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수를 버리고 터진 웅덩이를 선택하는 어리석음

교회는 복음으로 설명된다. 복음 위에 세워졌고, 복음을 소유한 것이 교회이다. 복음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이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 부활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온전히 드러내 보이셨다. 역사에 개입하셔서 역사를 새롭게 만드신 하나님의 구원을 복음이라 부른다. 구약 시대에 복음은 약속의 하나님 자신이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온 세상에 복을 주신다는 약속의 하나님이 바로 복음이다.

항상 현실을 산다는 것은 보이는 것에 대한 동경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을 흥분하게 만들기도 하고 유혹에 떨어뜨리기도 한다. 현실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한 방향을 잊어버리게 만들 수 있다. 구약 시대를 되돌아보면 바알이라는 물신의 영향력이 가나안 땅을 흔들었던 시대로 볼 수 있다. 가나안의 풍요를 보장하는 신이 여호와보다 우수하다는 판단이다. 이는 나아가서 이방의 강력한 세력들 애굽과 앗수르 그리고 바벨론이 현실을 더욱 많이 주장한다는 판단으로 발전한다. 따라서 이방 신을 섬기는 것은 곧 이방 세력들에 대한 의존을 포함한다. 보이는 신에 대한 의존이 보이는 세력을 지향한다. 여기서 하나님이 주신 약속과 거룩에 대한 소망은 철저히 짓밟혔다.

예레미야의 현실 이해

이런 대략적 현실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한마디로 이렇게 집약했다. 렘2:13절이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선지자가 제시하는 두 가지 악은 하나에 대한 부정과 이에 대한 대안으로 다른 것을 선택한 것으로 이해된다. 버린 것은 생수의 근원되는 여호와 하나님이다. 생수는 끊어지지 않는 샘물을 말한다. 양이 많지는 않지만 그러나 계속해서 물이 나오는 샘물로서 하나님을 비유한다.

그러나 샘물은 한꺼번에 많은 양을 내어 놓지 않기에 어쩌면 답답할지 모른다. 그러나 계속 나오는 물이고 이를 통해서 목마른 자들이 기갈을 면하게 한다. 이런 답답한 양의 물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스라엘은 웅덩이를 팠는데 터진 웅덩이를 팠다. 웅덩이는 물이 귀한 가나안 지역에서 석회를 발라서 물을 저장하는 흔한 방식인데,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석회에 균열이 생겨서 물이 새 나가게 된다. 여기서 주된 대조점은 시간이 지나도 계속해서 물을 내어놓는 샘물과 시간이 지나면 물을 잃어버리는 웅덩이가 대조가 된다. 처음에는 많은 물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이 만들어 주는 웅덩이가 가진 매력이 나중에는 오히려 해를 끼친다.

이것은 비유이다. 비유는 목적한 메시지를 가진다. 샘물은 하나님 자신임을 선지자가 밝혔다면 후자의 터진 웅덩이는 문맥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하나를 부정하고 다른 것을 선택하는 표현이 2장에서 여러 번 반복된다.

2:5에 "나를 멀리하고 허탄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2:8에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지 아니하며 법 잡은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를 항거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을 좇았느니라"
2:11에 "나의 백성은 그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2:25에 "네 발을 제어하여 벗은 발이 되게 말며 목을 갈하게 말라 하였으나 오직 너는 말하기를 아니라 이는 헛된 말이라 내가 이방 신을 사랑하였은즉 그를 따라 가겠노라 하도다"

또한 직접적으로 현재의 이스라엘(유다)이 추구하는 방향을 지적하는 본문도 제시된다.
2:8에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함
2:17-18에서는 여호와가 너를 길로 인도할 때에 네가 나를 떠남으로… 네가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 길에 있음은 어찜이며 또 그 하수를 마시려고 앗수르 길에 있음을 어찜이뇨.
2:32-33절은 처녀가 어찌 그 패물을 잊겠느냐 신부가 어찌 그 고운 옷을 잊겠느냐 오직 내 백성은 나를 잊었나니 그 날 수는 계수할 수 없거니와 네가 어찌 사랑을 얻으려고 네 행위를 아름답게 꾸미느냐
2:36절은 어찌하여 네 길을 바꾸어 부지런히 돌아다니느뇨 네가 앗수르로 안하여 수치를 당함같이 애굽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할 것이라.

