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후반기 미래교회포럼을 다녀와서

2015후반기 미래교회포럼을 다녀와서

▲ 송우영 목사/진해풍성한교회 담임

금번 미래교회포럼에 수고하신 모든 분께 먼저 감사를 표하고 싶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면서 고신교회가 어디로 가야 할지를 고민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 자체가 귀하고 복된 일이 아닐 수 없다. 좋은 점이 있다면 아쉬운 점이 있는 것이 모든 일의 양면일 것이다.

고신정신을 다시 환기시켜 주고, 종교개혁에 대해 아직 연구하고 고민해야 할 부분이 많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 것은 매우 긍정적인 효과일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현장 교회 사역자의 입장에서 개선했으면 하는 것에 대해 몇 가지 말해 보고자 한다.

첫째, 현실 인식에 대한 아쉬움과 교회에 대한 배려의 부족함이다.

기조연설과 다른 강의들을 통해 고신 정신과 종교 개혁 정신이 많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필자가 볼 때는 참석자들 대부분이 이미 고신 정신에 대해서 비교적 투철한 사람들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기 때문에 고신정신에 대해, 그리고 종교개혁정신에 대해 많이 설명하기 보다는 그것을 오늘날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강의 내용이 더 많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주채 목사는 순교신앙, 말씀대로 사는 신앙, 불의와 불법에 대한 투쟁 신앙을 고신 정신으로 내세우면서 교단의 여러 교단에서 있었던 불법과 부정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오늘날 고신 신학이 근본주의적인 보수주의에 더 가깝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타락을 주도한 사상이 물질주의, 성공주의, 성장주의라고 규정하며 고신대학교와 복음병원이 그러한 시대풍조로 변질되었다고 지적하며 회개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했다. 그 회개에는 미래교회포럼도 예외가 될 수 없음을 밝히고는 총회 산하 주요기관들의 과제를 제시하고 고신교회의 중심을 이루는 기관들이 고신정신을 쇠퇴시키는 일에 견인차가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더불어 고신교회들이 함께 세속화의 길을 걸으며 오늘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 파악과 인식은 현장목회자들에게는 적지 않은 좌절감을 주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과연 고신 교단의 정체성이 교단 기관에 달려 있는 것인가? 발제자는 그러한 의도가 없었겠지만 전체적인 강의 내용을 듣고 강의안을 몇 번을 읽어 보아도 지역 교회의 위상은 너무나 초라하고 교단 기관의 들러리가 되어 버린 듯 한 느낌을 벗어 버릴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발제자는 자신도 모르게, 교단 산하 기관의 부정과 부패와 잘못이 교단 지도자들에 의해 자행되었음에도 모든 교회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교단 기관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교회나 목사가 과연 몇 퍼센트가 될까? 대부분의 교회나 목회자들은 교단의 지도자들이 결정한대로 모금하여 후원하고 기도할 뿐이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일어난 교단 기관들의 문제를 모든 교회의 책임이라고 규정한다는 것은 크게 보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구체적인 사례까지 들어가며 디테일하게 이야기하는 발제 내용의 연장선상에서는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이 든다.

고신 교단의 정체성에 있어 신학교가 차지하는 비중을 결코 무시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교단에 대한 평가는 신학교로만 평가될 수 없으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교단의 정체성은 일선 목회자들의 목회와 신학과 설교로 평가하는 것이 옳다. 신학교에서 아무리 잘 가르친다고 한들 현장에서 적용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번 포럼에서 교단 각 기관에 대한 조명에 포커스를 맞추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질의응답 시간을 통해서도 확인한 바, 일선 교회와 목회자들은 교단 기관보다 오늘의 교회와 목회 현장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고 그것에 목숨을 걸고 있다. 사역지가 없는 목회자들이 교단 3000교회 운동에 자신과 가정의 운명을 내던지고 있고, 대부분의 미자립 교회 담임목사들은 생계로 고민하고 있으며, 사모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취업 전선에 이미 내몰린 지 오래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교단 내에서도 생계의 문제로 목회지를 이탈하는 사태가 곧 발생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한참 자녀들이 교육받고 대학가는 시기의 학부모인 40대 가장 목회자들이 갈 곳이 없다. 그들이 아무리 탁월한 목회적 역량과 신학을 가졌다고 한들, 가정을 나 몰라라 하고 사역지도 없이 목사의 신분을 유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능하겠는가. 그런데 목회자들은 1금융권에서는 대출조차 어렵다. 그러다 보니 제2, 제3 금융권, 고리 사채업채의 대출 권유에도 심각한 유혹을 느낀다. 총회에서 목사가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가 이미 논의된 작금의 현실을 순교신앙, 말씀 중심의 신앙, 불의에 대한 투쟁이란 렌즈로 들여다보고 더 깊이 고민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한 관점에서 발제자의 기조강의는 현실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며, 지금 생존의 문제에 내몰려 있는 수많은 목회자들의 입장에서는 성공의 가도만을 달린 그들만의 리그를 대표한 한 선배 목회자의 모습으로 비춰진다. 물론 발제자도 어려움을 겪지 않았을 리가 없고 그러한 현실을 전혀 모르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교회가 없고 교단이 있겠는가. 교회가 없고 교단 기관이 있겠는가. 목회자가 없이 교회가 있겠는가. 신학대학원도 교회다. 그러나 ‘지역 교회가 더 교단의 본질이 아닌가!’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일선 지역 교회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이 교단의 정체성을 논해서는 안 된다. 고신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마당에, 교단 기관만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분명히 있다. 차후에도 이러한 발제는, 현장사역자에게 소외감과 무 존재감을 느끼게 할 수 있음을 참고했으면 한다. 필자도 현장교회에 대한 충분한 고민이 다음 포럼에서도 나타나지 않으면 더 이상 포럼에 참여하지 않을 것 같다.

