 권위를 차지할 위험이 상존한다.

쓰러짐이나 금니 변화 사건 등을 과연 성경적인 은사로 볼 수 있을까? 특히 금니 변화 현상은 오순절 운동이나 은사 운동 등에서 나타났다는 보고는 거의 없다. 유독 빈야드 운동이나 이와 연관된 운동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여겨진다. 그렇지만 넘어짐이나 금니 변화를 성경적 신유의 은사라고 보기는 어렵다. 아무리 능력 전도를 말하고, 사악한 오늘날의 세대는 이런 획기적인 사건이 아니면 믿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더라도, 이런 현상은 성경적으로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


게다가 인간은 본래 표적이나 기사에 대한 맹목적인 호기심을 가진다. 자연인들이 지닌 일반적 태도는 “기사(奇事)를 베풀라. 그러면 저들의 교훈에 귀를 기울이리라.”는 호기심과 같다.15) 예수님께서도 자기의 교훈에는 상관하지 않고 표적과 기사만을 추구하는 유대인들을 책망하셨다(요 4:48). 바울 사도도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지만, 자신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겠다고 하였다(고전 1:22-23).


한국 교회사에는 건전한 사경회를 통하여 회개 운동이 많이 일어났는데, 1907년의 부흥 운동이 대표적이다. 이런 사경회와 회개 운동에는 신유와 같은 은사가 나타나기도 하였으며, 전도와 구령(救靈) 사업, 대사회적인 절제 운동도 왕성하게 일어났다. 그렇지만 1907년의 부흥 운동 후에는 이단도 많이 일어나서 극성을 부렸다. 급기야는 일본 제국주의의 신사 참배 강요로 말미암아 과거에 부흥을 경험했던 교회 하나둘씩 우상 숭배의 범죄에 빠지고 말았다. 은사 운동이 아니라 복음의 순수성을 사수한 극소수의 교회와 교인들만이 신사 참배를 끝까지 거부하였다. 해방과 산업화 이후 한국 교회가 취한 방법론적 성장 운동은 교회의 부흥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많은 문제도 수반하였다.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말씀 곧 복음의 순수성이 훼손당했다. 올바른 말씀 전파가 왕성할 때에 성령께서 원하시면 이른바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주실 수도 있을 것이다. 설령 초자연적 은사들을 받았다 하더라도 말씀을 경시하면 그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요, 교회는 우상 숭배나 배교의 위협 앞에 무릎을 꿇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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