정리해 보면 현재 유다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주셨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바알 신과 그리고 이방의 세력들 애굽과 앗수르를 의지하려고 한다. 이에 대해서 선지자 예레미야가 책망하는 메시지를 전한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 왕국이 멸망하기 직전에 예언한 선지자로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목도하였다. 이런 멸망의 근본적인 원인을 소개하는 것이 초반부의 그의 메시지이다. 생수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대신 이방 신과 이방 세력을 의지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선택은 궁극적으로 부끄러움과 수치를 가지고 오고 형통함을 얻지 못한다고 선포한다. 렘2:35-6절에 소개한다.
"네가 앗수르로 인하여 수치를 당함같이 애굽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할 것이라 네가 두 손으로 네 머리를 싸고 거기서도 나가리니 이는 네가 의지하는 자들을 나 여호와가 버렸으므로 네가 그들을 인하여 형통치 못할 것임이니라"

이제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가 주시는 생수를 버리고 세상과 같이 힘과 권력과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이스라엘이 결국 형통함을 얻지 못한다. 이 말은 예루살렘이 멸망 당하고 결국 바벨론 포로가 된다. 포로의 70년은 이스라엘의 정화기간이고 사죄의 은총만으로 회복되는 기간이다. 다시금 세워지는 새언약의 약속으로 마음에 심겨지는 거룩한 법을 소유한 백성으로 회복된다.

이사야의 시대 이해

이와 같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시대 이해는 이사야 선지자의 시대 이해와 다르지 않다. 비유의 표현이 물이라는 동일한 대상을 가지고 이루어졌다.

사7:5-8절의 말씀이다.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나니"(6)

이 본문은 북 왕국 이스라엘 왕 베가와 아람 왕 르신이 연합해서 남 왕국 유다를 침략했던 때에 주어졌던 말씀이다. 북 왕국 이스라엘의 형편을 짧게 평가한 이사야 선지자의 평가이다.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의 물은 솔로몬 왕이 등극을 했던 장소인 기혼 샘에서 발원하는 물줄기이다. 이 물은 기울기가 적어서 천천히 흐르는 물이다. 왕상1:33에 보면 다윗이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라고 나단 선지자에게 부탁한 장소이다.

여기서 언급된 의도는 북 왕국 이스라엘이 남 왕국과의 유대를 깨뜨리고 당시의 패자였던 아람과 연합하여서 남 왕국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그 당시 침략 의도는 국제 정치적으로는 북에서 일어나는 신흥 강대국인 앗수르를 대적하기 위한 연합전선에 남 왕국을 합류시키려는 의도가 있지만 성경은 남 왕국 유다에 있는 다윗 왕가를 끊어버리려는 의도를 포함시키고 있다(사7:6) 이런 모략과 도모를 한 마디로 말해서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의 물을 버리고 북 왕국 전체가 르신과 베가를 선택함으로 세상 나라로 기울었음을 한탄한다.

그러나 이런 선택은 앗수르의 침략을 불러오고 결국은 멸망을 자초하게 된다. 그 내용을 사7:7절에서 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 위에 덮을 것이라. 그 모든 곬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창일하고 목에까지 미치리라.

북 왕국이 다윗 왕가를 부정하고 이방 세력을 의지하면서 세상적 세력으로 등장하려고 하는 것을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의 물을 버림이라고 했다면 그 결과는 유브라데 강의 넘치는 물이 그들을 쓸어버린다고 경고한다.

북 왕국과 아람 나라의 연합국의 침략을 받은 남 왕국의 아하스 왕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그들 배후에 염려하던 앗수르에 도움을 청해놓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 혹은 하나님을 성가시게 않겠다고 답한다(사7:12). 이때 선지자는 사7:14에서 유다의 소망은 임마누엘의 메시야의 탄생에 있음을 징조로 제시한다.

실제로 앗수르의 넘치는 물은 그들의 잔인한 군사력으로 유명하다. 결국 북 왕국을 기원전 722년에 멸망 시켰고 또한 남 왕국 마저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 왕 때에 예루살렘을 포위하게 된다(사36-37). 이런 상황이 바로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의 물을 버린 이스라엘과 유다의 태도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다. 넘치는 홍수의 물 앗수르의 세력이 남북 왕국을 위기로 인도한다.

다윗 왕권과 그를 잇는 임마누엘의 천천히 흐르는 물의 소망을 버린 북 왕국과 남 왕국은 앗수르와 바벨론의 넘쳐 흐르는 홍수로 멸망을 당한다.

