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지난 91100주년 기념교회 사회봉사관에서 교회개혁실천연대가 무능한 교단 외면하는 교인이라는 주제로 개최한 교단총회의 현실과 과제 포럼에서 발제한 김동춘 교수의 발제문이다.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다. 그리고 이날 발표된 발제문은 계속 연재할 계획이다.  -코닷-

 

<왜 교단총회는 성도들에게 멀어졌는가?>

1. 교단총회의 기능

1) 교단총회는 무엇을 하는가?

▲ 김동춘 교수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단총회는 예배와 말씀의 봉사가 주된 직무가 아니다. 교단 내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유지하면서, 교단교회의 질서유지와 교회법 준수를 관리, 감독하는 교회적 정치조직이다.

교단 총회는 교단 소속 개교회들의 총회를 말한다. 교단총회란 흩어진 교단 내 소속 교회의 구성원들이 회집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 즉 일치와 통일성, 그리고 연합을 재확인하면서 교회들과 교단의 산적한 현안을 처리하고 정리하는 교단의 총집(總集)이다. 총회는 교단의 최상위에 위치한 상회기관이다. 교단총회는 개교회와 시찰회, 그리고 노회/지방회, 혹은 지역대회에 우월한 상위기관이다. 총회는 교단질서의 측면에서 볼 때 교단의 가장 수위(首位)에 서있는 최고 의결기관이며, 감독기관이다.

교단총회는 일종의 교회정치와 교회권력, 다시 말해 교권의 형태이며, 교회질서상의 교회적 권력을 의미한다. 교단총회는 설교와 양육심방권면과 예배기도생활에 집중하여 성도를 양육하는, 개교회의 목회적 기관이 아니다. 교단총회는 경건미 넘치는 예배당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세례나 예전에 집중하는 기관이 아니라 일시적인 기간에 회집하여 교단의 회무를 처리하는 곳이다. 따라서 교단총회는 그 성격상 예배의 봉사나, 말씀의 봉사, 성례전의 봉사 등의 종교적 직임에 우선하는 기관이 아니라 교단 교회의 일체성, 통일성, 연합성을 재확인하고, 교단의 유지, 존속, 그리고 발전을 꾀하는 감독기관이요, 관리기관이다.

노회나 지방회가 목사의 청빙과 목사의 임직, 교역자의 이명, 그리고 교회의 설립과 폐지 등을 교단 헌법에 근거하여 관리하고 감독한다면, 총회는 교단 전체에 영향을 주는 차원의 문제, 즉 신학교 운영, 이단교설, 교단 신학에 위배되는 가르침을 유포하는 흐름을 관찰하여 이를 조사하여, 교단 전체 교회에 경고를 주기도 하고, 여기에 영향 받은 교회를 교정하는 일과 교회법을 위반하는 교회와 교회 지도자에 제명하는 일을 하게 된다. 따라서 교단총회는 필연적으로 교회를 위한 정치력을 수반하게 되므로, 결국 필연적으로 교권적 형태를 띠게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교단총회는 교회적 정치조직체라고 정의될 수 있다.

2)교단총회의 기능을 위한 수단으로서 정치성과 권력

모든 권력은 선하다. 다만 오용이 문제이다.

교단의 운영과 질서유지를 위해서는 권력의 사용과 정상적인 의미의 교회정치가 수단으로 사용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개혁운동에서 위험한 것은 지나치게 순결주의나 열광주의에 사로잡혀서는 안된다. 순결주의 사고는 현실교회를 부정하고 절연하는 것을 교회개혁의 최상의 방식이라고 전제하는 것을 말한다. 열광주의는 그 현실교회와 교단으로부터 절연한 대안교회운동만을 지상교회에서 가장 무흠하고, 완결된 방식이라고 사고하는 것을 말한다. 교회개혁운동은 비록 교회의 타락과 왜곡된 구조를 타파하고 성서적인 교회상을 구현하기를 희망하며 실천하는 운동이지만, 한편으로는 제도교회에 맞서 왜곡된 구조와 관행, 악습을 저항하고 비판하고 저항하면서, 부패한 교회권력과 질적인 차별화, 대항 공동체를 지향하면서 대안교회 건설에 적극적이어야 하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에서 존재하는 기존교회와 기존 교단 안으로 파고들어 교회를 개선하고, 선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개량적인 개혁운동에도 진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교회개혁운동은 현실에 뿌리 내린 보편타당한 교회개혁운동이 되기는 어렵다.

