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에게 잊혀진 장기려 박사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리는 장기려 박사가 세상을 떠난 지 금년으로 꼭 20년이 된다. 장 박사를 추모하며 세워진 두 단체인 장기려 박사 기념사업회(이사장 손봉호 박사)와 장기려 박사 소천 20주기 기념사업회(회장 정근두 목사)는 각각 20주기 기념예배를 드리고 그의 뜻을 기렸다. 장기려 박사 기념사업회는 지난 12월 4일 오후 4시 복음병원에서, 20주기 기념사업회는 12월 16일(수) 오후 7시30분 수영로교회에서 장기려 박사의 유업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손봉호 장로가 이사장으로 있는 기념 사업회는 역사가 꽤나 오래되었다. 그동안 서울에서 기념사업회를 운영해 오다 지난해부터 부산 복음병원에 사무실을 두도록 하고 병원장을 지낸 이상욱 박사가 깊이 관여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기념사업회는 조용히 장 박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에 집중해왔다.

그런데 한국고등신학연구원(원장 김재현 박사)이 한국교회를 빛낸 인물들을 발굴하여 그 뜻을 기리고 널리 알리는 사업을 하는 중에 장박사의 서거 20주년이 이르렀음을 알고 지난해부터 20주년을 의미 있게 보내는 작업을 준비해왔다. 장 박사님의 삶에 감사하며 기리고 싶은 뜻을 가진 목사님들을 연결하고 힘을 모을 사람들을 찾아 ‘장기려 박사 소천 20주기 기념사업회’를 만들었다.

장박사가 67세가 되던 해부터 기록한 글들을 모두 모아 세권의 문집으로 엮는 일을 시작하였다. 박지연 작가에게 의뢰해 ‘장기려, 그 길을 따라’라는 제목의 소설을 쓰게 하였고 아이들과 함께 성인들이 읽어도 좋을 ‘만화 장기려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바보 이야기’를 제작하였다. 뮤지컬을 만들 계획도 세웠으나 너무 많은 자금이 필요해 그 꿈은 일단 접었다. 위대한 인물들의 아름다운 삶을 후대에 제대로 전할 수 있도록 다양한 문화적 접근을 시도하였다.

광복로에서 기억되는 장기려 박사

부산 광복로에는 부산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이성구목사)가 주관하는 제7회 크리스마스트리문화축제가 11월 28일부터 내년 1월 3일까지 열리고 있다. 마침 장 박사의 귀천(歸天)일자가 12월 25일이어서 트리축제와 시간이 멋지게 맞아 들었다. 기념사업회의 본부장을 겸하고 있는 이성구 목사가 부기총과 협의를 거쳐 12월 16일-26일까지 10일간을 ‘장기려와 함께 하는 10일’로 삼기로 하였고, 한국고등신학연구원의 김재현 원장과 직원들이 서울서 내려와 전시장 개설, 토크 콘서트 장을 만들어 광복로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장기려 박사의 생애와 사상, 그의 헌신을 알리는 일을 진행하였다.

첫날인 수요일 수영로교회가 수요예배를 할애하여 장기려 주간 오프닝 순서를 진행했고 장 박사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사람들은 그의 헌신적인 삶에 열광하였다. 밤 예배를 마친 늦은 시간임에도 저자들의 사인을 받기 위하여 기꺼이 줄을 서서 기다리기도 하였다. 열흘간 계속되는 토크 콘서트 시간에 사람들은 꾸준히 찾아들었다. 부산의 교회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어쨌거나 겸손히 주님을 섬기며 헌신의 삶을 살다 간 귀한 하나님의 사람을 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도록 최선을 다한 일군(一群)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은 아름다웠다.

고신에게 잊혀진 장기려 박사

그런데 장 박사 귀천 20주년의 해를 보내면서 한 가지 커다란 아쉬움이 남는다. 고신의 중요한 자산으로 여기는 복음병원의 설립자 장기려 박사에게 고신교회는 관심을 보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왜 모든 사람이 존경하는 장 박사를 고신교회는 한 번도 공식적으로 기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가? 왜 고려학원 이사회와 총회는 황량한 벌판에서 복음병원을 설립하는 일에 삶을 바친 그를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혹은 자신이 원하는 날까지 복음병원에서 헌신하도록 배려해 주지 못하였을까?

