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한주 목사 /푸른숲교회

히말라야 등반에 관한 기록들을 보면 올라갈 때보다 내려 울 때가 훨씬 더 조난 사고가 많았다. 그만큼 내려 올 때가 더 힘들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내려올 때 더 조심해야 한다. 사실 낮은 언덕은 어린아이들도 뛰놀 수 있다. 별다른 준비가 없어도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산이 높으면 높을수록 체력이나 장비나 경험에서 준비된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에게 해가 될 뿐 아니라 가족이나 주변사람들에게 고통을 준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사회적인 지위가 높을수록 끝을 아름답게 맺기가 힘들다. 우리나라 전직 대통령들의 경우를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경우에 없는 말 같지만 하나같이 못난이들이다. 그들이 기업이나 군대나 정당의 장으로 끝났더라면 별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칭찬을 들었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높은 곳에 올라가서 잘못 내려왔기 때문에 가족이나 국민들에게 고통과 수치를 주는 못난이들이 된 것이다.

근래에 기독교계에서 말하면 쉽게 알 수 있는 정점에 있는 분들이 끝마무리를 잘못하여 교계에 상처를 주고 불신자들에게서 비난을 듣는 일들이 더러 있었다. 물론 앞으로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이들의 목회와 인생의 후반부가 구질구질하다 못해 처량한 모습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들이었다. 많은 젊은 청년들을 잃어버리고, 뭔가를 찾기 위해 순례 길에 동참했던 사람들의 발길을 다른 곳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그들이 한국 교회에 끼친 공도 있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화도 크다 할 것이다.

높은 산에 오를수록 내려오기가 힘들 듯이 정점에 있는 사람일수록 끝을 잘 마무리하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의 내면에 자신을 알리고 싶은 명예심이 있고 물질과 세상 것에 대한 탐욕의 마음이 있는 데, 정점에 있을수록 그 단위가 커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명예와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결국 일반 성도들보다 더 해가 크고 그만큼 주변 사람들에게 더 큰 고통을 주게 될 것이다. 정치인이나 사회 지도층에 있는 자들의 비리를 보면서 더 크게 분노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한 변호사협회가 퇴임하는 대법관의 변호사 개업을 막겠다고 했을 때 개인의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반론도 있었다. 그러나 대법관이라는 최고의 정점에 올라갔으면 그만큼 스스로 잘 내려와야 한다는 내면의 소리가 반영된 것이다. 교계의 정점에 있는 분들도 마찬가지다.

정점에 걷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사회가 달라진다.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위치에 맞게 바른 삶을 통해 책임을 다한다면 더 큰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왜냐하면 정점에 있는 그를 바라보며 따라오는 후진들이 많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끝이 아름다운 종교다. 세상 사람들의 잔치의 포도주는 처음에는 그럴 듯한 것을 내지만 술이 취하면 아무것이나 낸다. 그러나 예수님이 물로 만드신 가나 혼인잔치의 포도주는 처음보다 훨씬 더 나은 것이었다. 끝을 아름답게 맺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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