그런 점에서 교회개혁운동에서 마주하는 대표적인 장애물은 교단정치와 교회정치를 어떻게 바라 볼 것인가하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교단총회는 전적으로 교회정치요 교회권력이 표출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교단총회는 근본적으로 예배와 기도, 상담, 축도와 같은 인격적 대면관계를 중시하거나 전도와 선교활동 같은 복음의 확장에 힘쓰는 활동기관도 아니며, 세례와 성찬에 집중하는 예전적 직무에 힘쓰는 활동이나 조직체가 아니다. 교단정치는 교단 내 전체 교회를 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교회정치의 집결현장이다. 그것은 교단 내 교회들에 대한 지도와 감독, 관리, 질서, 통제, 교회법 준수 여부 등에 관한 일에 집중하는 교회의 정치 조직체이다. 따라서 그것이 비록 교회를 대상으로 하는 정치라 할지라도 정치적 활동에는 권력이 수단으로 동반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모든 권력은 창조의 선물이므로 선하다고 말해야 한다. 다만 선한 권력은 오용됨으로써 인간에 의해 악한 도구로 전락했다는 것이 문제이다. 교회정치는 권력사용이 수반된다, 여기서 문제는 권력을 사용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권력이 어떤 목적과 어떤 수단으로 사용되는가의 문제이다.

 

2. 교단총회의 현주소

교단총회는 교회정치의 정당한 구현인가, 악하고 부패한 권력기관인가?

1)교단총회는 일정부분 절차적 민주성을 구비하고 있다

매년 9월이면 교단마다 총회가 열리며, 여기서 한국개신교의 주요 교단의 산적한 현안들이 논의되고 처리된다. 교단총회가 다루는 의제는 실로 다양하고 복잡하다. 교단총회에서 다루는 가장 일반적인 사안은 헌의안 처리이다. 헌의안은 교단 산하 노회 혹은 지방회에서 상정되는 안건으로 총회가 이를 의제로 채택하여, 총회에 참석한 총대들에 의해 최종적으로 심사하고 결정하게 된다. 노회에서 상정된 헌의안은 우선 총회 산하 각 부서로 이송되어 심의하게 되고, 이것을 총대들은 찬반에 붙여 결정하는 과정을 거친다.

교단총회 내에는 일반적으로 처리해야 할 통상적인 분야인 정치부, 사회봉사부, 선교부와 같은 상비부외에도 좀 더 전문적인 심의가 필요한 경우(이단문제, 신학사상)에는 전문위원회 혹은 특별위원회를 설치하기도 하고, 특정 사안에 대한 충분한 조사가 필요한 경우라면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문제를 풀어가기도 한다.

이렇듯 교단총회의 절차와 과정은 각론적으로나 전체적으로나 크게 문제가 없어 보인다. 교단총회가 교단 내 산하 노회와 지방회에서 헌의된 현안을 수렴하여 교단내의 각 전문부서로 이양되어 부서별로 심의를 거처 교단의 최고의결기관인 총회에서 각 지방에서 파견된 총대들의 민의를 거처 민주적으로 결의하고 결정되고 있다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모든 교단 총회는 적어도 절차와 과정에 있어서만큼은 분명 민주적으로 진행되고 있지 않는가?

그러므로 교회개혁실천연대에 열성적인 한 회원이 교단총회 기간 중 총회장 입구에서 피켓을 들고 당신들은 한국교회를 타락시키는 주범이다고 외치면서 교단총회는 다 썩었으며, 하나님도 당신들의 교단을 포기하셨다고 한다면 교단총회에 참석하러 입장하는 총대 목사는 상당히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 총대는 말하기를 총회장에 와서 관찰해보시오. 도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요? 총회가 처음부터 교단의 회무처리를 불법적으로 자행하고 있지도 않는데, 왜 그렇게 난리인가? 총회는 나름대로 절차적 민주성을 구비해 놓고 있지 않은가?”라고 응수할 것이다.

