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무트 틸리케의 영성

51회 기독교학술원(원장 김영한 박사) 월례기도회 및 발표회의 주제는 틸리케의 영성이었다. 지난 5일 한국교회백주년기념관 4층에서 열린 이번 발표회의 1부 경건회에서 이영엽 목사(반도중앙교회 원로)가 사회하고, 이동주 박사(선교신학연구소장)가 기도한 후에 호세아 4:6을 본문으로 여주봉 목사(포도나무교회 담임)오라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여 목사는 교리적으로 믿는 것뿐만 아니라 삶으로 믿음으로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으로 돌아가는 것이 급선무라고 전했다. 여 목사는 하나님을 버렸으면서도 버린 줄 조차 모르는 시대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라고 안타까워하며, 하나님께 돌아가자고 설교했다.

▲ 1부 경건회에서 설교하는 여주봉 목사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를 종합하는 제3의 신학

김영한 박사의 사회로 2부 발표회가 시작되었다. 김 박사는 독일의 종교개혁적 신학자 헬무트 틸리케(Helmut Thielicke, 1906-1986)를 바르트 신학이 놓치고 있는 역사적 세계의 구조적 갈등을 윤리신학으로 접근하며, 틸리히 신학이 놓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강조한 신학자라고 소개했다. 김 박사는 틸리케의 신학 전체를 성령론적인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를 종합하는 제3의 신학이라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특별히 틸리케는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참담하고 어려운 세계 속에서 인간의 무능력을 시인하며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는 기독교 윤리를 주장했다고 전했다. 김 박사는 독일 보쿰대학에서 틸리케를 전공한 안계정 박사를 소개하고 안 박사의 발표가 이어졌다.

안 박사는 한국교회가 특별히 헬무트 틸리케의 신학과 영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며 발표를 시작했다. 안 박사는 틸리케의 영성이 그 주된 이유라고 밝혔다. “우리가 틸리케의 영성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오직 신앙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영성이 교회를 살린다는 사실 때문이다. 또 이렇게 교회가 교회로서 살아날 때 사회 역시 도덕적으로 각성되고 건강하게 변한다는 점이다.” 안 박사는 이런 관점과 문제의식 속에 틸리케의 영성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 좌로부터 장호광 교수, 안계정 박사, 김영한 원장, 이관표 교수

1. 틸리케의 영성은 말씀의 영성이다.

안 박사는 틸리케를 20세기의 스펄전으로 소개하며, 1955년 독일의 대표적인 시사주간지 슈피겔(Spiegel)”을 인용했다.

틸리케는 보통 한 달에 한번 미셸이라 불리는 함부르크에서 가장 큰 교회에서 설교한다. 그러면 설교 시작 한 시간 전에 3천 좌석은 이미 꽉 찬다. 문 앞에서는 교통경찰이 나와 통제를 할 지경이다. 예배 시간 30분 전에 온 사람이라도 자리에 앉을 기대는 아예 하지 않는 게 좋다. 설교에서 틸리케는 어떤 도 어떤 엑스타시도 하지 않는다. <중략> 틸리케는 교회 뿐 아니라 체육관에서도 설교하는 미국의 복음 설교자 빌리 그레함과 비슷하지 않다. 틸리케는 교회에서 정해진 예배시간에 설교한다.” 결론적으로 슈피켈 지는 틸리케는 설교의 시대가 결코 지나가지 않았음을 성공적으로 증명했다.”고 밝혔다.

안 박사에 의하면, 20세기의 스펄전 틸리케가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히틀러의 나치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1939년 여름 틸리케는 하이델베르크 신학부 교수직에서 해임되었다. 그 이후 틸리케는 한적한 시골 마을에 가서 목회를 했는데 그 시골 교회에서 20세기의 스펄전이 탄생했다.

