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는 이번 여름, 아프간 사건 때문에 정말 가슴 조리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특히 저는 샘물교회가 서울 영동교회에서 분리 개척한 교회이고 가끔 가서 설교도 하였기 때문에 나의 기도는 더 간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하게도 19 명은 살아서 돌아왔으나 두 젊은이는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자기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자기들 동포를 위해 의료봉사 온 사람들을 인질로 잡아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 생명을 두고 흥정하는 자들은 인간 가운데 가장 비겁한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선과 선행을 가르치는 종교의 이름으로 그렇게 했다니 더욱 가증스럽습니다. 이번 사건은 종교적 광신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 해를 끼칠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탈레반의 광신은 우리 인질들과 아프가니스탄 사람들뿐만 아니라 전 인류에게 큰 재앙입니다. 불행하게도 그런 종류의 열광주의는 우리 기독교 역사에도 자주 등장했습니다. 부끄럽게도 지금 한국 교계에도 그런 것이 전혀 없지 않습니다. 불상에 페인트로 칠을 하고, 단군 상의 목을 자르는 것도 바로 그런 광신의 표현입니다. 카자흐스탄에 단기선교 간 한국 교인들 가운데 이슬람교도들이 모여 기도하는 곳에 가서 고함을 지른 사람이 있었다 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고 소리 질렀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을 위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을 빛낸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비정상적 신앙 열정을 발산한 것에 불과합니다. 선교사들의 처지만 어렵게 만들어 전도에 막대한 지장만 초래했다 합니다.

우리가 선택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우리들의 종교적 열정을 발산하고 우리의 감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조차도 그 궁극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9절에 보면 우리가 택하신 족속이 된 것은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즉 우리가 선민이 된 기본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누가 영광을 받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를 인정하고 칭송하고 존경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우선 그의 소유된 백성인 우리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우리의 소임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민이 된 것은 그들만이 하나님을 섬기고 찬양하게 하기 위함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즉 모든 민족 앞에 하나님 위대하심과 인자하심을 드러내고 모든 민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찬양하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요나의 경우에서 보듯 이스라엘은 그 사명을 망각하고 오직 자신들의 특권과 복에 집착하다가 제사장 지위를 상실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용도폐기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새 이스라엘을 세우셨는데, 오늘의 교회가 바로 새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을 존경하고 찬양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나 오늘이나 세상 사람들은 가능하면 하나님을 부인하고 무시하고 비방하려 합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잘못을 드러내어 하나님을 욕하고 무시합니다. 기독교 신앙이 잘못임이 드러나야 자신들의 불신이 정당화되기 때문이고,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의 심판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이 판명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악행”한다고 비난하려 합니다(12절). 초대교회에는 기독교가 살인, 근친상간을 가르치고 성찬식은 사람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식인행사로 곡해해서 비방하고 핍박했습니다.

오늘 한국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최근에 반 기독교적 네티즌 그룹이 몇 개나 생겨나서 사이버공간을 이용하여 사사건건 기독교를 비판하려 합니다. 최근에는 목회자 세금문제를 들고 나와 교계를 비방하더니 이번 인질 사건이 터지자 호제를 얻은 듯 비난이 거세졌습니다. 교회들이 서로 경쟁적으로 선교사를 보내기 때문에 선교사가 만 명이 넘고 아프간처럼 위험한 나라에까지 단기선교 팀이 갔다느니, 다른 종교들을 무시하고 독선적이고 재국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 무슬림을 개종하려 하기 때문에 이슬람교도들이 분개한다느니, 이번 사건에 들어간 국가와 사회의 모든 비용에 대해서 한국 기독교가 배상해야 한다니 등 비난과 위협을 가하고 있다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대응은 많지 않습니다. 변명은 효과는커녕 사실 은폐, 책임회피로만 비칠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것을 수용하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다른 방법을 제시합니다. 즉 “선한 행실”입니다. (벧전 2:12) “여러분은 이 방사람 가운데서 행실을 바르게 하십시오. 그렇게 해야 그들이 여러분더러 악을 행하는 자라고 욕을 하다가도 여러분의 바른 행위를 보고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고 베드로가 가르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한 행실”은 흔히 말하는 “선행” (善行), 즉 “착한 일” 뿐만 아니라 주로 윤리적인 행동을 뜻합니다. 그래서 현대 번역은 선행이란 말 대신 “바른 행실”이라고 번역합니다. (벧전 2:11)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적인 욕정을 멀리하십시오.” 한 것으로 보아서 인간의 욕망 때문에 저지르는 잘못을 염두에 두고 있고, 그런 잘못들은 대부분 윤리적인 죄들입니다. 욕망을 제어할 수 있어야 정직하고 공정하고 신실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이런 윤리적인 행동을 보고 하나님께 돌리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보고 칭찬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선한 행실”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금년은 평양대부흥회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한국 교회가 이를 가념하고 그런 부흥운동이 다시 오기를 원하며 여러 가지 종류의 기념집회를 개회했습니다. 그러나 평양의 대 부흥회는 회개로 시작되었고 회개가 그 특징이었다 합니다. 역사가들의 말에 의하면 평양대부흥회 회개의 특징은 단순히 말로만의 회개, 눈물만 많이 흘리는 통회자백이 아니라 행동이 수반되는 죄의 고백이었습니다. 성도들은 아내를 구타하고 구박한 죄, 도적질하고 간음한 죄 등 어떤 죄도 감추지 않고 고백했고, 사경회가 끝나자 그들은 훔친 물건을 들고 주인에게로 갔고 자신의 잘못으로 고통을 당했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사과하고 변상하기 시작했다 합니다. 윤리적인 죄의 회개였고 행동으로 나타나는 회개였습니다.