오히려 교회개혁세력은 한국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악한 사탄의 준동이 아닌가 하고 역정을 내고 반응할 수도 있다.

따라서 교회개혁실천연대는 이런 문제 앞에서 좀 더 섬세한 전략적 준비가 필요하다. 교단총회에 참여하는 많은 목사들 가운데는 총회의 질서에 따르면서 그 교단 구조 안에 잔류하면서 총회내의 복잡한 회무를 바르게 풀어가려고 노력하는 다수의 총대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개교회에서는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으로 목회에 힘쓰고 있으며, 때로는 오히려 자신의 신앙양심과 교단내 불법과 불의를 교정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기도 하다. 총회구조를 현실적으로 바라보는 목사들 눈에는 노회/지방회의 구조의 연장선에서 총회를 바라보려 한다. 그러므로 교단에 어느 정도 문제가 있지만 교단에 소속되어 목회하는 대부분의 교단목사들은 교단내의 교권정치는 불가피한 것이며, 교단총회가 기본적으로는 적법한 절차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개혁운동이라는 또 다른 권위에 의존한 채 총회구조에 대한 엄밀한 분석 없이 기존교단에 대한 일방적인 비판과 정죄, 매도하면서 일거에 타도의 대상으로 접근하는 흑백논리식의, 양자택일적인 편안한 대결구도적 관성에 안주하고 있지 않는지 반성할 일이다.

그 이유는 교회개혁운동의 주체들도 비록 기존의 교단총회가 완벽하지 않고, 불합리한 구조와 관행으로 점철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소속된 교단과 절연하지 않고 여전히 교단에 몸담고 있으면서 총회에 참여하여 발언과 개선을 위해 힘쓰고 있기 때문이다.

2). 그러나 교단총회의 절차적 민주성은 허구이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교회의 교단총회는 과연 민주적 절차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과연 오늘 한국교회의 교단은 성경이 보여주는 바대로 주님의 몸된 교회의 총회로서 말 그대로 성총회를 구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교단총회는 전혀 민주적이지도 않으며, 전혀 교회의 거룩성을 구현해 내지 못하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교단총회가 민주적이라면, 그래서 교단 내에 발생하고 있는 문제교회와 문제목사를 왜 적시에 처리하지 못하고 있는가? 왜 교단총회는 여전히 전병욱 목사 같은 성범죄의 혐의가 있다고 보도되는 문제목사를 적법한 절차에 의해 치리하지 못하는가? 왜 교단총회는 매년 수없이 발생하는 부도덕한 목사에 의한 교회 재정 횡령이나 비윤리적 범죄행각을 고발하고, 치리하여 제명하여 교회의 순결성을 구현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외형적으로는 교단총회가 민주적 절차에 의해 총회장도 선출하고, 교회의 질서를 잡고 있는 듯 보이지만 한국교회 전반적인 교단의 총회란 일종의 부패한 권력정치가 난무하고 있는 패역한 무리들의 집합소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물론 총회는 노회와 지방회에서 상정된 헌의안을 안건을 처리하고 있으며, 사고노회나 교회의 문제를 총회차원에서 심각하게 다루고 주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얼마나 많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부당한 소청들이 제기되어 정상적인 목회자를 제거하려 했으며, 오히려 문제있는 교회와 목회자는 제대로 치리하지도 않은 채 허송세월만을 보낸 적이 얼마나 부지기수였는지 모른다.

외형적으로 보기에 총회는 민주적 절차와 의견의 수렴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본다면 교단정치의 결과물인 권력관계의 역학관계에서 판가름이 나고 있는 것이 허다하다. 총회장의 곤봉은 절차적 민주성을 상징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의제는 총회장의 편의에 따라 ’, 혹은 아니요라는 구두로 가부를 묻는 방식으로 일사천리 진행된다. 총회장의 회의 운영방식은 결의에 있어서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수많은 총대들의 항의와 질의에도 불구하고 총회장의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정회를 선포하고, 찬반을 유도하는 다반사하다.