이 산골마을에서 성도들을 심방하고 같이 기도하고 매주 설교하면서 틸리케는 그 동안 자신을 지배하고 있었던 신학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스스로 고백한다. 특히 설교를 위해 말씀을 준비하고 기도하는 과정 속에서 그는 그 동안 자신이 추구했던 신학이 얼마나 관념적이고 사변적이었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틸리케는 이렇게 고백한다. “믿음은 선포(Verkündigung)를 통해 생기며, 신학은 이 믿음에 대한 추후의 반성형태(Reflexionsgestalt)라는 사실을 나는 배우게 되었다.” 틸리케는 신학은 말씀의 선포를 따라가야지 말씀 선포를 앞설 수 없다고 강조했다.

틸리케는 하나의 교의학은 그것이 설교될 수 있는 만큼 좋은 가치를 갖는다.”고 하며 말로 선포되는 설교와 글로 표현되는 교의학적 진술이 그 본질에서 같다고 주장했다. 안 박사에 의하면, 설교강단에서 선포될 수 없는 교의학적 진술은 그만큼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2.틸리케의 영성은 소통의 영성

▲ 발표자 안계정 박사

틸리케는 대학 강단에서 강의만하는 신학자가 아니었고, 교회에서 설교만 하는 목사도 아니었다. 그는 라디오나 TV, 또는 쉬운 에세이 같은 출판물을 통해 기독교신앙에서 멀어진 동시대인들과 소통했고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영향력있는 대중잡지의 표지모델이 될 정도로 틸리케는 일약 대중적인 스타가 되었다. 틸리케의 목회상담은 특별한 계획 없이 수시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 가운데 전파하려는 틸리케의 노력은 노사갈등 상황에서도 이루어졌다.

이렇게 틸리케는 다양한 방법과 매체를 통해 신앙에서 멀어진 동시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했다. 어렵고 전문적인 신학이론만이 아니라 설교 집을 출판해서 대중들에게 다가갔으며, 기독교신앙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는 많은 대중들과 편지로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고, 라디오에 나와서 기독교신앙의 의미에 대해 해설했다. 또한 노사갈등등과 같은 사회적 이슈에서 중재자로 나서기도 했다. 이러한 다양한 그의 노력은 오로지 복음전파, 즉 기독교신앙을 잃어버린 동시대인들에게 다시 신앙을 갖게 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3. 틸리케의 영성은 고난의 영성

193610월 틸리케는 26세의 나이로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조직신학 교수로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정권을 잡은 히틀러의 나치가 본격적으로 전쟁준비에 광분하기 시작했다. 틸리케는 나치의 실체를 파악했다. 그것은 무저갱에서 올라온 짐승이었다. 침묵할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 최고의 지성인이라는 대학교수들도 히틀러를 지지했다. 결국 틸리케는 저항의 길을 선택했고 고난도 시작되었다.

또한 1960년대 서유럽과 미국을 강타했던 학생혁명운동의 파고는 틸리케의 인생 후반에 가장 큰 고난과 상처를 남겼다. 틸리케가 반대했던 것은 스탈린주의였다. 그가 보기에 스탈린 체제는 개인의 인권과 자유를 억압한다는 면에서 나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195610월 자유를 요구하는 부다페스트의 시민들을 소련군이 무력으로 진압했을 때 틸리케는 신학자 가운데 가장 앞장서서 소련군의 만행을 규탄했다.

나치와 볼세비키는 틸리케가 싸워야했던 무저갱에서 나온 짐승이었다. 그것은 어떤 이데올로기의 문제, 즉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가 아니라 인권과 양심의 문제였다. 틸리케는 이 가운데서 인권과 양심의 길을 선택했고, 그것은 때로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힘겨운 고난의 길이었다.

지난 세기 서구에서 틸리케처럼 시대의 악마와 싸우며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은 신학자는 본회퍼 외에 없는 것 같다. 우리가 틸리케의 삶과 신학에서 발견해낸 말씀의 영성, 소통의 영성, 고난의 영성은 독일교회의 새로운 부흥을 위한 귀한 자양분임에 틀림없다. 동시에 그것은 우리 한국교회에도 아주 의미 있는 도전이다. 왜냐하면 이제 한국교회는 남 걱정할 때가 아니라 스스로를 걱정해야만 하는 막다른 골목에 몰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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