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운데 두고 두 편이 나뉘었다. 한 강도는 예수를 믿지 않았다. 진짜 그리스도라면 당신과 우리를 구원해보라고 비웃었다. 다른 강도는 예수를 믿었다. 자기들은 응당 받아야 할 형벌을 받지만 예수님은 죄 없이 고난 당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구원받은 강도의 믿음이 놀랍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 23: 42). 그는 주께서 능력이 많으실 때 자기를 기억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각색 병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자들을 살리시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실 때 주님을 의지하지 않았다. 주님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때나 부활과 승천의 조짐이 조금이라도 엿보일 때가 아니었다. Hopelessness! Helplessness! 속수무책! 자기와 똑같이 십자가 위에서 무기력하게 죽어가시는 지금,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 되심을 믿었다.

우리가 무언가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와 마찬가지로 비참한 나락에 떨어진 이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강도는 자기와 함께 처절한 죽음의 위기에 빠진 주님께 자기를 기억해달라고 부탁한다. 그의 믿음이야말로 순수 믿음 그 자체였다. 어떤 이는 구원받은 강도의 이야기가 '기독교 최초의 설교'라고 말한다. 주님을 버리고 도망친 사도들도 이해 못한 구속론의 비밀을 한 비루한 강도가 증거했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욥 1: 9) 믿을 수 없는 중에 믿었던 강도 한 사람이 십자가에 함께 달린 이웃이 진짜 메시아임을 알았다.

예수님은 강도의 모호한 부탁에 분명한 약속을 주셨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 43). 아이러니컬하게도 주님과 더불어 천국에 최초로 들어간 이는 베드로도 야고보도 요한도 성모 마리아도 사도 바울도 아닌 흉악범 강도였다. 죄인 중의 죄인이었다. 그는 세례나 성만찬도 받지 않았다. 두 손과 두 발목이 굵은 대못에 박혀 있었기에 선행을 할 수도 없었다. 죽기 몇 분 전, 천국 10m 앞에서 오직 믿음 하나로 낙원에 드는 영광을 얻었다. 스펄전의 말대로 예수님의 '지상 최후의 동반자'요 '천국 최초의 동반자'가 되었던 것이다.

오늘 온 인류가 두 강도와 똑같은 운명 앞에 서있다. 십자가 한 편에 예수님의 구주 되심을 인정하는 신앙인들이 있다. 다른 편에 죽기 일보 직전까지도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불신앙의 사람들이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집이나 병원의 중환자실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다. 예수님께 돌아오는 데에는 결코 늦는 법이 없다. 구원받은 강도처럼 단 1초전, 천국 1m 앞에서라도 지은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면 천국문은 열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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