게다가 교단은 점점 전문화되어 가고 있다. 교단 내에 다양한 위원회가 설치되어 있고, 그 위원회에는 유급 전문위원들이 포진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이 교단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가? 오히려 총회로부터 봉급을 받는 유급 전문직 근무자는 기존의 총회의 질서에 편승하여 더 구조적으로 견고한 틀을 만드는데 기여하게 된다, 총회가 개혁해야 할 대상은 총회를 받쳐주고 있는 관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자주 세미나를 개최하고, 홍보활동도 필치고 있지만, 현존하는 총회의 악한 관행과 질서를 거스르지는 못한다.

 

3. 교단총회에서 일반성도의 괴리의 원인에 대한 진단

1) 교단총회의 탈법과 무법적인 교권정치

오늘의 한국개신교 교단의 모습을 들여다본다면, 과연 이것이 주님의 구속되고, 거룩한, 그리고 하나인 몸된 교회인가를 의심할 정도로 저급한 수준의 행태들이 난무하고 있으며, 그야말로 독사의 자식들의 집결지요, 주의 이름으로 모인 강도의 소굴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교단총회장은 외형적으로는 예배가 드려지고, 성찬식이 집례 되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가스총을 들고 난동을 부리는 목사가 출현하기도 하고, 깡패들을 용역으로 심부름시켜 특정세력에게 불리한 결의와 토론을 봉쇄하기도 하며, 교회의 정화를 주장하며 항변하는 이들의 진입을 막아내기도 한다. 총회장 선거에 거액의 금품이 전달되기도 하고, 교단 내 정치세력간의 음모적 밀약과 결탁에 의해 총회장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여 파행적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이것을 어떻게 바른 총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모습의 교단총회는 부패하고 일그러진 모습을 한 사탄의 구렁텅이에 빠진 악의 화신들의 집합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성총회는 아니다. 그들에게는 목사로서 부름 받은 섬김과 복종, 정결과 절제가 거의 사라진지 오래다. 이것은 거의 종교화된 조폭집단이 아닌가? 목사들의 기수에 따른, 혹은 교회의 크기에 따라 서열화 된, 그리고 권력의 상하관계에 따라 복종과 위계가 질서지워진 그들에게는, 권력의 왕국이 별도로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위계질서 안에서 교단현실의 악의 실재 앞에서 분노하지 않고, 교단에 내재화된 퇴락한 관행에 미동도 하지 않고 묵묵히 동조함으로써 그것을 지탱해 주는 악의 침묵들이 있다. 거기서는 어떠한 갱신이나 변혁이나 근원적인 자성이나 회개의 모습을 찾기는 힘들며, 일반 성도들은 총회의 시스템에 묵묵히 협력하고 자원하여 일을 수행하게 된다. 일반 성도들에게 이러한 교단의 모습과 목사들의 행태는 거의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2) 정치목사의 권력확보의장이며, 목사들의 이익집단으로 전락한 교단총회

교단총회에 대한 무관심의 문제는 일반 성도보다는 교단총회를 이끌어 가야할 목사들의 무관심이 더 심각하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정상적인 목회를 수행하는 목사들은 교단정치를 소모적이라 판단하여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어서 결국 교단총회는 정치목사의 전용 무대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교단총회는 어쩌면 한국의 지배정당의 구조처럼, 목사들끼리의 지역 세력과 그들만의 동기회가 결합하여 오랜 시간에 걸쳐 장기적으로 구축된 구조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쉽사리 붕괴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교단정치는 정치목사 + 교회의 정치자금 + 총대들의 무관심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해 교단정치는 중대형교회의 은밀한 정치자금을 동원하여(이 동원은 개교회 장로들에 의해 동조, 후원받는다) 정치목사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정치목사들은 일반 목회자와 달리 늘 중앙의 교단정치에 집중하고 있는 반면 정상적인 목회자들은 이러한 시간과 재정을 투자할 방법도 없으며, 그 일에 뛰어들지 않는다. 결국 교단정치는 오랜 세월동안 기반을 닦은 전문화된 정치목사들에 의해 점유되고 만다.