물론 회개는 말로 이루어져야 하고 격한 감정이 동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말로만 하는 회개, 눈물만 많이 흘리는 회개는 진정한 회개가 될 수 없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회개한 대로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통회자복하지 않아도 행동으로 잘못을 고치는 것이 눈물 많이 흘리고 말로만 끝나는 회개보다 더 진정한 회개일 것입니다. 삭개오가 눈물 많이 흘리며 통회 자백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행동으로 자신의 과거 잘못을 회개했고 그것이 주님을 기쁘게 했습니다.

해방 이후 상당기간 동안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존경을 받고 상당한 특혜를 누린 것은 한국 초대교회가 윤리적으로 사회의 모범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장기려 박사는 “예전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모습이 타인의 모범이 되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는 자의 생활을 보고 감탄해서 그런 모습이 어디에서 나오는지에 대해 궁금해 했다”고 말했습니다. 테레사 수녀, 장기려 박사를 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처음부터 자진해서 세금을 바친 한경직 목사님은 불신자들도 다 존경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최근 한국교회는 그 위대한 유산을 다 탕진해 버리고 윤리적으로 파산상태에 빠졌습니다.

이 사실은 한국 기독교인들도 인정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한국목회자협의회와 국민일보가 금년 (2007) 5월 27일부터 6월 9일까지 한국교회 목회자와 성도 1500명을 대상으로 <한국교회 미래 방향성에 대한 한국교회 성도들의 의식>이란 주제로 설문조사한 결과 기독교가 타종교에 비해 호감을 덜 받는 이유“로 57.5%가 ”삶과 신앙의 불일치“라고 대답했고 41.1%가 ”일부 교회 지도자들의 타락“을 지적했다 합니다. (중복 대답 가능). 여기서 말하는 불일치는 우상숭배나 하나님에 대한 참람 같은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로 도덕적인 위선과 타락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이라도 기독교인들의 윤리적인 삶을 칭찬하고 비윤리적인 것을 비방하는 이유는 윤리적인 삶이 그들 자신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고 비윤리적인 행동은 그들에게도 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정직하고 공정하면 사람들에게 덕이 되고, 거짓말하고 불공정하면 사람에게 해를 끼칩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끼치는 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십계명의 윤리적 계명도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셨습니다. (마22:35-40) 1 계명부터 3계명 까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4계명으로부터 10계명 까지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입니다. 후자는 윤리적 계명입니다. 그래서 윤리적인 삶은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끼치는 적극적인 사랑보다 더 기본적인 것은 살인하지 않고, 거짓말 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는 소극적인 사랑입니다. 윤리적인 행동은 소극적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번 인질사건은 한국교회에 엄청나게 큰 후유증을 가져왔습니다. 인질들이 귀국하고부터 샘물교회와 한국교회에 대한 비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큰 위기입니다. 신사참배 보다 훨씬 더 심각한 위기입니다. 우리가 올바로 했는데도 불구하고 받는 비난이 아니라 우리가 잘못했기 때문에 받는 비난이기 때문입니다. 샘물교회 뿐 아니라 거의 모든 한국 교회가 하나님 대신 “우리 교회”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이런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선교를 두고도 교회들 끼리 경쟁하다 이런 변을 당한 것입니다. 잘못된 열정이 하나님의 영광을 땅에 떨어트리고 말았습니다.  

이번에 한국 교회가 근본적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한국 교회의 장래는 암담합니다. 우리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한 없이 낮아져야 하며, 우리의 잘못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다 져야 할 것입니다. 이번에 들어 간 모든 비용에 대해서 사회가 구상권을 요구하기 이전에 전 한국 교회가 동원되어서 스스로 그 모든 비용을 지불하겠다고 나서야 합니다. 우리가 잘못해서 생겨난 비용을 국민의 세금으로 감당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효과적인 길은 우리가 세상적으로 손해를 보아 가면서도 “선한 행실”에 모범이 되는 것입니다.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