그의 소설 속에도 나타나고 그의 삶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동의하는 대로, 자신의 삶이 몽땅 담긴 복음병원에서 퇴임할 때 장 박사는 너무 불편한 모습을 보였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보통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장 박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1973년 어느 날, 고신 총회장, 이사장, 고신대학 학장이 장 박사를 서울로 불렀다고 했다. 서울까지 불러 올려 전달한 이야기에 장 박사는 큰 충격을 받았다.

다짜고짜 70세까지이던 임기를 65세로 줄이겠다는 통보였다. 그리고 얼마 후 당시 이사장이 복음병원 원장실을 방문, ‘원장님은 병원 때문에 이렇게 좋은 방을 사용하는 게지요?’라고 물으며 은근히 이사장 집무실도 병원 안에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요구하는 바람에 그는 병원장실을 이사장실로 쓰도록 내어 주어야 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의술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푸는 것을 평생의 목표로 삼고 자신의 월급까지 털어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는 데 전심전력 해온 장 박사는 결국 3년 뒤인 1976년 6월 25일 그의 뜻과는 상관없이 억지로 복음병원을 떠나야 했다. 북에 두고 온 아내를 만날 날을 그리며 평생을 혼자 살아온 그는 은퇴 다음날로 외로워할 틈도 없이 부산 백병원의 명예원장을 맡아 출근을 시작했다. 고신은 그를 버렸고 백병원은 고신에서 버림받은 그를 두 손 높이 들어 환영한 셈이다.

의문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고신의 누가 주도하여 장 박사 같은 국보급 인사를 바깥으로 몰아내 버린 것일까? 도대체 무엇을 얻기 위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대량 간 절제수술에 성공하고, 그가 수술을 집도한 10월 20일을 지금도 ‘간의 날’로 지킬 정도로 명의로 추앙받는 그를 그렇게 거침없이 끌어내려 버린 것일까? 물론 개인들의 욕망이 개입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그런데 공동체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항상 가난한 자에게 무료진료를 해 주는 것을 소원으로 삼았던 장박사로서는 1970년 고신대학을 설립하면서 재단의 수익용 재산으로 둔갑해버린 복음병원의 정체성 변화를 잘 받아들이지 못했고, 당시에 돈이 많이 필요했던 이사회와 총회지도부는 ‘병원의 효율적 경영’에 무관심한 장 박사를 귀찮게 여기고 내어보낸 것으로 추정해 볼 뿐이다.

복음병원, 어디로 가야 하는가?

장박사가 우려하던 대로 교회가 직접 병원에 대한 간섭을 시작하면서 끊임없이 문제가 발생하였고, 급기야 2천 년대 초엽에는 경영주체인 고려학원이 부도에 처하는 수치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로 빚더미의 근거지였던 김해복음병원이 청산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복음병원의 장래를 우려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다시 부채가 쌓이기 시작한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대형병원들이 부산과 창원 등 곳곳에 세워지고 있어 복음병원의 앞날이 밝지 않다는 소리도 들린다.

장박사가 떠난 후의 복음병원은 주인 없는 병원, 적극적으로 이윤을 추구해야하는 병원으로 바뀌어졌다. 그러면서 장기려 박사와 그의 정신은 복음병원과 고신교회에서 별로 기억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는 안 된다. 무료진료를 추구하다 상황이 바뀌게 되자 청십자 의료보험제도를 만들어 마침내 국가건강보험제도의 가능성을 확인시켜 주었던 장기려 박사가 지금 여기 살아있다면 오늘의 고신교회와 복음병원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할까? ‘가장 똑똑한 바보 의사 장기려’의 예수님 제일의 신앙정신이 점점 더 절실해지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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