복음만을 가진 교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과 약속을 가지고 살아가는 백성이었듯이 신약 시대의 교회는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가지고 산다. 복음은 값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드러낸다. 그리고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존해서 살도록 인도한다. 세상의 돈이나 부귀 그리고 명예와 학벌이 아닌 복음의 은혜만을 붙잡도록 한다.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행3:6)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을 보여준다. 교회가 가진 것은 금과 은이 아니다. 교회가 가진 것은 바로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다. 바로 복음이다. 교회는 자신이 가진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지나가는 길에 얻는 것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들이 있다. 누가 빵을 줄수도 있고, 누가 옷을 던져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교회가 항상 가지고 있는 것은 복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다.

바로 사도들과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이 복음으로서 교회는 세워져 갔다. 바울은 신령한 은사인 이 은혜의 복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누기 위해서 로마의 교회를 방문하기를 원했다. 그 결과는 교회를 견고하게 만드는 것이었다(롬1:11).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교회의 견고함과 세움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된다. 복음이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유대 인이게나 헬라 인에게나 마찬가지이다. 시대와 장소를 떠나서 언제나 유효하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롬1:17절의 고백은 삶과 생명에는 오직 복음에 대한 신뢰만으로 가능함을 고백한다.

교회에게 주어진 것은 돈이 아니다. 수익이 아니다. 교회는 값 없는 은혜와 은혜를 나누는 것이다. 이런 본질적 자기 이해를 상실해 버릴 때 교회는 세상과 다르지 않는 존재 양식과 행동 양식을 가지게 된다.

복음 병원과 수익

복음 병원은 고신 교회가 운영하는 직접적인 교회기관이다. 이 병원은 이름에 있는대로 복음의 정신을 따라서 구호병원이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면서 치료해 주셨듯이 고통 당하는 이들을 치료하는 기관이다. 그러나 대학인가와 함께 이를 보장하는 수익기관화의 길은 잘못된 선택이다. 만약에 대학이 교회의 대학이 아니면 가능할 수 있다. 자본의 논리와 수익의 논리가 교회 안으로 개입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한 사실이 아니다. 자본과 수익이라는 관심은 이를 중심한 인적인 조직과 사업 구도 그리고 마켓팅과 장비 등 모든 내용과 형식이 이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교회적 구도가 아니다. 복음적 구도가 아니다.

최고의 시설을 통해서 최대의 의료 혜택을 베풀어 준다는 이상이 복음적 이상은 아니다. 복음은 값없는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는 것이다.

관선 이사 체제에서 복귀한 복음 병원을 포함한 고려 학교 법인의 내일은 복음의 빛에서 조명하는 일이다. 우리가 아니라도 의료 행위를 통해서 사회에 도움을 줄 단체들이 많이 있다. 교회는 그런 행위에 함께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받은 것을 줄 수 있는 자리들을 찾아서 섬김에 복음의 빛이 나타난다. 교회가 가진 것을 주는 것이다.

그런 곳을 찾아서 섬길 때 교회는 헌금을 하게 되고 오히려 수익이 아니라 적자를 감사하고 기뻐하게 되고 교회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고신 교회가 복음을 철저히 소유한 길에 서기를 다시 한번 소망한다.

교회가 가진 복음은 역사 현실 속에서 항상 복음적 존재를 지향해야 한다. 복음적 존재는 잃어버리는 것이고 낮아지는 것이고 포기하는 것이다. 현재의 아픔과 상처와 고통을 위로하기 위해서 섬기고 그리고 그곳에서 얻는 힘과 권력과 지위를 포기할 줄 아는 것이다. 과거의 역사만을 붙잡고 살기 원하는 것은 복음적 가치가 아니다. 신사참배 거부나, 삼박자의 축복이나, 전제 정치의 항거 그리고 교회의 대형화 등을 붙잡고 오늘의 역사 현실에서 기득권의 위치를 주장하는 것은 복음을 상실한 증거이다. 복음은 끝없이 잃어버리는 길을 요청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는 것은 우리에게는 교회에게는 끝없이 솟는 생수가 있기 때문이다. 모여진 웅덩이가 아니고 넘쳐 흐르는 강물은 아니지만 끝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수가 우리를 온전하게 한다.

더 낫은 곳을 지향하는 교회적 존재와 섬김의 가치가 오늘 필요하다. 질병과 가난, 굶주림과 기근 그리고 전쟁과 테러와 학살 또한 재난과 파괴, 탐욕과 미움, 이혼과 학대 등으로 고통 당하는 현실을 위로하는 일에 참여하는 교회가 바로 복음을 가진 교회이다.

실로아의 물을 버리고 창일한 유브라데 하수를 찾지 말아야 한다. 생수를 버리고 터진 웅덩이에 소망을 두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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