둘째, 포럼의 불분명한 목표다.

김영규 교수의 강의는 탁월한 전문성이 돋보이는 강의였다. 16세기 종교개혁에 대한 발제자의 전문적인 접근과 해석은 루터에 대한 오해를 풀어 주고, 루터의 신학과 루터주의자의 신학이 어떻게 다른지, 루터의 신학이 어떻게 후대에 열매를 맺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발제자의 연구 내용을 목회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할 것이며, 설교에 어떻게 반영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답도 내놓지 못하였다. 분명히 포럼의 주제가 “고신교회, 어디로 갈 것인가?”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적용하지 못하는 아이러니와 해프닝이 발생한 것이다. “고신신학, 어디로 갈 것인가?” “개혁주의 신학,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주제였다면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분명 주제는 “고신교회, 어디로 갈 것인가?”가 아니었는가.

송영목 교수의 요한계시록 설교의 핵심 과제 포럼도 별반 차이가 없다. 송 교수가 한 절 한 절 구체적으로 명쾌하게 풀어나가는 주해는 그 어떤 주석이나 강해서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탁월한 주해였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논찬자와의 토론 주제가 된 666이 네로냐, 도미티아누스냐 하는 논쟁은 포럼의 취지에 부합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물론 네로인가, 도미티아누스인가를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저작 연대와 1차 수신자가 누구인지를 규정하는데 영향을 주고 그로 인해 여러 부분에서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 차이점을 가져 온다. 그러나 정작 그러한 논쟁이 고신 교회, 어디로 갈 것인가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논찬자가 제기한 현실 적용의 문제도 송 교수는 답하지 않았다. 그냥 연구해 보겠다고 하였다. 다시 ‘고신 신학, 어디로 갈 것인가’가 되고 말았다. 현장 목회자의 입장에서는 다시 그들만의 리그가 되고 만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해석에 대한 입장 차이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어느 입장이든 무시할 수 없는 신학의 대가들이 그 입장 뒤에 버티고 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신천지를 비롯한 계시록을 둘러싼 시한부 종말론자들과 이단들과 싸우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다시 한 번 묻고 싶다. ‘고신 신학, 어디로 갈 것인가?’인가? 송영목 교수는 포럼 강의를 통해 현장 설교자들이 자신감을 얻게 하는 계기를 삼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결국 세대주의 종말론이나 이단에 대한 대응 방안에 대한 도움은커녕 논찬자와의 견해 대립을 통해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에 대한 답변도 피해감으로써 강의를 듣는 이들로 하여금 씁쓸하게 하였다.

송인규 교수의 포럼 내용은 공감이 많이 가는 탁월한 내용이었으나, 송 교수의 현장 경험 부족으로 인한 대안 제시 불가능에 아쉬움이 있었으며, 교단교육에 대한 전체 패널토의 또한 현장 목회자들 입장에서 얼마나 피부에 와 닿는 내용이었을지는 참석자들의 판단에 맡긴다.

셋째, 마지막으로 운영에 대한 아쉬움이다.

필자는 지방에서 부산에 참석하기 위해 1시간 정도 일찍 현장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정작 운영진이 도착한 시간은 약속한 2시가 임박하여서였다. 물론 필자의 기준에서일 수 있다. 그러나 미리 세팅이 되지 않고 등록 절차상에서 우왕좌왕하는 혼란스러운 모습은 다소 당혹스러웠다. 실무담당자를 더 세우거나, 현장교회와 더 세밀하게 커뮤니케이션을 했어야 했다. 또한 포럼이 열린 해운대 지역은 동부산 지역이나 동부 경남지역에서는 접근하기가 용이하나, 경남 전체로 볼 때나, 서울, 경기 지역에서 강의를 하러 오는 강의자 입장에서는 찾아오기가 불편한 위치였다는 점도 생각해 볼 부분이다. 서울 경기 지역에서 강의자를 불러 내린다면 부산역 근처가 적당한 위치가 될 것이다. 전체적으로 강의자에게 할당된 포럼 시간이 좀 짧았었는지, 강의자들마다 쫓기듯이 발표하는 모습도 공통적이었다. 질문자들의 질문 수준도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이 또한 필자가 앞서 지적한 것처럼, 질문자들은 현장을 더 염두에 두고 청강한 반면에, 포럼강의자들은 자신의 연구에만 충실한 탓에 생겨난 결과로 볼 수 있다. 앞으로 이 문제는 주최 측이 간격을 줄여 나갈 수 있도록 고민해야 할 것이다. 아니면 질문을 미리 서면으로 받아서 강의자들이 선택하여 답변하게 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교단 내에 이러한 포럼을 통해 고민하는 모습이 있다는 자체가 참 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고민의 장을 위해 오랫동안 수고해 주신 위원님들께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이런 고민의 장이 더욱 공감대가 형성되어 더 넓은 스펙트럼의 현장 목회자들이 참여하여 열띤 토론과 나눔의 시간을 갖는 축제의 장이 되기를 기도한다. 일선 교회에서 개혁주의 신학과 교리를 가르치고, 바른 성경 해석에 기초하여 설교하며, 성찬을 행하고, 권징을 행하는 참된 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이를 열심히 실천하는 교단 목회자들도 많으리라 믿는다. 다음 포럼에서는 신학 전문가들 뿐 아니라 일선 목회현장에서 이 시대의 칼빈으로 살기 위해 목숨을 건 목회자들도 만나고 싶다. 필자만의 순진한 바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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