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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빛 고운 11월의 어느 날,

▲ 이병길 목사

산수(傘壽)를 바라보는 이만열 교수님 부부 등과 여섯 명이 서울 근교, 경기도 양주군 송추에 있는 한 식당에서 마주 앉았다. 식사 후 휴게실로 자리를 옮기려던 찰라 이만열 교수님이 두툼한 책 한 권을 건넸다. 포이에마에서 펴낸 이만열 산문집잊히지 않는 것과 잊을 수 없는 것-한 역사학자의 시대읽기, 하나님의 뜻 찾기-, 424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20152211쇄에 이어서 20153412쇄한 걸로 보아 서점가에서 매우 인기리에 발매되고 있음을 짐작케 했다.

책은 199310월부터 20149월에 이르기까지교회와 신앙,국제신문,경향신문,한겨레신문,복음과 상황,한국일보,대한매일, 지난 40년 간 일간 신문과 월간지에 실렸던 글들을 묶어서 펴낸 것이다. 62편의 글은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분야별로 묶여져 있었다. 1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한국 사회를 생각한다), 2역사란 무엇인가?’(역사를 생각한다), 3일생지계 재어근’(인생에 관한 짧은 생각), 4종 되었던 때를 생각하라’(한국 교회를 생각한다), 5역사에 살아있는 사람’(그들을 기억하라)는 내용으로 정리 되어있다.

지난 며칠 간 나는 가을이 깊어가는 서울 압구정로 옛집에서 글을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책에 알알이 심겨져 있는 저자의 삶과 생각, 조국과 민족, 무엇보다 한국 교회에 대한 그의 애정 어린 눈물과 쓴 소리에 마주쳤다. 간혹 범인(凡人)과는 세상 보는 시각 차이에 대하여는 역사학자의 높은 혜안을 존중했다.

저자는 일제 강점기인 193858,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덕대리 텃골, 그곳의 기독교 가정에서 37여 중 장남(일곱 째)으로 태어났다. 그로부터 40, 19781112일 서울중앙교회 설립25주년 기념감사예배 때 장로에 장립되었다. 저자는 마산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문리대 사학과와 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생활을 설립 이념으로 한 합동신학대학원(1980. 박윤선 박사)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1970년 숙명여대 사학과 교수에 부임한 저자는 19807월부터 19848월까지 4년 간 영문도 모른 채 신군부에 의하여 해직교수명단에 이름이 올려졌다. 때는 서슬이 시퍼렇던 신군부 시절, 저자는 치안본부 303 수사대로 끌려가 사직서를 강요당했다. 담당 수사관은 길을 가다가 갑자기 옆에서 날아온 돌에 맞았다라고 생각하라.’ 했다니(스크랩북/사람들 이만열 2005.11.2), 권력의 횡포에 대한 분노 보다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그 후 저자는 제8대 국사편찬위원장(2003-2006),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및 이사장, 외국인 근로자를 위한 희년선교회 대표, 한국사학사학회 회장, 남북나눔운동 연구위원장 등 국가와 사회 활동에서 폭넓은 행보를 보였다. 이런 일련의 경력은 신앙인으로서 사회참여를 몸소 실천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동안 나는 저자로부터 저자가 자필 사인한 책들,한국기독교와 역사의식(1981),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1991),아펜젤러(1985) 10여권을 선물로 받았다. 이 책들은 지금 시애틀의 아들 집 서가에 가지런히 꽂혀 있다. 내가 그동안 읽었던 저자의 책들은 한국사와 한국기독교사에 관한 것들로서, 싸늘한 머리로 읽어야 이해될 수 있을 만큼 학술적이었다. 그런가 하면 이번에 받은 책은 저자의 신앙과 학문, 고난의 역사 속에서 저자 자신이 뼈에 사무치게 체험한 아픔과 눈물, 분노, 참회가 녹아 있어서 나도 모르게 뜨거운 가슴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이 글을 쓰는 지금 아내가 이어서 정독을 하고 있다)

