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옥중 회심

▲ "초기 이승만과 기독교"라는 주제로 발표하는 민경배 박사

한국교회사학연구원 제211회 세미나가 지난 7일 “초기 이승만과 기독교”라는 제목으로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사단법인 한국교회사학연구원 세미나실에서 열렸다. 유정우 원장의 인도로 드려진 1부 예배에서 학회 이사장인 박옥선 목사가 시편1:1-6의 말씀으로 “의로운 삶”이란 제목으로 설교했다.

박옥선 목사는 주의 종들이니 정직해야하고, 교회의 지도자들이니 정직해야하고, 특별히 역사학자들이니 정직해야 한다고 하며, 생명을 걸고 철저하게 의로운 삶을 살자고 설교했다. 하나님 앞에 생명을 바쳐놓고 주님이 명령한대로 살아가는 의로운 삶을 살아 갈 때, 모든 교인들도 보고 따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예배 후에 민경배 박사가(백석대 석좌교수, 명예원장) “초기 이승만과 기독교”를 주제로 세미나를 진행했다. 민 박사는 요즘 이승만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은 시대라고 말문을 열며, 최근에 이승만(李承晩, 1875년 4월 18일 ~ 1965년 7월 19일)에 대한 연구가 해외에 있는 한인 학자들에 의해서 깊이 있게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승만의 옥중 회심

민 박사는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 사건으로 1899년 감옥에 들어가 1904년 석방될 때까지 이승만의 옥중 생활을 이야기 하며, 이승만의 회심과 신앙생활에 대해 말했다. 이승만은 6년 동안 한 방에 350명이 생활하던 감옥에서 생활했다. 감옥살이 자체가 죽음과도 같은 시절이었다. 그런 감옥에서 이승만은 1902년에 예수 믿고 변화되어 “나의 마음속에 드리운 그 안위와 기쁨을 표현할 수 없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이승만은 감옥생활을 하면서 선교사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선교사들을 미국 자본주의 앞잡이 인줄로 알고 있었던 이승만은 감옥에 와서 섬기고 봉사하는 선교사들을 보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종들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발견된 당시 선교사들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 믿고 변화된 이승만은 감옥을 복당(福堂)으로 만들고, 진리 탐구의 방으로 만들고, 기도의 집이 되게 하고, 예배당이 되게 했다고 한다. 민 박사는 이런 과정을 거쳐 마침내 이승만은 감옥을 신학당(神學堂)으로 변화 시켰다는 자료들을 공개했다. 이승만의 옥중 회심과 그 사역의 결과 감옥에 있던 당시의 많은 정치범과 양심범 같은 인재들이 그 영향으로 기독교인이 되었고 한국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전했다.

김일성과 이승만의 차이는 무엇인가?

민 박사는 요즈음 문제가 되고 있는 교과서 문제가 사실 이승만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 일 수 있다고 하며, 그동안 상대적으로 너무 몰랐던 이승만에 대해서 좀 더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자신을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이라고 말한 민 박사는 김일성과 이승만에 대한 이야기를 잠간 하겠다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김일성과 이승만의 차이는 무엇인가? 민 박사의 최근 연구에 의하면, 이승만이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년 1월 26일 ~ 1949년 8월 5일)와 동행해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기 위해 미국에 갔다는 역사 자료가 있다고 한다.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늑약 사건이 있은 후에 을사늑약의 무효 성을 알리기 위해 헐버트가 고종 황제로부터 친서를 받아 1905년 미국 대통령에게 밀서를 전달하고자 했을 때, 이승만이 헐버트와 동행했다는 내용이다. 그 전에는 헐버트만 다루어 졌는데 최근 연구에 의하면 이승만이 동행한 것으로 나왔다고 민 박사는 주장했다.

민 박사에 의하면, 이승만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세종대왕의 아들 양녕대군의 16대 손 독자로서 복음을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고. 프린스턴과 하버드 등에서 국제적인 교육을 받고 국내에서 독립협회 운동과 국제 사회에서 나라를 위해 여러 가지 활동을 많이 했다. 한마디로 이승만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김일성은 소련 군의 장교로 투쟁과 싸움의 역사 밖에 다른 것은 없다고 민 박사는 강조했다. 민 박사는 투쟁과 싸움 외에 다른 배경이 전혀 없는 사람이 김일성이라고 주장하며, 김일성과 이승만은 비교하기 조차 힘들다고 했다.

▲ 한국교회사학연구원 세미나 후 단체사진

역사가는 당대의 상황을 고려해서 그 인물을 평가해야 한다.

민 박사는 이승만이 정치하던 당시 한반도의 상황은 지금의 상황과는 너무 다르다고 했다. 예를 들어 제주 4.3사태 때 공산당들이 제주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해 놓고 지도부들은 다 빠져버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농어민 3만 명이 희생되는 비극이 일어났다고 했다. 민 박사에 의하면, 1957년 7월까지 제주도는 사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고 한다.

민 박사는 “이럴 때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4.3 사건에 이어 6.25 전쟁, 빨치산 사건이 연이어 터지는 나라에서 그 당시 대통령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질문을 던졌다. 그는 1957년까지 공산당이 대한민국을 좌지우지 하고 있었다는 역사적 상황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언제나 역사라는 것은 그 시대의 상황에서 봐야 한다고 전했다. 이승만 대통령 재임 시절 터진 제주 4.3사건, 여수 순천 사건, 6.25 전쟁, 빨치산 등과 같은 공산당의 압도적인 위협 속에서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날과는 전혀 다른 이런 상황을 무시하고 오늘날의 관점으로만 이승만을 평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어려운 시절에 대통령을 하면서 겪었던 그 고통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승만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결론적으로 민 박사는 이승만은 어려운 시대에 태어나서 그 시대를 이끌었던 큰 정치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전했다. 또한 남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가 아닌 대한민국이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 정신에 근거한 이승만의 지도력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민 박사는 이승만의 폭넓은 배경과 리더십으로 대한민국이 탄생했고, 김일성의 투쟁정신으로 세운 나라가 북한이라고 결론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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