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의 분위기가 거리에서 먼저 다가온다. 반가운 마음에서 돌아보지만 모두가 상업적인 것일 뿐 어디에도 성탄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볼 수 없다. 교회는 오히려 조용하다 못해 적막감을 느낀다. 사실 2015년 올해는 광복 70주년과 함께 선교 130주년이 되는 해여서 한국교회가 할 일이 많아 보였다. 그러나 뭔가를 꺼내보지도 못하고 한해를 마무리해야 한다니 부끄럽기 그지없다.

물론 메르스 사태, IS테러, 국정화 문제 등이 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기독교가 말을 하려고 하면 그때마다 입을 막아버린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 대형교회들의 비리와 성추문 등으로 할 말을 잃게 하였고 특별히 목회자의 칼부림 사건은 그 정점에 이르게 하여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게 만들었다. 이제 기독교는 2015년에 방점을 찍고 다시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성탄의 참된 의미를 찾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성탄은 축하할 일이고 기뻐해야 할 놀라운 사건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시는 것은 특종 중의 특종 뉴스이다. 그러나 우리는 올해만이라도 기쁜 성탄을 맞이하기 보다는 낮은 곳으로 오신 예수를 닮아가는 성탄을 맞아야 할 것이다. 강보에 싸여 짐승의 구유에 누이신 예수,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시다.

그는 박수를 받고자 오신 것도, 권력과 부를 거머쥐고자 함도 아니었다. 그가 낮고 천한 곳으로 오신 것은 섬기기 위함이고 자기 생명을 죄인에게 주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그의 제자 된 우리들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 앞에 서 있는가? 적어도 예수를 뵈러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오랜 여행에 더러워지고 헤어진 옷이라도 입었을 것이지만 오늘의 우리는 너무나 화려한 옷으로 단장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누운 아기 예수를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지금 스스로 옷을 찢고 눈물로 옷을 적시면서 성탄을 맞아야 한다. 한국교회 스스로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 부를 자랑하는 자들은 스스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와서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 한다. 성탄은 축제지만 축제로 보냈다는 추억거리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가 낮아지지 않고 지금 우리가 눈물을 아낀다면 한국교회는 희망이 없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교만이 목구멍까지 가득하다. 예수의 자리까지 넘보며 올라갈 자리만 찾는다면 한국교회는 단연코 내침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떨어질 자리까지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높은 교회의 십자가 탑이 오히려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목회자 스스로가 그렇게 만들어 버리고 있으면서 십자가를 사랑한다며 자랑한다는 것은 오히려 예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낮은 자리로 오신 예수, 다 버리고 오신 예수, 주무실 보금자리 하나 없이 사셨던 예수, 그리고 입었던 겉옷까지 다 나눠주고 십자가를 지셨던 예수, 우리가 기쁜 성탄이라고 하는 그날, 누우실 자리 없어 구유에 누인 예수 앞에 서서 누가 감히 예수의 제자라고 자처하면서 내가 예수를 닮았다고 말할 수 있는 목사, 장로, 집사, 혹은 성도가 있을까?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성탄이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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