내가 저자를 알게 된 것은 19747월말, 서울 종로구 인의동에 있는 서울중앙교회에서 봉사를 시작하면서다. 어느 날 저녁 교회와 관련된 일로 종로에 있는 YMCA 커피숍에서 만났던 저자는 세속의 떼가 묻지 않은 것 같았다. 설렁탕을 앞에 놓고 마주한 저자는 우선 대면이 부담 되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운 천연(天然)의 풍모를 지녔다는 느낌이었다. 외모보다 내가 저자로부터 받은 더 강한 인상은, 그때만 해도 애송이와 촌뜨기 티를 면치 못한 나에게, 특히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진지하게 듣는 그의 모습이었다. 그 후 나는 청파동, 때로는 숙명여대 연구실, 구반포, 효자동, 아현동 집을 드나들면서 지금까지 교분을 쌓고 있다.

지난 40여 년간 나는 저자와 비교적 지근거리에서 살면서 저자의 삶을 지켜보았다. 1996년 두레마을이 출간한한 시골뜨기가 눈 떠가는 이야기는 저자의 인생 역정을 고스란히 들여다 볼 수 있는, 말하자면 저자의 진한 정서가 담긴 인생 수첩이라 이해된다. 저자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성경을 읽기시작, 지금까지 그 성경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다(나의 독서편력, 205) 저자의 글에 유독 성경 인용이 많은 것은 저자 자신이 성경을 항상 가까이 두고 산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증이라 생각된다.

조선(祖先)의 신앙 뿌리가 깊은 고향, 군북교회(현재 예장고신 소속)에서, 저자는 당시 유년주일학교 부장이었던 문성주 장로에게 아브라함의 믿음, 모세, 여호수아, 사무엘과 다윗, 다니엘의 신앙 얘기를 통하여 믿음을 키웠다. 그 때 성경의 위대한 신앙 인물들에 관한 얘기는 훗날 저자가 역사에 천착(穿鑿)할 수 있었던 밑천이 되었다고 한다. 저자의 산문집을 읽으면서 자주 만났던 단어는, 산문집의 키워드는 민족’, ‘정의’, ‘화해라는 말로서 압축될 수 있을 것 같다. 이 세 마디는 곧 저자의 인생 역정을 객관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단어가 될 것 같기도 하다. 먼 훗날 어떤 역사 학도가 이만열 사상연구논문을 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여기서는 선물로 받은 이만열의 산문집에 대한 나의 단견(短見) 소감을 책값으로 대신하려고 한다.

 

민족 의식

저자는 민족과 관련하여 이웃의 아픔과 겨레의 고통’, ‘민족의 아픔’(16)이라는 말로써 민족에 대한 애틋한 감성을 나타냈다. 무려 62편의 글 가운데 저자가 직접 쓴 61편에는 매 편마다 거의 민족이라는 말이 한 두 번씩은 언급 될 정도로 민족을 말하지 않고는 문장 형성이 불가능할 것 같이 느껴졌다. 저자의 문적(文籍)에는 유독 민족이라는 제자(題字)가 많이 눈에 띈다. 저자에게서 민족의식은 단순한 역사학자로서 갖는 언어적 서술이나 의식(儀式) 표현이 아니라 그의 신앙적 토양에서 발아(發芽)된 것임을 짐작케 한다. 언젠가 저자는 신약성경 히브리서11:24~25절의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라는 말씀으로 하는 설교를 인상 깊게 들은 적이 있다.

저자는 민족과 함께 역사의 같은 시공간에서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12:115)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실천하려고 노력한 모습을 엿보게 한다. 역사학자인 저자에게서 역사는 과거를 되새김 하는 데서 나온 것이지만, (생략)현재에 다가와서 현재 살아 꿈틀거리고 있는 것’, ‘더 나아가 역사는 현재 살아 생동하면서 현재와 미래를 규정해나가는 생동체로 간주되었다(‘우리에게 역사의 의미는, 130) 생동체속에서 저자는 서재에서 뛰어나와 요동치는 역사의 현장에서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숨 쉬는 잠재적 민족주의자로 불리는 이유가 되었음직도 하다.

