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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수 장로(고신대 前사무처장, 부산노회 부평교회)

역사가들에 의하면, 조국의 해방은 일제가 사형을 집행하기로 정한 음모를 하루 전에 무산시켰다고 전한다. 금년 2015817일은 해방과 함께 한상동, 주남선, 이인재, 손명복, 조수옥 전도사가 평양 형무소에서, 손양원 목사는 청주 형무소에서 출옥하신지 어언 70년이 되는 의미 있는 해이다. 그리고 내년 201616일은 한상동 목사님께서 서거하신지 40주년이다. 내년 920일은 고려신학교 설립 70주년을 맞는 뜻 깊고 의미 있는 해의 날이다.

무엇보다 금년 915일 열린 총회를 통해서 그동안 외형적으로는 교리문제로 떠났든 형제들이 귀환하였다. 이번 통합은 교회사적으로도 드문 경사라고 말할 수 있다. 이에 필자는 고려파 교회의 장로의 한 사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말씀을 되새겨 보고자 한다.

요한계시록 2:1-6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 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말씀하신, 칭찬과 책망을 돼 새겨 보고자 한다.” 우리 교회는 에베소 교회와 같이, 칭찬 받을 만한 일들도 조금은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디에서 떨어진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된다.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한다는 현재적 의미는 신신학과 자유주의에 대한 경고일 뿐만 아니라, 선진들의 신앙과 정체성을 훼손하는 일체의 행위를 근절시켜야 하며, 우리가 어디에서 떨어졌는가를 깊이 생각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본다.

 

1. 교단 명칭, “고려파본명을 돼 찾아야 한다는 바람이 일고 있다.

이제 우리 교회는 하나가 된 상황에서, 교단 명칭에 대해서도 신중히 한번쯤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고신교회에서 -> ⌈고려파교회로의 원래 이름, 본명 전환과 개칭 등 회복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원래는 고려신학교 내 대학부에 신학과를 두었다. 칼빈대학을 운영하다가, 1971년도에 고려신학대학 입학생을 처음 받았다. 정규대학 인가 10년이 지난 시점에, 1981년 고려신학대학에 의예과를 신설하게 됨에 따라, 관할청이 일반대학으로의 전환에 필요한 교명 변경을 요구하게 되어 교명을 고신대학으로 바꾸었다.

원래는 관할청이 단과 대학은 대학으로, 종합대학은 대학교라는 명칭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후 구분을 없애고, 4년제 대학은 모두 대학교라는 명칭을 사용하도록 했다. 지금은 전문대학도 기관장을 학장이라고 하지 않고, 총장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대학교라는 교() 자를 붙인다고 해서 다 종합대학은 아니다. 균형 잡인 영역별 단과대학 분포와 일정한 재학생 규모 등이 고려된다.

고려신학대학이 일반대학으로 전환됨에 따라 신학대학에서 기독교대학으로 명명하고 분류하게 되었다. 대학의 교육 목적도 일부 변경되었는데, 지금은 교회의 목회자 양성을 포함한 기독교적 관점에서 문화적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기독교 인재를 양성하게 되었다.

그런데 대학의 교육 목적과 정체 변경에 따라(의거), 교단 명칭까지도 1981년 이래 고려에서 고신으로 변경하게 된 것은 신중하나마 지금은 한번쯤은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작금에 이르러 우리 교회는 고려파 태동 당시의 처음 신앙이 흔들리고 있으며, 교단의 정체성이 훼손되고 있음을 보면서, 이는 어떤 이유로서든지 간과할 수 없다는 심각한 상황에서, 교단 명칭 변경은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하다고 여겨진다.

천안의 고려신학대학원은 역사성과 정통성 및 정체성을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해 고려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의 원래 이름 고려파는 해방이후 초기부터 고려신학교를 지지하는 자(세력)들이라는 의미가 있다. 고려신학교 설립 취지문에 나와 있는 고려라는 명칭이 우리 교단의 본명이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고신은 본명이 아닌 개칭된 가명이다. 지난날 우리 대학은 영문 표기를 Korea Theological Seminary & College 라고 표기하였다. 여기에서 Korea 라는 단어는 매우 의미심장한 단어이다. “고려는 우리 민족을 조선인이라고 하기 훨씬 이전에 불렀든 고려(Corea)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고려 신학파라는 선진들이 지키고 사수하였든 개혁주의 신학을 확립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교려파 교회라는 본명을 되찾아야 한다.

