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헌옥 목사(편집인)

한국교회가 양적인 부흥만 진짜 부흥인양 속아서 모두가 양적인 성장만 하면 신앙이야 어떠하던 아무래도 좋다는 식으로 살다보니 목회자도 평신도도 사회 앞에 조롱거리가 되었고 돈만 알고 명예욕 가득하고 독선만 가득 찬 기독교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이 원인을 여러 가지로 살펴볼 수 있겠지만 우선 한 가지를 지적하라면 오늘날 한국교회가 주기도문의 신앙고백적 삶이 너무나 결여되었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알고 또 잘 암기하고 있다. 그러나 얼마나 진실하게 주의 기도에 걸맞는 신앙고백적인 삶을 사는지는 의문이다.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세 가지만 지적하려 한다. 그 첫 번째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이고 두 번째는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이며, 세 번째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터져 나오는 불협화음의 소리는 모두가 제 뜻대로 하자는데 상대방이 안 따라 준다는 소리이다. 그것이 당회에서, 제직회에서, 그리고 공동의회에서 종종 나타난다. 목회자와 교인, 장로와 교인, 교인과 교인의 사이에서 그런 알력들이 충돌한다. 모두가 자기 뜻이 관철되기를 바라기에 교인들이 피터지게 충돌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목회자들끼리 칼부림은 어떠한가? 가장 거룩한 권위를 나타내야 하는 총회에서마저 목소리 큰 사람이 그리고 세력(많은 표를 가진) 있는 사람이 모두를 휘어잡는 일들이 발생하는 것은 겸손히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하는 성도의 신앙고백적 삶은 아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 이루어 졌으니 땅에서는 내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내 뜻, 내 뜻 하다가 더 나아가서는 내 교회로 이어진다. 다른 교회야 어찌되었던 말든 내 교회만 생각한다. 이 땅에 모든 교회가 꼭 같은 주의 교회임을 우리는 망각하고 약하고 작은 교회는 잡아먹을 먹잇감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목사든 교인이든 싸울 때는 피터지게 싸운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없다. 자신이 심판하고 벌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의 교회는 안중에도 없다. 교회가 사회로부터 어떤 비난을 듣는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직 내 뜻만 이루어지기를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그 싸우는 사람들을 들여다보면 세상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집단을 이룬다. 소위 법을 좀 안다는 사람들, 학문의 최고위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재물로 사람들을 부릴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일수록 더욱 그리한다. 즉 세상적 권세를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 보다는 자기 뜻을 이루려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들에게 교회는 제 3순위 정도이다. 그러나 명목은 교회를 위해서다.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단들이 이성을 미끼로 목사들을 유혹하는 시대에 우리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의 기도를 정말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가?

최근 수도권의 어느 지역에 일어난 사건이다. 목회를 잘 하던 목사가 이성 문제로 교회를 사임하게 되었다. 60대의 목사가 아주 젊은 아가씨에게 걸려든 모양이다. 그런데 문제를 제기하여 목사를 내모는 일에 앞장 선 사람들을 알아보니 사이비 이단에 연루된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들이 구체적으로 이 문제를 제기하고 나온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젊은 여자와 한 통속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경찰 수사에서도 밝힐 수 없는 은밀한 것까지 들출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목사가 잘못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요셉의 용기가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는 시험에 들지 말게 해 달라는 기도를 진심으로 했어야 했다. 육체적으로 공격하여 오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육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연약한 육신을 가진 우리들은 시험에 들지 않도록 도우시는 주의 은혜가 절실히 필요하다. 작정하고 달려들면 이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시험에 들게 해 달라는 사람처럼 오히려 물가로 달려가는 것은 아닌가? 점치러 가고, 유흥업소에 드나들고, 도박장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어떤 교인이 도박에 빠져 교인들에게 돈을 빌려다 도박을 하다가 교회 전체가 헤어날 수 없는 시험에 빠진 경우도 있다.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가 아니라 시험에 들어도 좋으니 세상 쾌락을 맛보게 하옵소서 하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오늘날 성도들이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는 것을 보기가 쉽지 않다. 평생 먹을 것을 보장 받기를 원한다. 그것은 목회자도 예외가 아니다. 일용할 양식이 주께로부터 오기를 거부하고 세상에서 확보하기 위해 힘 다하여 스스로 노력한다. 그 노력이 지나쳐 도적질 하고 속이기까지 한다. 은퇴할 때는 더 많이 받아내기 위해 줄다리기를 한다. 죄를 짓고도 고이 물러나지 않음으로 더 많은 퇴직금(?)을 챙긴다.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는 다만 주문일 뿐이다.

우리가 아는 대형교회 목사들이 줄줄이 이 문제에 걸려 사회법정에서 재판을 받거나 판결을 받은 사례들은 교회를 심히 부끄럽게 하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를 기도하면서도 가난하게 사는 성도는 복을 받지 못한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 했는데, 그렇지 못함은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한 증거가 아니겠느냐 하는 잘못된 논리 앞에 성도들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 사는 것은 복된 일이다. 그러나 너무 세상 복(물질과 건강의 복)에 치우치다 보니 복을 강제로 만들어 내려고 하는 오류에 빠진다. 모두가 많이 가지면 복이고 강건하면 복이고 잘나가면 복이라는 개념에 함몰되어 있지는 않은가?

그 복에 겨워 천국도 사모하지 않는다. 지금 주님이 오신다고 하면 아마 지금은 아니 되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옵소서.”하고 주의 오심마저 만류하고 나설 모습들을 보인다.

어쩌다 한 번이라도 주기도문으로 마치는 예배에서라도 그냥 주문으로 주기도문을 할 것이 아니라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가 유효하도록 해야 않겠는가?

 

주기도문을 회복하자.

누구는 이렇게도 말한다. 옛날에는 목사가 없어서 축도 대신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끝내는 교회가 많아서 주기도문을 할 기회가 많았지만 지금은 아무리 작은 개척교회라도 목사가 있어 축도를 하므로 교회에서 주기도문이 사라져 버렸다. 그런 이유로 축도를 받으며 살아야지 주기도문으로 살 이유가 없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말이다.

우리는 새삼 주기도문에 눈을 돌려야 한다. 주기도문이 유효하도록 기도하며 사는 목사가 되어야 하고 그것을 교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목사부터 주기도문을 바르게 이해하고 신앙하고 실천하려 해야 주기도문은 유효할 것이다. 한국교회가 주기도문적 신앙을 회복하기를 바란다.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