그런 민족의식의 연원은 어린 시절 교회 주일학교에서 다윗과 모세 같은 성경의 인물들에 관한 얘기를 들으면서 싹텄고, 그 후 초등학교 6학년 시절 한국전쟁 중 40여 일간 인민군 치하에서 동민들이 죽어가는 상황과 가족사적비극이 민족적 비극과 아픔으로 전개되어 갔던 모진 역사를 경험했다. 이 역사적 트라우마를 경험한 저자는 그의 사촌형 두 분이 전사했고, 서울에서 공부하던 막내 자형이 납치되었으며, 홀로된 누님은 40년 간 남편을 기다리다가 돌아가셨다. 어찌 눈을 감았을까’(‘다시 74일을 보내는 소회, 173)라면서, 그의 감성적 표현을 감추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목사가 되기로 결심한 저자는 대학시절 군대 복무 중 소속부대 장교로부터 한국역사에 관한 질문을 받고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 충격이 훗날 역사학자가 되게 했다고도 했다. 박사 과정에서 저자는 강열한 민족주의자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의 민족주의 사관을 통하여 민족주체성에 대한 감명을 받았다(네이버뉴스-동아일보/지성의 나무, 2003.7.21)

저자는 이런 일련의 역사 현장에서 민족과 함께 아픔을 경험했으며, 더 나아가서는 민족의 눈물에 참여한 민족주의자라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팽목항에서 세월호 희생자 유족을 찾았던 저자는 그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목이 메었다.’(‘팽목항을 다녀와서, 27)라고 적었다. 어쩌면 발생하지 않았어도 될 역사 현장에서 민족이 당하는 고통에 대한 저자의 연민의 정은 역사학자를 넘어서 한 인간의 평범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찡했다.

 

정의 구현

시대 앞에 선 역사가로서 한국인 지식사회와 기독교계에 대해 비판적 지성인’(아멘넷 뉴스, 2007.2.25)으로 평가되는 저자는 정의에 대한 분노가 용광로 속의 쇳물처럼 이글거리고 있다는 느낌이다. ‘시대 앞에 선 역사가라는 평가는 마치 1989년 중국 천안문사태’(4.15-6.4, 혹은 六四事態) 당시 장안로(長安路)를 달리던 진압탱크 앞을 맨몸으로 가로막은 한 베이징 시민을 연상케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저자는 정사(政事)를 소홀히 하고 쾌락에 탐닉한 백제 의자왕(義慈王, 599-678)이 극간(極諫)하는 좌평 성충(成忠)을 하옥시키자 이로 말미암아 감히 말하는 자가 없어졌다.’(是無敢言者)라는삼국사기를 인용, 정의에 대한 분노를 표출시켰다.

저자는 이 나라의 정치 상황과 상식과 법을 초월한 특권의식’(‘우리 사회속의 특권의식, 45)을 개탄하면서 기독교 현실을 각골지통(刻骨之痛)의 심정으로 비판했다. 특히 교회에 대하여는 시장화의 물결이 교회에도 범람하여 기독교적 가치관은 찾아볼 수 없게 된 딱한 현실을 보면서, 이제는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 것인지 모를 정도로 안타까운 상황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시장과 자본이 휩쓸어버린 교회의 맨살 모습, 그것은 머리털 깎인 삼손의 신세와 다를 바가 없다.’(‘책머리에, 6)라고 현실 교회의 어두운 면에 대하여 자성을 촉구하기도 했다.

아울러서 저자의 비판의 칼끝을 피해갈 수 없었던 교회의 세습, 목회자의 학위논문 표절, 일부 대형교회의 사유화, 역사적으로 한국교회가 이승만 정권에 협조해서 부정선거에 관여한 것, 5.16군사쿠데타를 지지하고 그에 편승한 것, 1980년에 전두환 신군부의 장도를 축복해 준 것’(‘한국교회의 죄책 고백문제, 314)이 도마 위에 올려졌으며, 이런 일련의 현대사에서 교회가 정의롭게 처신하지 못한 것을 먼저 죄책 고백해야 할것이라 지적하기도 했다.