 

2. 한상동 목사님의 사모님이신 김차숙 여사의 가계는 독립운동가 가문임이 발굴되었다.

일제강점기 평양감옥의 수인 돌봄이 활동을 하셨던, 한상동 목사님의 사모님 김차숙 여사의 가계가 발굴되었다. 서슬이 퍼런 일경 고등계 형사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남편과 평양감옥에 있는 주의 종들을 5년 동안 직접 돌보시고 뒷바라지를 하신, 김차숙 여사의 집안은 일제강점기 시대에 독립운동을 한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던 집안이었음이 확인되었다.

일신여학교 출신으로서 부산의 유일한 여성독립운동가로서 족적을 남긴 박차정 의사의 조카 박의영 목사(전 경성대학교 교목실장, 전 부산동노회장, 통합)와 최수경 글마당 대표(고신대학 졸업)와함께하고 필자는 지난 105() 오후 공태도 기장출신 독립운동사집필자를 직접 찾아 뵈웠다. 각종 증빙 자료와 지난해 2014년 성탄 전날 인터뷰 과정에서 조영진 사모님(이근삼 박사 부인, 김차숙 여사 조카)이 필자에게 직접 전달한 김차숙 여사의 제적 등본 등을 소지하고 이를 근거로 대조한 결과, 김차숙 여사의 가계를 파악하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김차숙 여사의 수인 돌봄이 역할은 깊은 기독교 신앙심에 기초하고 있었지만, 민족의식이 강한 집안에서 성장하였던 까닭에, 그런 어려운 일들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용기와 담대함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특히 출옥성도이며, 고려신학교 제1회 졸업생 이인재 목사는 김차숙 사모님의 헌신적 삶을 침이 마르도록 극찬하였다고 전한다.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사모님이신 김차숙 여사의 가계에 독립운동가의 면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한글학자(주시경의 수제자, “깁더 조선말본저자)이며 독립운동가인 김두봉이 있다. 그는 해방 후 북한으로가 인민최고회의의장까지 하였지만, 1957년에 김일성에 의해 숙청당하여 비참한 생을 마쳤다. 그의 과거 한글운동과 독립운동활동 공적은 사라지고, 남에서도 북에서도 존재가 없이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 그는 김차숙 여사의 선친 김두천과 4촌간이다.

2. 제헌 국회부의장이며, 독립운동가인 김두전은 김차숙 여사의 선친과 6촌간이다.

3. 독립운동가 이며, 동아일보 기자와 강릉 지국장을 지낸 김두백은 김차숙 여사의 선친과 4촌간이다.

4. 여성독립운동가인 박차정 의사(의열단장 김원봉의 처, 건국훈장 독립장)는 김차숙 여사와 고종4촌간이다.

5. 의열단 모집책이었으며, 신간회 중앙상무위원으로 활동한 박문희와 의열 단원으로 활동한 박문호는 김차숙 여사와 고종4촌간이다.

6. 그 외 기장과 부산 동래지역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한 김시엽, 김응엽, 김종엽, 김태엽 등은 김차숙 여사와 4촌과 6촌 지간들이다.

7. 초기 부산기독교 방송국장을 지낸 김기엽 목사는 김차숙 여사와 6촌간이다.

이상에서 김차숙 여사의 집안을 살펴보면,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시대에 기독교 신앙의 힘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한 많은 인물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상동 목사님의 힘든 감옥 생활과 출옥 이후에도 자숙과 한국교회의 정화운동을 역설하는 과정에서 교권을 쥔 총회 측의 친일 반민족 세력의 도전으로 너무나 힘들고 외로웠으나 한상동 목사님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사모님의 가정적인 배경에서 나온 올곧은 의지와 애국심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깊은 신앙심이 작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번 발굴을 직접 체험하고 목도하면서 한동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많은 동역자들에게 먼저 문자를 통해 김차숙 여사의 가계도 발굴 소식을 알려드렸다. 이제도 우리가 자랑스러운 선진들이 있었든 고려파 교회의 일원이라는 점에 상당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진다. 그때 그분들이 온갖 수모와 역경과 고난을 견디면서 진리를 파수하기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서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다면, 오늘 우리는 여기에 없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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