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영안 장로(고신대학교 이사장,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

2004년 한국갤럽의 한국 종교 실태 조사를 보면 한국의 여러 종교들 가운데 개신교 신자들의 만족도가 가장 높았습니다. “정신적 문제에 만족을 준다라고 답한 개신교 신자는 59.2%였고, 천주교 신자는 44.8%, 불교 신자는 38.1%였습니다. 종교인들의 역할에 대해서는 개신교 신자 76.1%, 천주교 신자 67.4%, 불교 신자 58%가 만족한다고 답하였습니다. 자신의 신앙심이 깊다고 스스로 평가한 개신교 신자는 50.5%, 천주교 신자는 26.8%, 불교 신자는 19.6%였습니다. 만족도에서 개신교 신자들이 훨씬 앞서고, 천주교 신자들이 뒤따르고, 불교 신자들이 그 뒤를 이어갔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윤리실천운동과 바른교회아카데미, 국민일보가 공동으로 3년간 연속 한국 종교인들의 신뢰도 조사를 한 결과를 보면 순서가 다릅니다. 2009년 조사를 따르면 가장 신뢰 받는 종교는 천주교(35.27%), 불교(31.1%), 개신교(18%) 순이었습니다. 다른 종교와 비교하지 않고 개신교만 두고 개신교를 신뢰하느냐?”고 물은 물음에 대해서는 신뢰한다는 답이 18.4%, “신뢰하지 않는다는 답이 48.3%였습니다. 종교에 대한 호감도를 보면 불교가 31.5%, 천주교가 29.8%, 개신교가 20.6%였습니다. 개신교에 대한 신뢰도는 3년 내내 18%를 넘지 않았습니다.

여론 조사는 대상 선정이나 조사 방법에 따라 결과가 다르게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큰 흐름을 파악하는 데는 유용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만족도 조사는 개신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 월등하게 높게 나왔지만 신뢰도에서는 처참할 정도로 낮게 나온 것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자기들끼리는 좋은 데 남들이 볼 때는 아니라는 뜻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지금 개신교는 바깥사람들에게는 당신들의 천국일뿐, 갈망할만한 종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이 되겠지요.

한걸음 물러나 생각해 보십시다. 개신교와 개신교 신자들에 대한 불신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2009년 설문에는 개신교에 대해서 요구하고 싶은 사항을 선택할 수 있는 항목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11.5%가 재정 사용의 투명성을 요구했습니다. 25.5%가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42%가 교인과 지도자의 언행일치를 요구하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교회의 재정 사용이 투명하지 않고 남의 종교에 대해서 무례하고 신앙 따로, 삶 따로 사는 개신교 지도자와 신자들의 모습을 세상 사람들이 한탄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목사나 장로, 교인들이 중생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 답해야 하겠습니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지만 여전히 누구나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야 하겠습니까? 목사와 장로들이 정말 예수를 믿지 않아서 그렇다고 해야 하겠습니까?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태 7: 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귀신을 쫒아내고 권능을 행해도, 아무리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말을 해도, 아무리 자신의 신앙에 만족해도, 주의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삶 속에서 맺히는 열매가 없다면 결국은 거짓이라는 판단을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듣게 됩니다.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십니다. 참으로 두려운 말씀입니다.

다시 물어 보십시다. 오늘 한국교회가 이렇게 신뢰를 잃은 까닭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떤 분들은 언론 때문이라 말합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부정적인 면이 언론에 알려질 일을 저지르는 분들은 누구입니까? 주로 목사와 장로들입니다. 목사와 장로들이 말씀대로, 자신들이 가르치는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언론에 보도되고, 사람들이 널리 알게 되니, 신뢰를 잃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일반 평신도들도 문제를 일으키지만 대개 목사와 장로가 그렇게 가르치고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회개할 사람들은 목사와 장로들이고 이들을 가르치고 지도하고 이른바 교회의 교사라고 자처하는 신학 교수들입니다.

그런데 회개라면 지금까지 잘못된 것들,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할 텐데, 무엇을 회개하고 어디로 방향을 돌려야 하겠습니까? 산상설교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라도 읽고 이 말씀에 우리 자신을 내어 놓고 우리 모습을 바라보아도, 회개의 제목은 분명하게 제시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산상설교에는 십계명 가운데 여러 계명이 나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짓는 죄가 다 들어있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1계명입니다.

다시 물어 보겠습니다. 왜 한국교회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나 외에 너희에게 다른 신을 두지 말지어다.” 이 계명을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나 외에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알 파나이하나님 얼굴 앞에, 하나님 얼굴 곁에, 하나님 얼굴과 나란히란 뜻입니다. 1계명은 하나님 앞에, 하나님 곁에, 하나님 나란히, 우상을 앉혀 두고 섬기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어느 사이 하나님은 가만히 두고 하나님 앞에, 하나님 곁에, 하나님과 나란히 수많은 우상들을 세웠습니다. , 학위, 학벌, 지위, 자식, 가족, 회사, 국가, 건강, 미모, 성공, 심지어 목사나 장로, 교회, 교단, 이런 것들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과 나란히 서 있는 우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교회가 빛과 소금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아무 쓸 데 없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히게 된 이유를 여기서 찾지 않고 어디서 따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원수까지 포함해서) 이웃을 참되게 사랑할 때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우상들을 상대화할 수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그들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곁에 있는 자리에서 끌어내려 우리 무릎 아래 굴복시킬 수 있습니다. 이 때 비로소 지금까지 섬기던 물질이나 건강, 지식이나 지위, 가족이나 국가, 심지어 교회와 교단마저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유용한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참으로 안타까워 할 수밖에 없는 일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오늘 교회가 세상 것들을 추구하고 그것들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엄청나게 열심히 섬기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돈이나 지식 등 유용한 수단으로 사용해야 할 것들을 목적으로 삼아 그것들을 즐기느라 막상 예배하고, 즐거워하고 누리고, 삶 속에서 그로 인해 기뻐해야 할 삼위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한국교회가 다시 사는 길은 삼위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 분을 알고, 믿고, 그 분을 사랑하고, 섬기고, 그 분으로 인해 기뻐하고 소망 중에 사는 삶이 가장 참되고, 좋고, 아름다운 삶이 되는 길밖에 다른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글은 예장 통합 측 기독공보 한국교회 회개가 먼저다라는 특집기사로 기고된 글입니다. 코닷 독자를 위해 저자의 허락을 받아 싣습니다. - 편집장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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