책을 읽으면서 내 의식을 자극시킨 것은 제4종 되었던 때를 기억하라한국 그리스도인이 수행한 민족사적 과제’, 이 부분에서 저자는 이 땅에 기독교가 수입된 과정을 설명하면서, ‘한말의 기존 종교와 사상이 시대적 과제에 충실하지 못하고 있을 때 예수교가 수용되었다.’(240)라고 지적했다. 이 말을 역으로 적용하면 이 시대의 교회가 이 시대에 주어진 과제를 고민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한말의 기존 종교의 상황을 피해갈 수 없다는 교훈으로 이해된다. ‘한말 우리에게는 두 가지 큰 민족사적 과제가 있었다. 안으로 봉건사회의 부패를 척결하는 일과 밖으로 외세의 침략을 막아 국권을 수호하는 것이었다.’라고 말한 부분이 그렇다(240-244) 즉 교회가 시대적 과제를 고민하고 충실하지 않을 때 유럽과 미국의 교회 현상을 피해갈 수 없다는 절박함을 느꼈다. 그제야 역사학자가 서재실에서 뛰어나와 거리에 선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서 역사에 살아 있는 사람들로서는 옥한흠 목사, 방지일 목사, 안병무 선생, 손양원 목사, 이승만 목사, 김교신 선생, 함석헌 선생, 안창호 선생 등을 꼽았다.

 

화해 원칙

저자는 글에서 민족’, ‘정의라는 말과 함께 화해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한 것을 주목케 했다. 이는 한반도의 상황에서 민족통일과 정의로운 사회 구현이 평화통일로 이루어져야 된다는 저자의 의지적 결론이라는 것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6.25한국전쟁에서 비극적인 가족사를 경험한 저자임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어떤 이유로도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굳어진 것은 이 때문이다. 이것이 평생 평화통일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한 가지 이유이기도 하다.’(174)라고 말하면서 화해를 강조했다. 이 대목은 민족의 숙원 통일에 대한 저자의 이상을 엿보게 했다. 이완 관련, 저자는 ‘7·4남북공동성명의 통일 원칙으로서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정신에 공감하기도 했다.

저자는 산문집 전체 분량에서 종북’(從北)이라는 용어에 대한 예민한 반응을 보인 듯 했다. ‘종북’(從北)은 어쩌면 세간의 가담항어(街談巷語)이거나 분단 현실을 상징하는 슬픈 용어일 수 있다. 이 말은 2001년 말 당시 민주노동당한국사회당간의 논쟁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민주노동당의질의에 대하여 한국사회당종북친북과 구별하기 위해 사용한 말이라고 대답했다. 이와 관련, ‘위키백과사전종북에 대하여 북한 집권당인 조선로동당과 그 지도자인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등을 추종하는 경향을 말한다.’라고 정의했다.

저자는 종북에 대하여 그 정의가 뚜렷이 밝혀지지 않은 채, 대북 햇볕정책 이후에 나타나 주로 진보적인 세력을 엮어 공격하는 테러적 용어로 사용되었다.’라고 정리했다(‘종북, 공북, 화북, 61) 사실 종북이라는 단어는 이념적 대립이 팽배한 한국 사회에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편 가르기에 사용되고 있는 단어다. 이 말은 정치, 연예, 종교 등 우리 사회의 공동체를 난도질 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안타까운 것은 종북이란 말이 북한에 대한 유화적 자세를 갖는 개인이나 단체를 싸잡아서 종북 몰이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통일은 대한민국 정체성에 준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모색되고 추진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다만 대한민국이 북한 정권이 추구하는 이상적 사회 달성을 위한 통일전선’(統一戰線)의 전략적 타도대상이라는 점과 이를 위해 북한 권력집단은 민족통일전선’(1975.10.9)을 구축하고 지금까지 끊임없는 대남공작에 인민의 역량을 쏟고 있다는 것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통일전선은 중국에서 마오쩌둥(毛澤東)이 항일투쟁과 국·(國共)내전에서 중국을 공산화 하는데 유용하게 쓴 전략이기도 하다. 그러나 통일전선은 중국과 북한 이외 지역에서는 이미 폐기된 유물이다.