교단총회가 성도들의 관심에서 멀어간 이유는 너무나 자명하다. 교단총회가 목사중심으로 짜여진 교회정치의 필연적 귀결이기 때문이다. 교단총회는 한마디로 목사들만의 총회이고, 성직계급들의 총회이지, 전체 하나님 백성들의 총회가 결코 아니다. 교단총회는 안수 받은 성직자들만의 회집이며, 성전권력의 수장들의 모임이고, 안수와 설교권을 독점하고 있고, 교인들에 대한 지도와 통제, 관리의 권한이 있는 자들의 소위 성직자들의 회집이다. 그러니 여기서 평신도나 여성들이나 교회의 관리인이나 혹은 안수 받았다 하더라도 전도사 신분인 부교역자들은 총회에끼어들 틈새가 없다. 총회가 교단 권력의 수위권에 있고, 교회의 대표성을 말한다고 할 때 그 수위권과 대표성은 교인들, 여성들, 전도사 혹은 부교역자층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총회가 교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가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장로교는 회중주의 정치가 아니다. 한국개신교의 주류교단은 일부에서만 회중정치를 채택하고 있고, 대부분 장로제나 감독제를 취하고 있다. 또한 교회와 교단 내 교회정치권력의 배분에 있어서 여성에게는 매우 협소한 자리 밖에 부여되지 않는다. 문제는 교단이 여성목사에게 안수를 허용한다 해도 여성들의 참여권이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성안수는 일부 교단에서 인정하고 있지만, 여전히 여성목사는 교회에서 소외되어 있고, 권력의 서열구조에서 뒷전으로 아니면 주변으로 밀려나 있다는 것이다. 안수 받은 목사도 이렇거늘 하물며 평신도, 일반교인들은 어떻겠는가?

개교회에서 여성교인들의 참정권은 최소한 보장되어 있다. 투표권을 행사하고, 여신도회 부서에서 여성들의 목소리를 표할 수는 있다. 더구나 개교회에서 여신도들의 역할과 중요도는 목회구조상 무시할 수 없는 중차대한 위상이 있다. 그러나 여전히 개교회 내 교회 권력을 목사, 장로가 점유하고 있으므로 평신도 층의 발언과 요구는 밀려나 있다. 물론 노회에서도 여신도회는 구조상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여신도회 임원들은 노회기간 중 잘 차려 입은 복장으로 노회원들에게 잠시 인사하고, 연간사업결과 보고를 잠시 보고하고 퇴장하면 그만이다. 어떤 노회에서는 이렇게 귀한 자리에 자신들을 세워주었다는 것에 무척 감사하다는 인사를 연발하는 풍경도 있었다. 목사들의 총회요, 성직자들의 모임에 평신도가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격해 하는 진풍경인 것이다.

그렇다면 교단정치에서 장로는 일반성도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지 않는가물을 수 있다. 장로그룹에서 평신도를 대변한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한국교회에서 장로는 안수 받은 순간부터 목사와 같은 지위를 누리게 되거나 아니면 목회자와 동맹관계를 형성하여 또 다른 성직주의적 경향을 띠게 된다.

 

4. 결론: 대안모색

1) 성직주의의 극복

목사만이 성직자라는 사고나 목사를 제사장화하는 사고방식은 교정되어야 한다. 목사나 평신도나 모두가 하나님께 부름 받은 성도요, 하나님나라를 위해 섬겨야 할 성직자라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종교개혁의 만인제사장의 원리가 오늘의 교회에서 더 분명하고 새롭게 해석되고 가르쳐져야 한다.

2) 교회권력구조에서 평신도층의 확대

교단총회에서 평신도의 참여를 위해서는 먼저 개교회 안에서 일반성도들의 민주적이며 평등한 참여가 훈련되고 일상화되어야 한다. 평신도 내에서 일반성도-서리집사-권사-안수집사-장로-목사라는 위계적인 서열구조는 폐기되어야 하고, 기능적 역할에 의해 구분되어 있음을 강조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교단총회에서 평신도의 참여는 요원한 일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교단정치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려왔던 목사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평신도에 쉽게 내어주기란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외국의 교단총회의 사례에 대한 부단한 학습이 필요하고, 그러한 제도를 국내 교단에 도입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검토하여 시도하는 방안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대안교회 그룹에서 이러한 방식을 채택하여 전혀 다른 형태의 교회구조를 보여주는 것도 한 방안이 될 수 있다.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