남북 공생의 길’(67)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저자가 역설한 북한의 죄책고백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6.25한국전쟁의 책임, 정전협정 이후 북한 권력집단이 자행한 수많은 죽임에 대한 참회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이로써 한반도에 정의로운 사회가 이룩될 것이라 믿는다. 이에 저자가 기대한 종북이란 말은 역사적 유물로 안치하고, 공북(共北), 화북(和北)의 길’(67)이 열릴게 되지 않을까?

 

맺는 말

저자는 신앙적으로 예장고신 인이다. 예장고신인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근본주의같다는 느낌을 갖게 할 정도로 자신에게는 엄격하다. 그는 평소 경건과 검소함이 몸이 벤 신앙인이다. 이번에 새로 옮긴 아파트는 아현동 언덕바지 길을 숨차게 걸어서 올라가야 하는 스물다섯 평 남짓한 공간이다. 두 부부의 공간으로서는 적당하다고 생각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복직하여 퇴임한 후 지금은 숙명여대명예교수라는 직함이 붙어있다. 산수(傘壽)의 연륜을 목전에 둔 노교수에게 퇴임 시간은 북한산을 오르내릴 여유를 줄 것이라 생각될 수도 있지만 그에게 시간은 인색했다. 간혹 밥 한 끼 같이 먹고 싶었지만 외부의 일정은 그것마저 허용하지 않은 것 같았다. 아직도 역사 현장에서 할 수 있거나 해야 할 일들이 많다는 뜻이다. 어쩌면 옆집 아저씨 같은 풍모를 가졌지만, 그의 사고는 섬광(閃光) 같이 빛났고, 역사의 현장에 대한 판별력(判別力)은 비수처럼 예리하다는 생각을 갖는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연륜 탓인지 감성에 젖은 글, 눈물을 보게도 된다.

해직 기간 동안 저자는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서 한국 기독교와 관련된 희귀 사료들을 대거 수집하여 정리한 노고는 두고두고 기억될만한, 시련을 통해 얻은 값진 소산이라 할 것이다. 특히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를 설립, 한국 교회 정사(正史)에 기여하고 있으며, ‘희년선교회를 통하여 외국근로자를 보듬는 등 아직도 왕성한 외부 활동에 정력을 쏟고 있는 모습에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저자에 대한 다른 시각도 있다. 저자에 대한 교단 안팎의 시각의 온도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시체(時體) 말로 저자는 보수의 시각에서 진보에 경도되었다는 평을 피해갈 수 없는 점들이 눈에 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저자는 예장고신이라는 신앙적 뿌리 탓으로 외부로부터 골 보수라는 별명이 따라다닌다. ‘골 보수1975년 안병무 교수가 처음 민중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신학에 접목시키려는 과정에서 이에 동의하지 않는 저자에게 붙여진 명예로운 별명이라고 한다(‘안병무 선생을 추억함, 357) 저자는 골 보수라는 별명을 들을 때마다 그 놀림소리를 들을 때마다 수치심 대신 오히려 긍지를 느끼곤 했다.’라고 회고했다(358)

전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이이화 재야역사학자는 저자를 청교도’(422)에 비유, ‘그는 예수의 충실한 제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단순한 청교도가 아니라 개혁운동가였다. 또 북한 정책에 대해서는, 더불어 살자는 생각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해달라고 말한다.’(‘내가 만난 이만열 교수, 423)라고 평하고, ‘이만열 교수는 개신교 신자기는 하나 신앙운동을 한 게 아니라 새로운 기독교 개혁운동 또는 종교인으로서 모순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참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되었다. 특히 유신체제와 신군부의 반역사적 행태에 대해 역사학자로서 물러섬이 없이 저항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의 의식과 활동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동의하였다.’(‘내가 만난 이만열 교수, 419)라고 했다.

이 글을 마무리해 갈 즈음, 지난 토요일(14) 서울 세종로 일대에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언론에 의하면 민주노총이 주도한 이른바 민중총궐기대회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궐기대회에 참가한 일부 시위대는 폭도로 변했다. 거의 자정이 가깝도록 광화문 일대는 한 마디로 무법천지가 되었다. 경찰의 폴리스 라인을 무너뜨리고, 경찰을 쇠파이프로 폭행하고, 경찰차를 파손시켰다. 특히 민주노총 위원장은 서울을 뒤엎어 버릴 투쟁을 부추겼다. 이것이 진정 그들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대한민국이라면 절대다수의 시민들은 폭도들을 외면할지 모른다. 아니 외면했을 것이다. 시위를 주도한 민노총의 한상진 위원장은 서울 종로에 있는 한 사찰에 피신 은거하고 있다고 한다. 머리에 붉은 띠 띄고 포효하듯 투쟁을 외치던 그는 비겁했다. 만약 그의 행동이 정의로웠다면 지금 당장 사찰에서 나와 대한민국 법 앞에 서야 할 것이다. 무엇이 두려워 사찰 깊은 곳에 숨어 있는가? 언론은 그를 향하여 비겁한 처신이라고 집중포화를 하고 있다.

60대로 보이는 한 시위대는 경찰 버스의 유리창을 깨고 막대기로, 어쩌면 자신의 아들이나 손자벌 같은 버스안의 경찰을 향하여 무자비하게 가격했다. 경찰이 시위대에게 폭행을 당하고 시위대가 물대포에 쓰러지는 그 현장에, ·야 정치인은 한 사람도 안 보였다. 몽둥이 뜸질할 각오를 하고 우리가 책임지겠습니다라는 말로 현장 수습하는 정치인은 안 보였다. 뒤늦게 일부 야당의원들이 경찰서를 찾아 과잉진압운운하면서 항의를 했다고 한다. 웃기는 일이다. 이런 정치인들을 믿을 수 없었기에 시위대는 경찰에게 분풀이를 한 것일까.

폭력은 그 어떤 명분으로도 용서 받을 수 없다. 민주주의 대로에는 법치설득인내가 있을 뿐이다. 자신의 의견과 의사를 폭력으로 표현하는 것은 곧 민주주의에 대한 테러라고 감히 규정하고 싶다. ‘폭력은 역사를 후퇴시키는 비열한 방법이다. 우리 모두가 민족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정의사회 구현과 화해를 원한다면 폭력을 경멸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함께 가기위해 다양한 의견을 제시할 수 있으며, 다양한 방법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와 다른 상대를 적화’(敵化) 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세상을 보는 눈은 서로 다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또 다른 시각의 비판을 예상하면서도 자신이 보는 세상을, 그 세상을 향하여 마음을 열고 애타게 소리친 용기에 대하여 진심어린 존경을 표한다. 우리 가운데서 누군가 말해야 할 그 말을 저자가 대신한 것이라 생각된다. 저자는 글을 묶어 낸데 대하여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생략)이런 세태 속에서 글을 쓴다는 것이 여간 괴롭지 않다. 전문적인 글쟁이도 아니지만, 이 시대에 산다는 것이 너무 부끄러워 허튼소리라도 지르지 않으면 미칠 것 같다. 나잇값을 하라고 핀잔할 수도 있다. (생략)그래도 뒷날 메시아가 나타나기라도 해 역사를 광정(匡正)한다고 하면, 그 근거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 헛소리로 뒷북치는 것이라 하더라도 시대를 향한 소리를 남기기로 했다. 잊지 않기 위해서다.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생략)이젠 더 잃어버릴 것도 없는 시대로 점입 하는 시기에 이르기까지, 세련되지 못한 덜된 소리를 모은 것이다. 스스로 모은 것도 아니니 모은 분이 들려주고 싶은 소리에 따랐을 뿐이다.’(‘책머리에7~8)

저자에 대하여 한 마디 말로 정리할 수 있다면, 생활은 보수’, 사고(思考진보라는 말로 마무리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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